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 어원 산책(2)
-주로 한자어계 귀화어를 중심으로-
조세용(시인, 건국대 명예교수)
o 가지기
1) ‘홀어미로서 예식을 치르지 아니하고 다른 남자와 사는 여자. 2) 전날에, 상놈의 첩을 일컫던 말.(『우리말 큰 사전(한글학회 지음, 1992))』’의 뜻인 이 낱말은 ‘家 집 가<훈몽자회(동중본 이하 동), 중, 4>’와 ‘直 고들 딕<흔몽자회, 하, 29>’의 합성어인 한자어 ‘가딕(家直)’에 접미사 ‘-이’가 첨가된 혼종어적, 파생어적 귀화어이다. 한자어 ‘가딕(家直)’의 ‘딕’은 임진란(1592년)을 전후하여 구개음화되어(조세용, 『한자어계 귀화어 연구(1991)』 참조) ‘직’으로 변화되었다. 이 한자어는 중국 문헌에는 전혀 보이지 않고 18세기 조선조 문신 이의봉(李義鳳)이 저술한 사서(辭書) 『고금석림(古今釋林)』권 27에 ‘우리나라에서는 속칭 첩을 별실, 또는 가직이라 한다(本朝 俗稱妾曰別室 又稱家直)’라고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이 한자어는 우리나라에서 조자(造字)한 한국계 한자어임이 확실하며, 오늘날 의미 확대적 변화를 일으켜 모두의 1)과 2)의 뜻으로 쓰인다.
o 거지
‘1) 빌어먹고 사는 사람, 2) 남을 업신여기어 욕하는 말(『우리말 큰 사전』)’의 뜻인 이 낱말은 한자 ‘乞 빌 걸<훈몽자회, 하 22>’자에 알타이어 공통 지소사 접미사 ‘-어(아)치/어(아)지’가 첨가된 혼종어적, 파생어적 귀화어인 ‘걸어치>거러치<훈몽자회. 중, 1>>거어지<역어유해, 상, 30>’로 변화되었다가 오늘날 동음생략되어 ‘거지’가 된 낱말이다.
o 경마
‘남이 탄 말을 몰기 위하여 잡는 고삐(『우리말 큰 사전』)’의 뜻인 이 낱말은 ‘사람이 말을 타고 경주하는 일’의 뜻인 ‘경마(競馬)’와는 전혀 다른 ‘남이 탄 말의 고삐를 붙들고 걸어가면서 말을 모는 일’(『한국 한자어사전(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2002년 6월 15일)』 권 9 참조)의 뜻인 한자 ‘牽 잇글 견<신증유합, 하, 46>’과 ‘馬 마<훈몽자회, 상, 19>’가 합성된 ‘견마(牽馬)’가 자생적(=무조건) 음운변화를 일으켜 귀화어가 된 낱말이다. 이 한자어 ‘견마(牽馬)’가 최초로 등장하는 문헌은 중국의 전국시대 어느 유가(儒家)에 의해서 편찬된 중국 삼례(三禮)의 하나인『의례(儀禮)』 빙례(聘禮)에 처음으로 출현하는 사실로 보아 중국계 한자어로 보아야 한다(有司二人牽馬以從出門)(『대한화사전(소화(昭和) 43년 10월 』권 7 참조). 이 한자어는 우리나라 문헌인 조선시대 때 임금이나, 세자, 또는 대군 등이 타고 있는 말의 고삐를 잡고 그 말을 모는 일을 맡은 사복시(司僕侍)에 소속된 종7품의 잡직이나, 또는 그 일을 맡은 사람‘의 뜻인 ’견마배(牽馬陪)(『태종실록』, 권 14 참조)‘나, ‘말의 고삐를 붙들고 가는 군졸’의 뜻인 ‘견마군(牽馬軍)(『태종실록』 권 3 참조)’으로 출현하기도 한다.
이 낱말은 17세기말 중국어 어휘집인 『역어유해, 1690)』하, 20엔 ‘矓着馬 견마다’로 출현하나, 이미 ‘16세기 문헌인 『사성통해, 1539)』상, 11에 ‘牽馬 今俗謂 -著馬 경마다’로 등장하는 사실로 보아, 일찍이 ‘견마(牽馬)>경마’로 자생적 음운변화를 일으켜 귀화어가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본다.
이 낱말은 오늘날 ‘말 타면 종 두고 싶다.’라는 속담과 같은 뜻의 ‘사람의 무한한 욕망’이나, 상황에 따라 이리 변하고 저리 변하는 ‘사람의 간사한 마음’을 풍유하는 뜻의 속담인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라는 속담의 핵심어로 널리 쓰이고 있다.
O 고삐
‘마소를 몰거나 매어 둘 때, 한 끝을 코뚜레나 재갈이나 굴레에 잡아매는 줄(『우리말 큰 사전』)’의 뜻인 이 낱말은 고유어 ‘고ㅎ(’코[鼻]‘의 고어)’와 한자어 ‘轡 셕 비<훈몽자회, 중, 27>’ 사이에 관형격 사잇소리 ‘ㅅ'이 첨가되어 경음화의 과정을 거친 혼종어적 귀화어이다.
o 고약(-하다,-스럽다)
‘1) 얼굴이나 성미, 언행 따위가 사납다. 2) 인심이나 풍습 따위가 도리에 벗어나서 나쁘다. 3) 냄새, 맛, 모양, 소리 따위가 비위에 거슬리게 나쁘다. 4) 날씨, 바람 따위가 거칠고 사납다.(『우리말 큰 사전』)’의 뜻인 이 낱말은 한자 ‘怪 괴특 괴<신증유합 상, 15>’와 ‘惡 모딜 악<훈몽자회, 하, 4>’의 합성어인 ‘괴악(怪惡)’에서 ‘ㅚ’의 후행적 반모음 ‘j'의 순행동화로 ’괴약‘으로 음운변화되었다가 다시 ’ㅚ‘의 후행적 반모음 ’j'가 동음생략되어 ‘고약’으로 변화된 귀화어이다. '괴악(怪惡)(또는 괴오(怪惡))‘은 중국 문헌에만 출현하는 중국계 한자어로 전자는 ’험악함(『수호전(水滸傳)』41회)‘의 뜻으로, 후자는 ’아주 이상히 여기며 싫어함(『수신기(搜神記)』16)(『한한대사전(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2003년 6월 15일)』권 5 참조)’의 뜻으로 쓰였다. 따라서 ’고약‘의 원조어는 전자의 뜻인 ’괴악(怪惡)‘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낱말에 형용사화 접미사 ’-하다‘와 ’-스럽다‘가 첨가되어 형용사로 쓰이고 있다.
o 고추
‘1) 가짓과에 딸린 한 해살이 풀. ....(생략).....2) ’고추자지‘의 준말(『우리말 큰 사전』)’의 뜻인 이 낱말은 한자 ’苦 쓸 고<훈몽자회, 하, 14>‘ 와 ’椒 고쵸 쵸 <훈몽자회, 상, 12>'의 합성어인 ‘고쵸’가 단모음화되어 ‘고초’로, 다시 모음이화 과정을 거쳐 오늘날 ’고추‘로 변화되어 귀화어가 되었다.
이희승 편저의 『국어 대사전(민중서림, 1982)』과 북한 과학원에서 펴낸 『조선말 사전(1990)』에는 위의 ‘고추’가 한자어 ‘고초(苦草)’에서 음운변화 현상을 일으켜 ‘고추’가 된 것으로 그 어원을 밝히고 있으나, 이는 큰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왜냐 하면 ‘고초(苦草)’는 북위(北魏) 때 가사협(賈思勰)이 지은 중국의 농서(農書)『제민요술(齊民要術)(532-544)』잡설(雜說)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부인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쓰는 풀이름’이기 때문이다.
한 편 조선 성종(成宗) 12년(1489)에 출간된 민간 구급 한의학서인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권 1, 32에 ‘胡椒’를 ‘고쵸’라고 언해한 것은 오늘날의 ‘후추’에 해당하는 것이지 ‘고추’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귀화어 ‘고추’는 조선 정조(正祖) 20년(1796)에 간행된 경기도 수원성(水原城) 역사(役事)의 경위와 전말을 기록한 책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6에 ‘고추 여덟 되(苦椒 八升)’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과 『조선영조실록(朝鮮英祖實錄)』44년 8월조에 ‘고추장(苦椒醬)’으로 기록되어 있는 사실로 보아, 오늘날의 ‘고추’라는 낱말은 의미가 전혀 다른 중국계 한자어 ‘고초(苦草)’에서 모음이화된 귀화어가 아니라, 한국계 한자어 ‘고쵸(苦椒)’에서 단모음화와 모음이화 과정을 거쳐 귀화어가 된 것이 확실하다고 본다.(한글 새소식, 2010년 8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