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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침없는 사랑] 18
S#0. 17회 엔딩
산귀래 입구에서 마주서는 두 사람.
정환 : ... 좀 늦었지?
경주 : (멍하니) ... 왜 비를 맞구 와요? 차는 어쩌구요?
정환 : 어.. (기침하면)
경주 : (버럭) 감기 걸린 사람이 비를 맞으면 어떡하냔 말야!
정환 : 저기, 나 (우산 가리키며) 이거 좀 쓰면 안돼?
경주 : 어. (그제야 씌워주며, 웃고) 미안?
그렇게 우산 속에서 마주보는 경주와 정환.
S#1. 산귀래, 방갈로 앞 (동 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처마 밑 빨래 줄에 정환의 바지와 셔츠, 걸려있고.
경주, 양말을 반듯반듯 펴서 곱게 넌다. 다시 한번 셔츠를 만지고.
불켜진 방을 돌아보며 떨리는 기분으로.
S#2. 동 방갈로 안
침대와 작은 소파, 작은 창이 있는 아담한 공간. 한쪽 벽에 조리대가 있다.
욕실에서 머리를 털며 나오는 정환, 시골 농부의 고쟁이에 셔츠 차림.
정환 : 너는 옷을 빌려와도 어디서 이런 (하다가 하하 웃는다)
경주 역시 그 농부의 아낙에게 옷을 빌려 입었다.
경주 : (우유를 데우던 중) 왜 웃어요? 우유 안 준다?
정환 : 내가 우유 한잔만 그랬다고, 딱 우유 하나 사왔어? 너 정말 아이큐 몇이니?
경주 : 아우, 정말 나 왜 이러지? 열 있을 땐, 우유도 안 좋은데... 이럴 땐 죽 먹어야 되는데. 저기 얼른 가서 쌀사올게요.
정환 : 나 죽 싫어해. 앉아. (앉아서 한 모금 마시고) 이게 그러니까 3억짜리 우유네? 너 인제 그 돈 어떻게 갚니?
경주 : 정말... 우리, 만나면 안 되는데...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정환 : (미안해서 본다) ... 집사람,... 그렇게 일 벌일 줄 몰랐어... 근데
경주 : OL) 알아요... 나래두 용서 못해... 나, 정말 죽일 년 맞아요...
정환 : ...
경주 : ... 저기, 신김치 좋아해요, 날김치 좋아해요?
정환 : (보면)
경주 : 헤어진 보름 동안 내내 그게 궁금하더라구요... 나, 다른 거 생각 안 할래요...
그냥, 되는대로...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 이제 그만 생각할래요.
정환 : 그래, 김치 얘기나 합시다... 신김치는 라면 먹을 때 좋고, 날김치는 칼국수 먹을 때 좋고.
흰쌀밥엔 오이소배기, 보리밥엔 열무김치구. 우리집은 동치미도 떨어지면 안돼.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건,
푹 삭은 김장김치, 냉동실에 넣어 놨다 한여름에 먹는 거야... 아, 이런 날엔 멸치 넣고 찌개 끓이면 제격인데.
경주 : ... 아, 대박파 성질 끓는다... 한정환, 이런 인간이었어? 이런 남자랑 어떻게 살어?
정환 : 하하...비싼 남자 모시고 사는데 그 정도도 안 해? 너 인제 고생문이 훤하다...
경주 : ... 우리, 정말.... 김치 담그면서 살 수 있을까?
정환 : ... (어쩔 수 없이 집이 생각나고)
S#3. 정환 네, 재동의 방
잠든 재동을 꼭 끌어안고 누워있는 채옥.
어린 아들의 등에 얼굴을 묻고, 흐느낀다.
열려진 문으로 그런 며느리를 아프게 보는 정환모.
정환모 : 그만 나와... 나랑 술 한잔 할래?
채옥 : 아뇨, 어머니... 저 나가봐야 돼요.
정환모 : 이 시간에
채옥 : (수다스럽게) 패션쇼가 바로 내일 모렌데 어떻게 놀아요? 어우, 스트레스땜에 미치겠어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 회사 다닐 때가 좋았어요. 독립하고 나니까, 뭐든 돈 돈(하는데)
정환모 : OL) 에미야.
채옥 : ... 저만 깨끗이 물러나면 되는데 그죠? 근데, 그저 분한 생각 밖에 안 들어요.
저더러 좋게 좋게 하라는 말씀 마세요, 어머니.
정환모 : ... 니 마음 알아... 그 자식이 지은 죄를 다 어떡하면 좋으니...
채옥 : (눈물 꾹 참고, 돌아서며) 저, 일하러 갈래요...
S#4. 지하 주차장, 채옥의 차 안
눈물이 자꾸 나는 채옥, 눈물을 쓱 닦는다. 휴대폰 누르고.
채옥 : 이것보세요, 송 과장님! 일 그따위로 할 거예요? 당장 공장으로 와요! ... (운전해가며)
S#5. 방갈로 앞과 안 (동 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창밑의 경주와 정환, 무릎 세우고 나란히 앉아서 빗소리를 듣는다.
경주 : ...
정환 : 빗소리가 저런 거였어? 저 소리, 죽을 때까지 잊지 말아야지...
경주 : ...
정환 : ... (무릎에 얼굴을 대고 눈이 스르르 감긴다) ...
S#6. 원희 아파트 실내 (동 밤)
창문을 열고 내리는 빗줄기를 보는 원희.
초인종 울리면 열렸어요 하고.
태만, 들어오며 젖은 우산을 턴다.
태만 : 문이 왜 열렸어? 난영이는?
원희 : 경철이네 집에요... 경주랑 한 사장, 둘 다 가출이랍니다.
태만 : 으이그 웬수들, 나두 몰라 인제.... 잠깐, 지금 혼자 있어요?
원희 : 네 (하려는데)
태만 : (잔소리 퍼붓는다) 아니, 이 아줌마가 정신이 있어 없어! 한밤 중에 문단속도 안하고? 아 정말 이 집 여자들은 겁두 없어.
(벽을 딱 치고) 여기다 가까운 파출소 전화번호부터 붙여 놔, 알았어요! ... 근데 이거 무슨 냄새지?
원희 : 앉아요...
프라이팬에 부쳐놨던 김치전을 덜어준다.
태만 : 하... 비오는 날의 김치전이라... 이거 먹으라고 부른 거야? 난 또 어디 비라두 새나, 놀래서 뛰어왔잖아.
원희 : ... 드세요...
태만 : (먹고) 예술이다 예술.... 원희씨, 식당 차릴 생각 없어? 내가 하루 세끼 대놓고 먹을게.
원희 : OL, 장난처럼 말하지만) 그러지 말고, 나랑 결혼해요.
태만 : (보면)
원희 : 생각 없어요? 손해볼 거 없을 거 같은데...
태만 : ... 손해는 무슨,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 거지... 근데, 저기 원희씨... 저...
원희 : 나 안 좋아한다고? 내가 정말 싫어요?
태만 : 원희씨가 싫으면 이 밤중에 비까지 오는데, 올 리가 있어? 나 땜에 그러지....
나, 착하고 친절하고, 유모 있고, 꽤 괜찮은 남자루 보이지?
원희 : (보면)
태만 : 내 전처 소개해줄게 한번 만나봐... 그 여편네, 나랑 결혼한다면 도시락 싸들고 와서 말릴 거야.
인간 박태만이는 가정생활의 암적 존재래... 문제는 그게 맞는 말이라는 거지.
원희 : ... 거절하는 방법도 착하고 귀엽네...
태만 : ... 근데 갑자기 웬 헛소리야? 결혼생활 치 떨린다며?
원희 : 그러게요... 비가 와서 그런가부죠 뭐... (착잡하고 힘들다) ...
S#7. 방갈로 안 (동 밤)
침대에서 잠든 정환을 바라보는 경주.
손가락으로 가만히 정환의 눈썹을, 콧날을 따라서 그리고.
정환, 그 기척에 돌아눕는다.
경주, 정환의 옆으로 조심스럽게 앉는다.
그리고 정환의 어깨를 주물러주기 시작한다.
정환 : (잠결에, 아파서 꿈틀하고)
경주 : (아이처럼 이크 웃고는 더 조심스럽게)
정환 : (색색 숨쉬며 아이처럼 잔다) ...
S#8. 산귀래 전경 (아침)
이른 아침의 새소리.
비 개었다.
S#9. 방갈로 안 (동 아침)
새소리에 눈을 뜨는 정환.
돌아보는데 방은 비어있고.
정환 : ... 경주야! (일어나 보면)
탁자에 정환의 옷을 얌전히 개놓고, 양말까지. 메모지가 놓여있다.
S#10. 시골 장터 (동 아침)
비닐 봉지에 장을 보는 경주, 야채를 사다가 휴대폰 받고.
경주 : 일어났어요? 응 시장... 근데 어떡하지? 오늘은 김치 없이 밥 먹어야겠다.
S#11. 산귀래 (동 아침)
이른 아침의 오솔길을 걸어오는 정환, 들 꽃 몇 송이를 꺾어들고.
이슬이 맺힌 풀잎들을 헤치며, 거미줄의 반짝거림을 경이롭게 보며,
어 경주 꽃이다 하며 몇 발짝 뛰어가는데 기침이 쏟아져나오며 가슴이 턱 막히게 아프고, 겨우겨우 한 송이를 꺾어든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는데 극심한 현기증을 느끼며 꽃을 떨어뜨린다.
꽃무더기와 하늘이 휙 돌며 하나되는 느낌.
S#12. 방갈로 안 (동 아침)
밥 두 공기과 감자국, 계란말이, 생선 한 토막의 초라한 밥상에 푸짐한 푸성귀와 야채를 싱싱하게 씻어 상에 올리는 경주.
시계를 보고 기웃하다가 휴대폰 누르며 밖으로 나가고.
S#13. 산귀래별 (동 아침)
경주, 정환을 찾으면서도 아무 걱정없이 경치를 감상하듯이.
길에 꽃 한송이가 떨어져 있어서 줍고 허리를 펴는데.
저만치 흰 구절초의 무더기 앞에 정환이 쓰러져있다.
경주 : (하얗게 질리며, 비명도 못 지르며) ...
그렇게 쓰러진 정환의 손에 쥐어진 들 꽃 몇송이.
S#14. 도로, 달리는 구급차와 안 (동 아침)
경주, 혼절한 정환(산소호흡기)의 손을 잡고 안타깝게.
경주 : (너무 무서워서 울지도 못하고) ... 이 이 사람, 왜 이래요? 간밤에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그냥 감긴데... 비 맞아서 그래요?
구급요원 : 검사해봐야겠지만, 열이 너무 높네요.
경주 : 왜 왜 그래요? 이 이 사람, 죽나요?
경주 매달리듯 말하다가 문득, 자기 손을 보면, 정환의 손이 자기 손을 토닥거려준다, 눈물 젖은 눈으로 정환을 보면.
정환 : (겨우 웃어주며, 괜찮다고 끄덕이고) ...
경주 : ...
S#15. 병원 복도와 응급실
스트레처에 실린 정환, 응급실로 빠르게 들어간다.
경주, 따라서 뛰어 응급실까지 가는데.
간호사 : 가족이신가요?
경주 : ... 아니요...
간호사 : 그럼 빨리 가족 부르세요!
경주 : ...
S#16. 채옥의 빌딩 일각
넓은 공간에 모델들 몇 명, 시계를 보고 서성이고 있다.
그들이 보이는 뚝 떨어진 공간에서.
채옥 : (만호에게)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지금... 모델들은 피팅하겠다고 모여드는데, 옷이 없다니요!
만호 : 옷은 있죠... 근데 공장에서 밀린 돈을 다 주기 전에는 출고를 못 하겠다고
채옥 : 뭐 뭐... 말이 돼요? 박사장, 연락해요.
만호 : 그게 저 연락이 안됩니다.. 아무래도 우리 물을 먹이려고
채옥 : 사채 써요... 조건 다 받아주세요... 쇼는 해야돼요... 안할 수 없잖아. (전화 오면, 보고)
.... (이윽고, 받는다) 서경주씨, 무슨 일이죠? ... 나 바빠요! 용건 있으면 말하란 말야!
경주 : (F) 한 사장님... 지금, 병원에 있어요...
채옥 : ? 뭐?
S#17. 병원 일각(동 낮)
채옥, 뛰어들어오고. 저쪽에서 정환모도 같이 온다.
어머니, 이게 무슨 일이냐 하며 손잡고 정신없이 간다.
그 일각, 벽 뒤에 숨듯이 지켜보다가 돌아서는 경주.
경주, 깊은 죄책감과 허탈함으로 멍하니...
S#18. 경주네 거실
경주모, 싸고 누웠다.
경철 : 엄마, 나랑 영화 보러 갈래? 나가자, 응? 냉면 사줄게.
경주모 : 저 자식, 저거 저거... 지 누나가 어디서 뭘 하는지도 모르는데, 너 회사 안나가?
..그래, 나갈 수가 없지..으이그 이 웬수..
경철 : (돌아서다가) 야! 여긴 왜 들어와!
현관 앞에 경주가 고개 꺾고 서 있다.
경주모 : (경철을 한 대 치고) 야라니 누나더러. 얘 얘... 안색이 왜 그러니? 너 괜찮아?
경주 : 엄마... (울음 터지며) 엄마, 나 어떡해!
경주모 : 왜 왜 그래! 얘!
경철 : 울지 좀 마! 뭐 잘 했다구 울어! 누나는 챙피한 것두 몰라! (문 탕 닫고 나가고)
경주 : ... 그 사람, 나 때문에... 나 만나려구 오다가 비를 맞아서...
경주모 : 그래서... 우리 환이 어떻게 됐다구우!
경주 : ... 여, 열이 너무 높은데, 떨어지질 않는데... 난 옆에서 지켜보지도 못해...
그 사람 죽을지도 모르는데 난 아무것두 못해 엄마!
경주모 : 그럼 니가 무슨 낯짝으로 거길 붙어있어, 이 웬수야! (퍽퍽 치며) 니가 기어코 사단을 냈구나 어이구 이걸 어째!
경주 : (엄마를 끌어안고 울며) ...
S#19. 병원 중환자 실 안과 앞
유리벽 밖에서 초조하게 보는 정환모와 채옥.
정환의 몸에 갖은 약과 검사용 줄이 설치되고.
의사와 간호사 긴급하게 움직이며 수치 확인하고,
의사, 나온다.
정환모 : 선생님. 우리 애 왜 저래요?
의사 : 뇌수막염입니다... 몸이 아주 쇠약해져있네요...
정환모, 채옥 : (경악하며) ...
의사 : 우선 항생제를 투여하면서, 경과를 지켜보겠습니다. 열이 떨어져야하는데...
채옥 : ... 열이 안 떨어지면... 위험한 거군요, 그렇죠?
의사 : 청각을 잃을 수도 있고, 심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정환모 : ...
채옥 : 우리는... 그저 지켜만 봐야하나요?
S#20. 동 일각 (동 낮)
채옥, 휴대폰을 켜면,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수도 없이 많다.
채옥 : (통화를 누르고) ... 송 과장님... 우리... 쇼, 취소하면 어떻게 돼죠? .... .... 알아요....
채옥, 생의 기로, 벼랑 끝에 선 느낌으로 치열하게 갈등하며.
시간 경과의 느낌.
채옥, 그대로 서있다. 고개를 돌리면 저만치에서 정환모가 다가온다.
채옥 : (울컥 눈물이 나는데 얼른 닦고)
정환모 : (그 와중에도 마음을 다잡으며 강단 있게) 여기 있었구나?
채옥 : (이를 앙 다물고) ...
정환모 : 어서 가서 밥 먹고 와... 재동이는 성북동에 맞겨 놨어... 아빠 출장 갔다고 말해놨으니까 그렇게
채옥 : OL) 어머니, 저 일하러 가야돼요.
정환모 : (믿을 수 없어서 보며)
채옥 : 저 여기 있어봐야 하는 거 없잖아요.
정환모 : 왜 하는 일이 없어... 걔한테 제일 가까운 사람은 넌데...
식구들이 가까이에서 마음을 모아주면, 그 마음이 다 통하는 거야, 그래야 앓고있는 사람도 기운을 내지...
채옥 : 쇼가 바로 내일이란 말이예요, 어머니! ... 취소할 수가 없어요 들어간 돈이 너무 많은데, 그게 다 제 돈이 아니잖아요.
윤채옥, 이름 하나 보고 투자해준 사람들 어떡해요? 직원들 월급이랑, 공장 사람들... 저 없으면 안돼요... 그이는,
(목이 매고) 그이는 의사가 지켜주잖아요.
정환모 : 의사가 지킨다고? 그래서 나 혼자 나 혼자, 두고 너는... 얘... (붙잡는다) 그러지 마... 같이 있자 응?
채옥 : 어머니한테는 아들이 제일 우선이죠? 근데 저는... 저는... 용서 하세요, 어머니.
채옥, 돌아서고. 그런 며느리를 뒤에서 멍하니 바라보던 정환모, 배신감과 분노를 어쩔 수 없어서 휙 돌아서고.
채옥의 눈에서 그제서야 눈물이 흐른다. 달려가고.
S#21. 채옥의 빌딩, 창고 (밤)
패션쇼의 옷들이 잔뜩 걸려있다.
모델들이 옷을 입고 서있다. 채옥, 모델들에 맞게 피팅을 새로 해주고, 모자 벨트 지정해주고.
송과장이 옷을 한 벌 들고 오면, 살펴본 다음에 성질을 내며, 실하고 바늘 가져오라고 소리지르고.
한구석, 옷들 사이에 파묻히듯이 앉는 채옥, 직접 바늘에 실을 꿰어서 손수 비즈(구슬)를 단다.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으며 바느질을 하는 채옥.
S#22. 어느 교회 (동 밤)
도시 변두리의 작고 소박한 교회.
카메라 안으로 들어가면, 어둡고 텅 빈 회당의 한구석에 고개 숙이고 울고 있는 경주.
경주 : (그저 눈물밖에, 해줄 것이 없어서 울고 또 울고) ...
S#23. 병원 복도와 중환자실 앞 (동 밤)
경주모, 눈물 바람을 하며 정신없이 온다.
중환자실이 어디냐며, 응응 울며 다급하게 물어가며 달려가다가, 문득 멈추고 숨는다.
저만치 구석에 정환모가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인다.
경주모, 차마 다가가서 위로도 못하며 그저 죄인처럼 숨어서 고개만 빼고 보며 눈물로.
정환모, 눈물 없이 조용히, 아들을 지키는 심정으로.
S#24. 중 환자실
정환, 인공호흡기와 링거, 수많은 모니터 선에 둘러싸여 사투를 벌인다.
S#25. 패션쇼 장 (다음날 밤)
윤채옥 쇼의 플래카드가 내걸리고.
음악이 시작되면서 모델들이 걸어나온다.
모델들의 워킹 사이사이로 지켜보는 시선들.
백 스테이지
채옥, 무대 입구에서 모델들을 최종 점검해주고.
뭔가 고쳐주며 지적해주고, 다음에 입을 옷 지정해주고.
S#26. 중환자실 (동 밤)
정환모, 허둥지둥 들어온다.
인공호흡기를 떼어낸 정환, 어머니를 기다리다가 맑게 웃는다.
정환모, 아들의 손을 잡으며 보고.
정환 모자, 그저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눈물을 감추며...
정환, 어머니의 얼굴에 손을 대보다가 죄책감에 고개 돌리고.
S#27. 패션쇼 장(동 밤)
무대의 쇼는 계속되고, 피날레를 장식하는 모델의 화려한 의상.
이윽고 백 스테이지에 일렬로 늘어선 모델들 두 줄로 서서 나가기 시작하고.
채옥, 일일이 잘했다고 격려하며 내보낸다.
초조하게 객석의 반응을 살피는데 터져 나오는 갈채.
채옥 : (돌아서며 눈물과 땀을 닦는다)
백 스테이지의 다른 스태프들도 박수 쳐주며, 빨리 나가라고.
무대의 모델들 일렬로 늘어서서 박수를 치며 환호해준다.
그 사이로 걸어나오는 채옥, 활짝 웃으며 객석에 인사하고 꽃다발을 받는다.
그러나, 돌아서는 채옥의 표정은 쓸쓸하고 허망하고.
S#28. 채옥의 빌딩 앞 (아침)
채옥, 간밤의 그 옷차림 그대로 차에서 내린다. 녹초가 되어서.
S#29. 채옥의 빌딩 계단과 집무실 (동 아침)
채옥, 녹초가 되어 구두를 손에 들고, 맨발로 올라간다.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예쁜 꽃바구니가 놓여있다. 카드를 보는데 한정환이라고 적혀있다. 손이 파르르 떨리며.
S#30. 채옥의 집무실과 정환의 입원실 (동 아침)
정환, 일인용 병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옆에서 음료수 마시는 태만.
정환 : 꽃 이쁘지? ... 쇼 잘 했다며?
채옥 : ... 응...
정환 : (F) 바이어 오더는 많이 들어왔어?
채옥 : 어... 한국 백화점에서 입점해달래. 제일 좋은 자리 준데.
정환 : 축하해... 당신, 잘할 줄 알았어.
채옥 : ...
정환 : ... 나도 괜찮아... 걱정, 많이 했지?
채옥 : ...
정환 : (F) 미안해.
채옥 : ... (입술을 깨물고, 모질게) 한정환씨! 당신, 정말 웃기다 못해 철면핀 거 알어?
니가 나한테 한 짓을 생각해봐, 꽃이 무슨 소용이야! (꽃바구니를 집어던지고)
S#31. 정환의 입원실
정환 : ... (끊고 수화기 놓는데도 식은땀이 나고, 손 후들거리고) ...
태만 : (수건 주며) 꼴 좋다... 저승사자가 동무하자고 하겠다 임마.
정환 : 안 그래도 오락가락 하더라.
태만 : 봤어! ... 너 진짜 갈 뻔 했구나! 으이그 이걸(주먹 들었다가) ... 그래, 다시 살아나니까 좋으냐?
니가 싼 똥 니가 치울 일만 남았는데, (들어오는 정환모 위로) 구찮아서 도로 딱 죽고 싶지, 그지!
정환모 : 죽고 싶데? (정말 화나서 냉담하게, 서류 등을 서랍에 넣고 정리한다)
태만 : 하 하이유, 그럴 리가 있나요. (자기 입 치고) 요 주둥이... 얘가 어떻게 죽어요, 토끼 같은 자식을 두고.
정환모 : 토끼 같은 자식 두고, 여자랑 도망도 가는데, 뭔 짓은 못해! 나는 인제 집에 들어간다. 나머지는 느이들이 알아서 해.
정환 : (그런 어머니를 서늘하게 보며)
태만 : 어머니 말구는 병실 지킬 사람 없잖아요. 우리도 이 자식 땜에 비상 걸렸는데. 뭐 하냐 빌어 빌어 임마.
(정환모를 억지로 앉히고 나간다)
정환모 : (외면하고) ...
정환 : ... ... 에미한테 섭섭하셨죠?
정환모 : ...
정환 : 패션쇼는 디자이너한테는 목숨 같은 일이예요.
정환모 : 목숨? ... 그래.... 제 목숨보다 귀한 건 없지...
정환 : ...
정환모 : 걔 원망할 것도 없어, 다 니 자업자득이다... 딱 하루만 살면 죽어도 좋겠다더니... 좋더냐?
정환 : ...
정환모 : 좋은데 몸이 이 지경이 됐겠어? 인생은 한번이다, 아무도 두 번은 못 살어.... 욕심 버려. (일어서는 위로)
정환 : OL) 좋았어요, 엄마... 경주랑 같이 있으니까, 그렇게 좋더라구요.
정환모 : (보면)
정환 : 아픈 줄도 모르고, 아무 걱정 없이, 그렇게 편안한 거...내가 갓난쟁이였을 때, 아마 그랬겠죠?
너무 좋아서, 이 대로 죽고 싶다, 그 생각들만큼 좋았어요... 정말 죄송해요, 엄마...
정환모 : (아득하게 보며)
정환 : 인제 더 이상 안 바랄게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S#32. 정환네 침실 (동 밤)
채옥, 침대 위에서 로버트를 갖고 노는 재동을 멍하니 본다.
채옥 : ...
재동 : 심심하다... 아빠 언제 와요?
채옥 : 응... 일주일쯤... 재동아...
재동 : (그냥 놀고)
채옥 : 재동아, 엄마 좀 봐.... 저기,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재동 : (쳐다보지도 않고) 엄마요!
채옥 : ... 왜에? ... 재동이는 아빠랑 더 친하잖아. 로버트도 조립해주고, 롤라 브레이드도 사주고... 뭐든 아빠가 다 해주잖아...
근데두 엄마가 더 좋아?
재동 : (웃고) 히히, 아빠가 무조건 엄마라구 대답하랬어요.
채옥 : (턱 막히며)... 왜?
재동 : 엄마는 여자잖아요. 우리 남자들이 잘해줘야지.
채옥 : ...
S#33. 지하주차장 (아침)
채옥, 막막하게 앉아서.
S#34. 입원실 (동 아침)
정환의 앞에 이혼서류를 내미는 채옥.
정환 : ... (보면)
채옥 : 이렇게 된 마당에 무슨 변명이 필요하겠어... 그래, 나 당신하고 헤어지기 싫었어...
당신 없이 사는 게 너무 삭막하고 불편하고... 무서우니까... 근데...
정환 : 여보.
채옥 : 아니, 내 얘기 마저 들어. 나한테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생각해 봤어...
난 아무래도 남편보다... 자식보다, 내 이름이 더 소중한가봐...
정환 : (보며)
채옥 : 당신한테 제일 소중한 건 뭘까?
정환 : ...
채옥 : 분명한 건, 그게 나는 아니라는 거지... 쓸쓸하지만 인정할게.
정환 : ...
S#35. 유비텍 디자인실 (동 아침)
강실장, 허장, 원희, 영재.
허장 : (전화 끊고) 한 사장, 고비는 넘겼는데요, 퇴원하려면 일주일에서 열흘은 걸린답니다.
강 : 미친 눔... 바람 한번 요란하게두 피네...
영재 : 어떡할까요, 리즈팸 샘플도 일주일 안에 뽑아야 하는데.
강 : 둘이 알아서 해.
원희 : 우리 둘이는 못하는 거 아시잖아요.
강 : 서과장 안나오는 게 나 때문이야? 내가 해고라두 했어!
허장 : 그 망신을 당했는데 그럼 여길 어떻게 나와요.
강 : 가서 데려와!
S#36. 경주네 거실과 안방 (동 아침)
영재 : (들어온다) 어머니, 밥 좀 주세요.
경주모 : 어... 그래... (안방에 있다고 눈짓하고)
영재 : (방문을 열고) 과장님, 얼른 준비하고 나오세요. 11시까지 군포 공장 가야합니다.
경주 : ... (구석에 웅크리고)
영재 : (들어온다) 병원 가봤어?
경주 : ...
영재 : 윤채옥쇼 대성공이었데. 남편이 위독한 순간에도 독하게,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현장 지켰다더라.
경주 : (보며) ... 병원에 안 있고, 일하러 갔었단 말야?
영재 : 그래, 그렇게 멋지게 사는 여자도 있는데, 넌 여기서 뭐하는 거냐?
병원으로 달려가던지, 일하러 가던지. 뭘 해야할거 아냐.
경주 : 알아... 근데... 자꾸 자꾸만 눈물이 나서 아무 것도 못하겠어...
영재 : ...
S#37. 나염 공장
자동화 기계로 찍혀 나오는 현란한 무늬의 프린트
시간 경과, 바쁜 일상의 느낌으로.
S#38. J 기획 사장실 (낮)
앞 씬의 프린트, 유지 앞에 펼쳐지고. 경주, 영재, 태만, 지켜본다.
유지 : (자세히 보고) 다시 하세요. 이건 아닙니다.
경주, 영재 : ... (짐작하고 있었다)
태만 : 왜? 내 보기엔 괜찮은데. 웬만하면 그냥.
유지 : 한 사장님 안 계시다고, 이러면 곤란합니다.
경주 : 다시 할게요... (노랑?)색이 문제지?
유지 : 잘 아시네요. 내일까지 다시 해오십시오.
S#39. 동 사무실 (동 낮)
경주와 영재, 태만과 유지, 날씨 인사 나누며 나오고.
난영 : 시원한 메밀 차 한잔씩 드릴까요?
경주 : 아니, 고마워 (하는데)
경철이 들어오다가 안색이 싹 바뀌며 냉담하게.
경주 : ...
경철 : 형, 생지 샘플 좀 보세요.
영재 : (보며) 내가 보면 아나? 누나가 담당인데.
경철 : (경주 앞에 턱 놓고, 사장실로 들어간다)
태만, 유지, 난영의 당황하는 시선.
영재 : 저 자식이 (들어가려면, 경주가 잡는다)
경주 : 가... (나가는데)
난영 : 저기, 쟤가요... 저 때문에 화나서
유지 : (거의 동시에) 나 때문에 화나서
난영 : (어설프게 웃으며) 그러니까 저, 신경 쓰지 마세요...
경주 : (웃어주며 나가고)
문 닫히면, 유지, 난영, 태만, 동시에 경철을 부른다.
경철 : 왜! 왜 불러요! (나온다)
태만 : 그러는 게 아니지, 너는 가족이니까 한편을 들어야지.
경철 : 그래서 더 밉단 말이예요!
S#40. 동 복도 (동 낮)
경주와 영재, 걸어나온다.
경주 : ... 일주일 째 집에도 안 들어와...
영재 : 남자들은 자기 누나나 엄마한테는 사생활이 없는 줄 알잖아, 이해해.
경주 : 알어, 내 동생 얼마나 착한데... 근데... 평생 쟤 얼굴 제대로 못 볼 거 같아...
영재 : (보면)
경주 : (쓸쓸해지고) ...
S#41. 유비텍 디자인 실 (동 낮)
영재, 다녀왔습니다. 서과장님도 왔어요. 하고 큰 소리로.
경주 : ... (강실장에게 목례하고)
강 : ... 수고했어. (실장실로)
영재 : 실장님, 상의드릴 게 있는데요 (안으로 들어가고)
원희 : (마시던 아이스 티를 준다) 마셔, 시원해.
경주 : (옆에 앉는 위로)
원희 : 한 사장은 병간호 해주는 사람두 없다더라. 그 어머니도 꼼짝 안하신데..
경주 : ...
원희 : 같이 가볼래? 내가 살짝 불러내줄게.
경주 : 싫어... 안 만날래...
원희 : 죄책감 느껴서? 하기는 니가 스트레스 원흉인 건 맞지...
모범생이 나쁜 짓 하려니, 잠도 못 자고 먹지도 못하고 몸이 어떻게 됐겠어.
경주 : ...
원희 : 윤채옥씨, 멋지지 않니... 마누라 병나도, 남편들은 남자니까, 당연히 일터로 가잖아. 그 여자도 그거 한 거야...
나두 그렇게 살고 싶은데.... 경주야... (허장이 들어오는 것을 지긋이 보며)
경주 : 왜?
원희 : 나... (허장 위로, 분명하게) 임신했어.
허장, 화들짝 놀라서 보면, 원희는 시치미 떼고, 허장을 못본 척.
경주 : (놀라서 원희를 보며) ... ....
허장 : (후다닥 나간다)
원희 : (냉소하며) 황당무계 허장 통신, 맹활약을 기대합니다... 내가 거짓말을 잘하는 건지 인간들이 아둔한 건지,
보름이나 입덧을 하면서, 회충이라는데 다들 속는 거 있지. 서경주 너는 친구도 아니니까 당연히 관심 없을 거고.
경주 : 하여튼... 징그러운 기집애야...
원희 : ... 징그럽지? 사는 게 정말 징글징글 맞지 않니? (일어서고)
S#42. 시장 (동 낮)
원희, 야채거리와 생선을 사들고 온다.
어느 일가족 셋이 지나간다. 아이는 장난감 사달라고 조르고, 엄마는 아우 지겨워 소리치고.
아빠는 왜 소리를 지르냐고 더 소리치며.
원희 : (그런 모습조차 부럽고 아프게 본다) ...
S#43. 원희 아파트
원희, 밥을 짓고 있는데. 초인종 울리고, 문이 벌컥 열리면서 태만이 들어온다.
원희 : (기다리던 중이라 놀라지도 않고, 냉동실의 물수건을 꺼내준다) 덥죠?
태만 : 제발 문 좀 잠그고 살란 말야! 이거 뭐야. (물수건에 놀라며) 이런 서비스는 또 어디서 배웠어요?
원희 : 칠 년 버릇 어디 가나요? 앉으세요... 소문 듣고 왔어요?
태만 : 아, 유과장도 들었어요?
원희 : 제가 임신했는데, 애 아빠가 박사장님이래요?
태만 : 정말 기가 막힐 노릇.... (싹 쳐다보며) 뭐야... 이거 또 뭔가 냄새가 난다, 유원희 페인트모션이지 이거!
도대체 애기 아버지가 누굽니까?
원희 : 그걸 질문이라고 해요? 당연히 전남편 애지, 누구 애겠어요!
그때 난영이 다녀왔습니다 하고 들어온다. 두 사람, 입 다물고.
난영 : 저 신경 쓰지 마세요. (방으로)
태만 : 하아 참... 아니, 다른 남자 애 임신한 몸으로 나한테 결혼하자는 심보는 또 뭡니까? 나 데리고 논 거예요?
원희 : 지금이라도 허락만 해주시면, 결혼하고 싶어요.
태만 : (보면)
원희 : 그래서 남편이 애 낳으라면 낳고, 지우라면 지울게요.
태만 : 당신 미쳤어? 더위 먹었냐구?
원희 : 네, 정말 미치겠어요... 내가 뭐 박사장님이 좋아서 이러는 줄 알아요?
나 아직도 자다가 깨서 울어요, 꿈에 남편 나타나서.
태만 : 정말 미치겠네... 근데 왜 그랬냐구!
원희 : ... 나 혼자서는 정말, 어떻게 해야할지 결정을 할 수가 없어서 그래요, 나 어쩌면 좋아요 네?
난영 : (옷 갈아입고 나와서 욕실로 가며) ... 저 아무 말도 안 들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태만 : 허우 참 기가 막혀서... 이것보세요 유원희씨... 아이 아버지하고는 인연 끊겼다 쳐.
그래도 시댁 어른들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원희 : 그래서 더 무서워... 애기, 분명히 뺏길 거예요...
태만 : 그 그렇다고, 나를 방패막이로 쓴단 말야! 그거 천륜 어기는 거야.
원희 : 나두 안다구! 아니까 이러지...나, 어떡하면 좋아요 네? 너무 무서워, 무섭단 말야! (비명처럼 울고)
난영 : (수건 두르고, 욕실 문 벌컥 열고) 왜 우리 언니 울려요!
태만 : ... 하우 참 울지 좀 마요.
원희 : 나두 울기 싫어요, 정말 우는 거 싫은데... 나 혼자... 아빠도 없는 애, (울음이 터진다) 미안해서, 미안해서... (엉엉)
나 어떡해! 우리 애기 불쌍해서 어떡해! (엉엉 울고)
태만 : (같이 글썽해서 보며) ...
난영 : (눈물로 보다가 머리 수건 거칠게 풀며) 울지 말란 말야!
S#44. 대학로 (동 저녁)
아마추어 춤꾼들의 신나는 거리 공연이 벌어지고.
그 조금 경철과 유지, 기다리면.
저만치에서 팔랑팔랑 뛰어오는 난영, 뱀 베로! 외치며 까분다.
경철 : 쟤, 또 술 마신 거 아니야?
유지 : 난영, 나 그렇게 부르지 마! 싫어!
난영 : 흐흐 나도 빨리 사람이 되고 싶다아아? 얘들아 우리 뭐 하고 놀까 응! 아! 저기 애들 모여있다, 저리 가자. (뛰어가고)
유지 : 미친년.
경철 : (웃고) 유지! 그거 욕이야.
유지 : 그래? 몰랐어...
경철과 유지, 사람들을 뚫고 보면.
무대로 뛰어든 난영, 마구 춤을 추고.
유지 : 와우! 나도 미치고 싶다.
유지, 뛰어들어서 난영과 함께 신나게 춤춘다.
경철 : (보다가, 한숨 쉬는데 휴대폰 울리고) ...어 형!
S#45. 편의점 (동 밤)
햄버거와 생수를 먹으며 책을 읽는 영재.
경철도 음료수 하나 사들고 옆에 앉으면 아는 척 하고.
경철 : 무슨 책이예요?
영재 : 너 책 좋아한다며? 선물.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란 책을 주고)
경철 :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이란 이름의 웬수들인가? (웃고) 누나한테 싸가지 없게 굴었다고 벌주는 거죠?
영재 : (웃고) 경주한테 싸가지 없게 군 거는 나도 안져.
두 남자, 무심한 표정으로 유리벽 밖의 거리 풍경을 본다.
시간 경과의 느낌.
경철 : ... 누나...어릴 때부터 기억나는 건 죄다 우는 모습 뿐이예요...
새 엄마가 구박도 안 하는데... 나 때문에 더 울었겠죠, 내가 말썽쟁이였으니까...
영재 : ...
경철 : 나는 정말 누나 우는 거 싫은데, 왜 하필 연애를 해도...
영재 : ... 우리 할머니도 나만 보면, 그렇게 우셨지... 지금도 전화 드리면 그냥 우셔... 난 울 할머니 눈물 받아먹고 자랐다...
세상에 눈물 만한 사랑은 없어... 너의 누나, 지금 그런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
경철 : ... (보며)
S#46. 원희의 아파트 앞 (동 밤)
난영, 유지 나란히 오며 아까 추던 춤을 서로 배우고 키득거리며 웃고. 잘자 잘가 하이파이브하고.
돌아서는 난영의 표정은 서늘해지고. 난영,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쉰다.
난영을 지켜보는 경철의 위로.
영재 : (E) 넌 누굴 위해서 그렇게 울어본 적 있니?...
경철 : (난영을 보며) ...
난영 : 어, 서경철! (활짝 웃고) 치사하게 도망치더니, 여긴 왜 왔어?
S#47. 근처 어린이 놀이터(동 밤)
그네에 나란히 앉은 난영과 경철.
경철 : 너두 울보지?
난영 : 내가 은제? 내가 바보니?
경철 : 울고 나면, 마음이 훨씬 가벼워질 거 같아. 그래서 그렇게들 우는 거지?
난영 : 난 안 운다니까!
경철 : 난, 울고 싶어도 못 울어...울 자격도 없는 놈이야...재수 옴 붙은 놈.
난영 : ... 또 시작이다... 야, 너 낳다가 너의 엄마 돌아가신 게 왜 니 탓이야? 너두 진짜 미친놈이야.
경철 : ... 장난영... 그 날이지... (난영의 위로) 나더러 핸드폰 줄 사달라고 졸랐는데, 내가 안 사줘서, 너 화났던 날...
그래서 락까페
난영 : OL) 아니야,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경철 : (보며) ...내가 너한테 죄책감 느낄까봐 그래서 숨긴 거지? ..그랬구나...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아닐 거야...
내가 그렇게까지 재수 없는 놈은 아닐 거야... 그러면서
그런 경철의 말을 가로막듯이 키스하는 난영, 짧고 서툴게.
경철에게 다가갔던 난영의 그네 떨어지면. 다시 어색한 침묵.
경철 : (굳고) ...
난영 : ... 사랑해...
경철 : ... (보면)
난영 : ... 자존심 상해서 다른 말로 했으면 좋겠는데, 다른 말은 생각이 나지 않네...
(보며, 눈물이 흐르고) ... 나 때문에 아프게 해서, 정말 미안해...
경철 : 아니야... 저기... (눈물이 흐른다, 어 하며 일어나 돌아서며 얼른 닦는데 또 흐르고) ...
난영 : (보는데 눈물과 함께 웃음까지) 바보... 울보...
경철 : 아니야! (흑 하고 울음이 터지고) ...
난영, 그런 경철을 안아준다.
두 사람, 함께 울며.
S#48. 경주네 공원 (동 밤)
벤치에 앉은 경주, 눈물을 닦고 일어난다.
S#49. 동네 골목길 (동 밤)
경주, 걸어오는데 휴대폰 울리고
경주 : (놀라며 보다가, 받는다) 네...
정환 : (F) 서과장! 바이어한테 클레임 당했다며! 도대체 일을 하는 거야, 마는 거야!
경주 : ...
정환 : (F) 일을 못하면, 성격이라도 좋든가... 거래처 사장님이 아픈데, 병문안 한번도 안 오니?
경주 : ...
정환 : (F) 오늘 혼자 머리 감다가 죽는 줄 알았단 말야!
경주 : (비로소 버럭) 아니 아픈 사람이 머리를 왜 감아요! 머리 며칠 못 감는다구 죽어요 죽어! 사람이 왜 그래요 도대체
정환 : (F) 이쁜 아가씨 만나러 오는데, 어떻게 그냥 와?
경주 : !
S#50. 근처 골목 (동 밤)
경주, 달려간다.
S#51. 공원 (동 밤)
경주, 헉헉이며 달려와 보면.
아까 그 벤치에 앉아 있는 정환, 환자복에 쉐타 걸치고.
정환 : (찡하게 보다) 다리에 모타 달았니? 십 분은 걸릴 줄 알았는데 딱 삼분만에 오네?
경주 : (헉헉이며, 정환을 주먹으로 치며) 미쳤어요!
정환 : 아야... 나 아직 아파.
경주 : ...(쩔쩔매며) 어, 미안미안 괜찮아요? 이러다 또 도지면 어쩔려구? 빨리 일어서요, 어서 가요.
정환 : 괜찮아, 안 들켜... 두 시간 뒤에 알약 하나만 받아먹으면 돼.
경주 : ... 괜찮아요?
정환 : 응... 앉아...
경주 : (떨어져 앉고)
정환 : ... 가까이 앉아.
경주 : ... 여기가 더 좋아요... 잘 보여...
정환 : ... 집사람이... 헤어지재
경주 : (돌아보며) ...
정환 : ... 결혼 서약 깬 것도 나고, 이혼하자고 조른 것도 난데... 참 ... ... 죽는 것도 무섭더니.... 사는 것도 무섭네...
경주 : ... (눈물을 쓱 닦고) 저기요... 내 말, 들어 줄래요?
정환 : (보면)
경주 : 가서 그렇게 말하세요.... 논 바다 비아... 떠나지 말라고 그러세요
정환 : (보며)
경주 : ... 죽다가 살아나서 뒤늦게 철 들었다고, 이제부터는 정말 잘할 거라고 빌어요, 꼭 그렇게 하세요...
정환 : (눈물로 보면)
경주 : ... 당신, 이번에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죠?...
정환 : ...
경주 : 살아줘서 정말, 고마워요...
두 사람, 또 그렇게 뚝 떨어져 앉아서.
S#52. 경주네 골목길 (동 밤)
경주, 묵묵히 걸어온다. 울지 않는다.
S#53. 경주네 거실 (동 밤)
경주, 다녀왔습니다하며 들어오면.
경철 : 왜 이렇게 늦어!
경주 : (보면)
경철 : (아무 일 없던 표정으로) 밥 먹었지?
경철과 경주모, 화투놀이를 하고 있다.
경주모 : 너두 낄래? 둘이 치려니까 재미없다 야.
경주 : (먹먹해서) 어... 돈내기지? (앉고)
경철 : 엄마가 벌써 이천원이나 땄어.
경주모 : 우리, 그 돈으로 뭐할까? 금강산 갈까? 제주도 갈까?
경주 : 제주도 좋지... ...
S#54. 채옥의 집무실
채옥, 안경을 쓰고 장부를 보며 계산기 두드린다.
잔뜩 쌓여진 영수증과 어음 지불각서 등 정신없이 살피고.
만호 : 이사님, 그게 아니잖습니까? 이거 좀 보세요... 그러게 한사장님한테 자문을 좀 얻자니까요.
채옥 : 그만 퇴근하세요.
만호 :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고 사업은 사업가가 (채옥이 계산기 집어던지면 그제서야, 꾸벅) 먼저 가겠습니다.
채옥 : (창가로 가 서며, 외롭고 고단하다) ...
S#55. 병원 복도와 병실 (동 밤)
정환, 쉐타를 벗어들고 텅 빈 병원 복도를 걸어 들어온다.
빈 병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정환, 혼자 침대에 오르는데 또 한번 눈물이 왈칵 나며.
그렇게 혼자 남는 정환.
S#56. 지하철 역 (아침)
빠르게 달리는 지하철, 지상으로 나오며 일상의 아침이 열리고.
S#57. J 기획 로비 (아침)
정환, 출근하면 수위가 오랜만이라고 인사하고.
정환, 언제나처럼 밝게 청소부 아줌마와도 인사하고 들어오는데.
저만치에 경철이 기다리고 서있다.
정환 : (긴장으로 보며)
경철 : (경멸의 감정을 누르고, 당당하게 보며) ... 사직서를 내러 왔습니다. 다음 주부터 복학 준비를 해야되거든요.
정환 : 응...
경철 : 엘리베이터가 만원인데 (겨우 조금 미소) 계단으로 갈 수 있겠어요?
정환 : (짧게 보며)
S#58. 동 비상계단
정환과 경철, 계단을 오른다.
말없이, 빠르게 절도 있게 계단을 오르는 두 남자의 위로 프래시 백 되는 8회 30씬의
경철 : (E) 저, J 기획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6층을 지나가는 정환의 걸음, 가볍고 빠르게. 그런 정환을 쫒아 올라가는 경철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며.
정환 : 다른 데 가서 알아봐. (뒤도 안 돌아보고 복도로)
경철 : 헉헉, 몇 층이야 대체? 괴물 아냐? 같이 가요!
복도로 따라나가 달려서 정환에게 따라붙고, 땀 닦으며 헐떡이고.
정환 : 방금 너는 신입사원 면접에서 떨어졌어. 몸부터 만들고 와.
경철 : 에... 이건 공정한 게임이 아니죠? 사장님은 질문만 하고, 나혼자 떠들었잖아요.
정환 : 세일즈는 언제나 혼자 떠드는 거야. 바이어의 마음을 움직이기전에는 오줌도 참아야하고, 숨도 참아야 돼.
회상 끝나고. 계단을 다 올라온 두 남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본다.
정환 : 제법 틀이 잡혔는 걸?
경철 : 그 동안 많이 배웠습니다. (목례하고)
S#59. 동 복도
경철 : 뭘 배웠는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불과 몇 달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감정들을 느꼈어요.
정환 : (멈추며)
경철 : 제가 변하긴 변했나봐요... 안 그러면, 야구방망이 들고 와서 사무실을 다 깨부셨을텐데...
정환 : ...
경철 : 사장님하고 누나, 이해가 안됩니다... 또 모르죠, 제가 그 나이가 되면... 그래도 안되는 일은 안 해야되는 거 아닙니까?
정환 : ...
경철 : 정말 모르겠네요... 우리 누나는 인제... (말을 못 잇고 그저 인사하고) 안녕히 계세요. (돌아서 간다)
정환 : ... ...
S#60. 유비텍 입구와 디자인실
영재, 심각한 표정으로 걸어 들어와 멈춰선다.
원희와 함께 그림을 놓고 이야기하며 웃는 경주.
그런 경주를 바라보는 영재의 표정에 긴장과 연민이.
경주 : (고개를 들다가) 어디 갔었어?
영재 : (보며)
경주 : 시원한 거 한잔 줄까? (일어서려면)
영재 : 잠깐... 이거 좀 볼래? (가방에서 프린트 천을 꺼낸다)
경주 : 내 그림이네? .... (자세히 보면 아니다)
원희 : (다가와 본다)
영재 : 나도 속을 뻔 했어... 너무 잘 뽑아내지 않았니?
원희 : ...원가가 얼마래? ... 어쨌든 윤채옥씨 타격 좀 입겠구나.
경주 : (듣는 위로)
영재 : 조금이 아니야... 안산 어느 공장에서 비밀리에 대량생산되고 있어. 이 프린트 말고, 윤채옥씨네 신제품 원단 전부...
경주 : ... 왜?
원희 : 그럼 누가 작정하고 덤빈 거네... 원단뿐이 아니고, 의상 디자인까지 카피해서 먼저 출시하면...
영재 : 정말 끝장이야.
경주 : !
S#61. 동대문 의류 상가 (동 낮)
어느 점포에 걸린 앞 씬의 프린트 의상, 채옥의 의상들이 주르륵 걸려있다. 그것을 확인하고 휴대폰 거는 대박.
대박 : 누나! 누나가 윤채옥씨한테 준 그림이 왜 동대문에 깔려있어?
한두 집이 아니고, 완전 도배를 했다니까! 옷값은 또 왜 이렇게 싸냐구?
S#62. 채옥 집무실 (동 낮)
채옥, 옷을 들고 부들부들 떤다.
채옥 :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 우리 옷은 아직 박스도 안 뜯었는데, 이것들이 어떻게 시장에 다 깔리냐구요!
만호 : ... 디자인을 빼돌린 거 같습니다.
채옥 : 특허청에 고발해요.
만호 : 소용없습니다. 이파리 끝, 소매 끝, 아주 교묘하게 피해간 것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덤벼든 거 같습니다.
채옥 : 작심이라뇨 뭐 뭘요?
만호 : 우리, 망하게 하려구 작심했다구요!
채옥 : 망해요? 우리가? 왜?
만호 : 이 어음이요! 바로 내일부터 속수무책으로 돌아올텐데...
겨우 신제품 출고 날짜 잡아놨더니, 우리보다 한발 앞서서 반 값에 똑같은 물건을 시장에 깔아놨단 말입니다.
채옥 : 누 누가 그런 짓을...
만호 : 우리가 돈을 못 갚으면, 이 빌딩이 누구 손에 넘어가는지는 아시죠... 투자자와 사채업자들이 다 한통속이었습니다.
채옥 : ....
만호 : ... 정신 차리시고.... 빨리 재산정리 하십시오.
채옥 : 네?
만호 : 연속극도 안 봅니까! 부도나면 사채업자 몰려와서 깽판 치고, 집달리들이 빨간 딱지 붙여놓는 거 말입니다.
남의 일 아니라구요!... (채옥의 질리는 얼굴 위로) 한 사장님 회사까지 넘어 간단 말입니다.
채옥 : (질리며) ...
S#63. 동 테라스 (동 낮)
채옥, 극도의 두려움과 망설임으로 어쩔줄 몰라하고.
채옥, 휴대폰을 누르다 끊고, 왁 짧은 울음을 터뜨리고, 또 얼른 감정 수습하며 매몰찬 표정으로.
S#64. 유비텍 디자인실 (동 낮)
경주, 어쩔줄 모르고 서성이다가. 가방을 들고,
원희 : 어디 가?
경주 : 그 사람은 아직 모르고 있을 거야... 그 사람이라면 뭐 해결책이 나올 거야, 그지?
영재 : ... 자기 와이프한테 나쁜 일 생기면, 남자는 절대로 이혼 못해. 그건 알지?
원희 : 윤채옥이라면, 남편이야 어떻게 되던 말던, 발목 잡고 늘어질 거야.
경주 : ... (그대로 나간다)
원희 : 바보...
영재 : ...
S#65. J기획 사무실과 사장실
채옥, 당당하게 문을 밀치고 들어온다. 난영이 깜짝 놀라 일어서면.
채옥 : 사장님 계시지? 나 차 마실 시간 없어?
사장실로 들어가서 의자에 척 앉고.
정환 : (어, 하는 느낌으로 보고)
채옥 : 그거 빨리 덮고 일어서. 두시까지 법정에 출두하래.
정환 : ... 뭐... 어디?
채옥 : 내가 이혼서류 접수시켰거든?
정환 : 여보.... 우리 서류에 싸인도 안 했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채옥 : 어, 당신 도장 아무거나 찍어서 내가 냈어. 빨리 옷 입어. 나 내일 모레까지 어딜 좀 가야되서 바쁘거든?
정환 : (보면)
채옥 : 미국 있을 때 사귄 애가, 요트를 샀는데 그 기념으로 대서양 횡단을 한데!
당신두 알지? 내가 제일 하고 싶어하는 게 그거잖아.
정환 : ... 그래, 여행 다녀와... 다녀와서 천천히
채옥 : 아 참... 질기네... 이것보세요, 요트 여행을 여자애들 몇 명이 가겠어? 당연히 파트너가 있지...
난 누구처럼 불륜은 싫단 말야. 당당하게 독신선언 하고 즐길 거야. (정환의 위로) 솔직히 말해, 당신도 시원하잖아.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꿩 먹고 알 먹고, 우리 쿨하게 끝냅시다. 응?
정환 : (보며)
채옥 : 근데, 위자료는 좀 빨리 줬으면 좋겠다. 나 돈 쓰고 싶어 미치겠어.
정환 : ... 그래... 그러자...
채옥 : (돌아서는 표정) ...
S#66. 거리 (동 낮)
경주, 걸음 점점 빨라지며 걸어가고.
S#67. J 기획 로비
경주, 뛰어들어오고.
S#68. J 기획 복도
정환과 채옥, 나란히 걸어온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뛰어오던 경주와 딱 마주치고.
경주 : (멈추며)
정환 : ...
채옥 : 어, 서경주씨... 이이 만나러 왔나요?
경주 : 네... 저기, 근데 윤 이사님께 여쭤볼 게
채옥 : 근데 지금 우리 바쁘거든요? (보며) 법원에 가야돼요.
경주 : (경악하며, 정환을 보면)
정환 : (외면하고)
경주 : ...
채옥, 정환의 팔짱을 끼고 경주를 스쳐 지나간다.
그렇게 스쳐 가는 두 사람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는 경주.
그렇게 엇갈리는 세 사람에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