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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13년 가을호.
한일 인식의 시
―『시와시』제16호 머리말을 대신하여
맹문재(본지 주간)
1.
광복 68주년이 지난 시점에서 볼 때 한일 간의 교류는 증가하고 있지만 한일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근래에는 양국 관계가 이전보다 소원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사과와 반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총리를 비롯해 각료들이 신사 참배를 감행하고, 8․15 전몰자 추도식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을 표현하지 않고, 평화헌법을 개정해 군대 보유와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려는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있고, 위안부 문제와 독도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등 일본의 역사 인식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한국 국민들은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심화시키고 있는데,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보수 우익주의자들은 더 이상 한국과 경제 협력을 할 필요가 없다거나 한국 투자에서 발을 빼야 한다는 목소리도 내고 있다. 한국의 경제가 한 단계 더 성장하려면 일본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역사를 무시하고 일본의 요구대로 손을 잡을 수도 없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문학 작품을 통해 한일 인식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크다. 일본의 제국주의 만행을 역사적 사건을 토대로 한 문학 작품으로 확인함으로써 민족의식의 필요성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응교는 「1923년 관동대진재, 한일 관계의 상흔」에서 김동환의 서사시 『승천하는 청춘』을 통해 관동대진재(關東大震災)의 실상을 고발하고 있다. 『승천하는 청춘』은 김동환의 두 번째 서사시집으로 1925년 신문학사에서 간행되었다. 『국경의 밤』(1925. 3)을 간행한 지 9개월 뒤에 나온 것으로 태양을 등진 무리, 2년 전, 눈 위에 오는 봄, 혈제장의 노래, 순정, 피리 부는 가을, 승천하는 청춘 등 총 7부로 이루어졌다. 시집의 전개는 시구문 밖 공동묘지에서 어린아이의 무덤을 찾는 한 여인의 모습으로 시작되어 일본 나라시노[習志野] 수용소로 옮겨진다. 폐병 환자인 청년과 그의 누이동생 그리고 그녀를 사랑하는 한 청년이 등장하는데 병든 오빠는 죽고 애인은 사상범으로 체포된다. 그녀는 오빠의 유골을 안고 고향에 돌아와 다른 사람과 결혼하지만 네 달 만에 아이를 낳음으로써 파경에 이른다. 여인은 곤궁하게 살아가며 아이를 기르다가 이전의 애인을 만나지만 아이가 죽게 되자 두 사람은 세상의 모순에 좌절해서 다른 세상을 택한다. 결국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하는 비극적인 청춘 남녀의 모습을 통해 일제 강점기의 민족적 고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뒤 조선인 학살이 이어지는데, 『승천하는 청춘』은 조선인과 중국인이 강제로 수용된 찌바현의 나라시노 수용소의 이야기를 담은 것이다. 비위생적인 수용소에서 새벽이면 기상나팔 소리에 연변장으로 뛰어나가 인원 점검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잔혹한 대우를 받고 시체 처리를 비롯해 지역의 노동 봉사에 동원되는 장면을 그린 문학적 보고서이다.
김응교는 이 글에서 관동대진재와 같은 국가적 폭력이 일어난 이유로 메이지 시대 이래 일본이 중국과 조선을 미개한 나라로 가르쳐온 점, 일본의 신문들이 조선의 3․1운동을 무자비한 폭동으로 보도해 일본인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준 점,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들이 낮은 임금으로 일을 하자 일자리를 잃은 일본 노동자들의 불만이 쌓인 점, 그리고 일본만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국가라는 점을 강조한 ‘일본판 오리엔탈리즘’ 교육으로 개인이 국가에 투신하도록 훈련된 점 등을 들고 있다. 이 글은 관동대진재가 일어난 지 90년이 되는 해에 그 실상을 문학작품의 통해 고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데, 다음의 언급도 중요하다.
이 작가들이 귀국해서 신경향파와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참여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필자가 확인해본 이기영․김동환․이상화․김용제는 관동대지진을 기점으로 그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진재가 일어난 뒤 어떤 구체적인 실천의 장을 모색하게 되는 것은 일본의 1920년대 문학사도 마찬가지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신감각파는 기성 문단에 대한 반항이라는 점에서는 방법을 같이하면서도, 일본의 1920년대 문학사는 저들의 교류와 배반 속에서 프롤레타리아 문학, 신감각파, 기성 문단이 정립되었던 것이다. 이후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한때 전성기를 맞았으나 계속된 탄압으로 전향 현상이 일어났고, 신감파는 기성 문단에 흡수되었던 것은 한국의 1920년대 문학사와 어느 정도 닮은 부분도 보이고 있다. 적어도 이글에서 다룬 자료를 본다면, 관동재지진이 한국 프롤레타리아 문학에 어떤 기폭제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김응교, 「1923년 관동대진재, 한일 관계의 상흔」 부분
위의 글에서 관동대진재와 조선의 신경향파 문학 및 프롤레타리아 문학과의 관련성을 언급한 점은 앞으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우리에게는 관동대진재와 같이 일제 강점기 동안 당한 잔혹한 학살과 탄압의 실상을 찾아내고 고발하는 일도 필요하지만, 그에 대항했던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고 그 의미를 정립하는 일도 필요한 것이다.
문혜원은 「원폭 투하와 재일조선인의 고통의 역사」에서 고형렬의 장시집 『리틀보이』를 통해 일본의 제국주의 욕망과 자본주의가 작용한 미국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충돌한 원자폭탄 투하 사건을 고찰하고 있다. 핵으로 인한 참상의 모습으로 반핵과 반전의 메시를 전달하면서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유린의 역사를 조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만족스럽게 만들어졌다.
나를 비롯하여, 7월 16일 월요일
제일 먼저 미국에서 죽은 형과
내가 죽은 지 사흘 뒤 나가사키에서
나를 따라 죽은 뚱뚱이
우리 삼형제는 미국의 팡파레
미국의 삼중창이었다,
―고형렬, 「리틀 보이」 부분
문혜원은 위의 작품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한 주체가 미국이고 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핵이 개발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간파하고 있다. “핵 개발은 모르건과 록펠러 같은 미국의 거대한 독점 자본체의 이익이 더해진 것이기도 했다. 미국은 1950년대 원폭 생산을 위해 236억 달러를 예산에 할당했고, 당시 재무부 장관인 존 스나이더는 모르건 사람으로서 퍼스트 내셔널리티 뱅크 부은행장이었다. 결국 원폭 투하는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욕망과 미국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적인 경제 논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진 결과인 것이다.” 이와 같은 진단은 우리의 역사가 제국주의와의 투쟁사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에 대항하고, 해방 후에는 미국과 소련의 지배에 대항한 역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는 일본의 파멸과 조선의 해방 차원을 넘는 인류의 대재앙을 가져온 것이지만, 일본의 제국주의 정책으로 인해 희생당한 조선인의 실상을 새롭게 조명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준다.
1945년 8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일본의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미국은 포츠담선언에서 일본에 무조건 항복하라고 요구했으나 거절하자 해리 S. 투루먼 대통령의 명령으로 원자폭탄 리틀 보이(Little boy)를 투하했고, 사흘 뒤인 8월 9일 팻맨(Fat man)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그 결과 8월 15일 일본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 선언을 했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공식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그렇지만 인류사 최초로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70만 명에 이르는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다치는 대재앙을 가져왔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관심 깊게 봐야 할 면은 피해자의 10%가 넘는 인원이 재일 조선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징용당하거나 가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고 조국을 떠난 이들이었다. 위안부로 끌려가 일본 군인들에게 혹독하게 유린당한 조선의 여성들도 상당했다. “석탄광산에 60만이요, 군수공장에 40만/토건에 30만이요, 금속 광산에 15만/항만운수에 5만, 총 150여 만 명이나/팔도에서 일본으로 강제 동원된 조선 장정들”이 원자 폭탄 투하에 대거 희생된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을 위로하고 보상하는 역사는 아직까지 마련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실상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국가적 차원에서 보상하는 길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을 본격화하기 시작한 을사늑약을 그린 이기형의 「해연이 날아온다」는 다시 읽을 필요가 있다.
한과 눈물로 살거냐
긴긴 세월을 허탕 치고도 못 말려
달구벌 멋은 잦아들고
만경벌 흥은 사위어가고
퍼지는 영어 열풍 어디로 가나
불야성 저 광란하는 나체춤의 의미는 뭐냐
나운규는 아리랑고개를 울고 넘었건만
분단고개를 울고 넘는 사람은 없다
국록 먹는 어른들은 말잔치로 밤을 지새우고
청바지들은 할아버지가 울고 넘은 박달재를
촐랑대며 넘는다
가쓰라․태프트와 을사오적의 후예들은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며 분단선에 쇠말뚝을 박는다
망국의 치욕 을사늑약 백 년에도 정신을 못 차려
고구려 넋은 어디로 갔나
백두산 신단수 큰할아버님이 내려다보신다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가 들린다
슬픈 사연 하도 많아 누선도 말랐느니
피 마르는 지겨움 가슴이 빠개진다
임 따라 어라연엘 가랴
임 맞으러 삼지연엘 가랴
지는 해야 빨리 져다오
솟는 해야 퍼뜩 솟아주렴
폭풍우 천 길 만파를 뚫고
바다제비 날아온다
해연(海燕)이 날아온다
―이기형, 「해연이 날아온다- 을사늑약 백 년, 고리키의 「해연」을 보고」 전문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백 년이 넘었지만, “맥아더 동상을 사수하며 분단선에 말뚝을 박는” 오늘의 상황을 “퍼지는 영어 열풍”이며 “불야성 저 광란하는 나체춤” 등으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분단은 단순히 남북한의 이념 대립에서 발생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 전쟁 차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을사늑약”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폭풍우 천길 만파를 뚫고/바다제비 날아온다”고 우리의 분단 극복을 민중의 차원에서 희망하고 있다. 1901년에 발표된 막심 고리키의 산문시 「해연의 노래」는 폭풍을 예고하는 해연(바다제비)을 노래한 것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횃불이 되었듯이 오랫동안 가로막고 있는 분단선을 민중들이 무너뜨릴 것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을사늑약” 같은 치욕으로 인한 “선열들의 피맺힌 목소리”를 잊지 말고 분단 극복의 동기로 삼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을사조약 또는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불리는 을사늑약(乙巳勒約)은 1905년 11월 17일 한국과 일본 간에 체결된 불평등한 조약이다. 체결 당시의 공식 명칭은 ‘한일협상조약’이었는데, 일본은 제2차 일한협약 또는 을사협약이라고 부른다. 한국의 일부 사학자들은 을사년에 일본에 의해 강제로 맺은 조약이기 때문에 을사늑약이라고 부른다.
일본은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기에 앞서 한국을 지배할 것을 결정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국을 독점하려고 했지만 러시아의 간섭에 의해 저지되자 조선에서의 경제적 지배권을 바탕으로 러시아와의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비 확장에 나섰다. 한국은 일본과 러시아 간의 전운이 감돌자 중립 선언을 열국에 통고했지만, 일본은 무시하고 인천항에 정박 중인 러시아 함대를 격침시킨 다음 1904년 2월 10일 선전포를 감행하고 서울로 진주했다. 그리고 공수동맹의 성격을 띤 ‘한일의정서’를 체결하고, 병력과 군수품 수송을 위한 경부선 경의선 철도 건설을 서둘렀으며, 조선의 통신사업을 강점했다. 일본은 압록강을 건너 구연성과 봉황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라 러시아를 격침시켜 나갔고, 러시아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의 발발로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게 되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권고를 수락해 1905년 9월 5일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군항 동시 포츠머스(Portsmouth)에서 강화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으로 미국 및 영국뿐만 아니라 러시아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도 보호 감리권을 승인해 사실상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로 들어서게 되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7월 일본의 수상인 가쓰라[桂太郞]와 미국의 육군장관인 태프트 간의 밀약으로 미국으로부터 한국의 보호권을 인정받았고(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 인정), 8월에는 제2차 영일동맹조약으로 영국으로부터 한국의 종주권 및 보호권을 인정받은(일본은 영국의 인도 지배 인정) 상태였다.
일본은 이와 같은 외교적인 지배 이전부터 한국에 보호조약을 강요했다. 한일의정서를 강압적으로 체결해 내정간섭의 길을 연 다음부터 시행 세칙을 내세워 군사행동과 토지의 점령 등을 자의적으로 단행했고, 1904년 8월 22일에는 ‘한일 외국인 고문 초빙에 관한 협정서’(제1차 한일협약)를 체결하고 군사 재정 외교 고문을 파견했다. 이와 같은 정지 작업을 진행한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1905년 11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한국에 파견하면서 보호조약 강요를 본격화했다. 일본의 특명 전권 대사 자격으로 서울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위협해 한일협약안을 제시하면서 조약 체결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그렇지만 고종이 계속 거부하자 전략을 바꾸어 조정 대신들을 위협 내지 매수했다. 그 결과 각료 8대신 가운데 참정대신 한규설,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하고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찬의를 얻어내었다. (찬성한 이들을 을사오적이고 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을 체결한 것이다.
을사늑약 주요 내용은 “1. 일본국 정부는 재동경 외무성을 경유하여 한국의 외국에 대한 관계 및 사무를 감리, 지휘하며, 일본국의 외교 대표자 및 영사가 외국에 재류하는 한국인과 이익을 보호한다. 2. 일본국 정부는 한국과 타국 사이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수하고 한국 정부는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조약을 절대로 맺을 수 없다. 3. 일본국 정부는 한국 황제의 궐하에 1명의 통감을 두어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고 한국 황제를 친히 만날 권리를 갖고, 일본국 정부는 한국의 각 개항장과 필요한 지역에 이사관을 둘 권리를 갖고, 이사관은 통감의 지휘하에 종래 재한국 일본 영사에게 속하던 일체의 직권을 집행하고 협약의 실행에 필요한 일체의 사무를 맡는다. 4. 일본국과 한국 사이의 조약 및 약속은 본 협약에 저촉되지 않는 한 그 효력이 계속된다.” 등으로 실로 불평등한 것이었다. 을사늑약의 체결로 한국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취임하였다.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정책이 실로 본격화된 것이었다.
2.
김태선의 「두 나라 사이에서-1990년대 이후 현대시에 나타난 한일 인식」은 최근의 현대시를 통해 한일 인식을 살펴본 글이다. 최근의 한일관계는 역사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만,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다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판단으로 사이토우 마리코, 이승원, 성기완, 서정학, 주하림, 황병승 등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살펴보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발표된 현대시에서 일본적인 것들이 사용된 것들을 하나의 주제로 통합하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할 수 있다. 한국과 일본은 역사나 문화적으로 상당히 이질적인 요소들이 많지만, 그럼에도 가까운 점이 있다. 이러한 친근함이 시인들로 하여금 일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다르면서도 같은 것에 대한 관심.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쓰이는 신조어 중 ‘오덕’과 ‘덕후’라는 표현이 있다. 일본어 ‘오타쿠’를 우리식으로 변형한 말이다. 일본의 오타쿠 문화가 이미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정착되어 용어마저 우식으로 전환된 것이다.
―김태선의 「두 나라 사이에서-1990년대 이후 현대시에 나타난 한일 인식」 부분
“오타쿠”(おたく)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 등 특정한 분야에 깊은 취미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단순한 팬이나 마니아 수준을 넘어선 특정 분야의 전문가를 의미하는 것이다. “오타쿠”는 상대방 혹은 제 삼자를 높여 부르는 말인 ‘귀댁’에서 유래했는데,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동호회에서 만나 서로 예의를 지키고 존중하며 쓴 것이었다. 가령 “오타쿠(귀댁)는 어떤 스피커를 사용하십니까”와 같이 사용한 것이다. 그렇지만 현재는 자신의 관심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의 지식이 부족하고 사교성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고 있다. 1989년 자신의 성적 만족을 위해 4명의 유아를 살인한 미야자키 쓰토무의 방안에는 비디오테이프와 만화가 가득했는데, 그가 속한 비디오 동호인회 멤버들이 서로 오타쿠라고 부르는 것이 밝혀지면서 더욱 부정적인 용어가 되었다. 어둡고 음습한 분위기의 청소년, 가치 없는 일에 몰두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 “오타쿠”라는 말이 한국에 들어와 “오덕후”(줄여서 “덕후”)가 되었는데, 초기에는 애니메이션광을 비하하는 말로 쓰이다가 최근에는 ‘살찌고 게을러 보이는 외모’를 빗댄 말로 쓰이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 교류는 역사의식까지 반영된 것이기에 주목된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역사적 문제를 청산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겠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일본이 역사적 문제에 대해 진정한 사과와 반성을 하지 않았으며 충분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인들 중에는 이와 달리 생각하는 층이 늘고 있다. 즉 일본이 한국에 대해 역사적 보상을 어느 정도 했다고 생각하거나, 보상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즈음에서 포기하는 것이 미래 지향적이라고 생각하거나, 역사의 문제와 달리 다른 분야는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거나, 심지어 일본을 과거의 역사 문제로 배척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면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풍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하루키의 신작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출간하기 위해 한국의 출판사가 선인세로 16억 이상을 지불했다는 사실은(실제로 24억을 지불했다는 소문이다) 씁쓸하기가 그지없다. 그 정도의 거액을 지불하고도 장사가 될 수 있기에 투기를 했겠지만, 그것이 단순히 경영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기에 씁쓸한 것이다. 출판사는 거액의 선인세를 일본의 출판사에 지불하고, 독자는 하루키 열풍을 자제하지 못하고 경외심으로 읽고, 저널들은 그와 같은 현상을 부추기는 것이 오늘의 상황이다. 이제(특히 젊은이들 사이에서) 한일관계의 역사성을 운운하는 것은 식상하고 고리타분한 것이 될 정도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1998년 10월 8일 동경에서 가진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케이조 총리는 과거의 양국 관계를 돌아보고 우호 협력 관계를 확인하면서 미래의 바람직한 관계를 위해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 지향적인 관계로 발전시키기 위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보편적 이념에 입각한 정치, 경제, 문화, 인적 관계의 광범위한 교류를 합의한 것이다. 그와 같은 차원에서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내에 일본 문화를 개방해 나가겠다고 알렸다. 그동안 문화의 많은 부분이 통제되었는데, 이 선언을 계기로 일본 문화가 한국에 점진적으로 들어오게 되어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일본 문화의 개방이 예상한 것에 비해서는 충격이 크지 않고, 반면에 ‘한류’가 유행하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한일 간 문화 교류는 대등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지금까지의 진행이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하루키의 열풍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문화의 영향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그리고 일본에 대한 역사의식을 완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에 경계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한일 관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주도해갈 수 있는 방안을 민족의식의 차원에서 모색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3.
일본이 역사적 반성을 하지 않는 점이나 우리 스스로 역사의식이 약화되어 가는 점을 경계하는 일은 중요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의식을 만들어가는 사람을 찾아내는 일도 중요하다. 그와 같은 예를 현선윤(玄善允)의 경우에서 볼 수 있다. 현선윤은 1950년 오사카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났다. 오사카대학 및 오사카시립대학 대학원에서 불어불문학을 공부하고 현재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연구소에 근무하며 교토, 오사카, 고베 등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다. 그는 산문집 『조선인의 언어』(가제)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서 겪어야 했던 민족적 차별을 호칭 등의 어휘 사용의 문제를 중점으로 살피면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처음으로 직접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봤을 때는 양쪽 다 낯간지러움을 숨길 수 없었다. 이쪽은 이쪽대로, 용의주도하게 준비를 한 셈이었는데도 막상 말하려드니 어색하고 목소리가 갈라졌다. 눈을 치뜨고 반응을 살폈다. 상대도 마찬가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려 애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동자가 뱅그르르 돌고 놀라움과 당혹스러워하는 빛이 보였다.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계속 해야 할 말을 못하고, “헤헤헤.” 하고 도망쳐 버렸다. 그러나 부드러운 시선이 등 뒤에 느껴져서 ‘행복’했다. 이것으로 한 사람 몫의 조선인이 되었구나, 하는 참으로 손쉬운 ‘민족의식’. (중략)
온 몸뚱이가 이 사회에 포박당해 있으면서도 한편으로 언제 거기서부터 배척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떠는 나. 그런 불안한 존재를 상징하는 말이 일본 속에서의 조선말 ‘아버지’이기 때문에 ‘아버지’라고 불리는 것을 원했던 건 아닐까. 뭔가에 뿌리내리는 것을 편집적으로 추구하면서도 그 무엇에도 뿌리내리지 못하는 나란 인간은, 정체를 알 수 없고 미덥지 않은 고립된 말, ‘아버지’라고 불리기에 적합한 존재다.
―현선윤, 「‘오토짱’과 ‘아버지’」 부분
일본에서는 아버지를 ‘오토오짱’이라고 부르고 어머니를 ‘오카아짱’이라고 불렀는데, 최근에는 그런 호칭을 듣는 일이 드물다. 한때 ‘토오짱’ ‘카아짱’이라고 불리던 것도 시들해져 ‘오토오상’ ‘오카아상’이 널리 사용된다. 마치 외래 문물을 중시하던 시대를 지나 복고풍이 부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데 화자는 재일 조선인 2세로서 집안에서 아버지 어머니를 ‘오토짱’ ‘오카짱’으로 불러왔다. 뒤의 ‘오’와 ‘아’를 빼먹은 호칭으로 일본인들의 발음과는 다른 조선인들만의 호칭이었다. 학력이 낮고 가난한 조선인 아버지 어머니들이 정확하게 발음하지 못한 것이었는데, 자식들도 자연히 따라 부른 것이다. 따라서 ‘오토짱’ ‘오카짱’은 일종의 조선어였다. 이 조선어라는 말은 조선인만이 사용한다는 의미를 지니는 동시에 일본 사회에서는 불이익이나 창피한 느낌을 받게 되므로 사용을 삼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진학과 진급을 하면서 일본인 아이들과 교제가 늘게 되므로, 스스로를 일본인 아이인 것처럼 가장하면서 적응하는 시기이므로, 조선어인 ‘오토짱’ ‘오카짱’은 성가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일정한 연령에 이르러서는 유아어를 버리고 어른이 사용해야 할 호칭으로 바꾸어야 하는데, 그것 역시 어려웠다. 일본인들은 아버지 어머니를 ‘오야지’ ‘오후쿠로’로 바꾸는데, 그러한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재일 조선인 2세는 힘들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화자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민족에 눈을 뜨고 민족의식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일상생활에서 민족성을 회복하는 상징성으로 ‘오토짱’ ‘오카짱’을 “아버지” “어머니”로 바꿔 부른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역사의식을 갖게 된 것이다.
내가 억지스런 콤플렉스를 품었던 것은 재일 조선인이었기 때문이다. 재일 조선인이 그런 상황을 강요당한 것은 일본의 역사와 사회, 그에 더하여 뼛속까지 식민지 근성에 중독된 매국 정치가와 자본가 때문이다. 내가 ‘진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우선은, 잘못된 일본 사회에 맞설 것. 그리고 조국에서 민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과 지식인들’의 전열에 가담할 것, 즉 ‘진정한 민족사’에 참여할 것, 이다. 그런 이론에 따라, 내 정신적 고향은 역사를 극복해야 하는 조국, 그리고 서울의 반체제 지식인과 그들을 뒤따르는 무구한 민중이 되었다. 얼굴 없는 인간들이 영위하는, 생활이 빠진 역사가 소위 나의 정신적인 고향이 된 것이다.
―현선윤, 「‘시골’과 ‘고향’」 부분
재일 조선인은 조국에서 바라보면 변경 중의 한 대상이다. 변경은 중심에 흡입되는 존재로 기본적으로 그들의 시선은 중심으로 향하고 있다. 그 중심의 한 곳이 분명 조국이다. 또한 재일 조선인은 일본에서도 변경에 위치한다. 일본은 물리적인 거리로 보았을 때 가장 가까운 중심이다. 그렇지만 중심으로부터 쉽게 인정받지 못하고 외면당하기 일쑤이다. 따라서 또 다른 중심으로, 즉 조국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리하여 오랫동안 동경해온 조국에 들어온다. 그렇지만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무관심과 냉담함을 받아 배신감 같은 것을 느낀다. 애정에서 오는 증오와 경멸감도 생긴다. 화자의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가 찾아간 조국은 아버지를 타인으로 취급했다. 군부의 권위주의적 통치가 만들어낸 제도의 잔재며 그것을 보완하는 암묵의 논리와 인정이 뒤얽힌 세계여서 결국 거절당했다는 서운함을 가졌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자신이 죽으면 무덤을 어떻든지 간에 고향에 만들어 달라고 자식들에게 명령했다. 화자는 아버지의 그 모순된 모습에서 역사와 사회의 난해함을 깨닫고, 결국 주체적으로 재일 조선인의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이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지 백 년이 넘는 역사의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한일 인식의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