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정체성을 일깨워준 가수-선우일선
기생을 다른 말로 해어화(解語花)라 부르는 것을 아십니까?
말귀를 잘 알아듣는 꽃이란 뜻입니다. 이 해어화들은 조선의 전통 궁중가무 개척자들이요, 선구자였습니다.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전역에는 권번이 개설 운영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평양권번의 명성은 드높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다시 떠올려 보고자 하려는 기생출신 가수 선우일선(鮮于一扇)도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 출신입니다. 최창선이란 본명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1919년 평남 대동군 룡성면에서 태어난 선우일선은 온화한 성격에 비단결처럼 부드럽고, 윤기가 자르르 느껴지는 목소리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마치 옥을 굴리는 듯 고운 선우일선의 어여쁜 성음에 반한 남정네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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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일선 데뷔직후 |
지금은 누렇게 변색된 당시 가사지(歌詞紙)와 유성기음반의 상표를 통해 선우일선의 생김새를 짚어봅니다. 얼굴은 동그스름한 계란형에 머리는 쪽을 쪄서 한쪽으로 단정하게 빗어 넘겼군요. 눈썹은 제법 숱이 많고 검습니다. 그 밑으로 가장자리가 아래로 드리운 눈매는 선량한 성격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 눈은 방긋 미소를 머금고 있습니다. 마치 봄비에 젖은 복사꽃잎처럼 말입니다.
아담하게 얼굴의 중간에 자리 잡은 코는 얼굴 전체의 윤곽에서 안정과 중심을 유지하면서 분위기를 살려줍니다. 인중은 다소 짧아 보이는데, 그 입술의 선은 얼마나 어여쁜지 모릅니다. 아래위 입술은 부드럽게 다물려 있습니다만 그것이 결연한 함구(緘口)가 아니라는 사실을 압니다. 전반적으로 은은한 느낌을 주는 선우일선의 용모는 보면 볼수록 가슴 설레고 서늘해집니다. 하얀 깃 동정을 곱게 달아 여민 목선이 아름답고, 저고리는 부드러운 흑공단으로 지은 듯합니다.
자, 이만하면 1930년대의 기생가수 선우일선의 용모가 충실하게 전달이 된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직접 만날 수 없는 아쉬움은 미련처럼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선우일선의 그 은쟁반에 옥구슬 굴리는 듯한 노랫소리를 한번 들어보아야겠습니다.
독일 계열의 레코드사였던 포리도루는 1931년 서울에 영업소를 설치합니다. 그리고 1932년 9월부터 조선의 음반을 만들게 됩니다. 당연히 한국인 가수가 필요했지요. <황성옛터>의 노랫말을 지은 왕평(王平, 1908∼1941)과 여배우 이경설(李景雪)이 문예부장을 맡았습니다. 당시 포리도루에서는 조선 전역을 돌아다니며 가수를 모집했습니다. 평양기생 출신의 선우일선도 이 무렵 발탁이 된 것입니다. 선우일선은 1934년 포리도루레코드사를 통해 가수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이때 데뷔곡은 시인 김안서(金岸曙, 1896∼?) 선생의 시작품에 작곡가 이면상(李冕相, 1908∼1989)이 곡을 붙인 <꽃을 잡고>였습니다. 국악기 반주에 맞추어 높은 톤으로 엮어가는 선우일선의 이 노래는 이제 신민요의 고전으로 기록될 만한 작품이란 평판을 받습니다.
하늘하늘 봄바람이 꽃이 피면
다시 못 잊을 지낸 그 옛날
지낸 세월 구름이라 잊자건만
잊을 길 없는 설운 이 내 맘
꽃을 따며 놀던 것이 어제련만
그 님은 가고 나만 외로이
-<꽃을 잡고>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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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일선 전성기 시절 |
작사가이자 뮤지컬 작가였던 이부풍(李扶風, 1914∼1982)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선우일선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나라에서 옥퉁소 소리를 듣는 듯했다. 그녀의 아름답고 청아한 음색은 신민요라는 경지를 한층 더 밝혀주었다.”고 했습니다. 북한에서 발간된 자료 『계몽기 가요선곡집』(2001)에 의하면 왕수복의 부드럽고도 독특한 가창력을 “설레이는 바다”에 견줄 수 있다면 선우일선의 가창력을 “노을 비낀 호수”로 비견하고 있습니다. 은은한 울림이나 아련함이 설레는 음색을 이렇게 표현한 듯합니다. 노래의 형상이 은근하면서도 운치가 있고, 마치 비단결처럼 부드러우며 아름답다고 해서 생겨난 비유적 표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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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일선 조선팔경가음반 |
선우일선은 줄곧 서도민요의 구성지고도 애수에 젖은 분위기가 느껴지는 신민요 창법으로 불렀는데, 이 때문에 포리도루레코드사는 왕수복(王壽福)을 포함하여 세간에서 ‘민요의 왕국’이란 평을 들었습니다. 당시 취입한 대표적인 신민요곡으로는 <숲 사이 물방아>, <원포귀범>, <영춘부>, <원앙가>, <느리게 타령>, <청춘도 저요>, <지경 다지는 노래>, <가을의 황혼>, <별한>, <압록강 뱃노래>, <남포의 추억>, <무정세월>, <그리운 아리랑>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선우일선의 노래를 단연 대표하는 노래로는 그녀의 출세작이기도 했던 <조선팔경가(朝鮮八景歌)>(1936.1)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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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팔경가'가사지 |
에 금강산 일만 이천 봉마다 기암이요
한라산 높아 높아 속세를 떠났구나
에 석굴암 아침 경은 못 보면 한이 되고
해운대 저녁달은 볼수록 유정해라
에 캠프의 부전고원 여름의 낙원이요
평양은 금수강산 청춘의 왕국이라
에 백두산 천지 가엔 선녀의 꿈이 짙고
압록강 여울에는 뗏목이 경이로다
(후렴) 에헤라 좋구나 좋다 지화자 좋구나 좋다
명승의 이 강산아 자랑이로구나
-<조선팔경가> 전문
<조선팔경가>(편월 작시, 형석기 작곡)는 2박자의 밝고 씩씩한 곡으로 신민요의 고전에 해당되는 명작입니다. 이 작품의 창작 모티브는 석굴암의 아침 경관이 보여주는 감동이었다고 합니다. 작사가 편월(片月)은 왕평 이응호의 또 다른 예명입니다.
<조선팔경가>를 창작한 작곡가 형석기(邢奭基, 1911∼1994)는 1911년에 태어나 20대초 일본 동양음악학교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배웠고, 해방 후에는 민요편곡에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이 노래는 1939년 <조선팔경가>란 제목으로 바꾸어서 재발매했는데, 첫 발표 후 3년이 지난 세월에도 여전히 대중들의 크나큰 반향을 얻었습니다. 나라의 주권을 잃었던 식민지시대에 내 나라 내 땅의 아름다움과 그 민족적 긍지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고 아름다움을 되새기는 노래를 만들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찡했겠습니까. 당시 식민지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이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이 <조선팔경가>를 덩실덩실 춤을 추면서 목이 메도록 부르고 또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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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일선 북한시절 |
해방 후 북한에서도 이 노래는 계속 불러졌는데, 이 사실은 참 놀라운 바가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조선팔경가>란 원래의 제목을 그대로 유지하되 여덟 군데의 명소를 모조리 북한지역으로만 개사해서 한정하고 있다는 점이 남한의 것과 다릅니다. 한편 이 노래는 남한에서도 본래의 제목 <조선팔경가>를 <대한팔경가>로 바뀐 모습으로 등록이 되었습니다. ‘조선’이란 북한의 국명이 불편했던 것이지요. 남북한이 다 같이 함께 부르는 곡조지만 분단의 독소는 이렇게 노래에까지 스며들어 제목과 가사를 남북한 버전으로 분리시켜 놓았습니다.
신민요풍의 가수 선우일선의 노래는 하나같이 중심과 터전을 잃어버린 당시 식민지민중의 서러움과 슬픔, 청춘의 탄식, 고달픔, 삶의 애환 따위를 너무도 애처롭고도 유장한 가락으로 실실이 풀어갑니다. 선우일선의 음색에는 두 볼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제 풀에 말라버린 눈물자국이 느껴집니다.
선우일선은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될 때 고향인 평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에겐 특별히 사상이나 이념이 따로 있을 리 없었고, 다만 고향의 가족과 친척들 곁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았습니다. 선우일선은 해방 후에도 많은 노래를 불렀으며, 평양음악무용대학 전신인 평양음악대학 성악과에서 교편을 잡고 민족성악 전공으로 연구와 후진양성에 노력하면서 민요에 관심을 가진 후학들을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은퇴 후에도 민요발전을 위한 노력에 힘을 쏟던 선우일선은 1990년 곡절도 많았던 이승을 조용히 하직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