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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문창후 고운 선생 영정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1990. 12. 15 지정), 대구시 동구 도동 766-4번지
문창공영당(文昌公影堂) 대구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0호 (1989. 8. 10 지정), 대구시 동구 도동 766-4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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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로동에서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 1㎞정도 가게 되면 경부고속도로를 만나게 된다. 이 고속도로의 밑을 지나 우측으로 약 500m정도 가면 천연기념물 제1호인 달성의 측백수림이 울창한 숲을 이룬향산의 남쪽 사면에 문창공영당이 남향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최치원 선생의 영정을 모시기 위하여 1912년에 그의 후손들이 세웠으나 그들의 시조가 남긴 위업을 후손에게 전하는 목적외에도 이름난 선현의 영정을 모심으로써 망국의 한을 씹고 있던 백성들에게 민족정기를 되살리기 위해 세웠다 한다. 장방형으로 둘러쌓인 담장안에 있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중앙칸의 박공이 좌우 양쪽보다 한단 높게 되어 있다. 구조는 3량가로 낮은 기단위에 원주형 높은 초석을 놓고 원기둥을 세운 익공계이며, 건물 전면에는 각 칸마다 두짝의 여닫이 골판문이 달려 있다. 영당앞에는 출입을 위한 정면 3칸의 솟을외삼문이 있다. 삼문의 각 칸에는 두짝의 대문을 달고 거기에 태극문양을 그려 놓고 있어 건물을 짓게 된 경위를 잘 보여준다 하겠다. 이 건물은 文昌公(문창공) 崔致遠(최치원)의 眞影(진영)을 奉安(봉안)한 影堂(영당)이다. 1755년(英祖, 영조 31) 創建(창건)한 이래 1864년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毁撤)되어 桂林祠(계림사)로 낮추어 불러오다가 1910년 庚戌國恥(경술국치)를 당하자 慶州崔氏(경주최씨) 匡靖公派(광정공파) 후손들이 奉先(봉선)의 뜻과 民族精氣(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퇴락한 桂林祠(계림사) 건물을 현위치로 移轉(이전)하고 三門(삼문) 솟을大門(대문)에 太極(태극)을 그려서 守護(수호)하였다. 1912년 인접한 九會堂(구회당)과 함께 完工(완공)하였다.
崔致遠(최치원, 857, 신라憲安王(헌안왕1∼?)은 新羅末期(신라말기)의 文章家(문장가)로 호는 孤雲(고운) 또는 海雲(해운), 12세에唐(당)에 유학, 17세때 과거에 급제하여 宣州 水縣尉(선주율수현위)를 거쳐 承務郎侍御史內供奉(승무랑시어사내공봉)이 되어 紫金魚袋(자금어대)를 下賜(하사) 받았다. 唐(당) 僖宗(희종) 6년 黃巢亂(황소란)때 黃巢檄文(황소격문)을 써 이름을 떨쳤고 884년 28세때 귀국, 阿餐(아찬)벼슬에 이르렀으나 亂世(난세)가 됨에 各地(각지)를 유랑하다가 海印寺(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고려 顯宗(현종)때 內司令(내사령)으로 贈職(증직)되고 1020년 고려 顯宗(현종, 11) 文昌侯(문창후)의 諡號(시호)를 내렸으며, 成均館(성균관)과 전국 鄕校(향교)의 大成殿(대성전)에 配享(배향)되어 從祀(종사)토록 하였다. 桂苑筆耕(계원필경)등 다수의 文集(문집)과 글을 남겼다 한다. 건물은 圓形礎石(원형초석)위에 圓柱(원주)를 柱上(주상)에는 柱頭(주두)를 놓았으며 쇠서받침에는 蓮花紋(연화문)이 복잡하게 조각되어 있다. 솟을지붕에는 柱上(주상)의 大樑(대량)위에 짧은 기들을 세우고 柱頭(주두)를 鳳頭(봉두)와 翼工(익공)장식을 하여 마치 重層(중층)처럼 꾸몄다. 상량문 | |||||||||||||||||||||||
19세기에 만들어진 최치원의 초상
최치원은 쓰러져 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하여 51대 진성여왕 8년에 시무책(時務策) 10개조를 국왕에게 올렸다. 이로 인해 아찬(阿餐)의 벼슬을 받았다. 아찬은 제6관등으로 6등품(六等品)이 승진할 수 있는 최고의 품계였다. 그러나 중앙의 권력을 장악한 부패한 위홍(魏弘) 등은 최치원이 제기한 시무책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배척하고 음해했다. 그리하여 최치원은 정계에서 물러나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개탄하면서 장기간의 방랑과 은거 생활을 하며 시를 쓰고 읊었다. 마산(馬山)의 월영대(月影臺) 등 명승지였다. 나중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 들어갔는데, 그의 동복형으로 승려가 된 현준(賢俊)과 정현사(定玄師)와 함께 도우(道友)가 되어 함께 은거했다. 그의 나이 40여세 때의 일이었다. 왕건(王建)의 격서(檄書)를 대필했다는 것으로 보아 가야산에 은거한 이후 약 30여 년 이상 생존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그는 세속을 떠나 행운유수처럼 떠돌아다니며 산과 숲 속이며,강과 바닷가에 대와 정자를 짓고 솔과 대나무를 심으며 서책으로 베개를 삼고 풍월을 읊었다.」 천하를 두루 돌아보아도 애착심이 가게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마치 하늘가의 한가로운 구름이 무심히 떠다니다 말다 하는 것과 같아 스스로 고운(孤雲)이라 자(字)를 짓기도 했다. 당시의 그로서는 벼슬자리의 호강을 썩은 쥐새끼 신세보다 못하게 여겼을 것이다."≪열하일기≫를 남긴 박지원이 자신의 저서 ≪함양군학사루기≫에서 남긴 말이다. 왕건에게 서찰을 보내 치도에 대해서 설파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할 것을 요구했다. 왕건은 최치원이 대문장가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를 초청하여 벼슬을 주려고 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단호히 사양했다. 왕건은 최치원이 벼슬자리를 한사코 거절하자 학사로서 송도에 머물러 있게 했다. 백성들은 봉기하고 논밭은 모조리 적토(赤土 : 흉년이 들어 거둘 곡식이 아주 없게 된 빈 땅)가 되었다. 나라의 재앙을 물리치고자 이웃과 친선관계를 맺었더니 과연 수천 리 땅에서 농사를 짓고 누에치는 작업에 몰두하니 7∼8년에 걸쳐 군사가 한가롭게 되었다. 그런데 그대는 털끝만한 이익에 눈이 어두워 천지의 두터운 은혜를 잊어버리고 임금을 죽이고 대궐을 불사르며 대신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도륙했다. 신라의 궁녀들을 모조리 붙들어가고 보물을 빼앗아 수레에 실어갔으니 그 흉악함으로 말하면 걸주(桀州)보다 더하고 그 잔인함은 짐승보다 잔인하여 나의 원한은 하늘이 무너질 듯하다." 왕건을 대신하여 견훤에게 격문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소박한 생각"이라는 글에서 그 시기 신라 지배층의 타락한 모습을 신랄하게 꾸짖었다. 신라 말기 타락한 세상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경계하는 최치원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작가는 이 시를 통하여 공명과 물욕에 눈이 어두운 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벼슬길에 뛰어드는 것을 풍자하는 한편 자신은 세속에 물드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제가야산독서당(題伽倻山讀書堂)이라는 시에서도 드러나 있다. 시끄러운 시비 소리가 난무하는 어지러운 속세를 벗어나고자 하는 작가의 심리가 표출되어 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하층민들에 대한 동정을 보여주는 시도 썼다. "강남녀"라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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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4년 병인에 "문창후의 후손은 비록 지파서손이라도 군정의 일을 시키지마라"고 전교하였다.
정조 20년 병진에 "문창후의 자손은 비록 지파서손이라도 군역에 침범하지 말고 태강의 예에 넣지 마라,열성조의 교령을 받아온 이래 과연 능히 준행했느냐 해조에 엄숙히 거행하라고 명령하고 범하는 수령은 나타나는 데로 처치하라"고 전교 하였다
단기 |
서기 |
왕명 |
년 |
령 |
사적 |
3190 |
857 |
헌안 |
1 |
1 |
신라 서울 사량부에서 탄생 |
3194 |
861 |
경문 |
1 |
5 |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그대로 정민호학하시 시절 |
3201 |
8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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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12 |
부친 훈시하에 입당(십년을 공부하여 과거를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말라는 훈시) |
3207 |
874 |
|
14 |
18 |
육년만에 대과 급제 |
3208 |
875 |
헌강 |
1 |
19 |
동부유랑,부오백수시백수,잡시부삼십수 모아 삼편성 |
3209 |
876 |
|
2 |
20 |
선주율수현위에 임명, 중산복적집 작쌍녀 분시성우관직 사직 |
3211 |
878 |
|
4 |
22 |
종남산 입학업 전마하신 시기 |
3212 |
879 |
|
5 |
23 |
황소난에 고련이 제도행영 병마도총이 되니 선생은 종사관 그 어도제순관 승무랑 시어사내봉공에 임명 |
3213 |
880 |
|
6 |
24 |
4년간 군막에서 書,狀,表,啓 |
3214 |
881 |
|
7 |
25 |
격문작 황소격문 작성 |
3215 |
882 |
|
8 |
26 |
자금어대하사 결화엄경사원문 작성 |
3216 |
883 |
|
9 |
27 |
군막4년간 만여수중 추려서 계원필경20권 지음 |
3217 |
884 |
|
10 |
28 |
당희종은 환국할때에 사신 자격 귀국시 풍랑기하여 부득이 월동하여 익년에 귀국하였슴 |
3218 |
8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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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29 |
귀국후 시독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지 서서람의 요직에 임명, 선생도 위국경론을 펴보려 하셨고 왕은 숭복지비문을 찬케 하였으나 완성은 진성여왕 시대임 |
3219 |
886 |
정강 |
1 |
30 |
정월에 제당시 저술한 계원필경중 산복적집시부등을 상하고 왕명으로 왕비김씨위고수석라여래상 번찬병서 작성 |
3220 |
887 |
진성 |
1 |
31 |
대화엄종 불국사 비로자나 문수보살상 찬병서 작성 진감단사비명 작성, 서산비문 |
3221 |
888 |
|
2 |
32 |
여왕은 내행이 부정하여 국내 미소년을 입궐시켜 음난하였고 빈관어사로 만조정기만이 해지하고 여왕의 간신폐혜가 컸다 |
3222 |
889 |
|
3 |
33 |
국내는 흉년기근, 선생은 국운회복에 노력 |
3223 |
890 |
|
4 |
34 |
봉산태수로 부임, 왕명으로 랑혜화상비문 작성 |
3226 |
8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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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37 |
서산태수 재임중 |
3227 |
894 |
|
8 |
38 |
시무십여조 상서, 제6품직 아찬에 임명(민간최고작임) |
3228 |
895 |
|
9 |
39 |
해인사 묘길상차비문 작성, 여왕하야 |
3231 |
898 |
효공 |
2 |
42 |
해인사 결계장기작성 |
3233 |
900 |
|
4 |
44 |
벼슬버리고 막대기 집고 유랑떠남.최후 가야산시대 不知 |
토 황소격문
광명 2년 7월 8일에 제도 공검교태위 아무는 황소에게 알린다. 무릇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행하는 것을 도리라하고 위험한 때를 당하는 것을 권이라 한다.
지혜있는 이는 시기에 순응하는 데서 성공하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스리는 데서 파하는 법이다
비록 백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은 기약하기 어려우나 모든 일은 마음으로서 그 옳고 그른 것을 이루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 왕사로 말하면은 덕을 앞세우고 죽이는 것을 뒤로한다. 앞으로 상경을 수복하고 큰 선의를 펴고자 하여 삼가 임금의 분부를 받들고 간사한 것들을 치우려 한다. 너는 본시 먼 시골 백성으로 갑자기 억센 도적이 되어 우연히 시세를 타고 감히 강산을 어지럽게 하였다. 드디어 불칙한 마음을 품고 높은 자리를 노려 보며 도성을 침노하고 궁궐을 더럽혔으니 죄가 이미 하늘에 닿을 만큼 극도로 되어서 반드시 여지없는 태망을 당하고 말 것이다. 애닳다 당우시대로부터 내려오면서 묘와 호 따위가 복종하지 아니하였은 즉 양심없는 무리와 충의없는 것들이란 바로 너희들을 가리킨다. 어느 시대인들 없겠느냐, 멀리로는 유요와 왕돈이 진나라를 였보았고 가까이는 녹산과 주사가 황가를 시끄럽게 하였다. 그들은 모두 손에 막강한 병권을 쥐었었고 또한 몸이 송요한 지위에 있어서 호령만 떨어지면 우뢰와 번개가 치닫듯 요란하였고 시끄럽게 떠들면 안개와 연기가 자욱하듯 하였지만 잠깐동안 못된 것을 하다가 필경에는 그 씨조차 섬멸을 당하였다.
햇빛이 활짝 퍼졌으나 어찌 요망한 기운을 그대로 두겠으며, 하늘 그물이 높이 쳐졌으니 나쁜 족속들은 반드시 제거되고 말 것이다. 하물며 너는 평민 출신으로 농촌에서 일어나 불찌르고 겁탈하는 것을 짓으로 살상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여 헤아릴 수 없는 큰 죄만 있을 뿐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마한 착함은 없으니 천하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속의 귀신까지도 가만히 죽이려고 의논하였을 것이니,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지만 넋은 벌써 빠졌을 것이다. 무릇 사람의 일이지만 제가 자신을 아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니 너는 자세히 듣거라. 요즈음 우리나라에서는 더러운 것을 용납하는 덕이 깊고 결점을 따지지 않는 은혜가 지중하여 너에게 병권을 주고 또 지방을 맡겼거늘 오히려 짐새와 같은 독심을 품고 올빼미와 같은 흉악한 소리를 거두지 아니하여 움직이면 사람을 물어 뜯고 하는 것이 개가 주인을 짖는 격으로 필경에는 임금의 덕화를 배반하고 궁궐을 침략하여 공후들은 험한 길을 달아나게 되고야 가는 먼 지방으로 행차하시게 되었거늘 일찌감치 덕의에 돌아올 줄 모르고 다만 흉악한 짓만 늘어가니 아야말로 임금께서는 너에게 죄를 용서해 준 은혜가 있고 너는 국가에 은혜를 저버린 죄가 있을 뿐이니 반드시 머지않아 죽고 말 것인데 어찌 하늘을 무서워 하지 않느냐. 하물며 주나라 솥은 물어 볼 것이 아니요 한나라 궁궐은 어찌 네가 머무를 곳이랴. 너의 생각은 끝내 어찌하려는 것이냐? 너는 듣지 못하였느냐! 도덕경에 회오리 바람은 하루아침을 가지 못하고 소낙비는 온 종일 갈 수 없다고 하였으니 하늘의 조화도 오히려 오래가지 못하구나. 더구나 사람의 하는 일이야 또 자못하겠느냐. 춘추전에 하늘이 아직 나쁜자를 놓아 두어 복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 죄악을 짖기를 기다려 벌을 내리려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너는 간사함을 감추고 흉악함을 숨겨서 죄악이 쌓이고 앙화가 가득하였음에도 위험한 것을 편안히 여기고 미혹되어 돌이킬 줄 모르니 이른바 제비가 막에다 집짓고 막이 불타오르는데도 제멋데로 날아드는 것과 물고기가 솥 속에서 너울거리지만 바로 삶아지는 꼴을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는 뛰어난 군략을 모으고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용맹스런 장수는 구름처럼 날아들고 날랜 군사들은 비 쏟아 지듯 모여들어 높이 휘날리는 깃발은 초새의 바람을 애워싸고 총총이 들어찬 함성은 오강의 물길을 막아 끊었다. 진나라도 태위처럼 적을 처부수는데 날래고 순한 양처럼 엄숙함이 신이라 불릴만하여 널리 팔방을 돌아 보고 거침없이 만리를 항행할 수 있으리 만치 치열한 불꽃을 놓아 기러기 털을 태우고 태산을 높이 들어 새알을 짓누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랴. 금신이 계절을
맡았고 수백이 우리 군사를 환영하는 이때 가을 바람은 숙살하는 위엄을 도와주고 새벽이슬은 혼잡한 기운을 씻어주니 파도는 이미 쉬고 도로는 바로 통하였다. 석두성에 뱃줄을 놓으니 손권이 후군이 되었고 현산이 돛을 내리니 두예가 앞잡이가 되었다. 앞으로 서울을 수복하기는 한 달이면 되겠지만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하늘의 깊으신 덕화요, 법을 늦추고 은혜를 드리는 것은 국가에 좋은 제도이다. 국가의 도적을 토벌하는 데는 사적인 원한을 생각 안해야 하고 어두운 길에 헤메는 이를 깨우쳐 주는 데는 바른 말이라야 하는 법이다. 그러므로 나의 한장 글을 날려서 너의 급한 사정을 풀어 주려는 바이니 미련한 고집을 부리지 말고 일찍이 기회를 보아 자신의 선후책을 세우고 과거의 잘못을 고치도록 하라. 만일 땅을 떼야 받어 나라를 맡고가 업을 계승하여서 몸과 머리가 두동강이 되는 화를 면하고 뛰어난 공명을 얻기 원한다면 몹쓸 도당들의 말을 믿지말고 오직 후손에게 영화를 유전해 줄 것만 유의하라. 이는 아녀자와 아는체 할바가 아니오 실로 대장부의 할일인 만큼 그간 부를 속히 회복할 것이요 쓸데없는 의심을 두지 말라. 나는 명령은 하늘을 우러러 받았고 믿음은 맑은 물을 두어 맹세하였은즉 한번 말이 떨어지면 반드시 메아리처럼 응할 것이 매운 해가 더 많을 것이요. 원망이 짙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미쳐서 날뛰는 도당들에 견제되어 줄 한 잠을 깨지 못하고 마치 당랑이 수레바퀴를 항거하듯이 어리석은 고집만 부리다가는 곰을 치고 표범을 잡는 우리 군사가 한번 휘둘러 쳐부수므로써 까마귀 떼처럼 질서없고 솔개처럼 날뛰던 무리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칠 것이며 너의 몸둥이는 도끼날에 기름이 되고 뼈다귀는 수레밑에 가루가 될 것이며 처자는 잡혀죽고 권속들은 배임을 당할 것이다. 옛날 동탁처럼 배를 불태울 그 때가 되어서는 사슴처름 물어 뜯는 후회가 있을지라고 시기는 이미 늦을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퇴진을 참작하고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라. 배반하다가 멸망하기보다 어찌 귀순하여 영화롭게 되는 것이 낳지 않겠느냐. 다만 너의 소망은 이루게 될 것이니 장부의 할일을 택하여 표변하기를 기할 것이요, 못난이의 소견을 고집하여 여우처럼 의심만 품지 말라.
檄黃巢書
廣明二年七月八日 諸道都統檢校太尉某官 告黃巢 夫守正修常曰道臨危制變曰權
智者成之於順時 愚者敗之於逆理 然則雖百年繫命
生死難期 而萬事主心 是非可辨 今我以王師則有征無戰 軍政則先惠後誅
將期剋復上京 固且敷陳大信 敬承嘉諭 用戢奸謀 且汝素是遐甿
驟爲勍敵 偶因乘勢 輒敢亂常 遂乃包藏禍心 竊弄神器 侵凌城闕
穢黷宮闈 旣當罪極滔天 必見敗深遁地 噫 唐虞已降 苗扈弗賓
無良無賴之徒 不義不忠之輩 爾曹所作 何代而無 遠則有劉曜王敦覬覦晉室
近則有祿山朱 吠噪皇家 彼皆或手握强兵 或身居重任叱叱則雷奔電走
喧呼則霧塞烟橫 然猶暫逞奸圖 終殲醜類 日輪闊輾
豈縱妖氛 天綱高懸 必除凶族 況汝出自閭閻之末 起於隴畝之間以焚劫爲良謀
以殺傷爲急務 有大 可以擢髮 無小善可以贖身 不唯天下之人皆思顯戮
仰亦地中之鬼已議陰誅 縱饒假氣遊魂 早合亡神奪魄
凡爲人事 莫若自知 吾不妄言 汝須審聽 比者我國家德深含垢
恩重棄瑕 授爾節旄 寄爾方鎭 爾猶自懷鴆毒 不斂梟聲 動則齧人
行唯吠主 乃至身負玄化 兵纏紫微 公侯犇竄危途 警蹕則巡遊遠地
不能早歸德義 但養頑凶 斯則聖上於汝有赦罪之恩 汝則於國有辜恩之罪
必當死亡無日 何不畏懼于天 況周鼎非發問之端 漢宮豈偸安之所
不知爾意終欲奚爲 汝不聽乎 道德經云 飄風不終朝 驟雨不終日
天地尙不能久 而況於人乎 又不聽乎 春秋傳曰 天之假助不善
非祚之也 厚其凶惡而降之罰 公汝藏奸匿暴 惡積禍盈 危以自安迷以不復
所謂燕巢幕上 漫恣騫飛 魚戲鼎中 卽看燋爛 我緝熙雄略糺合諸軍
猛將雲飛 勇士雨集 高旌大旆 圍將楚塞之風 戰艦樓船
塞斷吳江之浪 陶太尉銳於破敵 楊司空嚴可稱神 旁眺八維 橫行萬里
旣謂廣張烈火 爇彼鴻毛 何殊高擧泰山 壓其鳥卵 卽日金神御節水伯迎師
商風助肅殺之威 晨露滌昏煩之氣 波濤旣息 道路卽通 當解纜於石頭
孫權後殿 佇落帆於峴首 杜預前驅 收復京都 剋期旬朔但以好生惡殺
上帝深仁 屈法申恩 大朝令典 討官賊者不懷私忿 諭迷途者固在直言
飛吾折簡之詞 解爾倒懸之急 汝其無成膠柱 早學見機
善自爲謀 過而能改 若願分茅列土 開國承家 免身首之橫分
得功名之卓立 無取信於面友 可傳榮於耳孫 此非兒女子所知 實乃大丈夫之事
早須相報 無用見疑 我命戴皇天 信資白水 必須言發響應
不可恩多怨深 或若狂走所牽 酣眠未寤 猶將拒轍 固欲守株 則乃批熊拉豹之師
一麾撲滅 烏合鴟張之衆 四散分飛 身爲齊斧之膏
骨作戎車之粉 妻兒被戮 宗族見誅 想當燃腹之時 必恐噬臍不及 爾須酌量進退
分別否臧 與其叛而滅亡 曷若順而榮貴 但所望者 必能致之
勉尋壯士之規 立期豹變 無執愚夫之慮 坐守狐疑 某告
秋夜雨中
秋風唯苦吟 쓸쓸한 가을 바람 애닯은 노래
世路少知音 세상엔 날 알아 주는 이 없고
窓外三更雨 깊은 밤 창밖에는 비 듣는 소리
燈前萬里心 등불 아랜 만리 먼 길 외로운 마음. ]
최치원의「추야우중(秋夜雨中)」
秋風惟苦吟 가을 바람만 애처로이 부는데
世路少知音 세상 길엔 내 마음 아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한밤중 창밖에는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불 앞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秋夜雨中」(비 내리는 가을 밤)
화자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을 자연물[秋風, 三更雨]에 의탁해서 효율적으로 잘 표현해 내고 있는 가작이다. 낙엽이 지는 가을, 마른 나뭇가지를 스치는 바람소리는 스산하기 이를 데 없다. 그것도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한밤중이라니….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知音]는 아무도 없는 세상, 밤 깊도록 잠자리에 들지 못하고 등불을 밝히고 있다. 등불을 대하고 앉아 있으려니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며 지나간다. 그 생각을 ‘만리심(萬里心’이라고 했다. 만리심이란 무엇인가? 이 만리심이 이 작품의 시안(詩眼)이며 요체(要諦)라고 할 수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 857~?)은 신라 말의 유학자이며 저명한 문인인 동시에 한국 도교의 비조(鼻祖)로 알려진 분이다. 육두품(六頭品)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시절,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 유학의 길에 오른다. 그는 젊은 나이에 외국인을 상대로 한 과거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여 잠시 지방관으로 근무한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세력가였던 절도사 고변(高騈 ; 821~887)의 휘하로 들어가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된다. 마침 황소(黃巢)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그의 문명을 천하에 떨친다. 그러나 조국에 돌아와 청운의 뜻을 펼쳐 보겠다는 꿈이 어찌 없었겠는가. 그래서 29세의 청년 최치원은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귀국하게 되고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의 관직을 받는다. 그러나 진성여왕의 난정(亂政)으로 말미암아 견훤 궁예 등의 반란 세력이 창궐하여 난세에 접한다. 이 난국을 바로잡기 위해 시무책(時務策)을 임금께 올리나 시행되지 못하고 주위의 질시하는 무리들에게 밀려 벼슬길을 떠나고 만다. 이후 현실을 버리고 시문을 즐기며 명승지를 유람하다가 만년에 가야산에 들어 은거한다.
「秋夜雨中」의 제작 연대가 분명히 밝혀져 있지는 않다. 어떤 이는 외로운 객지 생활을 하던 당나라 유학 시절의 작품으로 보려고 한다. 그래서 ‘만리심’을 고국을 향해 달리는 향수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이 작품에 서려 있는 시풍(詩風)으로 보았을 때, 29세 미만의 청년 소작으로 보기에는 어딘가 미진함이 없지 않다. ‘토황소격문’을 썼던 패기 넘치는 청년기에 이런 작품이 나왔을 것 같지가 않다. 가을 비바람 소리에 잠 못 든 젊은이를 상상하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다. 이 작품에는 작자의 연륜이 서려 있어 보인다. 생에 대한 혹은 세상에 대한 깊은 고뇌가 엿보인다. 따라서 이 작품은 청년기가 아닌 장년기 이후의 작품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마도 가야산에 은거해 지내던 만년의 작품이 아닌가 추정된다. 또한 이 작품이 당나라 시절의 문집인『계원필경(桂苑筆耕)』에 수록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하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 ‘만리심’은 무엇인가? 무엇을 향한 만리심이란 말인가?
고국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오히려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당나라를 향한 그리움이란 말인가?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을 되돌아보는 연민의 정일까? 만리심에는 과거를 향한 개인적인 연민의 정도 없지 않겠지만 그보다는 인간 존재의 고뇌가 서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운선생문집』에는 ‘萬里心’이 ‘萬古心’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공간적 개념이 주도하고, 후자는 시간적 개념이 주도하는 시어다. 그런데 역사에 집착하는 ‘萬古’의 개념과는 달리 ‘萬里’는 시공을 아우르는 포괄성을 갖는다. 말하자면 ‘만리심’은 천고의 역사와 우주 공간을 오르내리는 아스라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유구한 역사 위에 놓인 짧은 인생, 무한한 우주를 바라다보는 왜소한 인간…, 만리심에는 이처럼 무궁한 시공(時空)에 대한 유한자 인간의 삭연(索然)함이 담겨 있다. ‘고운(孤雲)’이라는 아호(雅號)의 의미를 새삼 떠오르게 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기구(起句)를 ‘추풍에도 오직 애써 시만 읊을 뿐’으로 해석하는 이도 있다. ‘음(吟)’은 원래 시를 읊조리는 것이니 화자를 주체로 삼은 것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해석하면 결구(結句)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시를 읊조리면서 등불 앞에서 ‘만리심’을 자아낸다는 것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동적인 화자보다는 정적인 화자가 어울린다. 따라서 ‘吟’의 주체를 화자로 보기보다는 ‘추풍’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소소한 가을 바람 소리가 괴로히 시를 읊듯 들리는 정황이다.
승구(承句)의 ‘知音’은『열자(列子)』에서 유래된 말이다. 주지하다시피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그의 벗 종자기(鐘子期)가 잘 알아주었는데,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자신의 소리를 아는 이가 없다 하여 거문고 줄을 끊고 말았다는 고사에서 생겨난 말이다. 지음은 마음이 서로 통하는 친한 벗 곧 지기(知己)를 뜻한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굳이 지기로 한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생각과 포부를 이해해 주는 현명한 인물쯤으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 같다.
孤雲 崔致遠先生을 모신 書院·影堂·祠宇
우리나라에 비행기란게 처음 등장한 것은 미국에서 라이트형제가
비행에 성공한 해인 1903년으로부터 10년 후인 1913년에 당시 일본 해군장교가
용산의 조선군 연병장에서 처음으로 비행을 한 것이 최초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민간항공기가 정기운항을 처음 시작한 것은
1929년도에 일본인들이 후쿠오카 - 대구 - 서울 - 평양 - 신의주 구간을
운행한 것이 처음이며 한국인이 처음 정기운항을 시작한 노선은
1936년도에 조선항공사업사가 서울 - 이리간 노선을 운항한 것이 처음입니다.
1948년도에 '대한국민항공사'가 설립되어 서울-부산간 운항을 하였으며
이듬해인 1949년도에는 서울-강릉, 서울-광주-제주, 서울-옹진 구간을 운항하였습니다.
6.25 전쟁 직후인 1953년도에는 국제선항공기인 DC-4기종을 도입
서울-홍콩구간을 운항하였으며 1954년도에는 서울-대만-홍콩 구간을 운항하였습니다.
1962년도에는 대한국민항공사가 적자로 문을 닫게 되어
같은 해에 국영항공사인 '대한항공공사'가 설립되어 1963년부터
서울-오사카, 부산-후쿠오카, 서울-동경 구간을 운항하였습니다.
대한항공공사는 1969년에 한진상사에 불하되어 민영화가 되었으며
오늘날의 '대한항공'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은 1988년도에 시작하였습니다.
명칭 |
창건년대 |
배향자 |
주소지 |
제향일 |
남악서원 |
1968 |
문창후· 설 총· 김유신 |
경남 진양군 금곡면 금곡리 |
음 3월 16일 |
무성서원 |
1615 |
문창후· 신 잠· 정극인 |
전북 정읍군 칠보면 무성리 원촌 |
음 2월, 8월 |
문창서원 文昌書院 |
1969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전북 옥구군 옥구읍 읍내리 상평 全北 沃溝郡 沃溝邑 邑內里 上坪 |
음 10월 3일 |
백연서원 栢淵書院 |
1670 | 문창후·김종직 文昌侯·金宗直 |
경남 함양군 함양읍 백연리 慶南 咸陽郡 咸陽邑 栢淵里 |
|
벽성서원 碧城書院 |
1965 |
문창후·김유신· 김 보 |
전북 김제읍 교동 全北 金堤邑 校洞 |
|
서악서원 西岳書院 |
1561 | 문창후· 설 총· 김유신 文昌侯· 薛 聰· 金庾信 |
경북 경주시 서악동 慶北 慶州市 西岳洞 |
음 2월 8월 中丁日 |
염의서원 廉義書院 |
1685 | 문창후·고경명·고용현 文昌侯·高敬命·高用賢 |
전북 옥구군 옥산면 당북리 한림동 全北 沃溝郡 玉山面 堂北里 翰林洞 |
음 9월 中丁 |
용강서원 龍崗書院 |
1977 |
문창후 영정文昌侯 影幀 |
경북 안동시 용상동 산 79-2 慶北 安東市 龍上洞 山 79-2 |
매년 동지일 |
학남서원 鶴南書院 |
1916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남 청도군 각남면 일곡리 慶南 淸道郡 角南面 日谷里 |
음 2월, 8월 10일 |
대곡영당 大谷影堂 |
1971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대구광역시 남구 대곡동 大邱廣域市 南區 大谷洞 |
음 3월 10일 |
두곡영당 斗谷影堂 |
1846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남 마산시 두척동 두곡 慶南 馬山市 斗尺洞 斗谷 |
양 4월 18일 |
아산영당 鵝山影堂 |
1888 | 문창후· 익 현 영정 文昌侯· 益 鉉 影幀 |
경북 울진군 울진읍 명도리 慶北 蔚珍郡 蔚珍邑 明道里 |
음 10월10일 |
지산영당 芝山影堂 |
1737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전남 광산군 대촌면 양과리 全南 光山郡 大村面 良瓜里 |
음 9월 9일 |
금 산 사 金 山 祠 |
1931 | 문창후·설 총·김유신 文昌侯·薛 聰·金庾信 |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창곡리 京畿道 華城郡 八灘面 昌谷里 |
음 2월, 8월 中丁 |
금 운 사 錦 雲 祠 |
1970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북 영덕군 강구면 금호리 慶北 盈德郡 江口面 錦湖里 |
음 3월 10일 |
단 동 사 丹 洞 祠 |
1949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전북 익산군 웅포면 웅포리 全北 益山郡 熊浦面 熊浦里 |
음 2월, 8월 中丁 |
도 충 사 道 忠 祠 |
1907 | 문창후· 청· 몽 량 영정 文昌侯· 淸· 夢 亮 影幀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원사리 야인 忠南 舒川郡 韓山面 院山里 也印 |
음 3월 15일 |
부 성 사 富 城 祠 |
1920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충남 서산군 지곡면 산성리 忠南 瑞山郡 池谷面 山城里 |
음 2월, 8일 中丁 |
운 암 사 雲 岩 祠 |
1923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남 하동군 양보면 운암리 慶南 河東郡 良甫面 雲岩里 |
음 2월 10일 |
지 산 사 芝 山 祠 |
1924 | 문창후· 익 현 영정 文昌侯· 益 鉉 影幀 |
전북 순창군 인계면 지산리 全北 淳昌郡 仁溪面 芝山里 |
음 3월 20일 |
청 성 사 淸 城 祠 |
1768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京畿道 抱川郡 新北面 加采里 |
음 9월 15일 |
상 서 장 上 書 莊 |
1936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慶北 慶州市 仁旺洞 |
양 4월 16일 |
구 회 당 九 會 堂 |
1755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동촌) 大邱廣域市 洞區 道洞(東村) |
음 3월 3일 |
학 사 당 學 士 堂 |
1940 | 문창후 영정 文昌侯 影幀 |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홍류동 慶南 陜川郡 伽倻面 緇仁里 紅流洞 |
한 식 |
옥 산 원 玉 山 院 |
1929 | 문창후·김용니·두정란 文昌侯·金用泥·杜廷蘭 김 완· 전영방·강진문 金 浣· 田永芳·姜進文 강진백·김경신·김 업 姜進伯·金景信·金 嶪 김여생·신석보·신대욱 金麗生·申碩輔·申大旭 두안복·문창현 杜安復·文昌炫 |
전북 옥구군 옥구읍 읍내리 상평 全北 沃溝郡 沃溝邑 邑內里 上坪 | 음 9월 上丁 |
현 충 단 賢 忠 壇 |
1764 | 문창후·조태채·이건명 文昌侯·趙泰采·李健命 최익현·임병찬 崔益鉉·林炳讚 |
전북 옥구군 옥구읍 읍내리 상평 全北 沃溝郡 沃溝邑 邑內里 上坪 |
음 9월 上丁 |
해 운 대 海 雲 臺 |
1971 | 문창후 동상 文昌侯 銅像 |
부산시 동래구 동백섬 釜山市 東萊區 冬栢島 |
양 4월 17일 |
최치원기념관 崔致遠紀念館 |
2007 | 문창후 옥 조각상 文昌侯 玉 彫刻像 |
중국 양주시 당성유적지 내中國 楊州市 唐城遺蹟地내내 |
양 10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