축일:3월 9일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 수도자
St. Frances of Rome
St. Francisca Romana, C
Born:1384 in Rome, Italy
Died:1440 in Rome, Italy; relics at Saint Frances of Rome Church, Rome, Italy;
entombed beneath the pavement of the Ponziani sacristy
of the Church of Saint Cecilia, Rome, Italy
Canonized:29 May 1608 by Pope Paul V
1384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매우 어려서 결혼하여 세 자녀를 낳았다.
성녀는 어려운 시대에 살면서 자기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었고 병자를 돌보아 주었다.
덕행에서 특히 겸손과 인내 그리고 어려운 이들에 대한 선업에서 뛰어났다.
1425년 성 베네딕도의 회칙을 따르는 봉헌자회를 창설했으며, 1440년 세상을 떠났다.
봉헌자회 총장 마리아 막달레나 안귈라리아가 쓴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까의 전기]에서
(Cap. 6-7: Acta Sanctorum Martii 2, 185-187)
성녀 프란치스까의 인내와 사랑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에게 일어난 재앙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만성적이고 심한 질병을 통해서도 그녀의 인내심을 시험하고자 하셨다.
그럼에도 그녀는 짜증을 내는 일이 없었다. 자신에 대한 간호가
아무리 서툴러도 불만을 드러내는 것을 누구도 보지 못했다.
프란치스까는 그토록 사랑하던 자녀들이 채 크기도 전에
죽어 갔을 때 자신의 확고 부동한 인내를 보여 주었다.
그녀는 항상 평온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에 순복했고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그분께 감사를 드렸다.
자기를 비판하고 중상 모략하는 사람들의 말과 자신의 생활 양식을
비방하는 이들을 똑같은 인내로써 견디어 낼 수 있었다.
또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결코 반감을 갖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악을 선으로 갚아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하느님께 기도 드렸다.
하느님께서는 프란치스까를 단순히 자신의 성화를 위해서만
뽑은 것이 아니라 그에게 주신 은총의 선물을 이웃의 영신적이고
육신적인 복지를 위해 쓰도록 간택하셨기 때문에 그녀에게 어진 성격을 주셨다.
그래서 그녀를 대하는 이들은 누구나 즉시 그녀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에
사로잡혀 그녀가 지시하는 것을 순순히 따랐다.
하느님의 권능은 그녀가 하는 말이 위대한 효과를 거두도록 하셨다.
그래서 프란치스까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써도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근심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성난 이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며,
원수들을 화해로 이끌어 오랜 증오와 원한을 없애 주고,
언젠가는 앙갚음하려는 사람들의 복수심을 막으며,
한마디로 사람들의 격정을 가라앉히고 그것을 올바른 목표로 이끌어 주었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녀를 안전한 피난처로 여기고 사방에서 와 그에게 모여들었다.
비록 그녀가 직선적으로 죄를 힐책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느님을 진노케 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 없이 벌을 주어도 찾아오는 이들은
한결같이 위로를 받고 떠났다.
그때 로마에는 생명을 앗아가는 여러가지 전염병들이 돌고 있었다.
전염의 위험도 불사하고 거리낌없이 나아가 고통받는 이들과
다른 이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선 그들이 하느님과
화해하도록 한 다음 분주하게 간호해 주면서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병이 어떤 것이든 기꺼이 받아들이고, 먼저 그들 때문에 그토록 극심한 고통을
견디어 내신 그분께 대한 사랑으로 그 고통을 견디도록 격려해 주었다.
프란치스까는 자기 집으로 데려올 수 있었던 병자들만을 간호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그들의 오두막집이나 공립 병원을 찾아가 목말라 하는
환자들에게 물을 주고 침상을 마련해 주며 상처를 싸매 주었다.
더 더럽고 참기 더 어려운 것일수록 더 세심히 더 성심껏 간호해 주었다.
그가 캄포산토라는 병원에 갈 때에는 그 병원의 제일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음식과 진미를 늘 가지고 갔다.
집에 돌아온 때에는 그들의 낡은 옷가지와 더러운 속옷을
가지고 와 깨끗이 빨아서 마치 주님 친히 입으실 옷인 듯
정성과 세심한 주의를 쏟아 수선하고 향수를 뿌리고는 고이 접어서 상자에 넣었다.
프란치스까는 30년 동안 즉 남편과 함께 살 때에도
병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면서 이런 일들을 했다.
그는 특히 산타 마리아 병원, 트라스테베레의 산타 체칠리아 병원,
사시아의 산토스피리토 병원, 그리고 캄포 산토 병원에서 이런 일들을 했다.
전염병이 만연하던 이때에는 육신을 돌볼 의사들뿐 아니라 영혼에게
봉사할 사제들마저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들을 찾아내어 먼저 고해성사나
성체성사를 받을 준비를 시킨 환자들에게 모시고 갔다.
그리고 자신이 원할 때 언제든지 이 일을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비용으로 한 사제의 생활비를 충당했고 그 사제는 위에서
언급한 병원들을 찾아가 그가 지적해 준 환자들을 방문하곤 했다. (가톨릭홈에서)
프란체스카의 생활은 세속 생활과 수도 생활 양면을 결합한 것이었다.
헌신적이고 사랑스런 아내였던 프란체스카는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열망했다.
그리하여 그녀는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부인들의 단체를 조직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란체스카는 어릴 때부터 수도 생활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이를 반대하고 젊은 귀족을 그녀의 남편감으로 골랐다.
프란체스카는 결혼 후 시가의 친척들과 가까워지게 되자 자기 시누이도
기도와 봉사의 생활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프란체스카와 시누이 반노차는 각각 남편들의 격려를 받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함께 나섰다.
프란체스카는 얼마 동안 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고통 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그녀의 사명감을 더욱 깊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세월이 흘러 프란체스카는 아들 둘과 딸 하나늘 낳았다.
가정에 대한 새로운 책임과 더블어 이 젊은 어머니는
자기 집안 일에 더욱 마음을 쓰게 되었다.
프란체스카의 가정은 그녀의 사랑으로 번성하게 되었지만
몇 년 안가서 크나큰 재앙이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로마를 무자비하게 휩쓴 흑사병으로 프란체스카의 둘째 아들도 죽었다.
프란체스카는 병자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려는 마음에서
병자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구입할 수 있도록 자기 재산을 내놓았다.
재산을 모두 탕진하자 프란체스카와 반노차는 자선을 청하러 다녔다.
그 뒤 프란체스카는 딸마저 죽자 자기 집의 일부를 병원으로 내놓았다.
프란체스카는 이와 같은 헌신이 세상에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얼마 후 그녀는 공식 서원을 하지 않은 부인들의 단체를 설립할 수 있도록
교회에 허가를 청하여 승낙을 얻었다.
이 부인들은 단순하게 하느님과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봉사에 자신을 바치는 것이었다.
한편 이 단체가 설립되고 난 뒤에도 프란체스카는 공동체 안에서
생활하지 않고 집에서 남편과 함께 사는 생활을 택했다.
그녀는 그녀의 남편이 죽을 때까지 7년 동안을 이렇게 살다가
그녀의 남은 여생을 공동체에서 보냈다.
그녀의 반생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산 것이었다.
이 성녀는 1608년에 시성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프란체스카 로마나가 하느님께 대한
지극한 충성과 동료들에 대한 헌신으로 축복을 받으며 이끌어 간
모범적인 생활을 찾으려 할 때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를
기억하는 것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데레사 수녀는 기도와 가난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프란체스카와 같은 환시를 본 것이다.
프란체스카 로마나의 생애는 우리 각자에게 기도 안에서 하느님을 깊이 찾도록 하며,
우리의 고통 속에 살아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신심을 일깨워 준다.
프란체스카는 이런 생활이 꼭 서원한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하느님께 아름다운 것들(Something Beautiful for God)에서
마더 데레사는 자기 공동체의 수녀들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빈민굴에 있는 수녀들 안에서,
그 수녀들을 통하여 당신의 생활을 뿌리 내리고 사시도록 합시다.
가난한 사람들이 수녀들을 보면서 그리스도께로 끌려가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집과 생활 속에 들어오시도록 초대하게 합시다."
프란체스카 로마나는 이렇게 말한다.
"결혼한 부인이 사회에 헌신적인 것은 대단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집안 일을 하는중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 위하여
가끔 감실에 계신 하느님을 떠나야 합니다."(버틀러,’성인전’)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세상에 로마의 성녀 프란치스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성녀는
그 이름대로 로마에서 태어나 로마에서 자랐고,
로마 시민을 위해 힘쓰고 로마에서 돌아가신 순전한 로마 사람이었다.
또한 그녀의 본명 프란치스카는 그녀의 양친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유난히 존경하고 있었던 점에서 유래된 것이고,
이름은 인간성을 표시한다는 말대로 가난한 이에게 대한 성녀의 동정심이
많았다는 점에 있어서 성 프란치스코와 흡사하다는 것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녀는 1384년에 부유한 로마 귀족인 바오로 부쏘와 야코벨라의 딸로서
로마의 트라스테베레에서 태어났다.
양친은 두 분 다 신앙심이 깊은 신자였고 특히 교황청을 위해 적지 않게 노력했다고 한다.
프란치스카는 그와 같은 양친의 자녀로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좋은 감화를 받고
성모 마리아의 소성무 일도와 다른 기도를 어머니와 같이 바치며
로마의 곳곳에 있는 성당을 참배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낙으로 삼고 있었다.<
이처럼 신심이 깊었던 프란치스카가 어려서부터 수도자가 되어 일생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뜻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버지는 그녀가 겨우 12세 되었을 때 일찍이도
그를 라우렌시오 데 폰시아니(Laurentius de Pontianis)라는
귀족 청년에게 출가시켜 버렸다.
프란치스카는 이를 알고 대단히 놀랐지만 고해 신부도 결혼을
좋다고 하므로 마침내 자신의 희망을 버리고 폰시아니 가정에
출가해 남편을 잘 섬기며 일가의 주부로서의 책임을 완수했다.
그동안 자녀 여섯을 낳았지만, 그녀는 이를 모두 건실하게 교육시키고
또한 종들도 친자녀와 같이 친절히 대했으므로 그 가정은
늘 봄바람이 부는 듯이 화기의 행복 속에 살아 나갔다.
라우렌시오는 군인이었던만큼 무뚝뚝한 점도 있었지만,
그래도 결코 아내의 영적 생활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도리어 프란치스카가 구석의 작은 방을 성당모양으로 꾸미고 그곳에 들어가
묵상할 때 가끔 종들이 비방하는 것을 듣고서는 그들을 훈계하기도 했다.
폰시아니 가문의 가정(家政)을 완전히 위탁받은 프란치스카는 한편 자선사업도 시작했다.
즉 그녀는 매일 아침 성당 앞에 모여오는 여러 거지들을 도울 뿐 아니라,
친히 빈민굴을 돌보며 가능한 한 그들을 도우려고 노력했다.
또한 그녀는 병자를 위로하는 것도 하느님께 받은 자신의 책임으로 생각하고,
성내에 병실까지 설립하며 이런 가련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친히 그들을 간호했다.
특히 흑사병과 같은 악성 유행병이 만연되었을 때나 기근(饑饉)과 같은
천재때에는 한층 더 병자나 빈민의 구제에 동분서주하고
그들을 위해서는 자신의 재산을 통틀어 바쳐도 섭섭지 않을 열의를 표시했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천사와 같이 존경하고 하느님께서도
그녀의 자선으로 비게 된 창고를 기적으로 다시 채워주신 때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프란치스카에게도 쓰라린 시련의 시기가 왔다.
15세기 초엽 로마의 귀족들은 계속 서로 싸우고 있었으나 얼마뒤에
나폴리 왕 라디슬라오가 로마에 침입해 시내는 커다란 소동이 일어났는데,
그때 프란치스카의 남편 라우렌시오도 시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가
포로가 된 데다 장남 요한 마저 적의 볼모가 되고, 가장 사랑하던 차남 에반젤리스트는
흑사병에 죽고, 딸 아녜스가지도 갑자기 죽게 되었다.
게다가 악한에게 재산을 약탈당하는 등 온갖 불행이 닥쳐온 것이다.
그런 프란치스카는 일체를 하느님의 섭리로 받아들이고
모든 고통을 인내해 가며 오히려 가난하게 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당나귀를 끌고 로마 근교 캄파니아의 들에 나가서 나무를 주워 팔아
식료품을 사서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러나 그 당시는 전쟁으로 인해 빈민과 병자들이 너무 많았으므로
도저히 프란치스카 혼자의 힘으로는 마음대로 구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뜻을 같이하는 귀부인들을 모아 자선 사업을 하는
수도원을 시작하여 톨레 디 스베키에 그 수도원을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일원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마침 적의 수중에 있던
남편과 아들이 돌아왔으므로 잠시 그 뜻을 억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남편이 병을 얻어 프란치스카의 간절한 간호를 받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그때에야 원하던 희망을 풀기위해 아들 요한과 손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혈육의 정을 대의(大義)를 위해 끊고, 그들을 하느님의 손에 의탁하고
그들의 강복을 빌면서 이별하고 나서 겸손을 표시하기 위해 목에 줄을 걸고
톨레 디 스베티 수도원의 문전에 엎드려 입회를 원했다.
그 곳 수녀들은 본래 창립자인 프란치스카인지라
마치 인자한 어머니를 만난 아이와 같이 기뻐하며 영접했다.
그리고 원장은 자발적으로 사임해 프란치스카에게 그 직을 맞도록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고행이나 활동이 심신을 모두 피로케 했음이지,
4년 뒤인 1440년 그녀는 병석에 눕게 되고 마침내
3월 9일 자매들이 애석해하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그때 그녀는 56세였다.
그리고 성녀 프란치스카는 평소 수호 천사와 친밀히 지냈다고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녀는 사랑하는 아들 에반젤리스트를 여읜 후 세상을
떠날 때 까지 20년간 늘 수호 천사를 자신의 옆에서 환하게 보고 있었다고 하는데,
그녀의 자세는 태양과 같이 찬란하게 빛나고 얼굴은 늘 황홀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손을 가슴에 십자 모양으로 대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보인 것은 성녀가 기도할 때와 성당에 있을 때 뿐이었다.
수호 천사는 그림자와 같이 그녀를 잠시도 떠나는 일이 없었으나
다만 조금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불합한 일을 하면 별안간 보이지 않았다가
그녀가 보속을 다하면 다시 나타났다고 한다. (대구대교구홈에서)
우선 순위
가족들의 생활은 돌보지 않고 교회 일에만 바쁜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교회의 여러 단체와 위원회와 회장직을 유지하는 데 자신의 시간을 다 쏟아 붓는다.
바자회를 준비하고 기도회에 참석하고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을
돌보는 동안에 정작 자신의 가족들은 방치되고 잊혀진다.
가장 슬픈 것 중의 하나는 그들은 지금 하느님이 자신에게
기대하시는 일을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치스카는 가정과 신앙 생활을 어떻게 병행해야 할지를 잘 보여 준다.
그는 일생을 기도와 회개와 선행의 모범으로 살면서도 아내로서도,
어머니로서도 부족한 점이 없었다.
그가 가족들을 그토록 잘 돌볼 수 있었던 것은 무슨 일을 하든지
일의 우선 순위를 먼저 정하고 그것을 지켜 나갔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든 시간을 교회에만 쏟아 붓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거나, 무슨 일을 하거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름다운 꽃들로 장식된 제단 앞에서 성가가 연주되는 것을 들으면
거룩함을 더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는 바로 그곳에 계심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어디서 하느님을 찾고 있는가? 하느님은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계신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평화의 기도-가톨릭성가7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