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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당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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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토와 고금도 사이에 있는 섬으로,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육지와 잇닿아 있다. 1842년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이주해 들어오면서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데, 원래는 관왕묘(關王廟)가 있던 섬이라 하여 묘당도로 부르다가 1971년 덕동리에 분구하면서 충무사(忠武祠)의 이름을 따서 충무리로 바뀌어 현재에 이른다. |
| 묘당도 이충무공유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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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 고금면(古今面) 덕동리(德洞里)에 있는 이순신(李舜臣) 유적이다.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14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장군 이순신이 본영(本營)을 둔 곳이며, 이를 근거지로 왜병 30만 명을 무찌른 전승(戰勝)유적지이다. 노량해전(露梁海戰)에서 전사했을 때는, 이곳으로 시체를 옮겨와 봉안하였다가 아산으로 이장할 때 거쳐간 곳이기도 하다. 또한 명(明)나라 수장(水將)이 그의 전사를 애석하게 여겨 혈서헌서(血書獻書)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비석이 있다. 그 밖에 충무사(忠武祠)·사당(祠堂) 등 부속건물이 있다. 완도군에서 관리하고 있다. |
| 신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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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 신지면에 딸린 섬이다. 면적 30.99㎢, 해안선길이 48㎞이다. 완도 동쪽 5㎞ 해상에 있으며 모황도 등과 함께 신지면을 구성한다. 삼한시대에는 백제의 새금현에 속하였고 통일신라시대에는 탐진현에 속하였다. 고려시대인 1124년(인종 2) 장흥부에 편입되었으며,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 도강현과 함께 강진현에 편입되었다. 1896년 완도군이 창설되면서 면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옛날에는 지도라고 하였으나 나주목에 있는 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신지도라고 하였다고 한다. |
| 소안도 | |||||||||||
면적 23.16㎢, 해안선길이 42㎞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7.8㎞ 지점에 있다. 노화도·보길도\·횡간도·자개도 등의 섬과 함께 소안군도를 이룬다. 임진왜란 때 동복오씨와 김해김씨가 처음 월항리에 입도하여 이곳에 정착하였다. 주민들의 기개가 용맹하여 외부인들로부터 침범을 받지 않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사람들이 100세까지 살기 좋은 곳이라 해서 소안도라 했다고 한다. | |||||||||||
| 보길도 | |||||||||||
전라남도 완도군 보길면의 주도(主島)로서 4개리로 이루어져 있다. | |||||||||||
| 윤선도유적 | ||||||||
보길도 부항리에 위치하고 있다. 1992년 1월 11일 사적 제368호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8만 3532㎡이다. 윤선도가 병자호란 때 왕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1637년(인조 13) 이곳에 들어온 뒤 1671년 죽을 때까지 7차례에 걸쳐 드나들면서 13년 동안 산 곳이다. 그가 소요하며 자족을 얻던 세연정(洗然亭)과 곡수당(曲水堂), 세연지(洗然池), 시문을 창작하고 강론한 낙서재(樂書齋), 사색의 터전인 천동석실(天洞石室) 등의 유적이 있다. ① 세연지:자연이 계류(溪流)를 판석(板石)으로 만든 보(길이 11m, 너비 2.5m)를 설치하여 계담(溪潭)을 조성하고 그 옆에 방지(方池)를 만들어 계담의 물을 돌려서 흐리게 하여 이를 세연지라 하였다. ② 세연정:세연지 가에 단을 조성하여 1637년 3칸짜리 정자를 짓고 세연정이라 하였는데, 세연지에서 2km쯤 떨어진 산자락에 지은 한칸짜리 방형(方形) 정자이다. ③ 낙서재:석실과 마주보이는 곳에 있는 초가터이다. 무민당(無悶堂) 등 건물 4채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인멸되었다. ④ 곡수당:낙서재 건너 계곡가에 있다. 그의 아들이 조성한 초당·석정(石亭)·석가산(石假山)·연못\·화계(花階)·다리 등의 다채로운 조원(造苑)이 베풀어진 곳이다. 이들 유적은 특히 보를 막아 계담을 조성한 그의 기발한 조원 안목, 그리고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통한 원리(苑籬) 조성의 높은 경지를 엿보이게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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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송리해수욕장 | ||||||||
해변 길이 약 1.4km로 보길도 동남쪽 예송리에 있다. 활처럼 휘어진 모양의 해변에는 백사장 대신 검은 조약돌이 1만 5,000평 정도 깔려 있고 낮 동안 햇빛에 달구어진 조약돌이 초저녁까지 식지 않아 오랫동안 해수욕을 즐길 수 있다. 조약돌밭 뒤편에는 남쪽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을 막아 주는 후박나무와 소나무 등 6,700여 그루의 상록수 방풍림(천연기념물 40)이 해변을 둘러싸고 있다. 해수욕장 개장은 7월 15일부터 8월 25일까지이다. | ||||||||
| 중리해수욕장 | ||||||||
보길도 중리에 있는 해수욕장이다. 백사장 길이 1km, 너비 130m로 통리해수욕장에서 1.5㎞ 정도 떨어져 있으며, 보길도해수욕장이라고도 부른다. 경사가 완만해 바다쪽으로 200m 가량을 들어가도 키를 넘지 않을 만큼 수심이 얕으며 물이 맑고 수온이 적당해 피서지로 적합하다. 울창한 곰솔숲에 둘러싸인 은빛 모래와 탁 트인 전망이 빼어나다. | ||||||||
| 통리해수욕장 | ||||||||
백사장 길이 0.7km, 평균 수심 1.5m로 중리해수욕장과 함께 보길도의 명소로 꼽힌다. 모래가 곱고 경사가 완만하며 수심이 얕고 백사장이 넓어 피서지와 청소년수련장으로 적합하다. 백사장 뒤에는 울창한 곰솔숲과 야영장이 있고 주위에 바다낚시터가 많다. 찾아가려면 보길도 청별선착장에서 배를 내려 중리행 버스를 타고 통리에서 내리거나, 선착장에서 동쪽으로 통리방조제를 지나 보길도 저수지 앞으로 간다. | ||||||||
| 예송리상록수림 | ||||||||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40호로 지정되었다. 면적 3,901㎡이며, 완도군에서 소유·관리한다. 완도군에 속하는 보길도(甫吉島)의 남쪽 해안 예송리에 길이 740m, 너비 30m 정도의 대상(帶狀)으로 숲이 펼쳐져 있다. 이 숲은 약 300년 전에 마을사람들에 의해서 방풍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닷바람을 막아 마을에 좋은 생활환경을 제공하였을 것이고 농경지의 작물을 보호해서 소출을 올렸을 것이며, 어장(漁場)을 양호(養護)하고, 아름다운 풍치와 쉼터를 제공하는 등 이 숲의 기능은 매우 컸을 것이다. | ||||||||
| 완도 황칠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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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월 31일 전라남도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되었다. 밑동 둘레는 137㎝, 가슴 둘레는 102㎝, 높이 15m이다. 보길도에서는 상철나무·황철나무라고도 부른다. 황칠나무의 자생군락지 내에서 최대 수목이다. 마을 사람들은 신들린 나무라 하여 땔감으로 베지 않고 지금까지 귀히 여겼다. |
| 우암 송시열 암각시문 | ||||||||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이었던 우암 송시열이 1689 왕세자가 책봉되자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83세의 고령의 나이로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된다. 배를 타고 보길도 인근을 지나다 갑자기 불어닥친 풍랑을 피해 보길도에 잠시머물며 자신의 참담한 심정을 바위에 글로 새겨 놓은 곳이다. 당시 세상에 대한 한탄과 임금에 대한 원망이 배어 있다. 이후 우암은 국문(鞠問)을 받기 위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보길도 백도리 해안을 따라 오르는 길이 있는데, 자동차로도 갈 수 있으나 길이 협소하다. 육지에서는 보기 힘든 도둑게, 청띠제비나비 등이 이곳에 서식하고 있다. 83세 늙은 이 몸이 거칠고 먼 바닷길을 가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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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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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는 남쪽에 최고봉인 매봉산[鷹峰山:385m]과 보적산(寶積山:321m), 북쪽에 대봉산(大鳳山:334m)이 솟아 있고 평지는 읍리(邑里)와 양중리(陽仲里) 부근에 발달하였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루므로 다른 섬들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 등이며, 근해에서는 멸치·도미\·민어·갈치\·쥐치·장어\·문어·낙지 등의 어로가 성하고, 김·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특히 청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은 김장용 멸치젓 생산지로 유명하고, 굴·미역\·조개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면소재지인 도청리(道淸里)와 완도(莞島)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문화재로는 읍리 하마비(邑里下馬碑:전남문화재자료 108), 읍리 지석묘(支石墓:전남문화재자료 116), 완도 당락리(堂洛里) 성터, 당락리 고분, 백련사(白蓮寺), 동촌리 봉수(東村里烽燧), 도청리(道淸里) 봉수, 부용당(芙蓉堂) 등이 있다. |
| 보죽산 | |||||||||||||||||||||||||
보길도에서 다도해의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하기 가장 좋은 장소이다. 굳이 산에 오르지 않아도 전망대가 마련되어 있지만 다도해의 점점히 박힌 섬들을 관찰하기에는 보죽산이 제격이다. 산의 생김새가 뾰족하게 생겨 일명 뾰족산이라고도 불리우는데, 매우 가파른 모양을 하고 있어 산을 오르기도 만만하지 않다. 날씨가 맑은 날에는 보죽산 정상에서 제주도가 보인다고 한다. | |||||||||||||||||||||||||
| 청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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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는 남쪽에 최고봉인 매봉산[鷹峰山:385m]과 보적산(寶積山:321m), 북쪽에 대봉산(大鳳山:334m)이 솟아 있고 평지는 읍리(邑里)와 양중리(陽仲里) 부근에 발달하였다. 남쪽 해안에는 10∼20m의 높은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여 경승지를 이루므로 다른 섬들과 함께 다도해해상국립공원의 일부로 지정되어 있다. 주요농산물은 쌀·보리\·고구마 등이며, 근해에서는 멸치·도미\·민어·갈치\·쥐치·장어\·문어·낙지 등의 어로가 성하고, 김·미역 등의 양식이 활발하다. 특히 청산도를 비롯한 여러 섬은 김장용 멸치젓 생산지로 유명하고, 굴·미역\·조개 등의 양식도 이루어진다. 면소재지인 도청리(道淸里)와 완도(莞島)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오간다. 문화재로는 읍리 하마비(邑里下馬碑:전남문화재자료 108), 읍리 지석묘(支石墓:전남문화재자료 116), 완도 당락리(堂洛里) 성터, 당락리 고분, 백련사(白蓮寺), 동촌리 봉수(東村里烽燧), 도청리(道淸里) 봉수, 부용당(芙蓉堂) 등이 있다. |
| 장도 청해진유적 |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장좌리(長佐里) 장도(將島:將軍島)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군사유적. 사적 제308호.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가 1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해상무역권을 장악하던 곳이다.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무령군소장(武寧君少將)에 오른 장보고는 중국인들이 신라인들을 잡아다 노비로 삼는 데 격분하여 벼슬을 버리고 귀국, 왕에게 해적의 노략질을 근절하기 위해 청해(淸海:莞島)에 군영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828년(신라 흥덕왕 3) 그는 청해진대사로 임명되어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청해에 진을 설치,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해적을 소탕하는 한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해상무역의 패권도 장악하였다. 유적으로는 해중에 나무 말뚝을 박아 두른 방책(防柵)이 있고, 1만 명의 식수정(食水井)으로 사용하였다는 청해정(淸海井)이 있어 지금도 맑은 물이 솟으며, 이 밖에 토성의 일부가 남아 있고, 기와 파편 등도 출토되었다. | |||||||||||
| 장보고축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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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완도군에서 해마다 8월에 열리는 문화관광축제. 해양도시 완도의 대표적인 문화관광축제로 우리나라 최초로 바다를 개척했던 장보고대사의 역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청해진의 옛 영광을 재현함으로써 진취적인 해양경영사를 재정립하고 관광 완도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해양문화축제이다. 장보고가 이룩한 해상 무역항로 탐방과 학술회의, 해상출정식 등의 행사를 통해 완도의 지역적·역사적 특색을 엿볼 수 있다. |
| 완도 정도리의 구계등 | |||||||
전라남도 완도군 완도읍 정도리에 있는 해안선. 1972년 7월 24일 명승 제3호로 지정되었다. 면적은 114,317㎡이다. 활[弓]모양의 해안선을 따라 오랜 세월 파도에 깎여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간직한 자갈밭이 장관이다. 구계등이란 명칭 유래는 알 수 없으나 파도에 밀려 표면에 나타난 자갈밭이 9개의 계단을 이루어 구계등이라 불린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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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