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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습을 잘 굴리자" "바탕을 나투자" -보림선원 서울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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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불광사 탄생 배경(상) - “佛빛으로 온세상 환하게” 도심포교 첫삽
선재법사 추천 0 조회 40 15.07.06 11:0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광사 탄생 배경() - “佛빛으로 온세상 환하게도심포교 첫삽

 

 

 

1981년 정토제(淨土齋)를 여는 장면. 현재 불광사 부지에서 기공식을 하기전 광덕스님〈맨앞〉이 기원제를 열고 있다. 그 뒤 요령을 든 스님이 현재 불광사 회주 지홍스님이다.

 

 

 

불광사 부지. 당시 잠실은 영동에 이어 개발이 시작되던 때였다. 허허벌판 끝에 남한산성이 보인다.

 

 

 

 

대각사에서 불광회 모습. 이곳에서 불광운동이 일어나 불광사로 이어졌다.

 

서울 잠실 석촌 호수가에 위치한 불광사(佛光寺)는 한국불교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매우 특별한 곳이다. 1981 10월 공사에 들어가기 전 주변을 정결히 하는 정토식(淨土式)을 갖고 1년만인 1982년 10월24 준공한 불광사는 해방 후 현대 도심포교당의 발상지다. 서울에 들어선 해방 후 최초의 도심포교당은 1979년 3월1 준공한 미아리 삼선포교당이다. 불광사는 그보다 3년이 늦었지만 준비는 훨씬 일찍부터 시작됐다. 불광사가 특별한 이유는 건물 준공 시기가 아니라 그 과정이 새롭다는데 있다. 불광사는 불광사상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이 모임 장소로 만든, 한 사상의 부산물이다. 이는 일반적인 사찰 건립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즉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사상과 이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인 것이다. 부처님을 중심으로 불교라는 사상을 믿고 따르는 사부대중이 먼저 있고 난 뒤 정사(精舍)가 만들어진 경로와 같다.

불광사 창건주는 1999년 입적한 광덕스님이다. 불광사의 모태는 불광회며 불광회는 불광운동을 실현하는 단체다. 1974년 9월1 광덕스님은 불광회를 창립했다. 이 불광회는 일종의 법인체로서 이후 스님과 불광대중들이 전개하는 모든 불광활동의 모체가 되었다. 불광회는 회칙에서 목적을 반야사상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활을 밝게 하고 성공과 행복과 발전을 이루어 우리와 사회의 광명화를 도모한다고 했다. 사업으로는 매월 〈불광〉지를 발간하여 회원에게 배부하고 정기법회를 개최하여 신앙생활을 지도한다고 했다.

불광회 창립 후 곧바로 월간 〈불광〉이 창간됐다. 그리고 〈불광〉을 읽은 독자들이 신도가 되어 이를 매개로 불광회는 더 확장되고 신도들도 늘어 났다. 잡지를 매개로 운동이 더 확산된 것이다.

그 중심 공간이 처음에는 대각사였다. 이 대각사는 광덕스님에게 할아버지 되는 백용성스님이 일제시대 창건한 절이다. 대각사 역시 용성스님이 제창한 대각교 운동을 실현하는 공간이었다. 광덕스님에 의한 불광사상, 불광회, 불광사는 노스님인 백용성스님에 의한 대각교 대각사의 궤적을 그대로 이은 것이다.

 

광덕스님 1974년 불광회 창립해 반야사상전파

조부 용성스님이 창건한 대각사서 대중포교 계승

전환기 불교계 새바람신도 몰려 넓은 법당물색

 

일제시대 최초로 불교근대화 기치를 걸고 한글경전, 포교당운동, 찬불가 보급 등을 펼쳤던 용성스님은 대각교를 주창했다. 1921년 서울 종로 봉익동에 대각사를 설립해 용성스님의 대각교 운동은 대중포교운동으로 확산돼 널리 퍼졌다. 근대 포교당운동의 시초가 여기서 시작됐다. 그리고 60년 뒤 그 손자뻘인 광덕스님에 의해 1982년 불광사가 창립되며 현대포교당운동으로 연결됐다.

직접 만난 적이 없는, 두 세대의 공백을 메워 그 사상을 이어준 분이 용성스님의 제자 소천스님(1897~1978)이다. 소천스님은 용성스님을 은사로, 동산스님을 계사로 출가 득도 했다. 광덕스님에게는 사숙뻘이 된다. 스님은 전 생애에 걸쳐 금강반야사상을 통한 구국구세운동을 펼쳤다. 광덕스님이 구족계 수계전 소천스님을 따라 전국을 돌며 금강경구국운동을 펼쳤으니 광덕스님 출가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이 인연을 계기로 소천스님의 기제사가 지금도 불광사에서 열린다.

용성스님 동산스님 소천스님으로 이어지는 반야사상은 광덕스님에 이르러 불광사상과 운동으로 구체화 되어 열매를 맺게 된다. 김재영법사는 ()운동은 용성선사에게서는 대각교운동, 소천선사에게는 금강경구국운동이 되며, 광덕선사에게서는 반야바라밀운동이 되었다고 말했다.

불광운동도 처음에는 대각교의 발상지 대각사에서 시작됐다. 새로운 불교사상과 이를 통한 신불교운동을 접한 젊은이들이 대거 대각사로 몰려들었다. 스님이 대각사에서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칠 당시 한국불교는 극심한 혼란기였다.

종단은 정화가 마무리된 뒤 그 후유증을 심하게 앓았다. 종단 중앙은 종권을 놓고 갈등이 심하게 일어났다. 종단의 행태가 못마땅했던 선사들은 산속 깊숙이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승려들 교육은 물론 신도들도 방치됐다. 청정비구승단을 만든다는 정화이념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은 비구중심의 종단과 사찰의 주인교체 밖에 없었다. 그 이념이 구체적 신행현장이나 포교현장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설명하는 사람도 실천하는 스님들도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현대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는 시점이었다. 과거 전통과 사상은 모두 부정되고 서구 신사조만이 옳다는, 문명의 대전환기였다. 젊은이들은 의지할 이념이나 철학이 없었다. 광덕스님의 불광운동은 이 시점에 나왔다. 월간 〈불광〉을 통해 이념이 전파되고 대각사에서 이를 따르는 신도 청년 들이 모였다. 1975년 10월13 〈불광〉 창립 1주년 기념 한국사상대강연회를 계기로 법회 창립이 구체적으로 논의됐다. 3일 뒤 대각사에서 불광법회가 창립됐다. 이날 결사에 참여한 인원은 43명이었다. 잡지가 이념을 전파하고 그 이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결사단체를 만든, 한국불교 현대사에 초유의 일이 발생한 것이다. 이들은 매주 목요일 오후 630 대각사에서 법회를 열었다. 소천스님의 〈금강경강의〉를 교재로 금강경 보급운동을 하면서 이후 〈보현행원품〉을 배웠다. 사람들이 엄청나게 밀려들었다.

1976년 창립 1주년 때 43명의 보현행자 10배인 480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기존의 나이든 여성신도가 아니라 직장인, 자영업자, 전문직종사자, 대학생, 군인, 주부 등 새로운 인물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자리가 모자랐다. 대각사 좁은 법당이 차고 넘쳐 법당 앞 노천 법당을 만들었지만 곧 노천법당도 넘쳤다. 1977 9월부터 법당이 좁아 법등을 둘로 나누어 금요일 법회를 신설했다.

이렇게 해서 신도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안정된 법회장소를 물색하게 된다. 그것이 법회 창립 28개월만이다. 1978년 6월29 불광법당 봉납발원법회가 열렸다. 한국불교현대사에 큰 자취를 남긴 불광사는 이같은 배경에서 탄생했다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 창건주 광덕스님

 

선원 정진하다 1950년 출가

봉은사 주지 때 대불련 창립

불광운동 펴며 중생과 함께

 

 

1964년 봉은사 대웅전 앞에서 대학생 수도원생들과 함께 한 광덕스님. 이를 모태로 이듬해 대불련이 창립됐다.

 

1927년 경기도 화성군에서 태어난 스님은 현 서경대학 전신인 한국대학 재학중이던 1950년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과 만난다. 동산스님에게 소개장을 써준 인물이 한국대학 설립자며 당시 학장이던 한관섭선생. 스님은 건강문제와 세속학문에 대한 실망 등으로 입산을 결심, 동산스님과 만나 고처사로 불리며 범어사 선원을 비롯 여러곳에서 정진하다 1952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폐결핵을 앓는 등 젊을 적부터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았던 스님은 아랑곳 않고 참선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당시로는 꽤 늦은 나이인 30세에 구족계를 받고 당신 공부를 하는 한편 수많은 선서들을 번역해 한글본으로 펴내고 대각사를 중심으로 노스님인 용성스님의 대각사상을 선양했다. 1953년부터 신소천스님의 금강경독송구국원력대에 참여해 전국을 순회하다 1956년 대각회를 창립, 초대회장을 역임했다.

스님은 1971년 총무원장 권한대행을 역임하는 등 1960년대 중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종단 중앙에서 행정일을 맡아 보며 종헌 종법 체계를 정비하고 종단행정업무를 관장했다.

1965 9월 봉은사 주지 재임중 봉은사에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를 창립하고 한국대학생불교연합회 수도원을 설립했다. 종단에서의 활동에 한계를 느낀 스님은 1974년 불광법회를 창립, 1982년 준공한 불광사에 주석하며 1999년 입적 때 까지 한평생 불광운동을 전파하는데 보냈다.

 

[불교신문 2325/ 5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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