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의 10월항쟁
1945년 8월 15일, 거리는
해방에 감격한 사람들 모여 새나라 건설을 짜느라 분주했다
숨어서 찍소리 못하던 친일경찰, 친일관료, 친일 지주들
미군정이 들어와 곱다시 제자리에 불러 앉혔다
화북에는 도로 친일의 깃발이 걸렸고,
공포의 깃발꼬리는 보현산 바람에 끼득끼득 비웃음을 날렸다
애국자와 면민들이 칼숨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미군정에 줄 선 친일파들은 살아 남으려 간 쓸개를 다 떼었다
하곡공출을 족치고 호열자까지 덮쳤다
자천리 장날, 동녁이 트일 때 고을로
줄을 지어 플랜카드를 날리면서 영천의 시위대가 행렬해 들어오자
더럽혀진 농촌을 구하려 농민들이 너나없이 몸뚱아리를 내밀었다,
1946년 10월 3일이었다
두건을 두르고, 짝대기나 몽둥이를 든 청년 시위대,
꽹과리를 치며 해방 세상을 부르짖느라 눈이 멀었다
‘짝대기패’ ‘몽둥이패’라 불리는 이들은 친일 악덕 지주집를 공격했고
친일경찰 두 명을 죽인다
정도영(후일 제헌의회 국회의원)의 아버지 정문사(소작료를 가혹하게 징수하는 악덕 친일 지주) 집을 습격하여 집을 불태우고 일가들을 죽인다
정부자의 집은 불에 탔지만 김부자의 집은 불에 타지 않았다.
“자천에 김부자 하는 사람이 옛날에 천석꾼인데...그 사람들은 다른 큰 부자 집들 불(에) 다 뺏기고 그래도 김부자 집은 여전하이 있다. 그 양반은 부자라도 곡수도 많이 안 대고, 인심을 얻어 노니 자천 주민들이 그 집에는 손도 못 대구로 했다.”(화북면 상송리 김명진 증언)
그러나 친일경찰은 이리눈까리 불을 켜서 항쟁자를 색출하고
화북의 주동자인 임종포, 정재섭, 구홍서, 김치형과 그 가족들을
자천리 오리장림에서 학살한다
영천 북부 저항의 중심, 구전리
경찰과 친일졸개들의 등살로
산악지대로 몰려간, 초기 빨치산인 야산대가 항쟁의 불씨를 살린다
보현산, 경림산, 화산, 기룡산을 끼고 있는 화북,
그 중심에 ‘영천의 모스크바’ 라고 불리는 구전리가 있었다
황보집, 황보생, 황보선 형제들, 조희림 등 경북 진보 지도자들과
그 영향 하의 청장년 층 대부분이 따르자
사천리, 삼창리 등 이웃 지역을 동무처럼 끼고
보현산 일대는 굳센 주먹과 타는 눈초리 등등한 무장투쟁으로 번졌다
구전리의 경제적, 정치적 지도자인 황보집은 대지주이고, 황보家의 종손이다
황보家는 집성촌이었으므로, 봉건적 절대적 영향에 있었다
일본 유학에서 사회주의를 배워, 소작인들에게 평등사상을 심어주고
사재로 학교를 짓는 등 계몽활동을 하니 마을민의 심정은 폭발적이었다
주로 대구에 거주하면서 항일운동을 하던 그가 고향에 들어오면
‘이쪽에는 이승만이가 아니라 황보집이 대통령이다’라고 인산을 이루었다
대구 진보계 신문인 민성일보의 사주이면서 화북지역 저항의 정치적 구심이었던,
그러나 그는 10월항쟁 이후 행방불명되었다
황보집의 동생 황보생은 대구의 형을 대신해
지역의 중심적 역할을 맡았는데, 1949년 자천리 다리에서, 군경에 총살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하였다고 한다(여운형의 인민공화국)
10월항쟁 이후 조직된 야산대는 49년까지 활발했다
팔공산-보현산-화산-기룡산-운주산-채약산으로 움직였고
이 통로에 구전리 뒷산인 경림산이 놓여 있어, 마을과 연결되었고
경찰의 탄압은 구전리를 피로 물들였다
구전리 학살
1946년 10월항쟁 이후, 1948년 2.7구국투쟁에도 적극 가담한 주민들은
군경의 탄압이 거세지자 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된다
1949년 11월부터 1950년 2월까지 군경합동으로 보현산 일대를 이 잡듯 한다
마을에는 호림부대 주둔 사무실이 있었고
밤에는 철수했다가 아침에 주민을 모아놓고 야간에 있었던 일을 추궁한다
무차별 구타와 고문, 입산한 사람들과 이와 연결된 마을민 대부분 학살당한다
1950년 2월부터는 대대적인 선무공작이 있었다
‘입산자들이 자수하여 보도연맹에 가입하면 살려 준다’는 삐라가 온산을 하얗게 덮었다
겁 먹은 야산대가 내려 와 자수하고
이들과 지역 주민들은 보도연맹에 강제 가입한다
이들은 정부의 시책에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때 포도시 학살당한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주로 황보가와 이 집안에 시집온 여인들이었고 타성받이도 여러 있었다
110호, 한 마을에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포함하면, 남녀노소 50명이 넘게 죽었다
강대걸 강대洙 황보福 강대守 강을구 심의석 신상백 박순기 신상순 이선봉 신상진 이영석 신상철 이원목 강칠용 이성만 조만억 이원목 조삼춘 조희림 조희완 황보강 황보강 황보경 황보변 황보남철 황보석 황보목 황보수 황보범 황보순 황보馥 황보유 황보상 황보종 황보예 황보칠암 황보연 황보鎬 황보원 황보昊 황보진 황보훈 황보준 황보희 (이상 45인)
이 중 어린, 황보연(여, 10대), 황보준(10대)도 죽임을 당했다
황보가는 1세조인 영의정 황보인이 사육신과 함께 하다가 일족이 몰살되고
290년 만에 다시 충신으로 복권된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는다
증언
학살당한 황보유의 아들 황보문(1937년생)은 당시 상황을 진술한다
“우리 마을의 황보집씨는 지주라기보다는 리더라. 학식이 많고 마을에 학교도 세운 선구자라서 마을 사람들이 많이 따랐어. 그런데 그 사람이 좌익이었단 말이야. 10월사건 나고 이것이 드러나니 경찰과 우익이 와서 사람들을 잡아가고 불을 지르는 거라. 그러자 마을에서 이데올로기 선전하던 지식인들은 다 산으로 가고 가난한 무식자들만 남았어. 그런데 산에 간 사람들이 친인척에게, ‘야야, 내가 식량이 떨어졌는데 좀 가져 오너라.’라고 하면은 정과 천륜관계를 끊지 못하고 제 목숨을 잃는 한이 있더라도 명령을 따르는 거야.
그러면 마을에 또 풍파가 일지. 당국에서 이것을 알면 군인 경찰이 와서 남녀노소 모두 불러 학교 운동장에 엎어놓고는 ‘여기는 완전히 빨갱이 마을이니 한두 명을 가려낼 거 아니다’라고 하며 때리니 모두 허연 삼베옷 입은 채 일렬로 엎어져서 맞고 고문이 끝나면 각자 매 맞은 식구들 둘러메고 가 눕혀놓고 어혈을 푸는데, 그 당시에는 장독을 풀려면 똥물을 먹어야 한다 해서 집집마다 똥물 거르고 받는 게 일이라. 그런데 (어느 날) 경찰이 자수하면 고문 안하겠다고 선전하는 거라. ‘산에 음식 날라주고 빨갱이에게 동조했던 사람은 보도연맹 가입해라. 그러면 괴롭히지 않겠다.’라고 했어. 결국 산사람에게 간장 한 접시 준 사람까지 자수하다보니 마을 사람 대부분이 보도연맹에 가입했어.”
황보문은 보도연맹 체포에 대해 이렇게 진술한다
“1950년 8월 초 소개 명령이 난 뒤 동민들이 전부 다 피난 보따리를 싸서 마을을 나가는데 삼창지서 배주임을 비롯한 경찰과 구전동 동장이 마을 입구에 서 있었다. 그들은 보도연맹 명부를 쥐고 피난민 중에 보도연맹원들을 싹 다 뽑아서 데려갔다. 이때 실제로 보도연맹에 가입한 사람도 끌려가고 가입하지 않았는데 억지로 끌려간 사람도 많았다. 나는 부모 동생과 함께 피난 나가다가 우리 아버지 황보유와 마을 사람들이 배주임에게 끌려가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물론 이들은 모두 학살되고 말았다
정시명 가문의 몰락
정정웅의 아버지 정시명(정진용, 정용식)은 일제강점기 때
영천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천지부 활동을 한, 영천의 대표 독립운동가였고
이로 인해 왜놈들에게 잡혀 7년형을 살고,
각기병이 걸려 180센티미터 장신이 리어카에 실려 집으로 왔다
8.15 이후에는, 영천인민위원회 초대위원장, 경북인민위원회 노동부장,
해방 직후 경상감영공원에 있던 경북정치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금호강변 들 넓은 영천시 대전리,
오천 정씨 큰 부자집 아들로
일본 명치대 유학 가서 사회주의를 배워,
조선 독립에 이롭게 쓰고자 했지만,
해방된 조국에서 조차 죄인 취급
마침내 1946년 10월 영천대항쟁의 주역으로 나서서
1950년 한국전쟁 초기에 임고면 효리에서 학살 당한다
그러면 그렇지, 친일파들이 살려둘 리 없었다
많고 많던 재산 다 잃고, 아들 셋도 잃었다
다시 걸려온 전화
황보희 할머니는 어제 방문한 일행 한 사람에게 전화를 했다
“강선생님*, 우리 친하지요, 저는 강선생님 믿니데이”
“그럼요, 그럼요, 황여사, 지한테 뭐 할 말씀 있십니꺼?”
전날 일행이, 몇 푼 거두어 추석에 쓰라고 준 것 때문에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줄 알았다,
이제는 한마디 증언을 구스르듯 묻는다
그런데 “강선생님, 어디 가서 내 안다하지 마고, 같이 온 사람에게도 당부해주세이-”
“예? 아, 예,......아, 아, 잘 알았심더”
고향 사람의 눈물
조국의 품 속에서 고통의 늪이 된, 구전리를 찾아갔다 몇 번째인지 모른다
마을 점방에서 황보家, 몇 안남은 일족을 다시 만난다
“집자 어른 때문에 우리 집안이 다 망했어, 그 어른은 인격자야, 풍체 좋고 학식이 풍부하고, 좋은 일 많이 했지만... 좋은 세월 태어났으면 대통령 감인데...”
황보집의 막내 따님 황보희가 살아 계신다고 전하니
깜짝 놀라는 노인의 꺼진 눈자위가 불룩불룩거렸다
“천석군 집자 어른 막내딸, 이쁜 여고생, 당시 마을 청년들 선망의 대상이었지...
저기 마을 입구 언덕쯤에서... 저기 저쪽 편에서 학살된 줄 알고 있었는데......”
*강창덕(인혁재단 계승사업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