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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고구려
▲ 러시아의 시베리아 정복 시기와 나선정벌. 위키피디아 제공 지도를 이용하여 작성. |
지난회에 살펴본 바와 같이 1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한반도와 일본열도의 주민들은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과 북을 표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당시는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부분에 자리한 유럽 지역의 국가들이 바다와 육지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문순득과 다이코쿠야 고다유 모두 여러 나라들의 호의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지만, 이들 표류민을 귀환시킨 국가들이 결코 순수한 선의에서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유럽 국가들이 유라시아 동부지역에서 궁극적인 타깃으로 삼은 지역은 청나라였으며 특히 일본열도는 그 중간 기착지로서 주목받고 공격받았다.
일본열도에 가장 큰 관심을 보인 유럽 국가는 러시아였다. ‘거대한 암벽’(유리 세묘노프 ‘시베리아 정복사’ 7쪽)처럼 유럽인의 길을 가로막은 우랄산맥을 넘어 16세기 말부터 시베리아 진출을 시작한 러시아 세력은, 지도에서 보듯이 50여년 만에 유라시아 동해안의 오호츠크¡¤캄차카에 도착했다. 이러한 경이적인 정복 속도는, 몽골제국의 몇몇 후신(後身) 국가들 이외에는 시베리아에서 러시아의 침략을 저지할 토착 세력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17세기 당시 러시아 세력이 청나라의 세력권을 잠식하는 데 실패한 것이나, 훗날 알래스카(Alaska·Аляска)와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세력이 미국의 견제를 받고 이내 물러난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574년에 러시아 황제로부터 시베리아 지역을 위임받은 스트로가노프 가문은 코사크라 불리는 무력 집단을 고용하여 빠르게 지배지역을 넓혀 나갔다. 이들이 얻고자 한 것은 ‘부드러운 금’이라 불린 검은 담비, 수달 등의 가죽이었다. 특히 코사크 가운데 유명한 사람은 잉카제국을 정복한 프란시스코 피사로 곤살레스(Francisco Pizarro Gonzalez)에 비견되는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였다. 1581년에 우랄산맥 동쪽으로 원정을 시작하여 1584년에 전사하기까지 그는 오늘날 시베리아의 3분의 1을 정복했다.
예르마크가 죽은 뒤에도 코사크들은 ‘아직도 점령되지 않은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모두 점령한다’(앞의 책 367쪽)는 신조로 오브강¡¤예니세이강¡¤ 레나강 등 시베리아의 거대한 강의 물줄기를 따라 동쪽으로 동쪽으로 나아갔다. 이들 코사크가 대포와 총을 앞세워 선주민의 소규모 저항을 진압하고 요새를 건설하면, 1582년부터 시베리아로 보내진 러시아 유배민들이 지배의 기반을 굳히는 과정이 그후 수백 년간 되풀이되었다. 내륙 유라시아에서 러시아 세력이 대포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무렵 유라시아 동부에서는 명나라의 대포와 일본의 조총이라는 양대 신무기가 임진왜란 기간에 한반도에서 맞붙었다. 바야흐로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포성이 유라시아 대륙의 곳곳에서 울려퍼지고 있었다.
1632년 러시아는 야쿠츠크를 건설한 뒤 세 방향으로 확장을 이어나갔다. 하나는 동쪽으로 베링해협을 건너 알래스카로 향하는 방향이었고, 또 하나는 캄차카반도·쿠릴열도 등 오호츠크해의 북쪽 연안지역으로 향하는 방향이었으며, 마지막은 동남쪽으로 내려가 아무르강(흑룡강)에 이르는 방향이었다. 특히 러시아령 시베리아에서 전체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던 식량을 아무르강 유역이 공급해줄 수 있으리라는 환상이 코사크들을 이끌었다.
러시아인 최초로 아무르강을 탐험한 것은 1643~1646년의 바실리 다닐로비치 포야르코프 원정대였다. 포야르코프에 이어 1650~1651년에는 예로페이 파블로비치 하바로프가 거란인의 후예라고도 하는 다우르족(Daurs)의 알바진 요새를 점령했다. 알바진 요새의 점령에 이어 하바로프는 아무르강 중류에 아찬스크 요새를 건설했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하바로프스크이다. 오늘날 아무르강 하류 일대를 영유하고 있는 국가가 한국이나 중국이 아닌 러시아인 배경에는 하바로프의 군사 활동이 있다고 하겠다. 당시 러시아에서도 ‘예르마크가 시베리아 전체에 대한 문빗장을 올렸다고 한다면, 하바로프는 아무르강에 대한 문빗장을 올렸다’(앞의 책 201쪽)라며 그 의의를 높게 평가했다.
그러나 하바로프의 선구적 활동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오늘날과 같이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일대를 지배하게 된 것은 1858년의 아이훈조약과 1860년의 베이징조약 이후였다. 이처럼 러시아가 200년 이상 아무르¡¤우수리강 일대에 대한 지배를 실현하지 못한 것은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이 자기 민족의 발상지인 만주 지역의 외곽에 자리한 ‘외만주(外滿洲·Outer Manchuria)’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1650년대에 무력으로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의 조총부대도 1654년과 1658년의 두 차례에 걸쳐 청나라 군과 연합하여 러시아 측을 공격하여 승리했으니 이것이 바로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나선정벌의 전조가 되는 전투가 1652~1653년 사이에 아찬스크에서 일어났다. 1652년에 청나라 군이 하바로프의 아찬스크 요새를 포위 공격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듬해 봄에 아무르강의 얼음이 녹자 하바로프는 스스로 요새를 파괴하고 퇴각했다. 하바로프에 이어 오누프리 스테파노프가 이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전개하자 청나라 측은 두 차례에 걸쳐 조선에 조총부대의 파병을 요청했다. 이에 1654년의 1차 파병 때에는 변급(邊岌)이, 1658년의 2차 파병 때에는 신유(申瀏)가 지휘관이 되어 아무르강 유역에서 청나라 군과 함께 러시아 측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특히 2차 파병 때에는 러시아의 알바진 요새가 함락되고 스테파노프가 전사하는 등 청¡¤조선 연합군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1644년에 청¡¤조선 연합군이 이자성 농민군을 격파하고 베이징을 점령한 데 이어 조선군이 또다시 한반도를 벗어나 그 실력을 확인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조선군은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는지 알지 못했다. 2차 파병군의 지휘관 신유의 자필 기록인 ‘북정록(北征錄)’ 첫머리에는 ‘북쪽 바닷가에 한 떼의 도적 무리가 있는데 그 소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오직 배로 집을 삼고 흑룡강 상하를 오르내린다’(박태근 편 ‘국역 북정일기’ 55쪽)고 적혀 있다. 이 기록의 다른 곳에서는 러시아 코사크를 ‘노추(虜酋)’ ‘오로소(吳老素)’와 같이 ‘러시아’와 비슷한 발음으로 적고 있지만 ‘적들은 바다(즉 오호츠크해-필자) 쪽에서 강을 거슬러 올라온 것이 아니라 흑룡강 상류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다. 그 나라가 흑룡강 상류에 있는지 또는 육로로 나와 흑룡강에서 배를 타고 내려왔는지 좌우간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흑룡강의 상류는 몽골 지방에서 흘러나온다고 하니 이렇게 보면 그 나라는 강 상류에 있는 것 같지도 않다’(같은 책 98쪽)고 적고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끝끝내 알지 못했다. 아마 연합군을 구성한 청나라 측도 러시아 세력의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는 않았을 터이다.
이처럼 누구와 싸워 이겼는지 불확실하고 전투도 비교적 소규모였기 때문에 신유의 조선군을 비롯한 당시 조선 민관은 나선정벌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이 자발적으로 출정한 것이 아니라 청나라 측의 요청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전쟁을 치렀다는 사실 역시 나선정벌에서의 승리를 평가하지 않게 된 요인이었을 터이다.(계승범 ‘조선시대 해외파병과 한·중관계’ 푸른역사)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 양국에서 나선정벌의 기억은 의외로 오래 이어졌다. 조선의 경우 후대에 이 전투를 소설화한 ‘배시황전’에서 ‘삼국지’의 적벽대전과 같이 아군이 아무르강에서 화공법을 써서 승리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어서 어딘지 모르는 먼 곳에서 누군지 모르는 상대와 싸워 이겼다는 기억만은 지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청나라의 경우는 1658년의 2차 전투에서 포로가 된 러시아 코사크들이 베이징으로 옮겨져 후대까지 그 후손이 남아 있었음이 보고되어 있다.(강인욱 ‘나선정벌, 그리고 알바진 요새의 후손들의 뒷이야기’, http://blog.naver.com/kanginuk/90177876974)
1658년에 청¡¤조선 연합군이 승리한 뒤 러시아 측은 한동안 아무르강 유역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1680년대에도 알바진 요새를 둘러싼 러시아와 청나라의 공방전이 이어지다가 1689년에 양국이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으면서 사태는 일단락된다.
명나라의 잔존세력인 남명(南明) 정권의 저항과 삼번(三藩)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북방에 신경을 쓰지 못하던 청나라 측은 이 시기에 이르러 남쪽의 상황을 종결시키고 서북쪽에 군사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서부 몽골에서 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신장위구르자치구), 티베트에 걸친 지역에는 최후의 유목제국이라 불리는 준가르가 세력을 키우고 있었으며, 청나라는 제국의 명운을 걸고 준가르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18세기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청나라의 승리로 끝나게 되는 이 장기간의 전쟁에서, 청나라 측은 준가르인을 절멸시키다시피 했다.(피터 퍼듀 ‘중국의 서진’ 359쪽) 준가르인이 학살되어 비어 버린 땅에는 위구르인 등이 이주하여 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분쟁의 씨앗이 뿌려지게 된다.
청나라와 러시아 가운데 상대방과의 관계개선을 더욱 절실히 필요로 한 것은 러시아 측이었다. 아무르강 일대는 그들이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농업 생산력이 높은 땅이 아니었기에 아무르강 일대를 포기하고 중국과 교역관계를 맺는 것이 러시아 측으로서는 훨씬 이득으로 판단되었다. 청나라 측은 러시아에 대해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는 못했으나 러시아가 준가르 세력과 결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 측과 조약을 맺기로 하였다.
네르친스크조약은 오늘날의 중국 지역에 존재했던 국가가 외국과 처음으로 평등하게 맺은 조약이었다. 이는 청나라의 지배층인 만주족이 준가르 세력을 절멸시키고자 러시아 측에 대해 중화질서에 입각한 상하관계를 요구하지 않고 실리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서울대학교 구범진 교수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민음사)에서 상세하게 검토하고 있듯이 청나라의 지배집단인 만주족은 준가르, 즉 몽골족의 문제는 피지배층인 한족이 간여할 사안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네르친스크조약의 추진 과정에서는 한족이 배제되는 대신 예수회 신부들이 활약하였고 조약문 역시 문어인 중국어 즉 한문을 제외한 만주어¡¤러시아어¡¤라틴어로 작성되었다. 한편 나선정벌로부터 150년경 뒤인 1804년에 통상 관계 수립을 요구하기 위해 일본에 온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 역시 문어 중국어를 제외한 러시아어¡¤일본어¡¤만주어로 작성된 국서를 지참하고 있었다. 이들은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문어 중국어로 상징되는 중국이 더 이상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레자노프는 일본 측이 교역관계의 수립을 거부하자 1806~1807년에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였으니 그전까지 13세기의 몽골¡¤고려 연합군 이래 본토에 대한 외국 세력의 공격을 받아본 적이 없던 일본 열도의 민관은 이후 심각하게 위기감을 품게 되었다. 중국 대륙 이외에도 일본열도를 위협하는 세력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등장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무력충돌을 통해 러시아는 항구적으로 유라시아 동부에서 이익을 다툴 플레이어임을 이 지역의 다른 국가들에 확인시켰다.
조선은 러시아군과 무력충돌하면서도 끝끝내 그들이 어떤 존재인지 알지 못했으며 이들이 향후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리라고는 더더욱 예견하지 못했다. 조선의 민관에 중요한 외국은 여전히 중국과 일본, 특히 중국뿐이었다. 이를 ‘삼국지’에 비유하자면 조선인들은 자국을 ‘삼국지’ 속의 위¡¤촉¡¤오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거나 위¡¤촉¡¤오 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中華)’적인 존재로 간주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인들이 진정으로 알아야 할 외국은 중국 또는 중국과 일본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에 러시아¡¤영국¡¤프랑스¡¤미국과 같은 서구 열강이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이는 일본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일본인은 자국을 천축(인도)¡¤진단(중국과 한국)¡¤본조(일본)의 삼국 가운데 하나이거나 자국을 일본열도 바깥의 ‘오랑캐’와 대비되는 ‘중화’로서 간주했다. 다만 일본인들은 러시아와의 접촉과 충돌을 통해 ‘삼국지’적 세계관을 벗어나게 되었으나 한반도는 ‘삼국지’적 세계관을 탈피하지 못한 채 20세기를 맞이하였다.
어쩌면 이런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어떤 한국인들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알아야 할 가치가 있는 나라는 미국뿐이거나 미국과 중국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현대 한국의 역사에서 러시아와 일본이라는 존재를 과소평가하고 미국과 중국의 존재를 과도하게 평가하는 바람에 중요한 판단을 그르치는 경우를 적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통일 문제에서는 미국과 중국만이 아닌 러시아와 일본 역시 중요한 플레이어로서 기능할 터이지만, 한국의 일각에서는 러시아와 일본의 중요성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확인된다.
진수(陳壽)가 쓴 정사(正史) ‘삼국지’도 아닌, 극도로 단순한 세계관으로 이루어진 소설 ‘삼국지연의’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다 보니 일부 한국인들은 수많은 플레이어들로 이루어진 현실세계를 냉철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굳이 소설을 읽고 세상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필자는 ‘삼국지’보다 차라리 ‘열국지’나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을 권하고자 한다. 아무튼 ‘삼국지 3번 읽은 사람과는 말도 하지 마라’는 식의 주장이 더 이상 통용되지 않게 될 때 한반도의 시민들은 비로소 수많은 플레이어들이 현란하게 얽혀 전개되는 국제관계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능란하게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다음회에도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 등장한 러시아의 문제를 다룬다. 이번 회 연재 집필에 도움을 주신 경희대학교의 강인욱 선생님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