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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은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1545-1598)의 지휘아래 세계 4대 해전중의 하나인 한산대첩을 비롯하여 여러 해전의 승리를 이끈 아주 유명한 배로, 조선시대 전선인 판옥선에 둥근 개판을 설치하였으며, 배 앞부분에 용머리를 달아 그 형상을 거북과 비슷하게 만든 배입니다.
개판 위에는 적군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칼과 송곳을 꽂아 놓았으며, 선수와 좌.우현의 방패판과 개판에 총포 구멍을 내고 대포를 장착하여 강력한 화력을 지녔습니다.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돌격선으로써 적의 함대를 돌파하여 좌충우돌하면서 대포와 유황불을 쏘아 적을 혼란에 빠뜨려 쳐부수었습니다.
그 후에도 거북선은 지속적인 개량을 하면서 조선 수군의 주요 전선이 되었습니다.
본 거북선 키트는 임진왜란을 상세히 기술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와 그림 그리고 복원한 여러 가지 모형들을 참조하였고, 본 모형은 전라 좌수영 거북선을 원형으로 하였으며, 거북선의 구조에 대한 자세한 설계도나 명확한 치수는 전해 오는 것이 부족하나, 내부 구조는 선박의 구조 및 용도를 고려하여 2층으로 만들었습니다.
세계인의 관심과 주목을 끌고 있는 거북선은 기록상으로는 조선조 3대 태종 때부터 나타나 있으나 형상이 둥글고 유람선용으로 썼던 것 같은데 충무공에 의하여 전투용으로 개조된 것 같다.
특징은 16세기에 철갑과 철창으로 뚜껑을 덮고 있고 밖으로 젓는 바이킹노가 아닌 배 밑으로 젓는 한노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충돌 시에도 안전하였던 것이다.
시대별로 크기와 구조가 조금씩 달랐으나 충무공 전서에 나와 있는 거북선의 구조와 크기는 다음과 같으며 전라좌수영 거북선은 노가 한 편에 8개씩 16개이고, 경상우수영 거북선은 노가 10개씩 20개로 되어있다.
지금부터 약 400년전 충무공에 의해 탄생한 거북선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큰 자랑거리로 알고 있으며 우리 배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외국인들도 격찬하는 전함 이다. 그러나 너무나 유명한 이 배는 또한 많은 오해를 가지고 있다. 주로 우리 거북선에 대한 옛날 방식의 기록 습관과 이를 잘못 이해한 외국인에 의해 시작된 초기 연구 때문이기도 하고, 일제가 일부러 거북선이나 조선 해군을 폄하하려 한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많은 외국인들이나 일본의 경우 우리 군선이 별볼일 없으나 어떤 기적 같은 것에 의해 거북선이 임진란 동안 잠시 쓰였다고 평가 하는 것이 바로 가장 큰 오해인 것이다. 거북선은 어떤 기적 같은 것에 의한 것이 아니고 신화도 아니며,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전함의 하나이던 판옥선을 개조한 전함으로 판옥선과는 형제지간과 같은 배이다. 또한 거북선은 순수한 우리고유의 조선방식에 의해 건조된 국산전함이었다.
·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두 가지 거북선
정조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는 충무공에 대한 당시의 자료를 아주 세심하게 모아 발간된 책으로 신뢰성이 높은 책이다. 이 책에는 모두 두척의 거북선 그림이 나오는 하나는 전라좌수영의 거북선 그림이고 다른 하나는 통제영의 거북선그림이다. 두척 모두 기본 선체는 전선(판옥선)을 그대로 닮았으나 무장면에서 통제영의 거북선이 더 막강한 듯하다. 다만 이는 단순히 총포혈의 숫자만 비교한 것이지만 대개 통제영 전선이 일반 수영의 것보다 더 크고 탑승인원도 많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 할 것이다.
· 구조
거북선 선체의 구조는 판옥선과 같다. 다만 거북선의 경우 돌격선이기 때문에 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좌우 양현을 지탱하는 가목의 숫자가 판옥선에 비해 많다. 또한 판옥선의 경우 가목이 양현 밖으로 튀어 나온 위에 신방을 설치하고 포판을 설치하는데 비해 거북선은 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기 위해 가목(멍에)으로 신방을 관통하여 끼워맞춤식 공법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본체(선체)위에 방패판을 설치한 상장부분 역시 판옥선과 기본 구조는 동일하다. 다만 판옥선의 맨위 청판위에 여장을 두른 곳(언방)부터 판자를 덮어 거북의 등딱지와 같은 뚜껑을 만드는 점이 다를 뿐이다. 그리고 방패판을 설치할때에도 거북선의 경우 신방위의 기둥사이에 끼워 맞춤식으로 방패판을 설치한다. 거북선의 등딱지를 개판이라고 부르는데 개판은 좌우 각각 11장으로 구성된다. 정조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는 통제영 거북선에는 개판에 좌우 각각 12개의 포혈이 있다고 했고, 좌수영 거북선에는 각각 6개라고 했다.
즉 거북선은 비전투원인 노꾼 뿐만아니라 전투원까지 개판아래에 보호한 장갑함이다.
그러나 좁은 공간에 많은 인원이 탑승하는 단점이 있어 전투효율이 떨어 진다. 이는 임진란 초기 처럼 왜 선단과 접전을 벌여야 할 경우는 방탄등이 중요한 돌격함이 필요하지만 이후 도망치는 적을 추격 맹격을 가할때에는 상갑판이 넓어 전투원들이 마음대로 활동하기 좋은 판옥선이 유리하다. 이런 이유 때문에 거북선은 많은 숫자가 만들어 지지 않았다. 보통 임진왜란 당시에는 3척, 그후 영조때에는 14척이 배치되어 있었다. 이는 임진란 이후 거북선을 오직 함대의 선봉이 되는 돌격선으로 사용 했기 때문인데 그러나 영조이후 점차 각 수영 뿐만 아니라 모든 전초에 배치하기 시작하여 정조 6년에는 40척에 달하는 거북선이 취역하고 있었다.
· 화력
거북선의 화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다. 우선 선체 자체가 충파 공격을 할 수 있다. 고대 전함들은 충파를 위한 장치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가장 유명한 것이 그리스의 아테네 함대가 페르샤를 물리친 살라미스해전때의 아테네 군선들이다. 판옥선도 이와 같지만 거북선은 더욱 더 충돌전을 대비하고 있다. 선수 부분의 귀신머리가 아마도 서양 선박의 램에 해당하는 듯 하다.
이외에 통제영 거북선의 경우 거북 등에 좌우 각각 12문씩 총 24문의 총포구멍이 배치되고, 그아래 방패판에는 좌우 각각 22문, 선수부 용머리위에 2문, 용머리 아래 2문, 선체 부분인 좌우 현판에도 각 1문의 현자포혈등 총 74개소의 총포혈이 있다.
한편 통제영보다 한급 아래인 좌수영에 배치된 귀선의 경우 거북 잔등에 좌우 6문, 그 아래 방패판에 좌우 10문, 거북머리 아래 좌우 2문등 총 34개의 포문이 있다.
임진왜란때의 거북선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면 거북선의 앞뒤 좌우 모두 각각 6문씩 총 24문의 대포가 장치된 것 같다. 이는 거북선에 탑승하는 포수의 숫자와도 맞아 떨어진다
이외에도 사부가 탑승하므로 승자총통등 개인 화기가 약 20정 정도 있다고 보여 진다. 거북선의 경우 방패판의 포혈로는 대형총통류의 대포를 발사하고 거북 등딱지의 총포혈로는 승자총통등 작은 개인용 화기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충무공의 난중일기 당포해전 부분(1592년 6월 2일자)에 중위장 권준이 왜장을 승자총통으로 쏘아 맞춘 일이 기록되어 있다. - 큰배 한척은 우리나라 판옥선 만한데, 층각을 꾸며서 높이가 두길이나 됨직하고 층각위에는 왜장이 높이 앉아 끄덕도 아니 한다. 편전과 대, 중형 승자총통을 비 퍼붓듯 마구 쏘니 왜장이 화살에 맞아 떨어졌고, 여러 왜군들이 한꺼번에 놀라 흐뜨러진다 는 기록이 그것이다. - 이때 주의 할 것은 우리나라 옛날의 총포류는 모두 탄환으로 크고 작은 화살을 사용할 수 있고 실제 화살탄을 많이 사용한 점이다. 따라서 위에 소개한 난중일기도 승자총통에 화살을 넣어 발사한 것으로 풀이하면 된다. 일부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총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는 육전에서 총의 효용가치를 과소평가하여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다. (사실 조총의 화력은 명중률이 낮고 한번 발사에 30초정도로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크게 신뢰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이런 조총도 사격수를 여러줄로 배열하고 한줄씩 장탄 발사하는 밀집대형으로 사용하면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다. 임진란 이전에 일본 국내전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사용한 이 전법은 애석하게도 우리나라에서도 임진란 이전에 제안된 적이 있었다. 김지 장군은 자신이 개발한 승자총통으로 3000병력을 무장시키고 이를 1,2,3대로 나눠 1대가 발사할 동안 나머지 2대가 장탄, 조준하게 하며 번갈아 사격케 하는 전법을 주장 했으나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활로 왜군은 총으로 싸운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해전에서는 우리는 대포로 저들 왜군은 총으로 싸웠다. 임진란 해전의 직접적인 승패는 화력의 차이에서 왔다고 할 수 있겠다.
· 충무공 행장에 나타난 거북선
충무공 행장은 충무공의 조카로 임진왜란때 충무공을 수행했던 이분공의 저술로 충무공 자신의 장계나 난중일기 다음으로 권위있는 저술이다.
이 기록에서 거북선의 전투때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공이 전라좌수사를 지낼때 장차 왜적이 쳐들어오리라는 것을 알고 큰 전선을 창제하였다. 배위를 판자로 덮고 덮개 위에는 열십자로 좁은 길을 내에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는 모두 창칼을 꽂았다. 뱃머리에는 용머리를 달고 (배)꼬리에는 거북 꼬리를 달았다. 대포구멍이 앞뒤와좌우모두 각각 6개씩 나있고 큰 탄환을 쏜다. 적을 만나 싸울때에는 거적으로 거북잔등을 덮어 씌워 창칼을 가리고 함대의 선봉이 되어 나아간다. 적군이 배에 오르거나 뛰어 내리면 창칼에 찔려 죽게되고, 적선들이 엄습해 오면 한꺼번에 대포를 쏘아 가는 곳마다 휩쓸지 않는 곳이 없었다. 크고 작은 싸움에서 이 거북선으로 공을 세운 것이 많으며, 엎드려 있는 거북과 같으므로 이름을 거북선이라고 하였다.'
· 임진왜란때의 거북선
임진왜란때 거북선이 처음 등장한 것은 사천포해전에서이다. 충무공의 1차 출동인 옥포해전에는 판옥선 만으로 출동 했는데, 이는 아마도 이때까지 거북선이 작전에 참가할 만큼 실전 배치하기에는 모자란 점이 있었던 것 같다. 난중일기에 의하면 거북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인 선조 25년 2월 8일 돛으로 쓸 범포를 받았고, 3월 27일 처음으로 거북선을 타고 포격연습을 했으며, 4월 11일 돛을 만들고 12일 지자포와 현자포를 시험 발사한 것으로 나온다. 이는 전쟁이 발발하기 겨우 3일전이며 충무공의 1차 출동이 있기 20여일전이다. 따라서 1차 출동때는 아직 미완성이거나 시험중이었던 같다.
거북선에 대한 첫 기록으로는 충무공이 사천포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올린 장계(선조 25년 6월 14일, 당포파왜병장)에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臣嘗慮島夷乙變 別制龜船 前設龍頭 口放大包 背植鐵尖 內能窺外 外不能窺內賊船數百之中 價以突入放包 今行 以爲突擊將所騎 而先令龜船 突進賊船中 先放天地玄黃各樣銃筒
...그런데 신이 일찍이 왜적의 난리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거북선을 만들었습니다. 앞에는 용머리를 달고 그 입으로 대포를 쏘게 되어있고, 등에는 쇠못을 꼿았으며,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있으나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 볼 수 없고, 비록 수백척의 적선 속이라도 쉽게 돌입 대포를 쏘게 되는데, 이번 출동에는 돌격장이 타고 왔습니다. (그래서)먼저 거북선에 명령하여 적함대에 돌진 천,지,현,황등 각종 총통을 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돌격장이 거북선을 타고 왔다는 대목은 함대내에서 거북선의 기능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거북선은 돌격전용 특수 군선이라는 뜻이다. 거북선은 판옥선과 비슷하지만 등딱지에 해당하는 개판으로 승선인원 전원을 방탄판자로 보호하는 장갑함이기 때문에 돌격전에 매우 유리하다. 이를 잘 이용한 것이 당포에서 왜장의 층각대선에 돌격 적장을 사살한 일과 제 4차 출동인 부산포 해전에서 육지로 도망간 왜적의 포격속에 돌입하여 정박중인 왜선단 400여척에 공격을 감행 100여척을 침몰시킨 일 등에 나타나고 있다.
· 철갑선?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주로 일본측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말로는 조선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측 기록이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해도 요즘 처럼 철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남대문 등에서 볼 수 있듯 목조 전함에 철판을 씌운 것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측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충무공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은 기록은 없고, 조카분의 충무공 행장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 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현재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위에 일본측의 기록자인 구끼는 안골포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신령님이 나타나 조선의 화살을 막아 주었기 때문이라는 등, 조선측 화살의 직경이 한자나 된다고 하는등 신빙성이 없어 보이는 부분이 많아 더욱 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이 부분은 현재도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 거북선에 대한 논란
거북선의 철갑설 이외에도 거북선 구조에 대한 논란은 여러 가지가 있다. 특히 선수의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정조대왕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는 용머리의 치수가 길이 133 cm, 내부 폭 93 cm로 나와 있는데 포를 설치하기에는 너무 좁다는 느낌이 든다. 충무공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이에 의해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 되어 있는데, 현재 모형과 같이 긴 목에 작은 머리를 가지고는 그 안에서 병사가 현자포를 쏘기에는 무리 인것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 거북머리(용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과연 용머리의 기능이 선수부 포탑에서 유황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는 알 수 없다.
또다른 논란은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 올라 있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김재근교수의 '우리배의 역사'에서는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 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 되어 있으로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또다른 논란으로는 거북선의 노역에 관련된 것이다. 최초로 거북선을 연구한 연세대학의 언더우드박사는 거북선 선체 삼판에 노 구멍을 뚫고 서양식 노를 젖는 것으로 거북선 복원도를 지난 1934년 제시한 적이 있으며 우리가 흔히 보는 거북선 복원 모형들이 대게 이를 많이 따르고 있다. 그러나 현재 김재근 교수등은 전후 일본에 파견된 사신선의 전개도등을 증거로 거북선도 멍에뺄목위의 상장과 선체 사이에 조선식 노를 걸어 노역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거북선의 복원 모형에 대하여
거북선은 우리에게 너무나 유명하여 모두들 거북선은 매우 친근한 존재로 비춰 진다. 그러나 실상은 지금 우리 주변에서 제대로 된 거북선의 모형이라도 쉽게 보기는 어렵다. 현재 권위적인 기관에서 만든 모형 조차도 통제영 귀선과 좌수영 귀선을 적당히 조합하여 만든 것이 대부분이고 학계의 정설이 아직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 보다도 국내 사학계의 비과학적인 태도도 큰 몫을 차지 하고 있다. 그들은 임진왜란 중 씌여진 난중일기의 잣귀 해석과 이 충무공행장의 잣귀 해석에만 매달려 거북선 복원을 오히려 안개 속으로 몰아 넣고 있다. 임진왜란과 이충무공 행장이 씌여진 것은 시기 적으로 수세기나 차이나며, 그동안 해전술의 변화로 거북선의 구조 일부가 바뀔 수 있는 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들의 모임이 국내 사학계라고 할 수 있다. 우선 현재 거북선 모형의 문제점을 살펴 보면 충무공 행장의 내용에 따라 칫수를 결정 했다. 이때는 용 머리에서 사격을 하지 않고 유황연기를 뿜을 때 이다. 따라서 이때는 포좌가 아니기 때문에 크기가 작다. 그런 것을 가지고 난중일기의 내용에서 거북선의 용머리에서 사격하는 것은 무리라고 단정 짓는 웃지 못할 주장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더구나 임진란 당시의 거북선 설계도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정조때 설계도를 기준으로 임진란 당시 전투를 설명하는 것은 말 도 안된다. 우리가 많이 보는 복원된 모형들이 이런 식으로만들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 하고 관람하기 바란다. 즉 거북선의 외형은 정조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의 그림을 참고로 만들었다.
이들 모형에는 또 한가지 웃지 못할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모든 모형에 한결 같이 나타나는 무지막지한 "닻"이다. 거북선의 복원 모형에는 모두 앞 문을 반 쯤 열어 놓고 예의 그 무식한 "닻"을 내놓고 있는데, 이렇게 닻을 내 놓으려면 뭐하러 그 엄청난 장갑을 할 필요가 있는지... 글자 해석에만 관심 있는 국내 사학계는 충무공 전서의 거북선 그림에 닻이 나와있으니 당연히 그런 구조라고 주장 할지 모르지만 이는 어림 없는 소리이다. 당시 설계도와 비슷한 이 그림에는 닻의 모양을 보여 주기 위해 일부러 꺼내 놓은 것이지 실제 전투때나 항해시 닻을 내 놓고 다니지 않았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 이기 때문이다. 우선 닻을 내놓고 항해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아 보면 "삼도수군 조련전진도"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당시 조선 해군의 정기 훈련을 그린 그림으로, 이 그림에는 모든 전선이 닻을 배안 두고 있지 선수에 삐죽 튀어 나와 있지 않다. 더구나 이 그림의 통제영 상선 (통제사의 기함)에는 선수의 문이 열려 있고 그안에 닻줄이 보인다. 즉 닻을 감아 올린 것이다. 이 그림과 배의설계도라 할 각선도본의 그림은 그 구조가 정확히 일치한다. 다만 각선 도본에는 닻이 그려져 있다. 즉 각선 도본에는 배 뿐만 아니라 닻도 함께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설계도에 그려 넣었던 것이다.
또한 거북선을 비롯한 전통 전함의 경우 모두 적함과 부딪혀 적함을 깨뜨리는 충파 공격을 자주 감행 하였다. 그런데 이렇게 닻이 삐죽 튀어 나와 있으면 충파 공격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이점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