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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UTMB CCC 참가 후기, 그 두번째 이야기.
첫번째 후기를 쓰는데 시간이 넘 많이 걸려, 두번째 이야기는 가능한 한 호흡에 쭈~욱 써볼까 합니다...(과연? ㅎ)
2023년 8월 29일(화)
6년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샤모니로 가는 길을 나선다.
오랜 기다림의 시간만큼이나 가는 길도 멀고 힘들다. 지방 사는 설움에, 오후 3시에 목포역 출발, 광명역에서 다시 버스로, 다시 공항에서 한참을 기다린 후 밤 11시 무렵, 프랑스 샤모니가 아닌 아랍에미레이트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23년 8월 30일(수)
장장 10시간을 날아 두바이 도착, 낯선 동네에서 낯익은 아침해를 맞았다.
다시 몇 시간 대기 후, 스위스 제네바로~
다시 7시간. 비행기로 알프스를 넘어, 스위스 제네바 공항에 도착.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다.
샤모니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1시간 30분을 더 가야하니... ^^;;
근데 예약해 둔 버스(정확히 얘기하면 버스 기사님)가 한참을 지나도 오질 않아 다시 1시간 대기. 우여곡절끝에 샤모니 가는 버스를 탔는데... 아... 기사님이 오늘 첫 출근하신 듯... 1시간 30분 거리를 거의 3시간이 걸려서야 도착했다. ㅠㅜ
현지 시간으로 8월 30일 오후 5시. 집 나온지 꼭 33시간 만에 꿈에 그리던 샤모니에 도착했다! 대회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지침 ㅋ
원래는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좀 걸어야 하는데, 버스 기사님이 잘 모르시는 것 같아(^^;;) 숙소 최대한 가까운 곳에 내려 달라고 했다. 4박 5일을 머물 알펜로즈 (Alpenrose) 산장.
도착하자마자 내폰내찍 (내 폰으로 내가 직접 찍은) 아래 사진 두 장.
전 세계 하이커들과 트레일러너들의 성지인 샤모니에 도착했음을 실감케 한다.
숙소에서 한국인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체크인하고 같은 방 룸메들과 간단히 통성명 하고... 짐 풀 겨를도 없이 대회 장비만 챙겨서 바로 샤모니 시내로 향한다.
UTMB 운영본부에서 배번과 장비 검사를 받기로 예약한 시간이 오후 3:30~5:00. 샤모니로 오는 버스가 예정보다 늦어지는 바람에 5시를 훌쩍 넘어 버렸다. 늦게 가도 받을 수 있을 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보기로... 숙소에서 시내까지 무료 셔틀버스가 다닌다는데, 30분 간격이라고 걸어가기로 한다. 대략 2km. 두바이에서 시작한 하루가 무척이나 길다. ^^;;
멋진 삼나무와 빙하 녹은 회청색 강물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시내로 가는 길에 보니..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걷는 이보다 달리는 이가 더 많다... 오호... 멋진 동네!
그리고, 구글 지도에서 여러번 걸어봤던 샤모니 시내.
그래서일까... 처음 와보는 동네지만, 마치 어렴풋한 기억 속의 어릴적 고향 마을에 온 느낌이다.
마침, 이틀전(8월 28일) 출발했던 TDS(145km) 후미 주자들이 골인하고 있다. UTMB 170km보다 거리는 짧지만 9000m 이상의 획득고도로 원래부터 악명높은 TDS 코스인데, 이번 대회 내내 눈과 악천우, 그리고 진흙탕으로 많은 포기자들이 발생했단다. (한국에서는 8~9명이 TDS에 참가했다고 하는데, 트랜스제주 안병식 대표만 완주했다는 소문...)
들어오는 선수들의 면면을 보니, 모레 있을 대회가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주자들을 따라 광장에서 왼쪽 골목으로 돌아서니...
6년간 꿈에 그려왔던... 이번 여행의 목적지이자 종착역인 UTMB 골인 아치가 눈에 들어온다...ㅎ...
인터넷에서 수없이 봐왔던 감동의 그 골인 장면처럼, 수백의 선수들,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이 결승점 앞 펜스를 두드리며 40시간넘게 산길을 달려온 주자를, 뜨겁게 그리고 온 가슴으로 맞이해준다. 후기를 쓰는 지금도 그 때의 감동이 ㅠㅜ
샤모니에서의 첫 날, 매년 전 세계 수천의 러너들이 왜 이 곳에 모이는지... 그 이유를 보았다.
결승점의 감동을 뒤로 하고, 장비 검사와 배번을 받기 위해 서두른다.
대회 스탭에게 물어보니 다행히 7시까진 배번 수령이 가능하단다. 배번 수령 장소가 무슨 스포츠 센터라고 하는데, 중앙 광장에서 조금 걸어 올라가야 한다.
가는 길에 만난, 이번 대회 메인 스폰서인 H사 공식 매장. 생각했던 것보다 제품이나 모델이 다양하지 않다. 가격도 많이 저렴하진 않고... 다만 모든 대회가 끝나는 날, 전 제품 반값 할인 행사를 한다고 한다.
드디어 찾은 스포츠 센터. 예전 대회 포스팅을 보면, 배번 받기전에 장비 검사를 한다고 했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장비 검사 하는/받는 사람이 없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ㅠㅜ
입구에서 안전 관련 서약서에 이름과 배번을 적어내면, 배번과 백택(가방에 다는 인식표), 그리고 드랍백이 담긴 봉투를 준다.
그리고 특이하게 손목에 코스별 팔찌를 달아주는데, 이건 대회 끝날 때까지 떼내면 안된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무료 버스나 대회 후 샤워장, 무료 식사등을 제공받을 때 보여주면 된다고...
배번을 받고 나면, 이번에는 기념티 배부 장소로... 대회 신청할 때 "XL"로 신청했는데, 막상 입어보니 너무 커서 (유럽이나 미국 브랜드 의류는 한국보다 한 사이즈 작은 걸로 주문하는 것이 맞는 듯) "L"로 바꿀 수 있냐고 했더니 흔쾌히 바꿔준다. ^^
드디어, 장비 검사인가.... 하고 그 다음 장소로 갔는데.... 출구다. ^^;; ㅋㅋ
혹시 내가 잘못 왔나 싶어서 둘러보니, 아래의 사인이 붙어있다.
올해부터 장비검사가 자율로 바뀌었단다.
예전에는 방수 자켓의 방수 기준까지 꼼꼼하게 검사했다는데, 이번에는 장비 검사 받고 싶은 사람만 자원 봉사자에게 검사를 요청하면 된다. 예를 들면, 대회 때 챙겨갈 자켓이 눈비를 잘 막아줄 수 있는지, 렌턴 예비 배터리는 몇 개를 챙겨야 하는지 등을 물어보면 조언을 해준다. 난 장비만 6년 준비한 사람이라ㅋ 굳이 물어볼께 없어서 패쓔~^^
마지막으로 출구쪽에서 기념사진을 찍어준다. 방금 받은 따끈따끈한 대회 기념티를 입고 사진 한 장!
드디어, 배번 수령과 장비 검사를 무사히(?) 마쳤으니, 이제 진짜 대회만 남았다.
뭔가 큰 일을 해낸 듯한 기분에 다리에 힘이 풀려, 스포츠 센터 앞 잔디밭에 잠시 앉았다.
배번과 백택이 붙은 배낭을 보고 있노라니.... 참... 이걸 받으러 그 먼 시간과 거리를 넘어왔는지...
이 배번을 가슴에 다는 것이 대회의 끝이 아닌 시작이겠지만... 내 이름과 번호가 박힌 UTMB 배번을 보니 만감이 교차한다.
걱정했던 배번 수령과 장비 검사(?)까지 무사히 마치고 나니, 갑자기 허기가 몰려온다.
그러고보니, 점심 무렵 먹은 두바이-제네바 기내식 이후론 아무것도 못 먹었네.. 서둘러 숙소로 복귀. 한국에서 챙겨온 라면과 햇반으로 샤모니 첫 끼 해결.
2023년 8월 31일 (목)
무척이나 길었던 첫 날이 지나고 샤모니에서의 두번째 날. 대회 하루 전날이다.
7시간 시차에다 새벽에 한국에서 걸려오는 업무 전화들을 받느라 (프랑스에서 새벽 3시에 초등생 학원 상담... 실화냐..ㅋㅋㅠㅜ) 비몽사몽인데, 같은 방을 쓰는 룸메이트 선배 (대구철인클럽, 나랑 같은 100K 참가, 이번이 벌써 3번째 UTMB 참가라고 한다.) 가 아침을 차려놨다고 같이 먹잖다.
내일 지긋지긋하게 달릴테니, 오늘 달리는 건 패쑤하고 계획했던 에귀 듀 미디 산 전망대를 그 선배랑 함께 다녀왔다.
그림같은 몽블랑 정상을 볼 수 있는 3842m 에귀 듀 미디. 자세한 여행 얘기는 3편에서~^^
전망대에서 내려와, 점심도 먹고 내일 대회 중 일용할 양식인 햄버거도 사고... 숙소로 일찍 돌아와 장비와 복장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제일 관건은 내일 날씨. 날씨에 따라 챙겨갈 장비를 바꿔야 하니... 샤모니 도착 전날, 몽블랑 인근 산들 날씨가 무척 안좋았다고 해서 긴장. 거의 한 시간에 한 번씩 일기예보를 확인했다. 다행히 출발 장소인 이탈리아 Courmayeur와 골인 지점인 샤모니는 11~23도, 구름만 조금 낀 화창한 날씨가 예상된단다!
이런 날씨요정 같으니 ㅋㅋㅋ
이제 코스와 페이스, 보급품 확인.
코스는 아래 지도처럼, Courmayeur (빨간색 원)에서 출발, Champex(노란색 원)을 지나, Chamonix(파란색 원)으로 골인하는, 서유럽 최고봉 몽블랑(보라색 삼각형, 4807m)을 끼고 반시계 방향으로 반바퀴를 돈다. 걱정되는 구간은 노랑과 파랑 사이. 밤시간에 지나야 하고 한국 산길처럼 돌과 나무뿌리들로 험하단다.
총 제한 시간은 27시간. 금요일 오전 9시 출발, 토요일 낮 12시까지 들어가면 된다.
메이저 마라톤 대회처럼, 기록에 따른 출발 그룹이 있는데 난 쪼랩(ㅋㅋㅠㅜ)이라 3그룹, 9시 30분 출발이라 실제 제한 시간은 26시간 30분. 이 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도록, 코스를 쪼개고 또 쪼갰다. 대회 홈페이지에 가면, 가장 빠른 선수와 가장 느린 선수들의 구간 통과 시간 예시가 나와있는데, 난 가장 느린 선수들(ㅠㅜ) 시간 기준으로 페이스표를 짜봤다.
예전 기록을 보니 가장 느린 선수들도 각 CP를 컷어프 시간보다 최소 한 시간 전에는 통과했다. 그래야 마지막 힘이 빠졌을 때, 그나마 여유를 가지고 제한 시간 안에 골인할 수 있다고 한다.
대회 전날 저녁은 챙겨 갔던 햇반과 라면으로... 긴장 때문인지 입맛이 없어 먹는 둥 마는 둥. 그래도 맥주는 두 캔 ㅋ
2023년 9월 1일 (금)
그리고, 대망의 대회 아침이 밝았다.
샤모니에서 CCC 출발 장소인 이탈리아 Courmayeur (편의상, "꼬르마요르"로 읽겠음) 가는 대회 버스를 아침 6:30에 타기로 했다. (대회 한 달 전 온라인으로 버스 탈 장소와 시간을 지정해야 함). 역시나 아침도 햇반과 라면으로 대충 챙겨 먹고 같은 방 대구 철인 형님과 함께 6시쯤 길을 나선다. 승차 장소는 까르푸 주차장. 숙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면 도착. 가는 길에 인근 숙소에서 나온 CCC 참가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는데, 다들 썹쓰리 포스가 철철~ 출발도 하기 전에 살짝 쫄았음 ㅋㅋ
버스 예약 티켓을 깜박 잊고 안가져 왔는데, 없어도 된단다. 예약 시간과 장소 상관없이 오는 순서대로 태우는 듯.
선수들을 가득 태운 버스가 알프스 산맥을 뚫은 긴 터널을 지나 이탈리아로 넘어간다.
터널을 막 통과해 이탈리아로 접어드는데...
와.... 정말 "그림같다"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이탈리아 알프스의 어느 산간 마을 아침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꼬르마요르에 도착했다. 스포츠센터 앞에서 하차.
주차장에 간의 화장실이 여러개 마련되어 있다. 처음 왔으니 영역 표시(?)를 하고 ㅋ... 사람들 가는 방향을 따라 다시 1km를 걸어 출발 지점인 시청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시청 앞 출발 아치.
정각 9시. 총 2300여명의 CCC 참가 선수 중 제 1그룹이 출발하고 2 그룹도 출발. 드디어 3 그룹 차례.
UTMB 시그니처 곡인 "Conquest of Paradise (낙원의 정복, 대회랑 정말 잘 어울리는...)" 를 들으며, 감동의 눈물 한 방울 흘릴 준비를 했는데.... CCC는 다른 곡이 나온다. ㅋㅋ
9시 30분 출발 ~ CP1, 13.3km
전 세계에서 모인 선수들과 그 수만큼이나 다양한 언어들로 외치는 "화이팅" 속에서 100km 대장정을 출발한다.
출발 직후 100여미터 내리막, 그 이후엔 거의 오르막이다. 걷기도 힘든 경사인데 다들 잘도 뛰어간다. 나만 걷자니 동네 창피해서 (배번에 국기가 찍혀 있음 ^^;;) 처음부터 오버 페이스. 꼬르마요르 시내를 굽이굽이 돌아 산속으로 들어간다.
한 3km쯤 왔을까... 경사가 급한, 좁은 숲길이 시작되면서 첫 병목 구간이 생긴다.
앞 사람이 나갈때까지 한참을 기다리는데, 후미의 한 그룹이 옆 샛길로 추월하니, 단체로 야유를 보낸다. 그 후론 새치기를 안하더라는...ㅋㅋ. 한 번 길이 막히니, 가다서다를 계속 반복한다. 내 앞쪽은 중국계 캐나다 총각이 호주 아가씨랑 썸을 타고 있고, 뒤엔 처음 만난 미국 아가씨들 2명이 "라떼는..." 기록 자랑에 여념이 없다. 힘들지도 않은지.. 그래도 덕분에 지루하진 않네.ㅎ
제 1구간은 해발 1200m에서 이번 대회 가장 높은 지점인 2600m까지 9.1km 오르막이다.
거리와 고도가 한라산 관음사 코스와 비슷하다. 관음사 코스 6키로 지점인 삼각봉에서 경사가 가팔라지는 것처럼, 이번 첫 구간도 6km 지점부터 경사가 급해진다.
한라산과 다른 점은, 이 곳은 나무가 없어 조금만 고개를 들어도 앞 선 주자들과 올라야 할 경사가 한 눈에 들어온다는 거다.
하늘 끝까지 이어지는 듯한 업힐을 한번이라도 보고 나면, 정말 HP, 아니 멘탈이 10% 씩 깎기는 기분. ^^;;
반대로, 끝없이 올라오는 발 아래 주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없던 기운도 막 솟아나는 느낌. ㅋㅋ
정상까지 밑만 보고 걸었다. ^^
마침내 첫번째 정상 (Tete de la Tronche). 2시간 40분 소요.
예상보다 10분 늦었지만... 난생 처음 경험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압도적인 풍광에 기록은 잠시 의미가 없어진다.
그리고 첫번째 CP가 있는 Bertone 산장까지 4.2km 내리막은 UTMB 최고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몽드라삭스(Mont de la Saxe).
대회 첫 내리막. 주로는 단단하고 돌이 별로 없는 흙길이라 달리기 좋다.
오른쪽으로는 듬성듬성 눈덮인 알프스 산군을, 왼쪽으론 그 산들의 모습을 담은 작은 연못들을 끼고 최대한 속도를 내서 달려본다. 첫 CP인 Bertone 산장에 가까워서는 꽤 경사가 급해지는데, 그 경사를 다들 잘도 달려 내려간다.
이때, '아차'하는 생각이...
이번 대회를 준비하면서 나름 가장 많이 준비했던 것이 오르막. 한국에서 경험해 본 가장 높은 총고도는 Korea 50K에서 올라본 총 4800m (거리 60km). CCC 총고도는 지리산을 3번 오르는 것과 같은 6200m이니 아무래도 걱정이 많이 되었다. 하지만, 막상 첫 업힐을 올라보니, 주로 상태도 좋고 스틱이 도움이 많이 돼 예상했던 것보다 어렵지 않게 올랐다. 물론 병목 현상으로 쉬엄쉬엄 걸은 것도 있지만 ^^';;
그런데, 속도를 낼 수 있는, 그리고 내야 하는 내리막을 4km 이상 달리다 보니 다리가 후들거린다. 특히 허벅지와 고관절의 피로도가 심하다. 그러고보니, 오르막이 6000m면 내리막도 6000m...^^;; 오르막만큼이나 장거리 내리막도 연습을 했어야 했다. 뭐, 이미 양쪽 허벅지에 쥐가 올 것 같은 지금 시점에서 후회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지만...;;
넘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히 다운힐. 첫번째 CP에 도착했다.
도착 시간 12시 50분. 목표 시간이 12시 45분이였으니, 신기할 정도로 예상시간과 얼추 비슷하게 첫 CP를 통과했다.
CP 간식 구성은 한국 대회와 비슷하다. 비스켓, 오렌지, 초콜렛, 물과 콜라 등. 그리고 한국에는 없는 탄산수가 제공된다. CP1까지는 무게 때문에 물을 한 통만 채웠는데, 이 곳에서 두 통 모두 물을 가득 채우고 CP2로 출발.
CP1 ~ CP2, 12.6km
고저도를 보면, 특별한 오르막이나 내리막이 없는 평탄한 구간.
몽블랑의 남서면과 몽드라삭스(Mont de la Saxe) 사이의 페렛 계곡 (Val Ferret) 옆구리를 타고 진행하다, CP2 Arnouvaz가 있는 계곡 아래 강가로 내려가면 된다.
이 구간은 다른 알프스 트래킹 구간보다 비교적 오르기 쉽고 , 전망 또한 최고를 자랑하기 때문에 커다란 등산 가방을 맨 백팩커들을 자주 만날 수 있다. (자기 몸만한 배낭을 메고 아빠를 열심히 따라가는 6살 꼬마 아가씨도 만났다 ^^)
이 곳 주로가 대부분 두 명이 비껴 지나가기엔 조금 좁은데, 여기에서 만난 모든 등산객과 여행객들은 옆으로 비켜서서 선수들에게 기꺼이 길을 양보해 준다. 응원의 박수와 함께. "알레~! 알레~!!" (프랑스어로 Allez, 우리나라말로 "화이팅!" 정도의 뜻이란다.)
이렇게 응원을 받으며 달리다 문득 고개를 들어보면, 과연 현실일까 싶은 풍경들이 눈 앞에 펼쳐진다. 감동의 연속이다~!
힘들래야 힘들 수 없는 구간. 덕분에 천천히나마 쉬지 않고 달려 CP2에 도착했다. 페렛 계곡의 강가 옆 Arnouvaz.
도착 시간은 오후 3시 12분. 목표 시간보다 오히려 3분 빨리 들어왔다. 컷어프 시간과도 대략 1시간 20여분 여유가 있으니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아직까지는....
두번째 CP이다 보니 먹거리가 좀 더 다양하다. 첫 번째 먹거리가 우리나라 식혜(일리가 없잖아 ^^;;)랑 비슷해 보여 개인컵에 받아 마셨는데, 말로만 듣던 짜디짠 스프.ㅋㅋ 그 밖에 햄, 치즈, 바게트, 말린 과일 등등.. 제일 반가웠던 건, 시원한 수박을 큼지막하게 썰어준다. 배는 별로 안 고팠지만, 다음 구간이 스위스로 넘어가는 2600m 고개를 넘어야 해서, 배낭에 고히 모셔온 햄버거 하나로 점심을 대신하고, 일어섰다.
CP2 ~ CP3, 14.4km
CP2를 벗어나가기 무섭게 오르막이 시작된다. 그것도 꽤 경사가 심한...
점심 먹느라 조금 앉아 있었는데, 그것때문인지, 아님 내리막 후유증인지 양쪽 허벅지에 쥐가 나려고 한다. 아직 대회 초반이라 무리하지 않고 쉬엄쉬엄 오르막을 오른다. 첫번째 오르막처럼, 앞 선 주자들이 훤히 보이는 끝없는 오르막. 주변의 멋진 풍경이 그나마 위안을 주지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가파지는 호흡으로 멈춰서는 주기가 점점 짧아진다.
예전 참가기들을 보면, 한여름인데도 이 곳에서 눈보라를 만났다는 후기가 몇 있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더없이 화창하다.
다만, 정상 부근에 이르니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고, 바람도 제법 차가워 바람막이를 꺼내 입는 주자들이 눈에 많이 띈다.
나같이 몸에 열이 많은 사람이야 반팔로 가도 오히려 시원하고 땡큐지... ^^
드디어 이탈리아와 스위스 경계이자, CCC에서 두번째로 높은 고지, 페렛 고개(Grand Col Ferret, 2537m)에 올랐다.
목표 시간보다 15분 정도, 늦은 오후 5시 6분에 도착.
대회 출발한지 벌써 7시간 40분이 지났건만 이제 겨우 30km 조금 넘게 왔나... 지금부터 CP3 La Fouly까지는 10km 내리막이니 속도를 좀더 내보자~!
스위스쪽으로의 내리막은 길이 넓어지고, 경사가 조금더 완만하다.
빙하에서 내려오는 얼음 같은 계곡물을 한 잔 마시고, 쥐가 날 것 같은 양쪽 허벅지에 충분히 뿌린 다음 다운힐을 시작한다.
주자들 간격이 넓어 정체 현상도 없고 적당한 경사도에 푹신한 흙길, 산 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까지...
몸 속 아드레날린이 폭발했는지, 정말 미친 사람처럼(막 소리도 지르고 눈물도 나고 ㅋㅋ) 2~3키로를 달려 내려 왔다. 중간 급수 지점인 La Peule에서 현타가 오기 직전까지..ㅋㅋ
La Peule에서 물을 보급할 요량으로 조금만 물을 담아왔는데, 바로 내 앞에서 물이 떨어졌단다 ㅠㅜ. CP3까지는 앞으로 6k는 더 가야 하는데.. 할 수 없이 빈 물통을 들고, 중간에 계곡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하면서 남은 거리를 서둘러 본다.
산자락에 거의 도달했을 무렵,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들 박수 소리와 딸랑 딸랑 워낭 소리(소 목에 다는 종인데, CP에서 응원용으로 많이 사용한다.)가 들리는 걸 보니 CP3에 거의 다 왔나 보다. 중간에 물을 보충하지 못해 계획에 없던 파워젤로 대체해서, 보급 때문이라도 맘이 더 급해졌다. 남은 힘을 짜내서 소리 나는 곳까지 다 왔나 싶었는데.... 인근 등산객들의 박수 소리였다.^^;; 워낭 소리는... 주로 바로 옆 목장 소들에게서 나는 소리였다... 아놔...ㅋㅋㅠㅜ
이후 물 동냥(그마저도 실패..^^;;)을 하며 3km를 더 가서야 스위스 조그만 산골 마을에 있는 CP3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 시간은 저녁 6시 56분. 계획보단 15분 늦었다. 컷오프 시간과는 여전히 1시간 20여분 여유가 있지만, 장거리 트레일러닝에서 1시간은 너무나 빨리 사라지는 찰라의 시간이라 마음이 급하다.
일단 물부터 두 통 가득 채우고... 앞 선 두 CP보다 먹거리가 다양하고 따뜻한 음식도 많았지만, 마음의 여유가 없었을까, 점점 지쳐가는 몸 때문일까 선뜻 음식에 손이 가질 않는다. 계획과 다르게 파워젤 2개를 미리 써버려서, 대용으로 에너지바 2개만 챙겼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고, 랜턴을 배낭 앞주머니로 옮겨 넣었다.
CP3 ~ CP4, 13.4km
CP3를 나서니, 어느덧 저녁 어스름이 내려 앉았다.
CP4가 있는 Champex-Lac 까지는 9km의 내리막과 4.4km의 오르막이다.
초반 2~3키로는 강을 따라 난 산길을 걸어 가는데, 내리막보다는 평지, 가끔은 오르막 느낌이다. 몸이, 체력이 다했을까?
평지를 걷는데도 숨이 차고, 쉬고 싶어진다. 파워젤과 아미노 바이탈로 회복해 보고자 하는데, 효과가 없다. 그러는 사이 많은 주자들이 추월해 간다. 이때 였나 보다. 더 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처음 든 것이...
랜턴을 켜야 할 정도로 날이 어두어졌다. 긴 산길 내리막을 내려가니, 대회 출발 이후 처음으로 밟아보는 포장 도로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스위스 어느 시골 마을로 접어 드는데, 맛있는 와인과 치즈 냄새가 나는 듯 하다. 몇몇 불 켜진 앞마당엔 가족, 친구들과 오붓한 금요일 저녁을 즐기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온다. 어찌나 부럽던지...ㅎ
멀리 앞선 주자들의 랜턴 불빛만 보고 따라가는데, 불빛들이 반딧불처럼 산 위로 날아 오른다.
CP4 Champex까지는 대략 4 km 오르막이다. 산길에 들어서니, 이젠 주자들간의 간격이 멀어져, 보이는 건 오직 방향을 알려주는 작은 형광봉뿐. 그마저도 가끔은 보이질 않아, 계속 같은 자리를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종아리에 느껴지는 압박감만이 내가 오르막을 오르고 있구나 느끼게 해준다.
이 구간 획득 고도는 300여 미터. 월출산의 절반 정도를 오르는 고도지만, 몇 번을 쉬었는지...
이제 겨우 절반 왔는데... 이 어두운 산길을 앞으로 50km를 더 가야 한다고? 300m도 힘든데 800m 높이를 세 번 더 넘어야 한다고? 차라리 남은 길을 전혀 몰랐으면 나으련만, 수십번 외우고 외웠던 코스라 너무도 명확하게 머리 속으로 그려진다.
이 상황에서, 우습게도, 어떻게 하면 남은 거리를 완주할 수 있을까 보다, 여기에서 대회를 포기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하고 그럴듯한 핑계거리를 찾고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산길이 차가 다닐만한 도로와 만나니, 드디어 CP4의 응원 소리가 들린다.
밤 10시 04분, CP 4 도착. 코르마요르를 출발한지 12시간 34분이 지났다.
CP3 이후 중간중간 너무 많이 쉬어서, 예상 시간보다 많이 늦을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목표 시간과 거의 같은 시간에 도착. 컷어프 시간과는 여전히 1시간 10여분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번 대회를 여기서 마무리 할, 아주 그럴싸하고 내 자신에게 덜 미안한, 여러가지 변명거리들로 벌써 마음이 굳어 있었다.
DNF를 담당하는 진행 요원을 물어 보고, 그 앞에서 두 번을 망설였다.
세 번째, 담당 요원에게 DNF를 한다고 하니, 배번에서 선수정보가 담긴 바코드를 잘라낸다... 그 때 그 기분이란....ㅠㅜ
지금 생각해 보면 가장 아쉬었던 것이... 왜 남은 세 개의 오르막만 생각했을까... 왜 꿈에 그리던 샤모니에서 세상 멋지게 골인 아치를 통과하는 내 모습을 떠올리지 못했을까...
주최측이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밤 12시가 넘어 샤모니로 돌아왔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대회를 완주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한 느낌이 어떤가 물으신다면....
"고교 2학년때 순정만화에서 나온 듯 예쁜, 첫사랑 여학생을 만났다.
첫 눈에 반했고, 여학생도 싫지 않은 듯 마음을 받아 주었는데... 졸업하고 재수 1년에, 군대 3년까지 다녀오고 나니...
제대 후 드디어 만난 그녀는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지만.... 6년 전 그 느낌, 그 열정이 아닌....
그래서 결국 이루어지진 못했지만... 언젠간 한 번 더 만나보고 싶겠지?"
뭐 이런 느낌??? ^^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가보고 싶다. 대회든 여행이든....
마라톤이나 트레일러닝이나 어차피 두 발로 뛰는 여행이니깐....^^
* 3편에서는 재미 있었던 여행 이야기를 써볼까 합니다~ 언제 올릴수 있을지 모르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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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머신네 머싯써
앞으로 함께 이와 버금가는 스토리를 만들며 삽시다 빠샷 ㅎㅎㅎ
완주를 못해서,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였습니다~^^
앞으로 함께 이보다 더 멋진 스토리를 만들며 살아봅시당~!!!
댓글 감솨합니다~!
의지에 한국인이여~ 그 거대한 몸으로 그높은 산들을 오르락 내리락 참 대단하네
덕분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두다리 쭉펴고
한참 힐링하면서 읽고 있으면서도 쥐가 오면 안되는데 조마조마 걱정도 되고 웃고 있으면서 울고 있다는 말이 공감이 되네
최선을 다한 당신이야 말로 완주 주자요
멋쩌부네 👍👌
큰 응원 감사합니다~!
나름 의지의 한국인이라 생각했는데, 몸이 준비가 안되어 있으니 맘 같이 잘 안되던군요~
하지만 이 또한 좋은 경험이라 생각합니다. 다음에 또 기회가 된다면, 정말로 열심히 몸 만들고 준비해서 다시 도전해 볼까 합니다. 형님도 함께라면 더욱 좋을 것 같습니다~! ^^
후기 잘 읽었어요.. 인생은 여행과 같다와 같이 사십니다.
멋진 완주 후기 남기고 싶었는데, 많이 아쉬운 대회였습니다.
완주해서 얻은 것고 많았겠지만, 완주하지 못해서 얻은 것도 나름 많았다고 위안해봅니다.
다음에 형님과 함께 몽블랑을 뛰어볼 수 있는 기회가 그 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