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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인생》 연재원고 1회 171229 송고
망국의 역사 위에서 (1)
이 원 규
연재를 시작하면서-
1909년 한성 삼청동의 대한제국 무관학교, 나라는 패망으로 기울었으나 거기 40여 명의 생도들이 있었다. 어느 날 폐교 칙령과 함께 일본 육사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그렇게 갑자기 망국의 역사에 내던져졌다. 그 후 어떤 길을 걸어갔던가. 나는 그들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지막 무관생도들》이라는 장편 팩션으로 써서 출간했다. 그 책에 쓰지 못한 뒷이야기를 이번호부터 찬찬히 쓰고자 한다. 그들의 일본 육사 선후배들 이야기도 몇 편 쓸 것이다. 그 첫 이야기는 이종혁 중위의 거룩한 삶이다.
이종혁 중위의 허망한 죽음
1965년 조선일보 편집국장이던 소설가 선우휘는 대령으로 예편한 터라 무관의 기질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 해 봄, 그는 유봉영 주필에게서 가슴 벅차도록 슬픈 이야기를 듣고 단편소설로 써서《현대문학》5월호에 발표했다. 제목은 <마덕창 대인>,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화두를 독자에게 던져주는 감동적인 작품이다. 주인공은 비운의 독립투사 이종혁 의사이다. ‘마덕창’은 항일투쟁 시 사용한 그의 가명이다. 뒷날 용맹한 무관으로 이름을 떨친 김석원 장군이 깊은 신의와 우정을 나눈 조연으로 등장한다. 소설 내용으로 보면 김석원 장군도 인터뷰한 것이 분명하다.
삼청동에 있었던 대한제국 무관학교, 충청도 당진 출신의 과묵한 생도 이종혁은 외향적이고 역동성이 강한 한성 출신 김석원과 단짝이었다. 남자들의 우정이 그렇지 않은가. 이종혁은 김석원의 씩씩하고 거침없는 성격이 좋고, 김석원은 이종혁의속이 단단해서 한번 결심하면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이 좋아 서로 끌렸던 것이다. 선우휘가 ‘대인’이라고 제목에 썼으니 이종혁은 대인배(大人輩)였던 것 같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예였다. 덕수이씨대종회는 인터넷홈페이지에 있는 「가문의 영광」코너에 그를 넣고 있다. 의연한 기품은 충무공의 후예라는 긍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1909년 여름, 군부가 폐지되고 학교가 폐교되면서 청년 생도들은 망국의 역사에 던져졌다. 일본으로 건너가 육군유년학교와 육사를 다니게 된 것이다. 좋은 가문 출신의 당대 최고 엘리트들인데 설마 뜻밖의 행운이라고 기뻐했겠는가. 일본 유학 중 강제합병 소식을 듣자 학교의 주목을 피해 아오야마 묘지라는 곳에 모여 통곡하며 맹세했다. 일본이 가르쳐주는 대로 군사교육을 받고 뒷날 조국이 부르면 독립전쟁에 나서자고 결의했다.
그러나 인생은 결코 젊은 날의 맹세대로 되지 않는다. 조선인 생도들은 결국 일본 육군유년학교와 육사의 교육으로 순치되었고 일본군을 지휘하는 초급장교가 되었다. 당시 육군 소위는 위상이 군수와 비슷했고 일본군 병사가 당번병으로 배속되어 군화를 닦아주고 빨래까지 해주었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고 일본군 내부에 있다 보니 무장독립투쟁은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았고 칼날이 녹슬 듯 아오야마 묘지에서의 결의는 희미해졌다.
이종혁에게 운명의 파도가 닥쳐왔다. 일본이 러시아혁명을 방해하는 간섭전쟁에 17만 명이라는 대규모 병력을 출병하게 되고 조선인 장교들도 여럿이 연해주 전선에 참전했다. 이종혁과, 소설가 염상섭의 형 염창섭, 뒷날 국군 초대참모총장이 된 이응준, 뒷날 국군대령으로 북한군에게 포위되자 세검정에서 자결한 안병범 등이었다.
이종혁 중위의 소대는 조선인 파르티잔을 생포했다. 배낭에서 판화로 찍은 선전물과 기밀서류가 나왔다. 중대장은 보고를 받고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심문을 하사관들에게 맡겼고 파르티잔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동포 독립투사를 처형하게 되어 그냥 착잡한 기분으로 서 있었다. 그보다 열 살이 더 많은 하사관이 곁으로 다가와 명령을 기다렸다.
이종혁은 엄숙하게 명령했다.
“중대장님 명령대로 처형하라.”
총살형을 당하기 위해 끌려가던 파르티잔이 갑자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려 모국어로 말했다.
“거기 있는 장교, 당신 조선 사람이지?”
이종혁은 파르티잔에게 다가갔다.
“그렇다. 나는 조선인이다. 명령에 의해 처형하니 나를 원망하지 마라.” 동포 파르티잔은 눈을 부릅뜨고 꾸짖었다.
“이놈! 민족이 왜놈들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왜놈 장교 복장을 하고 꼭두각시 짓을 하느냐! 부끄러운 줄 알아라!”
파르티잔은 당당하게 처형장으로 걸어갔다.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총탄을 맞고 선혈을 흘리며 쓰러졌다.
이종혁은 무쇠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하사관에게 명령했다.
“조국을 위해 싸운 투사이니 잘 묻어 주라.”
이종혁의 소속부대는 조선인 파르티잔이 소지한 기밀서류를 토대로 공격을 해서 조선인 무장세력을 괴멸시켰다. 이종혁은 그 공적으로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 후 견디기 힘든 가책과 회의에 빠져들었다. 그런 일을 겪고도 정신없는 놈처럼 일본군에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군복을 벗고 만주로 탈출, 마덕창이라는 가명을 쓰며 눈부신 무장투쟁을 펼쳤다. 국사편찬위원회 인터넷데이터베이스에 들어가 검색창에 ‘마덕창’이나 ‘이종혁’을 입력하면 무수히 많은 자료가 쏟아진다.
그는 만주로 탈출해 독립군 부대를 찾아가던 중 일본군에 쫓겼고 자신을 구해준 펑위상(馮玉祥 풍옥상) 군벌부대에서 참모노릇을 했다. 다시 독립군을 찾아가던 중 펑텐(奉天 봉천) 군벌군에 포로가 돼서 몽골까지 끌려갔다. 총살 직전 탈출해 북만주로 가서 주만육군참의부라는 부대를 꾸려 투쟁했다. 그리고 참의부 군사위원장이 되어 혁혁하게 싸웠다. 일본군 전술을 잘 아는지라 싸울 때마다 이겼다. 그러나 가장 큰 고민이 동포 밀정들이었다. 참의부의 항일투사들 중 동포 밀정의 계략에 걸려 체포되거나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군사위원장 마덕창(이종혁)은 분노했다.
“독립투쟁을 돕지는 못할망정 일본의 사냥개 노릇을 하다니! 그놈들을 찾아내 처단하라!”
그는 특별조직을 만들어 밀정 처단작전에 나섰다.
그러나 밀정들은 더 교활해졌고 그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팠다. 그리하여 1925년 9월 체포당했다. 동포 밀정들이 이런 독립투사를 함정에 빠뜨리다니, 잊지 말아야 할 통탄스러운 일이라 《동아일보》 1925년 11월 14일 기사를 인용한다.
남만주(南滿州)에 근거를 두고 조선○○운동을 하는 참의부 군사위원장 마덕창(馬德昌 본 명 李鍾赫 32세)이 모종의 계획을 품고 모처를 향하여 지난 구월 십구일에 봉천(奉天)을 경 유하던 중에 봉천 일본 경찰의 포위를 당하야 피착되었다는데 이제 사실을 들은 바에 의하 면 전기 마덕창은 OO계획을 품고 얼마 전에 환인현(桓仁縣)을 떠나서 봉천을 향하던 바 전 기 환인현에 있는 밀정 이○○과 오OO가 전기 마덕창의 봉천 가는 일을 봉천 경찰에게 밀고한 바 되어 그같이 피착되어 이래 취조를 마치고 신의주로 압송하였다는데 전기 마덕창 은 일찍이 일본사관학교를 마치고 만주에 건너가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여 오던 중이라더 라.(장춘)
그는 결국 5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 5년은 공교롭게도 일본군 장교로 보낸 기간과 같았다. 그는 같은 기간 동안 일본군 장교 노릇을 한 것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행수도자와도 같은 태도로 복역했다. 조선인 간수들은 물론 일본인 간수들도 그의 경력을 알고는 외경과 존경으로 바라보았다. 이종혁은 그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2년을 복역했을 때 교회사(敎誨師)가 말했다. 형무소 간부들 사이에 특사를 상신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며 잘못을 인정하는 반성문을 한 장 쓴다면 풀려날 것이라 했다. 여러 차례 권유가 이어졌다.
“잘못했다고 한 마디만 쓰면 될 거 아닙니까?”
교회사의 말에 이종혁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나 자신을 속일 수 없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자주 면회를 가서 사식을 넣고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뒷날 조선일보 기자, 주필이 된 유봉영이었다. 그는 평북 철산 출신으로 고향의 3·1만세 시위를 주도하고 상하이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일했다. 만주에서도 투쟁했으며 그때 이종혁을 존경하며 따랐다.
이종혁은 결국 형기를 모두 채우고 중병에 걸려 들것에 실린 채 석방되었다. 유봉영이 달려가 평양의 허름한 여관에 웅크리고 있는 그를 경성 자기 집으로 데려 왔다.
어느 날, 이종혁이 말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네. 김석원을 아는가?”
“만주에서 무섭게 항일부대를 타격한 일본군 장교 김석원 소좌 말입니까?” 유봉영이 물었다.
김석원은 만주에 출병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일본 육군의 조선군사령부 산하부대의 대대장으로 있었다.
“그렇네. 그 사람한테 내가 감옥에서 나와 이렇게 앓고 있다고 알려 주게.”
유봉영은 난처한 일이라 대답하지 못했다.
이종혁은 가쁜 숨을 쉬면서 말했다.
“김석원은 신의가 있는 사람이네.”
유봉영은 김석원을 찾아갔다.
김석원 장군은 그때 이야기를 회고록에 썼다.
내가 당장이라도 가서 이종혁을 만나봐야겠다고 했더니 유봉영은 동행하는 거야 어렵 지 않지만 혹시 관헌에서 눈치 채면 나한테 화가 미칠지도 모르니 그럴 필요까지 없다는 것이었고 만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유봉영을 설득하고 결국엔 그를 따라가 참 오래간만에 이종혁을 만났다. 생각하면 한국무관학교 시절부터 일본 육사까지 만 8년 동안이나 한 솥 밥을 먹으며 책상을 나란히 하고 공부를 같이한 이종혁과 나 사이가 아 니던가. 하지만 한쪽은 우리나라의 해방을 위해 독립투쟁을 하는 독립군 장교요, 또 한쪽 은 독립을 가로막는 일본군의 장교였다. 묘한 사이였다. 따져보면 극과 극의 사이랄까. 하여튼 나는 이종혁과의 오랜 해후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착잡한 감회를 맛보았다.
우선 이종혁을 볼 면목이 없었다. 심한 늑막염으로 병색이 말이 아닌 이종혁이었지만 도리어 그가 당당한 인간처럼 보였고 나 자신은 초라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보였다.
“이 군, 참 자네를 볼 면목이 없네 그려.”
이것은 나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원 별 말을 다하는군. 이렇게 송장이 다 된 나를 찾아주니 참 고맙네.”(중략)
몇 마디 말을 주고받은 후 유봉영의 집을 나온 그 길로 평소 나와 가깝게 지내던 서울 장안의 몇몇 유지들을 찾아다니며 이종혁의 치료비로 약 5백 원을 만들어서 갖다 주었 다.(《노병의 한》, 육법사, 1977).
선우휘는 <마덕창 대인>에서 김석원이 1차 문병 때 동창생 17명으로부터 5원, 10원씩 모은 약값을 주고 돌아갔으며 윤치호와 박영효가 각각 50원의 돈을 인편으로 보내왔다고 썼다. 5원, 10원은 오늘 돈으로 50만 원 100만 원은 될 큰돈이다. 나라를 되찾는 일에 신명을 바치자고 맹세했던 대한제국 마지막 무관생도 출신 장교들, 그들은 자기들의 반민족행위를 대속(代贖)하는 듯한 그의 삶에 김석원처럼 깊은 외경을 느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일본 경찰은 이종혁을 보호하는 김석원을 찾아가 괴롭히고 귀찮게 했다. 김석원은 이종혁을 전동(典洞)여관(현재의 종로구 공평동에 있었다)으로 옮겨 치료에 전념하게 했고 그 일로 연대장으로부터 경고를 받았다. 징계는 없었다. 만주전선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가장 비범하고 용감한 장교로 인정받고 있어서였다.
김석원의 곁을 떠난 이종혁을 조선소년군(보이스카웃) 초대 총사령장이자 동아일보사 발송부장을 하던 조철호가 떠맡았다. 그도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 한 사람으로 이종혁보다 몇 해 먼저 탈출했던 사람이었다. 군사기밀을 갖고 만주로 탈출했다가 체포돼 군법회의에서 간신히 총살형을 면했고, 6 ‧ 10만세 사건으로 구속됐던 전력이 있는지라 조철호도 행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조철호가 한 애국인사에게 부탁해서 이종혁은 평북 선천으로 옮겨가 요양에 들어갔고 1935년 12월 14일 사망해서 그곳에 묻혔다. 조철호와 김석원은 마지막 무관생도들에게 알렸고 모은 돈을 이장 경비로 보냈다.《조선중앙일보》 1936년 4월 11일자에 관련기사가 있다. 이종혁의 유족이 가난하여 친구들의 도움으로 고향 충청도로 이장을 준비하는 중이라는 내용이다. 열댓 살 나이에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갔고 재학 중에 일본육군유년학교로 편입해 갔으니 국내에 친구가 있을 리 없다. 신문기사의 ‘친구들’이란 김석원과 마지막 무관생도들로 보인다.
이종혁이 죽은 뒤 중일전쟁이 발발해 김석원은 다시 전선으로 나갔고 눈부신 전공을 세워 일본군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여러 차례 학병, 지원병 지원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 한편으로 그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 성남중고등학교를 세웠고 대좌 계급장을 단 채 광복을 맞았다.
그처럼 끝까지 일본군 군복을 입었던 사람들 일부가 광복군 출신이 해야 할 국군창설의 주역이 되었다. 참회하는 심정으로 조국에 봉사하려고 나섰다고 했다. 참회한다면 근신해야 하지 않는가? 일본군과 만주군 고급장교 출신들이 장악한 국군 창설, 우리 현대사는 그렇게 왜곡되었다.
김석원은 면목 없다며 국군창설에는 나서지 않았으나 결국 국군의 장군이 되었고 6·25 전쟁에서 용감히 싸워 이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뒷날 다른 동창들 9명과 함께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목되었고 25명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선우휘는 <마덕창 대인>에서 김석원 장군이나 다른 일본 육사 출신 장군들을 비난하지 않았다. 그때 그들이 창군의 주역이자 6·25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군으로 존경받으며 생존해 있고 군대 인맥이 그들 중심으로 형성돼 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들의 삶이 결국 우리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일본군 장교가 된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 33명 중 망명탈출을 감행한 사람은 이종혁 외에 세 사람에 불과하다. 조철호, 이동훈, 그리고 광복군 사령관을 지낸 지청천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이종혁이 재판 받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으며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혹은 ‘나도 탈출하면 그 꼴이 되겠지’하며 반면교사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이종혁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울까 하는 생각이 든다. 조철호· ·이동훈·지청천도 그렇다. 의를 위해 자기를 버리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래서 그런 분들을 사람들은 지사(志士)라고 부른다. 맹세는 쉬우나 실천은 어렵다.
독립투쟁에 생애를 바친 분들이 스토리텔링으로 살아나고 있다. 아마 요새 젊은이들은 김석원 장군도 잘 모르겠지만 이종혁은 더욱 모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믿는다. 다시 나라에 그런 위기가 찾아오면 이종혁처럼 자신을 던지는 거룩한 지사들이 나올 것이라고.
사진 1. 《현대문학》1965년 5월호에 실린 선우휘의 소설 <마덕창 대인>.
2. 이종혁에게 징역 5년을 선고한 경성고등법원의 판결문 원본.
3.4 평양형무소 복역시절 이종혁이 유봉영에게 보낸 육필 엽서. 신연수 『법률신문』이사 소장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