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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있으면 12월, 어느새 2011년도 한 달여를 남겨두고 있다. 11월 29일은 내가 화요논평을 쓰는 순번이다. 이번에는 무엇에 대해 쓸까? 올 가을의 정치적 이슈는 뭐니뭐니 해도 서울 시장 선거였다. 선거에 앞서 불거지는 내곡동 사저, 연 회비 1억 피부샵,이 있었다면, 선거 후에는 평소 생각한 것을 실천에 옮긴 안철수의 사회환원이었다. 정치적인 문제가 불거질 때면, 언제나 누가 실질적인 정치 실권자이가의 문제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상대방에게 힘을 실어주는 데 악용되기도 하는 선거제도가, 선거 시기에만 주권을 행사하는 민주주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지지자의 승리에 감격하게 되는 건 이성이 어이할 수 없는 감성의 반복이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감성의 공감대를 확장시키고 있다.
하여, 나도 모르게 저지를 착오를 줄이기 위해 이정명이 쓴 2권의 소설도 읽었다. 예상처럼, 소설은 드라마와 달랐다. 지난 봄, 권음미 극본의 <로열 패밀리>와 연관해서도 그런 생각을 했었는데...극본은 권음미지만, 크리에이티브 작가에 김영현과 박상연이 같이 했었다. 그들은 특정양식을 선호하는 부류가 관심있는 추리형식의 소설로부터, 다수가 공감하게 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 기저에는 억압받고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어떤 공감이 작용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강채윤(똘복)과 소이(담이)는 만약 죽게될 자신들을 밀본이 구해줬으면 꺽쇠 아저씨처럼, 왕의 반대편에 서게 않겠느냐고 말한다. 백성들의 생생지락(生生之樂)을 말하는 세종의 반대편에 서지 않겠느냐고. 누가 우리를 거두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느냐고, 우리네 처지가 그렇지 않느냐고 똘복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드라마 <로열 패밀리>에 모리무라 세이치의 <인간의 증명>이라는 골격에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가 그 기저에 있었다면, <뿌리깊은 나무>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의문(무력감)이 있지 않을까 싶다. 시기적으로는 600여년 전의 조선시대를 다루고 있지만, 공감대를 지금 상황에서 끄집어 내고 있다.
세종이 집현전 학사들과 한글을 창제할 당시, 사대부만이 글자[漢字]를 알고 글자를 쓸 수 있었다. 극 중 정기준(가리온)의 말처럼, 사대부가 사대부인 이유는, 사대부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아니라, 글자를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세종과 집현전 학사들의 노력으로 백성들이 한글이라는 새로운 글자를 갖게 된다면, 글자를 배우는 데 시간이 별로 걸리지 않는 쉬운 글자를 갖게 된다면, 백성과 사대부의 구분이 무엇이 될 것인가를 묻는다. 허나 정기준의 우려는 우려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임금의 역사가 기록되고, 선비의 유물이 보존될동안, 백성의 말과 글은 어디에 어떻게 전승됐던가를 생각해보면. 글을 알게 됐고, 글을 전할 수 있게 됐는데, 왜 백성의 생각은 전해지지 않았을까? 가장 큰 이유가 뭘까? 백성 스스로 자신들이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하는 자신감의 결여가 기저에 있지 않았을까? 민의가 반영될 시스템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닐까? 지금 시대에 강남좌파가 있듯, 그 당시에는 더더욱 계급의 한계가 있었던 건 아닐까? 다수가 세상을 변하게 하는 구석이 있지만, 다수가 만들어질 수 없게 하는 시스템으로, 그 당시 민의는 단지 주막에서의 넋두리에 머물게 된 건 아니었을까?
이미 모두가 글자를 아는 이 세상에서, 모두가 글자를 아는 놀라운 세상에 대한 15C의 그 사유을 듣는 일이 왜 이렇게 낯설까? 왕과 유생들이 통치의 실권을 경쟁하던 조선시대가, 마치 그리스의 귀족정치 같았다. 지금 이 시대가, 아니, 어떤 시대라할지라도, 글자를 안다고 자신의 뜻을 전하는 세상이 아니라, 글자를 알아도 다수의 뜻을 공정하게 펼칠 수 없는 세상이라는 데서, 더더욱, 그들의 앞서나간 꿈같은 사유가 이상하였다. 무엇이 아직 없을 때는 그것만 있으면 세상이 너무도 달라질 거라고 말한다. 라디오가 주류였던 시대, tv가 나오면 라디오는 사장될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어떤가? 2011년의 히트작은 뭐니뭐니 해도 나꼼수라는 팟캐스트라고 생각하는데, 팟캐스트 시스템이야말로 시각적 이미지를 배제한 청각적 이미지에 집중하게 하는 시스템 아닌가. 여하간에 백성들이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전할 수 있는 글자만 있으면, 백성들의 생각이 온전히 정치에 반영될 수 있을거라는 생각은, 틀렸다. 글을 안다해도, 생각은 있다해도, 소통 시스템이 차단되면, 소통 시스템을 만들 수 없으면, 생각은 있으나 생각이 없는 것처럼 생각되는, 다 볼 수 없고 다 알 수 없는 인간 아닌가.
<뿌리깊은 나무>를 보노라면,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 문자와를 서로 사맛디 아니할쎄 이런 전차로 어린백성이 니르고저 할빼이셔도 마참내 제 뜻을 능히펴지 못할놈이 하니다. 내 이를 어여삐 녀겨 새로 스물여덟자를 맹가노니 사람마다 수비니겨 날로쓰매 편아케 하고저 할 따라미니라.
라는 훈민정음 서문의 아름다움(앓음다움)에 크게 공감하게 된다. 더불어 어느 시대나 생생하게 살아있었을 주체의 아름다움에 감동하게 된다. 예나지금이나, 내 일이라는 주체의식이 없다면, 내 책임이라는 책임의식이 없다면, 인간은 꽃보다 아름답기 어려우리라. <뿌리깊은 나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그 동력에는 다수의 상위 1%에 대한 분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어떤 드라마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흥미와 궁금증과 의문에서 시작되는데, 배우들의 연기과 스토리가 흥미로웠다면, <뿌리 깊은 나무>에 관심이 갔던 것은 성리학이 국가 통치 이론이라는 미명 아래 자신이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지 모르는, 자신들이 안아야할 것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대부들의 논리가 심히 거북하였다. 국가 체제에서 누가 꽃이고, 누가 줄기이고, 누가 뿌리인지에 대한 시선 차이가 심히 거북했다. 고등하교 시절 고전(古文:고전문학)시간 용비어천가를 배웠었다. 용비어천가는 훈민정음 반포 1년 전 한글 창제에 관련했던 학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서사시이다.
'해동 육룡이 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
시니//불휘 기픈 남
매 아니 뮐
곶 됴코 여름 하
니/
미 기픈 므른
래 아니 그츨
내히 이러 바
래 가
니'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태조·태종 등의 왕의 여섯 조상을 육룡이라하는 표현에, 오래된 영웅서사시의 어이없음에 웃었던 것처럼, 다같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시선이 이미 그때에도 내재돼있었던 듯하다. 그것이 고문선생님의 역량인지, 시대의 역량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뿌리깊은 나무>를 보면서 한 나라가 있을 때, 어떤 무리를 뿌리로 해야하는가의 관점 차이를 엿볼 수 있었는데, 태종은 왕이 뿌리라는 입장이었다면, 정도전은 유생들이 뿌리라는 입장이었다. 그에 반해 그 드라는 쓴 작가들은 백성이 뿌리라는 입장인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다수를 움직이는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정치에 있어, 자타의 구분이 없는 정치란 없다. 하여 무엇이 我이고, 무엇이 他인지의 구분여부에 따라, 어디를 향해 있느냐의 그 편향성에 따라 적과 아군이 결정된다. 결코 다수성(Plurality)이 전제되는 정치이기에 진리의 길을 걷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헌정 사상 최초로 국가 간 협상안을 국회에서 날치기 통과한 후, MB는 옳은 일은 반대가 있어도 해야한다는 말을 했다. 여기에서 물어보자. 2010녀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돌풍을 일으킨 한 해 였다. 정의란 것이 쉽게 정의내려졌다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처럼 베스트셀러가 되진 않았을 것이다. 공공선을 의식하는 사람들의 있기 어려운 정의에 대한 갈망이 아마도 <정의란 무엇인가>의 돌풍으로 이끌었다고 생각하는데, MB에게 옳은 일은 참 쉬운 일인가보다. 하지만 옳은 일이란 판단이 그처럼 쉬울까? 무엇이 옳은 일일까? 누구에게 옳은 일일까? 반대하는 사람들이 왜 반대하는지 들어보지 않는 태도가 옳을까? 들어보고 절충하는 태도가 옳을까? 영하의 날씨에 물대포를 쏘는 게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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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1월 끝자락 내가 관심집중하고 있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쓰려고 했는데, 생각해보니 11월 말이고, 생각해보니 곧, 한 해의 마지막 달 12월이다. 그렇다면? 잠시, 수다 한 마당?!
올해 나에게 인상깊었던 책들과 영화에 대해서 적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는 <스티브 잡스>가 인상적이었다.
사후 세계 동시에 발매된다는 호들갑에 보지 않으려 했는데, 지금 볼 마음은 없었는데, 누군가가 선물해줘서, 책상 위에 있는 책을 한번 뒤적이다가 읽게 됐다. 윌터 아이작슨의 객관적인 시선과 글재주에 혹하게 되었다. 전기지만 쉽게 책장이 넘겨지지 않을 정도로, 파란만장한 스티브 잡스의 전기는 2011년에 기억될 올해의 책이다. 자기(집단) 이익이 무엇인지 아는 스티브 잡스, 단순화된 아름다움을 아는 스티브 잡스, 현실 왜곡장이 따로 존재한 스티브 잡스, 자기 통제권이 수시로 작동하던 스티브 잡스, 재미(놀이)로 한 일이 돈까지 되는 삶을 산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나 애플은 2000년대 초반을 주름잡을 어떤 코드의 집합체 같았다.
우리나라 작가의 책으로는 뭐니뭐니 해도 <닥치고 정치>가 올해의 책으로 손을 번쩍 들고 올라온다.
나는 꼼수다라는 팟캐스트에 대해 간간히 소식이 들리던 때, <닥치고 정치>가 나왔다. 마초적인 발언이 별로 맘에 들지 않아서 읽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의 손은 어쩌다가 주문을 넣게 되었고, 나의 눈은 어쩌다가 읽게 되었다. 읽는데, 놀라웠다. 이렇게 쉽게 책장이 넘어가다니...그 책을 읽고나서 나의 첫인상은 이 책은 누가 뭐래도 '돌려봐야할 책'으로 생각되었다. 하여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닥치고 정치>를 읽어보라고 말했다. <닥치고 정치>의 최대 미덕은 뭘까? 그건 인간이 이성의 존재만이 아닌, 감성의 존재라는 사실. 정치는 이성으로만 가능한 무엇이 아니라, 감성에 호소하고, 기복있는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 아닐까?
<닥치고 정치>를 읽고 나서도 한동안 나꼼수를 듣지 않았다. 듣지 않는 첫번째 이유로는 듣기 위한 시간 소비가 많다는 것. 두번째는 언제 한번 다운받으려고 했더니, 하필이면 그때, 다운로드 받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 역시나 시간관계상 듣지 않았다. 그런데 급기야, 시간관계상을 뒤로한 채, 궁금증에 듣게 됐다. 듣게 된 이유는, <닥치고 정치> 에서 말하는 나꼼수 이렇게 만들련다는 그 취지가 맘에 들어서였다.
1. 자발성, 뭔가를 만드는 사람들의 노력이 헛수고가 될까봐 안달하게 돼, 직접광고하여, 정보를 전파한다.
2. 대중언어로 말하는 자세.
3. 쫄지 않는 자세. 과거 군사정권은 조직폭력단, 이명박은 금융사기단
4. 덕 볼 생각을 하지 않는 자세
이 네가지 정신으로 만든다면, 들을만한 방송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대체나, 자신들의 취지에 부합하는 자세의 방송인들이었다. 다만 처음 들었을 땐, 방송이 너무너무 시끄러워, 시간차를 두고 들었다. 계속 듣다보니, 그 수다가 시끄럽기만 한 것 아니었지만, 그들의 수다가 간간히 나로하여금 방송듣기를 멈추게 한다.
아쉬운 건, 어쩌면 그건 글자가 아닌 말의 아쉬움일지 모르겠는데, 방송이 끝나면 정서는 공감하는데, 머리가 허전하다는 것. 정보가 부족하다는 마음이 든다. 더 알기 위해서 다른 무엇을 참조해야할 것 같은. 아마도 그래서 나꼼수 4인방의 책들이 다수 팔리는 것 같다. 소리로는 부족하다. 말만으로는 안된다. 보이는 글, 기록이 있어야 한다.
책을 두 권 뽑아봤으니, 영화를 두 편 선정하면, 올 한 해 내게 인상적인 영화는 <북촌방향>과 <인 어 베러 월드 In the Better world>이다.
<북촌방향>은 한 사람에 의해 사유가능한 영화의 세계로 나를 초대했다면, <인 어 베러 월드>는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에 대한 격려가 있어 나에게는 인상적이었다.
<인 어 베러 월드>가 다소나마 작위적이지만, 그럼에도, 세상의 여러 문제에 대해 하나이지 않는 답을 제시하는 것 하며, 무엇 하나 쉽지 않은 것이 없는 인간의 삶을 다뤄서, 거기에 낯설은 카메라가 까지 있어 나는 괜찮았다.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선한(좋은) 영화로는 <완득이>가 있었구나. 영화를 보고나서, 정말로, 가능하기 어렵지만,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란 게 참 좋구나, 라는 것 외 다른 할 말이 없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는 나의 고등학교 시절과 겹쳐진 <파수꾼>도 참 인상적인 영화였다. 생각해보니, 법정 스님 입적 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든 <법정 스님의 의자> 도 인상적이었구나. 회향(廻向: 되돌린다는 듯, 자기가 쌓은 공덕을 모든 중생들에게도 이익이 되게 하거나 모든 중생들도 깨닫게 하는 것)이라는 단어를 상기하면서. 일 개인이 잊지 말아야 할 사회적 책임이 여기에 해당될테다. 올핸 유독 보고 싶은 영화가 적은 해였다. 보고 싶다가 나중 보게 봐도 감흥이 예전같지가 않았다. 나의 문제인지, 영화의 문제인지, 제대로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오래전 영화를 다시 봤을 때 받은 감흥이 여전한 걸 보면, 영화 자체의 문제도 있어 보인다. 영화가 적게 만들어진 건 아닐터인데, 배급의 문제가 갈수록 심각한 듯하다. 그나마 제목이라도 기억하려는 영화가, 이윤기 감독의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사랑을 카피하다>, 우디 알렌 감독의 <환상의 그대>라니...
올해 내가 즐겨 들었던 음반은 조세프-마리-클레멘트 달라바코(1710~1805)의 무반주 첼로를 위한 11곡의 카프리스이다.
풍월당 소개로 듣고서 바로 구입했다. 두번이나 샀는데, 내 손에 지금은 없다. 누군가랑 음악 얘기하다가 선물해버렸기 때문. 언제 또 생각나면 구입할 터. 그러다가 또 들어봐(요), 하면서 줘 버릴지 모를 일.
다른 하나의 음반은 여름에 선물받아 어김없이 되돌아가 듣고 있는, 머레이 페라이아 Murray Perahia의 Songs whithout words라는 앨범으로 바흐, 멘델스존,슈베르트 음악이 담겨있다.
다른 음반을 듣다가, 되돌이표로 돌아가는 곡이다. 예전에는 글렌 굴드가 연주하는 골드베르크 음반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전에는 키스 자렛의 쾰른 콘서트로, 그 전에는 조지 윈스턴의 연주로, 그 전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로, 또 그 전에는 김광석의 노래로 되돌아갔었는데, 올핸 머레이 페라이아로 돌아가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야권통합과 FTA 비준안 국회 날치기 통과가 크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엇을 기억해야겠다는 마음은 없는 것 같다. 어김없이 돌아가는 새해가 다가오면, 1년동안 수시로 들여다볼 다이어리를 준비하고, 새해가 돼 일출을 본다고 새벽같이 해맞이를 가고, 봄이 되면 꽃구경을 가고, 여름이 되면 바다를 구경하고, 가을이 되면 국화와 낙엽에 감탄하고 그러다가 겨울이 되면 아, 따뜻함이 그리워지는 겨울이 됐구나 하면서, 장갑과 목도리를 챙기는 그런 절기의 반복을 올해도 어김없이 치뤘다. 벌써 예약한 2012년 다이어리를 받았고, 달력들이 도착했다. 올핸 송년카드 쓰는 시간만 지나면, 올 한해가 지나는가보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무엇을 해야하는가, 하지 않으면 왜 힘든가, 왜 그와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는가, 하지 않을 수는 없는가, 내가 만든 규정이란 무엇인가, 내게 주입된 규정이란 무엇인가, 실체란 무엇인가, 몸이란 무엇인가, 최소한이란 무엇이며 과잉은 무엇인가 등등을 의문하며 보낸 시간은 오늘도 어김없이 지나간다. 내가 해야하는 최소한의 무엇과 내가 하는 과잉된 무엇 사이에서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아스라한 줄타기를 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탐구라 생각하는 소설의 세계,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단독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세계가 재현될 수 있다면서 끝없는 읽는 소설을 오늘도 어김없이 읽고 있다. 읽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종교는 친절이라는 법정스님의 말씀을 되새김해야하는 나의 시간은 오늘도 부끄럽게 흘러가고 있다. 올 한해 내가 읽은 소설들은 또 뭐가 있었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에서 나는 한 박자 쉬어갔다.
<토성의 고리>에서도 역시나 나오기도 어려운 긴긴 한숨을 토해내야 했다. <지도와 영토>에서는 비판하는 자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시늉으로 애쓰는 작가의 그리 불편하지 않는 소설세계에 잠시 빠져들었구나.
이렇게 마음이 이쁜 본성의 사람일 수 있을까 싶은 아름이가 등장하는 김애란의 소설<두근두근 내인생>에서도 한번 쉬었구나. 김애란 <두근두근 내인생>에 대해 잘 쓴 장편소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두근두근 내인생>을 읽으면서, 인간의 상상이 부단한 노력과 순간 번뜩이는 섬광에 의해 유기체처럼 생성된 소설의 장점이란, 분명 문자일 뿐인데도 생생하게 느낌이 전달된다는 것에 있을텐데, 김애란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걸 경험하게 되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읽게 되는 것 같다. 그게 잘 훈련된 글쓰기 수업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그것이 그녀의 장점으로 생각된다.
혹자는 잘 쓴 소설과 못 쓴 소설로 소설을 구분한다. 나 역시, 맘에 들지 않은 소설에 대해서 참 소설 못썼구나 하고 무심결에 생각한다. 공지영의 <도가니>를 보면서, 참 , 이 소설, 흥미롭지 않구나, 싶었으니까.
그건 한 작가의 소설사가 아닌, 소설의 역사와 소설사의 역사에서 어떤 자리, 어떤 의미가 될 수 있는가의 여부이다. 하여 어느때는 단지 한 사람으로서 이 정도면 하는 느슨한 판단 기준으로, 어느때는 한 작가로서 겨우 이정도인가 하는 엄밀한 판단 기준을 들이대기도 한다.
분명 허구인 글자가 나를 감동시키는 이유가 뭘까 싶은 생각을 하면서. 가을이 되어 정약전이 흑산도에 유배가 쓴 <자산어보>와 순조 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부터 김훈은 또 한 권의 소설을 냈다. <黑山>. 역사 속 사람들을 소재로 하여 쓴 소설에서 어김없이 말했듯이, 김훈은 이번에도 '정약현, 정약전, 정약용, 황사영, 정명련, 황경한, 장창대, 구베아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살았던 실존 인물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 이름에 많은 허구의 이야기들이 얽혀 있어서, 소설 속의 인물들은 누구도 온전한 실존 인물이 아니다,'를 일러두기 쓰는 친절을 베푼다. 사실 언어의 세계가 세상에 있는 물질들의 세계라고도 할 수 있지만, 김훈의 소설에 등장하는 언어는, 그 세계는 왜 그리 차가운지. 밀려오는 밀물에 찰싹찰싹 파도소리 내며 홀로 다져지는 해변의 조약돌 같은 소설이었다.
<닥치고 정치> 를 올해 인상적인 한 권의 책으로 말을 했지만, '닥치고'란 말은 언제 들어도, 낯설다. 올 후반기, 사람들은 별별 구석에서 닥치고를 쓴다. 말그대로 유행이다. 크라잉 넛의 '말 달리자'를 부르며 닥쳐, 라는 말을 할 때도, 언제 뭘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들어줬다고/들었다고, 닥쳐, 란 말을 내가 하는가, 하고 스스로 의문했는데...
거슬리기에 귀에 쏙 들어오는 '닥치고' 라는 말을 내년에는 듣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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