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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지음 조선시대사 2(미출간)
4장 조선 후기 사회· 경제적 변동
3. 농촌 경제의 변화
이앙법과 견종법의 확산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 농민들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농토를 다시 개간하고, 수리 시설을 수리 신축했다. 현종 때는 각 도의 제방과 수리(水利)를 맡아보던 관아인 제언사를 두었고, 정조 때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을 반포하여 수리시설을 개인이 독점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전문(前文)과 11조항의 절목(節目: 법률이나 규정 등의 낱낱의 조항이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는 「제언절목」은 농업용수 확보를 위해 제정한 제언 규정이다. ‘제언(堤堰)’은 농업용수를 저수하기 위한 제방과 방죽을 뜻한다. 18세기 말에는 전국에 크고 작은 저수지가 수 천 개 소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농민들은 여러 가지 농업 기술을 개발하여 농기구와 논밭에 거름을 주는 방법인 시비법을 개량했다. 특히 이모작(二毛作: 그루갈이)과 적은 노동력으로 광작(廣作: 경작지를 확대시켜 비교적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것을 말함)이 가능해졌다. 조선후기 사회변동의 뚜렷한 징표는 광작농의 등장이었다.
조선 후기에 광작농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토지매매를 중심으로 토지소유 구조가 변화하고 있었고, 나아가 이앙법 등 새로운 농법이 보급됨에 따라 농업 경영상의 변동이 야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회변동은 17세기 이후의 농법발달이 당시의 자연 제약을 한 단계 극복함으로써 나타난 결과였다. 그렇지만 그것은 단순히 농업기술상의 발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생산력을 사회적으로 적극 이용하면서 그에 기초한 사회적 생산력을 제고하는 방향으로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즉 그러한 방향은 단위 면적당 생산력을 확보하기 위해 집약화를 통해 나타나기도 하지만 광작을 생각하는 농민층도 나타나고 있었다.
―최윤오, 「광작과 지주제」.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3·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69.
광작은 새로운 농업 기술인 이앙법이 보급되면서 더욱 확대되었다. 볍씨를 바로 논에 흩어 뿌리지 않고, 못자리의 모를 본논에 옮겨 심는 방법인 이앙법(移秧法: 모내기법)의 보급으로 가을에 벼를 수확한 논에다가 보리를 심어서 한 곳에 두 번의 농사를 짓게 되었고, 논의 잡초를 제거하는 김매기 횟수가 줄어들어 일손을 덜게 되었다. 그리하여 농민 한 사람이 농사지을 수 있는 면적이 늘어났고,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한편 논에서 보리농사를 짓는 것은 지주에게 소작료를 무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소작농들이 크게 선호하였다. 세종 11년(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이앙법은 물이 충분하지 않은 곳에서는 농민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재배 방법이라고 서술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수리 시설이 발달하지 않은 조선 시대 초기에는 모내기할 때 비가 오지 않으면 한 해 농사를 망치기 때문에 이앙법의 보급이 보잘것없이 아주 작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앙법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농민들의 소득이 증가했다. 하지만 광작을 하는 농가들이 경작지를 더욱 확대해가자, 자기 땅에 자기가 직접 짓는 농민인 자작농(自作農)이나 경작을 담당하는 작인층(作人層)들이 경작지를 확보하지 못하게 되어 몰락해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경작지의 불균형 문제를 불러온 광작이 사회문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경영부농층(經營富農層)은 광작을 경영하는데 고용노동(雇傭勞動)을 확보하려 많은 노력을 했다. 농사 지을 땅을 가지거나 빌리지 못한 몰락 농민들은 임노동층(賃勞動層)으로서 향촌(鄕村)에 짧은 기간 동안 고용되어 농삿일을 했다.
興甫(흥보)가 품을 팔 제, 매우 부지런히 서둘러 上平下平(상평하평: 높은 곳에 있는 논과 낮은 곳에 있는 논) 김매기 遠山近山(원산근산) 柴草(시초: 땔나무로 쓰는 풀) 베기, 먹고 닷 돈 받고 장 서두리(장날이면 뒤에서 일을 봐주는 일), 十里(십리)에 돈 반[한 돈에 오푼을 더한 돈] 乘轎(승교: 가마) 메기, 新産(신산: 새로 난) 石魚(석어: 조기) 밤짐지기, 시(時)매긴[시간을 서로 정하는 것] 公事(공사: 관아의 사무) 急走(급주) 가기, 房(방) 뜯는데 助役(조역)군, 담 쌓는데 자갈 줍기, 鳳山(봉산: 황해도 군 이름) 가서 모내기 품팔기, 大丘令(대구령: 대구 약령)에 약태전(藥駄傳: 먼 곳으로 옮겨질 약재 짐을 지는 이), 초상(初喪) 난 집 부고(訃告) 전(傳)키, 출상(出喪)할 제 명정(銘旌: 죽은 사람의 품계, 관직, 성씨를 기록한 기) 들기, 공관(空官: 벼슬자리가 빔) 되면 상직(上直: 숙직)하기, 대장간에 풀무불기, 멋있는 기생(妓生) 아씨 타관애부(他官愛夫) 편지(便紙) 전(傳)키, 부잣집 어린 신랑(新郞) 장가 들 제 안부(雁夫: 기럭아비) 서기, 들병장수 술짐 지기, 초라니 판에 무투놓기(나무 놓기), 아무리 벌어도 시골서는 할 수 없다. 서울로 올라가서 군치리집(개고기 안주에 술 파는 집) 종노릇 하다가 燒酒(소주) 가마 눌려 놓고 빰 맞고 쫓겨와서 매품(대신 매를 맞고 삯을 받는 일) 팔러 병영(兵營)에 갔다가는 비교(차례) 밀리어서 태장(笞杖: 태형) 한 개 못 맞고서 빈 손 쥐고 돌아오니 興甫(흥보) 아내가 품을 판다.
五六月(오뉴월) 밭매기와 九十月(구시월) 김장하기, 한 말(斗) 받고 벼 훑기와 입만 먹고 방아 찧기, 삼(麻) 삶기, 보(洑) 막기와 물레질, 베짜기와 머슴의 헌 옷 짓기, 상고[喪故: 상사(喪事)]에 빨래하기, 혼(婚)장가에 진일하기(밥짓기), 菜蔬(채소)밭에 오줌 주기, 燒酒(소주) 고고 장 달이기, 물방아에 쌀 까불기, 밀 맷돌 갈 제 집어 넣기, 보리 갈 제 망웃(밑거름) 놓기, 못자리 때 망초(밑거름풀) 뜯기, 아이 낳고 첫 국밥을 제 손으로 해 먹고, 運氣(운기: 기운)를 放通(방통)하되 절구질로 땀을 내니, 한 때도 쉬지 않고 밤낮으로 벌어도 늘 굶는구나.
―강한영 교주역, 「박타령」, 『신재효 판소리사설집』, 민중서관, 1974, pp.351∼353.
「박타령」에 묘사된 품팔이 일은 다양하다. 김매기, 나무베기, 짐지기, 모내기 품팔기, 풀무불기, 자갈 줍기 등은 이 시기에 품팔이 일이 보편적이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박타령」의 핍진한 묘사를 통해 몰락농민들이 향촌에서 고용노동을 하면서 입에 풀칠을 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광작의 확대 등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는 농민층의 분화를 촉발시켰다. 농민층은 부농(富農)과 빈농(貧農)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농민층 가운데 빈농들은 자기 땅이나 소작지에 농사를 지어도 가계(家計) 유지가 어려워 자기 땅이 없는 무전농민(無田農民)들과 마찬가지로 ‘일고(日雇)’ 또는 ‘날품팔이’라고 하는 임노동(賃勞動)에 뛰어들어 소득을 얻고자 했다.
무전농민들은 농촌에서 안주할 수 없었으므로 고향을 떠나야 했다. 농토는 고용의 기회를 별로 주지 않았다. 이에 많은 농민들은 생산수단인 토지를 포기하고, 그리하여 농민으로서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버리고 유랑의 길을 나섰다. 그들은 고용시장을 찾아 나섰다. 이제 그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이 생계의 수단임을 알고 자유로운 임노동의 길을 택했다. 이에 상응하여 비록 제한적이지만 도시·광산·포구 등에는 노동시장이 전개되고 있었다. 도시에서는 봉건정부가 토목공사, 물건만들기, 잡일 등으로 일을 시키면서 품삯을 주고 있었고,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심부름이나 짐나르기 등 허드렛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때로는 틈을 타서 장사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되고 있었다.
―최완기, 「임노동의 발생」.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33·조선후기의 경제』, 국사편찬위원회(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140.
고향 떠난 무전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나섰다. 곧 그들은새로운 고용관계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임용위업지류(賃傭爲業之類), 곧 일정 액수의 품삯을 받고 남의 일을 해주는 품팔이로서 직업을 삼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었다.
농학서의 편찬
신속이 효종 6년(1665년) 공주 목사로 있을 때 『농사직설』을 구하기 어려운 것을 안타깝게 여겨 이앙법과 견종법 기술 등 다양한 농사법을 더하고, 『농사직설』· 『금양잡록』· 『사시찬요초』 ·『구황촬요』를 합치거나 덧붙여서 종합 농학서인 『농가집성』을 편찬했다. 『농가집성』은 지주제를 축으로 하여 지주·대농 중심의 농업경영만이 아니라 소농 중심의 농업생산에도 유의하고 있던 조선 정부의 농업 정책이 잘 반영되어 있는 책이다.
견종법(畎種法)은 밭을 견(畎: 밭고랑)과 무(畝: 밭이랑)로 다스리고 종자를 밭고랑(이랑과 이랑 사이에 있는 골)에 뿌리는 방법이다. 견종법으로 재배한 작물은 보리· 밀· 호밀· 귀리와 같은 밭작물이었다. 17세기 이후에 농민들에게 퍼지기 시작했던 견종법은 조선 후기 집약적 농업의 발달과 농업 생산력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농민들은 논농사를 지을 때는 이앙법을 주로 사용했고, 밭농사를 지을 때는 견종법을 주로 사용했다.
이앙법과 견종법이 확산되면서 지주들은 소작을 주는 대신 노비를 동원해 농사를 짓는 등 농업 경영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임원십육지)』에서 농업기술· 경영의 이론들을 종합하여 임노동(賃勞動: 자기의 노동력을 지주 등에게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노동 형태) 하의 지주제를 체계화 했다.
상품 작물의 재배의 확산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담배· 인삼 같은 상품 작물을 재배하여 소득을 올리는 농민들이 증가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대개 그 종류는 9가지 곡식 뿐만은 아니다. 모시⋅삼⋅참외⋅오이와 온갖 채소, 온갖 약초를 심어 농사를 잘 지으면 한 이랑 밭에서 얻는 이익은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서울 근교와 각 지방의 대도시 주변의 파밭· 마늘밭· 배추밭· 오이밭에서는 10묘(4두락)의 땅으로 수만 전(수백 냥)의 수입을 올린다. 서북 지방의 담배밭, 관북 지방의 삼밭, 한산의 모시밭, 전주의 생강밭, 강진의 고구마밭, 황주의 지황밭에서는 상상등전(上上等田)의 논에서 나는 수확보다 10배에 이르는 이익을 얻는다. 그리고 근년에는 인삼 또한 밭에 심어서 그 남는 이익이 천만 전에 상당하다고 하니 이를 토지의 등급으로 말할 수 없다.
-정약용. 『경세유표』 8권, 지관수제, 전제 11
이어서 정약용은 약재로 심는 홍화와 대청은 그 이익이 아주 많고, 목화밭에서 나는 수입이 오곡에서 나는 이익의 배가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밭에 심는 작물로 산도, 메조, 기장, 피, 촉서, 대두, 소두, 녹두, 대맥(보리), 소맥, 교맥(메밀), 영당맥, 한피, 호마(참깨), 청소(들깨),옥촉서, 의이 등 17종류이고 논에 물을 대어 심는 벼인 수도(水稻)를 합하면 18종류이며, 청소(들깨) 이상 15종류는 모두 식용으로, 일상 양식으로 하며 팔아서 재물이나 이익으로 만든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무렵 한양의 도시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면서 도성(都城) 주변에서 농민들이 온갖 푸성귀와 나물. 채소를 밭에서 가꾸어 그것을 팔아 이익을 얻는 이야기가 문학 작품에도 묘사되어 있다.
왕십리(枉十里)에서 무[蘿蔔나복], 살곶이[箭串전곶]에서 순무[菁청], 석교(石郊)에서 가지[茄窳가유]·오이[水瓠수호]·수박[胡瓠호호], 연희궁(延禧宮)에서 고추[苦椒고초]·마늘[蒜산]·부추[韭구]·파[葱총]·해채(薤菜: 여름에 비늘줄기를 심어 다음해 여름에 수확하여 소금과 식초에 절여서 먹음), 청파에서 미나리[水芹수근], 이태인(利太仁: 이태원)에서 토란(土卵)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밭은 상상전(上上田: 비옥도가 가장 높은 농지)에 심고 모두 엄씨(嚴氏)의 똥을 가져다가 잘 가꾸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엄 행수(嚴行首)는 일 년에 6천 전(錢)을 벌어들이기에 이른다.
- 박지원 『연암집』 별집 예덕선생전
마늘, 파, 호박, 수박 등 농산물을 팔아 벌어들이는 이익이 쌀 보리 같은 곡물을 팔아 벌어들이는 이익이 더 많았기 때문에 농민들은 채소 재배에 힘을 쏟았다. 농민들은 채소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비료로 인분을 활용하였다. 「예덕선생전」에 등장하는 엄행수가 도성 근교 농민들에게 도성에서 모은 인분을 팔아 일 년에 6천 전(錢)을 벌어들이기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는 조선후기에 상업적 근교농업이 활발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 후기 농산물 유통에서 특기할 만한 것은 농민들이 쌀마저도 팔기 위해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농민들은 상품으로서의 미곡(米穀: 쌀)을 생산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그 가운데서나마 그것을 또한 시장성(市場性)을 고려하여 생산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여주(驪州)·이천(利川) 지방(地方)의 미곡(米穀)은 그 상품(上品)의 미질(米質)로 인해서 오늘날까지도 그 성가(聲價)가 높은 바 있는 터이지만, 18세기의 이곳 농민들이 특히 서울에서의 수요(需要)를 목표로 조도(早稻: 올벼)를 생산하여 많은 이득을 보고 있었음은 그 예가 되겠다.
-김용섭, 『증보판 조선후기농업경제사연구』, 일조각, 1995, p.301.
조선후기에 농민들이 상품으로서 미곡(米穀: 쌀)을 생산을 했고, 시장성(市場性)을 고려하여 생산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생산한 미곡을 판매하여 매우 많은 이익을 봤다는 사례를 다음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경기(京畿)는 토지(土地)가 물기가 없고 기름지지 않은데도 백성들이 밀집(密集)하여 살았으며,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수확량이 가장 낮았다. 게다가 농산물을 한성으로 수송(輸送)하기 때문에, 이곳 백성들이 가장 가난하다. 서남은 감[柿시]이 많이 나고, 동북은 배[梨이]· 밤[栗율] ·땔나무[柴木시목] 숯[炭탄]이 많이 난다. 여주(驪州)· 이천(利川) 사이는 여주· 이천 사이에서는 올벼(早稻조도)를 생산하여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
―이익, 『성호사설』 7권 인사문
미곡(米穀: 쌀)의 상품화라고 부를 수 있는 이 현상은 이익이 그의 「생재론(生財論)」에서 “驪州利川之間 種稻先熟 得錢甚多(여주이천지간 종도선숙 득전심다) 여주· 이천 사이에서는 올벼를 생산하여 많은 이득을 보고 있다.”라고 기술한 데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 당시 여주·이천의 농민들이 시장성(市場性)을 고려하여 조도(早稻: 올벼)를 생산했던 것이다.
4.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
공인의 활동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력이 더하여 커지고, 수공업 생산이 활성화되어 상품의 유통이 활발해졌다. 이 무렵 한성을 비롯한 각 지방의 도시에서 공인(貢人)과 사상(私商)이 국내 상업과 대외 무역 활동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했다. 공인은 조선 후기 대동법 실시에 의하여 출현한 어용상인으로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여 납품하였던 공납청부업자이다. 정부는 공인에게 영업을 독점하는 권리를 주거나(영업 독점권), 공가를 높게 책정하거나 공물을 납부하기 전에 미리 지급하기도 했다(예급). 그리고 자금을 빌려주거나 꾸어주기도 했고(자금 대여), 공인의 유재(미납분)를 온통 삭쳐주기도 하는(유재 탕감) 등 많은 혜택을 주었다. 관청에 대한 예속이 강해 폐단도 많았던 공인은 한성의 시전, 지방의 장시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공인은 특정 물품을 대량으로 취급하는 까닭에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하였다.
『중종실록』에 시전상인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신(臣)이 듣기로는 국가에서 쓰는 잡용 물품을 모두 시전(市廛)에서 사들인다 하는데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대체로 국가에서 쓰는 물품은 모두 공안(貢案: 공물의 품목과 수량을 적어놓은 장부)에 그 품목이 정해져 있고, 필요한 경우 모두 이 상인에게서 사들이므로 물품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사(有司: 담당 사무를 맡아보는 관원)가 온전하게 관리하지 않아 물품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시세 보다 낮은 가격으로 많이 시전에서 사들이거나 시전에 없는 물품을 요구므로, 상인들이 매우 고통스러워합니다. 이는 상인들에게 폐해가 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재정에도 큰 지장을 줍니다. 그리고 목장(牧場)의 말과 소의 가죽은 쓰고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조각조각인 가죽을 모두 사다가 쓰니,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납철(臘鐵) 같은 것은 공조(工曹)에 아직 많이 있는데도, 사다가 쓰고 있으니 어찌된 일입니까? 나랏돈을 씀에 있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해진 공물(貢物: 궁중이나 나라에 바치던 물건)의 수량이 많은데도 내년도 공물을 앞당겨 받아쓰고 있습니다. 상감(上監)께서는 비용을 줄이소서.“
집의(執義) 양연(梁淵)이 아뢰었다.
"이 폐단에 대해 호조에서 이미 말한 적이 있었다. 정해진 공물이 회계 문서에 실려 있는데도 쓸 때에는 번번이 모두 사다가 쓰니, 이것은 필시 유사가 온전하게 관리하지 않은 탓이다. 비용을 줄이는 일은 유념하도록 하겠다.“
임금이 말했다.
- 『중종실록』 71권, 중종 26년 6월 5일
위 예문의 ‘이 상인’은 시전 상인을 가리킨다. ‘시전 상인’은 국가로부터 허락받은 상인으로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을 부여받았다. 시전 가운데 육의전은 면포전(면포), 면주전(명주), 어물전(수산물), 지전(한지), 선전(비단), 포전(삼베)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조선 정부는 시전 상인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기도 하였다.
사상의 대두
사상(私商)은 17세기 초부터 한성을 비롯한 각 지방의 도시근교의 농어민이나 소규모 생산자 등이 직접 생산한 채소, 과일, 수공업 제품 등을 자유롭게 판매하면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도시와 그 주변에 사는 소상품생산자와 소상인층, 수공업자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또한 농업 생산력의 발전에 따른 상품화폐 경제의 발전으로 소비자층이 확대되고 농업생산물의 상품화가 진전되어 사상이 급격히 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사상은 사상도고였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매점매석을 일삼으면서 상인자본을 축적하며 성장했다. 18세기 이후 시전상인의 특권적인 상업 체계는 난전(亂廛)이 나타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전안(시전에서 취급하는 상품의 종류와 상인의 주소·성명을 등록한 문서로서 1706년에 실시)에 등록되지 않은 난전들이 한성에서 상업 활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또한 이들은 판매 허가를 받은 상품 이외의 것을 한성에서 판매를 하기도 했다. 난전은 특권을 지닌 시전 상인과 대결하면서 사상도고(私商都賈)의 발달로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난전으로 성장한 계층으로는 한성 및 송도의 부상(富商)⋅도고· 군병(軍兵) · 수공업자 등이 있었다.
이현(배오개) · 칠패(남대문 밖) ·용산· 마포· 서강 등 시장은 송파 · 누원(도봉산 기슭) 등 한성 외곽의 새로운 유통 거점의 성장을 주도했다. 이현 · 칠패 시장이 한성의 가장 큰 상업 중심지의 하나로 발전해나가면서 시전 상인들이 자리잡고 있던 종루와 더불어 한성의 3대 시장으로 성장해 사상(私商)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18세기 전반에 칠패 시장의 난전들이 한성으로 들어오는 어물들을 매점하여 시내 각 처에 판매하는 등 시전 상인의 기득권을 위협할 정도로 어물도매시장으로서의 칠패의 기능은 육의전의 어물전과 치열한 경쟁할 정도로 성장했다.
도고의 활동
이용후생(利用厚生: 편리한 기구를 잘 사용하여 먹고 입는 것을 풍부하게 하며, 생계에 부족함이 없도록 함)의 실학사상이 잘 드러나 있는 ‘허생 이야기’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속에 실려 있는 「옥갑야화(玉匣夜話)」 의 한 토막 이야기이다. 「옥갑야화」의 ‘허생 이야기’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은 ‘도고의 활동상’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허생은 만 냥을 얻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총칭)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가지 않아,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 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몇 해 지나면 나라 안의 사람들이 머리를 싸매지 못할 것이다."
허생은 다시 칼, 호미, 포목 따위를 가지고 제주도에 건너가서 말총을 죄다 사들이면서 말했다.
얼마 가지 않아 과연 망건값이 열 배로 뛰어올랐다.
―박지원, 『열하일기』 「옥갑야화」
도고(都賈)는 원래 특권 상인이던 공인(貢人)들이 공납품 조달을 위해 상품을 사서 예치해두는 창고를 의미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이후 공물주인이나 일반상인들이 차차 독점상인으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상품의 물건 값이 오를 것을 예상하여, 어떤 상품을 한꺼번에 많이 사 두고 되도록 팔지 않으려는 일인 매점매석(買占賣惜)을 통해 이윤의 극대화를 노리던 상행위 또는 그러한 상행위를 하던 상인이나 상인 조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도고상업은 관권과 결탁하여 그것을 배경으로 특권적 독점상업을 한 관상도고(官商都賈)와 큰 자본을 가진 이들이 스스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독점적 도고상업을 영위한 사상도고(私商都賈)로 구분된다.
도고의 폐해
도고는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벼슬아치들을 매수하여 물품을 대량으로 사들여 저장하고, 한성으로 물품이 유입되는 길목에서 물품을 매점해 두었다가 물품의 값이 갑자기 많이 오르면 팔아버려서 큰 이익을 얻기도 했다. 이러한 도고상인은 물품을 소량으로 생산하는 농민이나 수공업자들을 시장에서 유리시키고 물품을 독점적으로 사들였다. 뿐만 아니라 도고는 농장이나 공장을 직접 운영하여 생산자층을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생산권· 유통권· 소비권을 모두 장악하고 매점매석을 일삼는 도고의 폐해가 커지자 정조는 육의전 이외의 시전에 도고권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도고는 인삼 재배 등 농업 생산에 투자하거나, 포목 따위의 물품을 직접 생산하는 공장에 투자하는 등 종전과는 질적으로 다른 상업 활동을 벌였다.
금난전권의 해제와 도고권의 폐지
『정조실록』에 좌의정 채제공이 정조에게 아뢰는 말이 기록되어 있다.
한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고(都賈)가 가장 정도가 지나칩니다. 우리나라의 난전(亂廛)의 법은 오로지 육전(六廛)이 위로 나라의 요구에 맞추어 행동하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혼자서 모두 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요즈음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한의 무리들이 서넛이나 대여섯 사람씩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붙여놓고, 대체로 보아 사람들의 생활 필수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책임지고 맡아 관리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몸이나 손 따위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단단히 묶어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 버리게 됩니다.
-『정조실록』 32권, 정조 15년 1월 25일
계속해서 체제공은 도고의 폐단으로 물건값이 나날이 올라 가격이 3배 또는 5배로 오르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는 “채소나 옹기까지도 가게 이름이 있어서 사사로이 서로 물건을 팔고 살 수가 없음”을 지적하고, “백성들이 음식을 만들 때 소금이 없거나 곤궁한 선비가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일까지 자주 있다.”고 고발하고 있다.
조선 시대 후기에 국역(國役: 국가 운영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노동력을 백성들에게 강제 부과하여 충당하던 방법) 등 각종 부담을 지던 육의전과 시전 상인이 서울 도성 안과 도성 밖 10리의 지역에서 난전을 금지하고, 특정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정부로부터 부여받고 있었다. 이것을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통 질서의 문란을 개혁하기 위해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자유롭게 매매하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마침내 정조 15년(1791년) 채제공의 주창(主唱:주의나 사상을 앞장서서 주장함)에 따라 정조는 각 시전(巿廛: 한양이나 지방의 각 도시에 설치된 상설 시장)의 국역은 존속시키면서 시전 상인이 도고에 대해 난전을 금할 수 있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해제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등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을 폐지하고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의 도고권을 폐지하도록 했다. 1791년이 당시가 신해년(辛亥年)이었으므로 신해통공(辛亥通共)이라 한다. 신해통공의 반포로 개성의 송상, 한강의 경강상인, 동래의 내상, 의주의 만상 등, 사상(私商)들이 각종 상품을 자유롭게 사고 파는 것이 인정되어 자유로운 상업 활동이 보장되었다.
장시와 포구 상업의 발달
16세기 중엽에 이미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던 장시는 지방을 중심으로 꾸준히 증가하였다. 장시는 17세기 이후 상품화폐경제의 성장에 따라 더욱 발달하였다.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은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고, 각 지방의 상업 중심지에 그 지방의 특산물이 집결되었다.
각 지방의 시장에는 그 지방의 생산조건에 따르는 여러 가지 특산물들이 집결되었다. 예를 들면 안성 읍내장과 개성 및 박천 진두장에서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놋그릇이 특산물로 유통되어 그 생산을 더욱 발전시켰으며 전주와 남원, 의령은 종이생산이 유명하였고 한산, 임천, 선천, 홍산, 비인, 정산, 남포 등 7군은 저포 7처라고 하여 모시 생산의 중심지로 발전되었고 안주, 영변, 개천, 순천, 성천, 덕천은 명주의 생산지로, 봉산, 안악, 재령은 목화와 무명의 산지로, 길주, 회령, 종성, 명천 안변 등 지방은 배의 산지로, 원산, 마산, 강경은 수산물 집산지로, 기후가 온화한 남부 지방에서는 알곡과 목화, 감, 참대제품, 돗자리 등의 생산지로서 그 지방의 생산물은 근방[근처] 시장에서뿐만 아니라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들에게까지 반출되어 널리 팔렸다.
―김광진·정영술·손전후, 『조선에서의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 1988, 열사람, p.10.
17세기 후반 이후에는 전국의 장시가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5일장 체제로 단일화되었다. 장이 열리는 날은 주변 고을마다 서로 달랐다. 보부상은 이러한 장시들을 하나의 유통망으로 연결하는 역할을 활발하게 했다. 18세기 중엽에는 전국적으로 장시가 1,000여 개소를 넘어섰다.
18세기 이후 해안가나 강변에 포구가 개설되면서 선박을 이용한 상품 운송이 활성화 되어 포구에서의 상업도 크게 활기를 띠었다. 물길을 이용한 운송이 도로를 이용한 운송보다 편리하였기 때문에 선박이 드나드는 포구는 상업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포구를 배경으로 발달하였던 장시에는 경기도 광주의 송파장이 유명했다. 송파장은 경기도 안성 읍내장, 충청도 은진의 강경장, 함경도 덕원의 원산장, 경상도 창원의 마산장 등과 함께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대표적인 장시로서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서 올라오는 물화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육상교통뿐만 아니라 해상교통도 발달하였다. 뱃길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이 황해도의 장산곳과 충청도의 안흥량이었다. 그러나 어려웠던 뱃길도 18세기 이후에는 대부분 극복되었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경강(京江)의 뱃사공들은 안흥량을 자기집 뜰을 밟듯이 지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경강’은 경강상인(京江商人)을 가리키는 말이다. 경강상인은 조선 후기 한강변을 중심으로 대동미를 비롯하여 정부의 세곡과 양반지주층의 소작료를 운반하는 일 등 각종 상업 활동에 종사하였던 상인이다.
포구나 지방의 규모가 큰 장시에서 상행위(商行爲: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매·교환·운수·임대 따위의 행위)를 주도한 상인은 객주(客主)와 여각(旅閣)이었다. 객주는 다른 지역에서 온 상인의 숙박을 치르며 곡류·담배·쇠가죽 따위 물건을 맡아 팔거나 흥정을 붙여 주는 일을 했고, 여각은 연안 포구에서 상인들의 해산물 매매를 거간하고, 숙박·물품 보관·운송 따위를 맡아 했다.
부연하면 보부상(褓負商)은 행상인 부상(負商)과 보상(褓商)을 총칭하는 명칭이다. 부상은 무게나 부피가 크고 값이 비교적 낮은 상품인 나무그릇· 토기 등 일용품을 지게에 짊어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등짐장수를 말하며, 보상은 부피가 적고 가벼우며 비교적 값비싼 필묵·금· 은· 동 같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다니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다니면서 판매하는 봇짐장수를 가리킨다.
대외 무역의 발달
화이론적(華夷論的) 역사관과 성리학적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조선의 정치경제와 사회문화를 해부한 이중환은 강물길과 바닷길을 통한 상품 유통에 주목해 『택리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는 동· 서 ·남의 3면이 모두 바다이므로 배가 통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다. 배에 물건을 싣고 오가면서 장사하는 장사꾼은 반드시 강과 바다가 이어지는 곳에서 이득을 얻는다. 전라도 나주의 영산포(榮山浦), 영광의 법성포(法聖浦), 흥덕(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의 사진포(沙津浦), 전주의 사탄(沙灘: 현재의 만경강)은 비록 작은 강이나 모두 바닷물이 통하므로 장삿배가 모인다. 충청도 은진의 강경포는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바닷가 사람들과 내륙 사람들이 모두 여기에서 서로의 물건을 교역한다. 매년 봄과 여름,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을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밤낮으로 포구에 줄을 서고 있다.
―이중환,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생리(生利)
17세기 중엽 이후 청나라와의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평안도 중강, 함경도 회령· 경원 같은 국경지대를 중심으로 공적 무역(개시)과 사적 무역(후시)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청나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었고, 수출한 물품은 은, 종이, 무명, 인삼 등이었다.
일본과의 무역도 17세기 이후 왜관 개시를 통해 활발했다.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물품은 은, 구리, 황, 후추 등이었고, 수출한 물품은 인삼, 쌀, 무명 등이었다. 그리고 청나라에서 수입한 물품 등을 넘겨주는 중계무역을 전개하기도 했다.
부연하면 후시(後市)는 조선 후기에 사상(私商)들이 벌인 밀무역을 말한다. 조선에서 중국으로 사신을 보낼 때 중국의 회동관에서 이루어진 회동관 후시(會同館後市), 압록강 중류 중강에서 이루어진 중강 후시, 평안도 의주 맞은편의 책문에서 이루어진 책문후시(柵門後市)가 대표적이다. 또 함경도 경원 등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들과 거래한 북관 후시(北關後市), 부산 등의 왜관에서 일본인인 왜관들과 거래한 왜관 후시(倭館後市)가 있었다.
국제 무역 상인
국제 무역에서 정부가 사적인 무역을 허용하자 만상· 내상 ·송상들이 무역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송상(松商)은 경기도 개성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상인을 말한다. 청나라와의 무역에서 개성, 평양, 의주 상인들이 중요한 구실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송상이라고 불리우는 개성상인들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송상은 일본과의 무역을 중계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상(灣商)은 18세기 말 이후 평안도 의주 지방을 중심으로 청나라를 대상으로 무역을 하였던 상인들을 말한다. 또한 내상(萊商)은 동래부 부산포에 설치한 왜관(倭館)에서 일본을 대상으로 하여 무역에 종사한 상인이다.
화폐의 유통
농업 생산력의 증대는 장시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고 유통 경제의 발달은 다시 농업 생산력 발달을 자극하였다. 이것은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재촉하여 빨리 나아가게 하였다. 17세기 말에는 상품의 가치를 나타내며 그 유통을 매개해 주는 물건인 전화(錢貨: 돈)가 전국적으로 유 통되었다. 18세기 말에 들어서서 세금을 전화로 낼 수 있었고, 지대(地代: 남의 토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땅 주인에게 무는 셋돈)도 전화로 대신해서 바칠 수 있었다. 누구나 전화인 상평통보로 물건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조 11년(1633)부터 주조해 사용했던 엽전인 상평통보는 숙종 때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사회가 근대 사회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상평통보의 보급은 상품 유통을 촉진시켰으나, 지주나 대상인들이 전화를 늘어난 재산 관리 수단으로 이용해 보관만 하고 유통을 시키지 않았다. 이로 인해 정부에서 동전을 많이 주조해도 유통되는 화폐가 부족한 전황(錢荒) 사태가 발생했다.
한편 상평통보 같은 동전이 그 무게 때문에 규모가 큰 상거래에서는 불편했다. 이에 환, 어음 등 신용화폐가 이용되었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