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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국립공원을 이루는 삼각산, 도봉산과 더불어 서울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철 산행 대상지로 꼽히고 있습니다. 산림청 지정 한국 100대 명산 중 한 곳이며, 인터넷 산행 정보 사이트인 ‘한국의 산하’ 인기접속순위 9위에 오를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찾고 있지요. 산세가 험하면서도 자연경관이 수려한 관악산은 경기 오악(관악, 운악, 화악, 감악, 송악) 중 하나로 꼽히는 산이기도 한데요, 특히 연주대에 서면 발 아래로 서울시내 전경이 시원하게 펼쳐 지는 장관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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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산하 모임이 벌써 10번째란다. 가야산에서 모임할때 참석하고 3년 만에 와 보는 관악산 모임였다.
서울대입구에 내려 관악산행 버스를 타려는데 와~~ 정류장에 꼬리를 물고 줄로 이어져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사람들이 관악산에 가려고 다 여기에 모여있는 것 같이 좁은 공간이 북적거렸다.
아산에서 이상일 내외분과 회원분들이 벌써 와 계시다. 운영자님과 관리자님, 총무님과 수도권 회원님들이
도착하고 멀리 대구에서, 창원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순천에서 모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반가운 얼굴들의
만남은 악수와 끈끈한 정으로 맺은 인연이 10년이라는 세월앞에 서 있었다.
운영자님과 인사와 총무님의 산행일정을 소개하고 관악산으로 오른다.
오늘은 버스로 이동하여 5516번 종점에서 관악산으로 오르는 코스와 호수공원에서 깔딱고개로 올라 관악산
정상에서 자운암 능선으로 해서 서울대공대로 내려와 만남의광장의 관악산회관의 식당까지 다녀오게 된다.
한국의산하 10년 모임에.
2013년 5월 26일
관악산 만남의광장에 하나 둘씩 모여든다. 운영자님과 관리자님, 그리고 총무님 아산에서 제일 먼저 와 계신 이상일님 내외분과 회원님들. 서울에서 . 대구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창원과 순천에서 만남의광장이 북적이는 시끌벅적한 그 광장을 빼곡히 메우고도 모자라 꽉 채워졌다.
하늘도 푸르다. 볕도 어느덧 여름으로 와 있고 뜨거운 열기가 회원님들 인사속에 더 화끈 달아 올랐다. 관악산 정기를 받으려는 기세보다 반가운 악수는 끊이질 않았다. 그래 1년 만나고 2년 만나고 시간은 10년의 울타리는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정을 넘어 있었는지 모른다.
손수 농사지어 만든 쑥떡을 드는 순간 마음이 울컥한다. 대구에서 아침일찍 출발해서 여기까지 달려오신 분들의 마음을 알았다. 너무 멀기에 ktx를 타고 울산에서 창원에서 모였다. 그것도 모자라 하룻밤 딸래미 집에서 지내고 오신 순천에 님. 내 생애 최고의 슬픔에 어떨떨 거리던 그 시간이 스쳐간다. 은지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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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 정상은 같이 오르지 못했지만 계곡에 앉아 두런두런 나눈 이야기와 한 상 펼쳐진 식탁이 풍성하다. 몇 년만에 나누어 먹는 찬과 술의 향기가 퍼져간다.
어깨에 큰 짐이 되었는지 우린 그 마음까지 헤아리지 못했는가 보다. 만나서 반가운 마음만 있었지, 이제 자유로운 시간에. 장소에서 만남을 기약하면서 운영자님 말씀과 회원님들의 인사가 오겹살 구워 먹는 연기속에 피어 오른다.
큰 아픔을 이기고 얼굴환한 모습으로 보는 소년소녀의 반가움 많이도 커 있었다. 아픔이 컷기에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자라 10년이 지나면 더 커 있을 그가 가장 자랑스럽다. 내 눈물고인 눈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나는 2005년 태극종주의 산행기를 올리면서 큰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감동을 기억하기에 이렇게 인연이 되었다. 벌써 8년의 산행기가 많은 사랑을 받았고 힘을 얻었다. 소중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울타리가 한국의산하였다.
그래서 더 정이 가는 한국의산하를 사랑한다. 10년이 가고, 20년이 가고. 더 50년이 가도록.. 산에 오르고, 만날 수 있고 , 어느곳에서나. 오늘만 같아라. 요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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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악산을 소개하는 안내에서 보듯이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한양을 에워싼 산중에서 남쪽에서 뾰족한 관악산은 화덕을 가진 산으로
조선조 태조가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화기를 끄기 위해 경북궁앞에 해태를 만들어 세우게 한 [불기운의 산]이라는 유래가 있다고
했다. 고려시대의 강감찬 장군과 조선시대의 신자하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로 관악산의 정기가 뛰어나 많은 효자, 효부와 충신
열사를 배출한 명산이란다.
[산행코스]
관악산으로 오르는 등산로는 만남의광장에서 호수공원까지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걷게 된다.
큰 도로가 많은 인파로 꽉 메워져 산으로 오르는 길은 인산인해라는 말이 실감케 한다.
북한산연가에 회원님들과 두런두런 이야기 하면서 벽화에 그려진 관악의사계가 눈에 들어와
사진으로 담아 정리하여 보았다.
관악의사계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관악문화원(원장 김윤철)에서는 2009 향토사 대중화사업 일환으로 관악의 사계 春ㆍ夏ㆍ秋ㆍ冬을 발행했다. 春은 관악구의 꽃인 철쭉과 강감찬장군 기마동상을, 夏는 천연기념물인 신림동 굴참나무, 秋는 관악산 정상의 연주대, 冬은 봉천동 마애미륵블로 각각 표현했으며 관악산 입구에 테라코다 벽화로 만들어져 있다. 김윤철 원장은 관악의 사계는 내일의 문화중심 세대가 될 청소년들이 참가하여 지역문화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로 유서 깊은 관악지역에 있는 문화재와 자연을 탐방한 후 ‘그림으로 표현하는 관악의 사계’를 완성하였고 그에 얽힌 선현들의 유람기를 삽입해 관악산 입구에 테라코타를 설치하여 관악산을 찾는 구민과 시민들이 한눈에 지역문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한 것이라면서 이 작품을 응용해 관악의 사계라는 홍보용 책자를 만들었다면서 우리고장의 문화를 알리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서울미술고 학생들을 이끌면서 이 작업을 지휘한 오미숙 사무국장은 학생들이 놀토를 이용해 문화재를 둘러본 후 작품을 구상하고 테라코타 작업을 할 장소를 방문 스케치를 한 후 이천의 우당도예원에서 도판을 만들고 굽는 등 4개월여에 걸쳐 완성된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한 처음으로 시도한 작업이기에 상당한 연구와 노력이 요구됐다면서 문화체육관광부와 관악구에서 후원한 사업이라고 했다. 이 책자는 관악을 홍보하기 위해 연하장으로도 활용하는 한편 전국문화원에 배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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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 관악구의 꽃인 철쭉과 강감찬 장군의 기마도상
여름 : 천연기념물 신림동 굴참나무
가을 : 관악산 정상의 연주대
겨울 : 봉천동 마애미륵불에 글씨를 읽어 보니 깎아지른 절벽에 불상이 새겨져 있고 바위머리에 구멍을 뚤어 놀았네
란 김병구 선생의 관악산 유람기 중에서 적어 놓았다.
오늘은 바위머리에 구멍을 찾아 보기로 하자. 얼마나 힘이 세길래 바위에 구멍까지 뚫었을까..궁금해졌다.
호수공원으로 향하여 오른다.
길옆에 세워진 미당 서정수님의 시비가 가늘 길 나를 붙잡고 강감찬장군과 자하 선생의 흔적이 묻어 나 있는 시비다.
호수공원의 물줄기가 여름의 한더위를 잠시 잊게 하는 하기도 한다.
호수공원에 세워져 있는 紫霞亭 자화정을 지나게 된다. 자하(紫霞)가 누구인가. 찾아 보았다.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
본관은 평산(平山), 호는 자하(紫霞) 또는 경수당(警修堂), 자는 한수(漢叟), 할아버지는 신유(申嚅)이고, 아버지는 대사헌 신대승(申大升)이다. 어머니는 이영록(李永祿)의 딸로 1769(영조 45)∼1845(헌종 11)의 기간에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화가이고 서예가이다.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시와 서예 그리고 그림의 대가로 특히 시에 있어서는 조선 제일의 대가라고 불리울만큼 유명했다. 신위는 1799년(정조 23) 춘당대문과에 을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 : 당하관 중에서 제술과 강독에 의해 특별히 뽑힌 문신)에 발탁되었다. 1812년(순조 12) 진주 겸 주청사(陳奏兼奏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갔는데, 이 때 중국의 학문과 문학을 실지로 확인하면서 자신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로 삼아 중국의 학자·문인과 교류를 돈독히 했다. 그리고 1814년에 병조참지를 거쳐, 이듬해 곡산부사로 나갔다. 이 때 그는 피폐한 농촌의 현실을 확인하고 농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조정에 세금을 탕감해달라는 탄원을 하기도 하였다. 1816년 승지를 거쳐, 1818년에 다시 춘천부사로 나갔으며 춘천부사 재직시 그 지방의 토호들의 횡포를 막기 위하여 맞서다 파직까지 당하기도 한다. 1822년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당쟁의 여파로 다시 파직된 뒤, 곧 복관되어 1828년에는 강화유수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윤상도(尹尙度)의 탄핵으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불운을 겪기도 한다. 1832년 다시 도승지에 제수되었으나 관직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대산의 평신진 첨사로 오게 된다. 평신진은 우리고장 서산시 대산읍 화곡리 반곡마을에 소재하는 진지로 충청도 북서부 해안 방어를 주 임무로 하던 곳이다. 종 3품의 첨사(僉使)가 있었고 주변의 목장을 함께 관리했던 해안의 군사진지로 왜구에 대한 방어와 세곡미를 운반하던 선박의 보호 및 안전항해를 위한 인도를 주로 했다. 신위와 우리고장과의 인연을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찾아 볼 수 있는데 순조실록 32년(1832) 11월 1일조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도승지 신위(申緯)가 연전의 정세(情勢)로써 스스로 인책(引責)하니, 여러 차례 칙교(飭敎)를 내렸으나 끝내 나와서 숙사(肅謝)하지 아니하자, 하교하기를, “당초에 논척(論斥)을 당한 두 사람이 이제는 모두 밝게 분변되어 구애가 없이 되었고, 말한 자는 저절로 무망(誣罔)이 되어 날조(捏造)였음이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그 정세는 신원(伸冤)을 기필하지 않아도 저절로 신원이 된 것인데, 이제 때도 지나고 일도 끝나버린 뒤에 또다시 그 일을 끌어내어 억지로 인의(引義)하려 하니, 그것이 은총을 얻으려는 데 돌아감은 유독 생각지 못하는가? 연일 서로 버티고 응명할 뜻이 없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다. 정세는 정세고 분의(分義)는 분의인만큼 사체가 있는 바에 줄곧 용서할 수는 없으니, 도승지 신위를 평신 첨사(平薪僉使)에 제수하라.” 』 왕명으로 평신진 첨사로 부임한 신위는 그의 발자취로 대산에 있는 해월사에 편액시와 대산지방을 주제로 하는 한시 7편이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서울대학교에 있는 유명한 연못 자하연도 그의 호 자하(紫霞)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위는 관료로서 보다는 시와 서예, 그림 부문에서 더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사라져가는 악부(樂府)를 보존하려 했는데, 한역한 <소악부 小樂府>와 시사평(詩史評)을 한 <동인논시 東人論詩> 35수 그리고 우리 나라의 관우희(觀優戱)를 읊은 <관극시 觀劇詩>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를 가리켜 김택영(金澤榮)은 시사적(詩史的)인 위치로 볼 때 500년 이래의 대가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그림은 산수화와 함께 묵죽에 능하였다. 이정(李霆)·유덕장(柳德章)과 함께 조선시대 3대 묵죽화가로 손꼽힌다. 대표적 작품으로 <방대도 訪戴圖>와 <묵죽도>가 전한다. 또한, 서예 부문에서는 동기창체(董其昌體)를 따랐으며, 조선시대에 이 서체가 유행하는 데 계도적 구실을 하였다. 저서로 ≪경수당전고≫와 김택영이 600여 수를 정선한 ≪자하시집 紫霞詩集≫이 간행되어 전해지고 있다. [출처] 서산의 인물 - 자하 신위|작성자 취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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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시, 숲은 소설이란 단어가 한 음절로 함축되어 그림과 시로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도림천을 건너다 보면 옥류샘이란 샘이 있다. 표지판도 있어 샘으로 가 쳐다 보았으나 먹을 수 있는 샘으로는 기능을 잃어
버린지 오래된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보기 어려운 '회양목' (종명 '긴잎회양목' 별칭 '도장나무') 군락이 대표적인 자생지로 보전지역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회양목이란 어떤 나무인가.
젖혀진다. 앞면에 광택이 있으며 앞면 기부와 잎자루에 털이 밀생한다. 암수딴그루로 3~5월에 잎겨드랑이나 가지 끝에서 연한 노
란색의 꽃이 몇 개씩 모여 달린다. 암꽃은 3개의 암술머리가 있고 대개 가운데 위치하며 수꽃은 1~4개의 수술이 있으며 암꽃 주변
부에 둘러 핀다. 열매는 삭과로 난형이며 암술대가 뿔처럼 달린다.
제4야영장 앞 계곡으로 오르게 된다. 홍수로 인하여 계곡이 다시 재정비되어 있었다.
오르다가 정상 오르기를 포기하고 한국의산하 모임 10주년이란 프랑카드를 걸고 계곡으로 자리를 잡았다.
각자의 베낭에서 이것저것 꺼내 놓으니 한상 푸짐한 안주거리와 술이 우리의 즐거움을 더했다.
총무님과 북한산연가 카페의 한국인님과 고석철님 내외분, 이중짱님 모두가 7-8년의 산친구의 인연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다. 늦게 합류한 신경수님과 모스님과 은지까지 시간을 계곡에서 보내고 정상으로 내려
오는 분들의 시간에 마추어 만남의광장 식당으로 내려온다.
연주대가 계곡위에 시야가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한국의산하 모임에 왔다가 내려가고 그 다음에
못 오른 정상을 오르기 위해 다시 왔다. 날씨가 뜨겁다. 덥다는 것보다 후덥지끈하고 불볕이라
늦으막이 왔는데도 아직 해가 저물기에 이른가 보다.
하단 깔딱고개에 오니 철쭉나무에 달린 하얀표지기가 눈낄을 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지라도
내가 변하면 모든것이 변한다' 란 글씨가 깔딱고개에 쉬어가는 산객들에게 일깨워주는 것 같은 느낌
이랄까. '그래, 맞는 말이구나, 내가 변하면 모든것도 변한다'란 거꾸로 읽어 보아도 내 하기에 딸
린 말이련다.
깔딱고개 오르는 경사진 돌계단과 엉성한 돌들을 밟고 올라야 한다. 이마에 땀이 묻어나 있는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진다. 산에 핀 라일락꽃 향기같은 꽃내음이 어느곳에선가 날려온다. 길가에 핀 꽃이 무엇인지 몰라
도 아마 그 꽃이 이 향내음일지 몰라도 깔딱고개에 서니 이마의 땀을 씻을만큼 바람이 분다.
헬기장에 쓰여진 글들이 가득하다. 좋은말도 있지만 흉한 말도 쓰여있는 어느 누군가 국립공원에 이런 글을
쓰여놓은 사람들은 산에 오를 자격조차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숲이 우거진 녹음진 그위로 연주대가
가장 가까이 들어오는 길을 따라 연주대 오르는 길목에 연등도 달려있는 길에 정상을 두고 올랐다.
어린이대공원과 경마장과 과천시의 시가지가 죽어가는 소나무 사이로 사진을 찍었더니 청계산이 더 늠름한 모습
으로 서 있는것 같기도 했다. 청계산!, 나는 몇 년전 동그랑땡 33산을 개척하면서 밤중내내 걷다가 이른아침
새벽에청계산에서 하루해를 시작하는 모습을 보던 그림이 생각났다. 그래. 내 그런 산들의 묻어나는 산향기도
내 마음속에 묻혀져 언뜩언뜩 피어 나는거겠지.
연주대의 두 이야기가 연민을 불러 일츠키는 내용이 내 마음이 스르르 스치는 것만 같다.
양녕대군이 누구인가.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태종의 장남이며 세종의 형이다.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궁중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여 폐위되었고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아들이며 불교를 숭상하고 선가(禪家)에 적을 두면서 많은
불사를 주관하였던 왕자이다.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의 설화를 적어보자면
내용 :양녕대군 제()는 방탕한 짓을 해 태자 자리를 잃었지만, 성품이 호탕하여 주색과 수렵 이외에는 하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그 아우 효령대군이 절에서 큰 불공 행사를 주재하면서 형님인 양녕대군을 초청했다. 양녕대군은 사냥꾼과 활 쏘는 사람을 거느리고, 황견(黃犬)을 이끌고 몇 마리의 토끼와 여우를 잡아 절로 갔다. 예불이 시작될 무렵 사냥꾼이 짐승을 가져오니 고기 잡는 사람이 고기를 굽고 심부름하는 사람이 술을 부어 올렸다. 이어 사람들이 모두 부처님께 절을 할 무렵에 양녕대군은 의젓하게 술을 마시고 구운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아우 효령대군이 정색하고 요청하기를, “형님, 오늘만은 좀 참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하고 말했다. 양녕대군은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하늘로부터 복을 받았으니 고생할 필요가 없다. 살아서는 임금의 형이고, 죽으면 부처의 형이 될 테니 걱정이 없도다.”라고 했다. 이것은 효령대군이 불교를 열심히 믿으니 죽어 부처가 된다는 뜻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양녕대군-효령대군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한국설화 인물유형), 2012, 한국콘텐츠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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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대는 언제 보아도 멋지다. 녹음진 나무들 위로 빼어난 암자는 늘 산객들의 눈을 끈다.
관악산의 제일 멋진 모습이 이곳에서 담는 연주대의 모습일 것이라고 말할수 있으리라.
얼마 전 내 고향친구의 작품인 소요산아래 박물관에서 보았던 연주대가 생각나서 같이 기록에 넣어 보았다.
정상의 축구공의 정체는 기상레이더였다는 것, 멀리서 보면 축구공만 보아도 관악산이라는 걸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상징물이다.
[기상레이더와 기암]
관악산 정상의 사람들이 한산했다. 늦은 시간에 올라왔던 탓에 늘 붐비어 정상에서 사진 찍어 보려던 곳은 모델로 분주했건만
널따란 암반위 몇몇만 이 산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았다.
정상에는 과천시의 시가지 설명이 있고
정상석을 앞에두고 기상레이더와 기암과 있다.
관악의사계에서 보았던 김병구 유람기 중에 나오는 '바위머리에 구멍을 뚤어 놀았네'가 이 구멍이 아닐까,
둥글고 크다. 물이 마르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더운날에도 고여 있으나 깨끗하지 않다.
서울시의 사당동쪽으로.
관악산의 삼각점도 찾아 보았더니 안양 23, 1976 재설인 것으로 2등급이었다. 영산전에 들러 부처님께 인사드리고
내가 좋아하는 찹쌀로 만든 떡한조각 공양하고 정상을 내려왔다.
구멍뒤로 레이더와 기암뒤로 삼성산도 보였다. 너무 늦어 자운암능선으로 가려 했는데 암릉이 위험하여
그냥 자운암능선 지능선으로 내려가야 겠다.
레이더뒤로 지능선을 따라 내려온다. 그래도 한눈에 요기가 되려는지 정상을 한 번 뒤돌아 볼수 있을만큼
바위도 있다.
자운암능선의 멋진 모습을 담아보기도 하고
내려오면서 가 보지 못한 오늘 가려 해던 발걸음을 못한게 못내 아쉬운지 눈은 그곳으로 고정되어지고
있었다. 자운암, 서울 근교에 사는 터라 맘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인데 내 발걸음은 어째서인지 관악
산은 멀어 있었다. 자근자근 혼자서 지능선을 내려오니 올랐던 그 길과 만난다. 먹을 수 있는 식수에
서 물 한통을 채워 서울대공과대 쪽으로 걸어 5516번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한국의산하 모임 10년 산행을 하고 내려와 만남의광장에 있는 관악회관에 정상에 올랐던 분들이 모여든다.
지친 기색은 커녕 기새 등등한 모습으로 서로가 서로의 인사로 또 맞는다. 운영자님의 모임에 관한 계획
이 소개된다. '이제 정기 모임은 이것으로 끝나고 비정기모임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어느곳, 어느 날 만나든 언젠가 또 변함없는 이 모습으로 만날 수 있지 않을까한다. 큰 아픔을 딛고 이겨낸
천지연과 천지인의 남매를 보면서 난 눈물이 나는걸 참아야 했다. 어린 소녀, 소년의 당당한 모습이 오늘따
라 자랑스러웠다. 오겹살과 소주로 오가는 정에 피어나는 연기가 솟아 올라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고
50년이 지나도 이렇게 만날 수 있고 산에 갈 수 있도록 하는 희망사항이 한 장의 사진속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두가 떠나간 자리로 채울 수 있었다.
내가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첫댓글 관악산의 역사와 인물 자료 잘 봤어요.
나무는 시고 숲은 수필이면 난 무명인이네
난 자연에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할 수 있다.
하나뿐인 지구를 사랑해야한다.
후손들에게 물려 줄 유산이다
유월의 날씨가 삼복더위 같다.
더운데 고생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