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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도읍지 숭례문종목 국보 제1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2.원각사지 십층석탑
종 목 국보 제2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2가 38
시 대 조선시대
원각사는 지금의 탑골공원 자리에 있었던 절로, 조선 세조 11년(1465)에 세웠다. 조선시대의 숭유억불정책 속에서도 중요한 사찰로 보호되어 오다가 1504년 연산군이 이 절을 ‘연방원’이라는 이름의 기생집으로 만들어 승려들을 내보냄으로써 절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 탑은 조선시대의 석탑으로는 유일한 형태로, 높이는 약 12m이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탑 구석구석에 표현된 화려한 조각이 대리석의 회백색과 잘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
탑을 받쳐주는 기단은 3단으로 되어있고, 위에서 보면 아(亞)자 모양이다. 기단의 각 층 옆면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화사하게 조각되었는데 용, 사자, 연꽃무늬 등이 표현되었다. 탑신부는 10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3층까지는 기단과 같은 아(亞)자 모양을 하고 있고 4층부터는 정사각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각 층마다 목조건축을 모방하여 지붕, 공포(목조건축에서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위에 얹는 부재), 기둥 등을 세부적으로 잘 표현하였다.
우리나라 석탑의 일반적 재료가 화강암인데 비해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고, 전체적인 형태나 세부구조 등이 고려시대의 경천사지 10층석탑과 매우 비슷하여 더욱 주의를 끌고 있다. 탑의 윗부분에 남아있는 기록으로 세조 13년(1467)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형태가 특이하고 표현장식이 풍부하여 훌륭한 걸작품으로 손꼽히고 있다.
3.흥인지문
종 목 보물 제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종로6가 69
시 대 조선시대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4.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5.경복궁
종 목 사적 제11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세종로 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중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태조 3년(1394) 한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세웠다.
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 복을 빈다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에서 오는 사신을 대접하도록 하였으며, 연못을 크게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는 아미산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는데, 집현전을 두어 학자들을 가까이 하였다. 경회루의 남쪽에는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으며, 궁의 서북 모퉁이에는 천문 관측시설인 간의대를 마련해 두었다. 또한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4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창덕궁·창경궁과 함께 모두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웠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의 행동을 하여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잃게 되었다.
현재 궁궐 안에 남아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숙향당·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정 등이 있다.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을 지킨 궁궐로서, 궁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가 있으며,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건물들의 배치는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 등이 앞부분에 있으며,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이 자리잡고 있다. 전조후침의 격식인데, 이러한 형식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궁궐 안 대부분의 건물들이 없어지기는 하였지만, 정전·누각 등의 주요 건물들이 남아있고 처음 지어진 자리를 지키고 있어서, 조선의 정궁의 모습을 대체적으로나마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6.서울사직단
종 목 사적 제121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사직동 1-28
시 대 조선시대
종묘와 함께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에 수도을 정하고, 궁궐과 종묘를 지을 때 함께 만들었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이 곳에서 지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의 사직을 끊고 우리 민족을 업신여기기 위하여 사직단의 격을 낮추고 공원으로 삼았다. 1940년 정식으로 공원이 된 사직공원이 옛 사직단의 자리이다.
5.창덕궁(비원포함)
종 목 사적 제122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7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 가운데 하나로 태종 5년(1405)에 세워졌다. 당시 종묘·사직과 더불어 정궁인 경복궁이 있었으므로, 이 궁은 하나의 별궁으로 만들었다.
임금들이 경복궁에서 주로 정치를 하고 백성을 돌보았기 때문에, 처음부터 크게 이용되지 않은 듯 하다. 임진왜란 이후 경복궁·창경궁과 함께 불에 타 버린 뒤 제일 먼저 다시 지어졌고 그 뒤로 조선왕조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정궁 역할을 하게 되었다. 화재를 입는 경우도 많았지만 제때에 다시 지어지면서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진다. 내전의 뒤쪽으로 펼쳐지는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이 마련되어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충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있다.
1917년에는 대조전을 비롯한 침전에 불이 나서 희정당 등 19동의 건물이 다 탔는데, 1920년에 일본은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가 대조전을 다시 짓고, 강령전을 헐어서 희정당을 다시 짓는 등 경복궁을 헐어 창덕궁의 건물들을 다시 지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건물 중 궁궐 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광해군 때 지은 것이다.
정궁인 경복궁이 질서정연한 대칭구도를 보이는데 비해 창덕궁은 지형조건에 맞추어 자유로운 구성을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창덕궁과 후원은 자연의 순리를 존중하여 자연과의 조화를 기본으로 하는 한국문화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장소로,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어 있다.
6.창경궁
종 목 사적 제123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와룡동 2-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궁궐로 태종이 거처하던 수강궁터에 지어진 건물이다.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를 위해 창경궁을 지었다. 처음 지을 당시의 건물은 명정전·문정전의 정전과 수령전·환경전·경춘전·인양전·통명전들의 침전이 있었으며, 양화당·여휘당·사성각 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궁궐중에서는 유일하게 동쪽을 향해 지어졌다.
처음에는 별로 사용되지 않다가 임진왜란 때에 경복궁·창덕궁과 함께 불에 탄 이후, 창덕궁과 같이 다시 지어져 조선왕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되었다. 숙종의 사랑을 받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독살하려는 못된 행동을 저지르다가 처형을 당했는데, 당시 희빈은 주로 취선당에서 생활하였다. 또한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일을 저질렀는데, 세자가 갇힌 뒤주를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8일간이나 두었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한 후부터 많은 변화가 있었다. 1909년 궁궐 안의 건물들을 헐어내고 동물원과 식물원을 설치하였으며, 궁의 이름을 창경원으로 낮추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84년 궁궐 복원사업이 시작되어 원래의 이름인 창경궁을 되찾게 되었고, 궐 안의 동물들을 서울대공원으로 옮기면서 벚나무 역시 없애버렸다.
장조·정조·순조·헌종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태어난 궁으로, 광해군 때 다시 지어진 정문·정전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옆에 있는 창덕궁과 함께 조선시대 궁궐의 역사를 살피는데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유적이다.
7.종묘
종 목 사적 제125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훈정동 1-2
시 대 조선시대
종묘는 조선왕조의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다. 종묘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태조 3년(1394)에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짓기 시작하여 그 이듬해에 완성되었다. 태조는 4대(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추존왕을 정전에 모셨으나, 세종 때 정종이 죽자 모셔둘 정전이 없어 중국 송나라 제도를 따라 세종 3년(1421) 영녕전을 세워 4대 추존왕의 신위를 옮겨 모셨다.
정전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608년 다시 지었고, 몇 차례의 보수를 통해 현재 19칸의 건물이 되었다. 정전에는 19분의 왕과 30분의 왕후를 모시고 있다. 영녕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1608년 다시 지었다. 현재 16칸에 15분의 왕과 17분의 왕후 및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고종의 아들 이은과 부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정전 앞 뜰에는 조선시대 83명의 공신이 모셔진 공신당이 있고, 중요무형문화재인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이 전해진다.
종묘는 동시대 단일목조건축물 중 연건평규모가 세계에서 가장 크나, 장식적이지 않고 유교의 검소함이 깃든 건축물이다. 중국의 종묘가 9칸인데 비해 19칸의 긴 정면과 수평성이 강조된 건물 모습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독특한 건축물이며, 동양 고대문화의 성격과 특징을 연구하는데 필요한 귀중한 자료가 담긴 유산이다. 종묘의 정전과 영정전 및 주변 환경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종묘제례와 음악·춤의 원형이 잘 계승되어,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8.운현궁
종 목 사적 제257호
지 정 일 1977.11.22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운니동 98-50
시 대 조선시대
운현궁은 흥선대원군이 살아던 집으로, 고종이 태어나서 왕위에 오를 때까지 자란 곳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집과 1910년대 새로 지어 덕성여자대학 본관으로 사용하던 서양식 건물을 합쳐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한옥은 제일 앞 남쪽에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이 자리잡고, 뒤쪽인 북쪽으로 행랑채가 동서로 길게 뻗어있으며 북쪽에 안채인 노락당이 자리잡고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이곳에서 흥선대원군이 정치를 하였고, 궁궐과 직통으로 연결되었다. 흥선대원군은 10여년간 정치를 하면서 세도정치의 폐란을 제거하고 인사·재정들에서 대폭적인 개혁을 단행하였고,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경북궁을 다시 짓기도 하였다.
지금은 궁의 일부가 덕성여자 대학으로 사용되고 있고 방송국 시설이 있기도 하다. 이로 인해 대원군이 즐겨 사용하던 아재당도 헐려 나가고 영화루와 은신군·남연군의 사당도 모두 없어졌다.
9.경희궁지
종 목 사적 제271호
지 정 일 1980.09.16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126
시 대 조선시대
원종의 집터에 세워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이궁이다.
원종(1580∼1619)은 선조의 5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로 후에 왕으로 추존되었다. 광해군 8년(1616)에 세워진 경희궁은 원래 경덕궁 이었으나 영조 36년(1760)에 이름이 바뀌었다.
원래의 규모는 약 7만여평 이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인 1907년부터 1910년에 걸쳐 강제로 철거되어 궁궐로서의 존재가치를 상실하였고 궁터도 철저하게 파괴되고 변형되어 결국 현재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경희궁에는 부속건물로 회상전, 융복전, 집경당, 흥정당, 숭정전, 흥학문, 황학정이 있었는데 융복전과 집경당은 없어졌다. 나머지 건물은 1910년 지금의 서울고등학교가 설립된 후, 회상전은 조계사로, 흥정당은 광운사로, 숭정전은 조계사에 옮겼다가 다시 동국대학교 안으로, 흥화문은 박문사로, 황학정은 사직공원 뒤로 각각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현재 이 자리에 궁궐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로는 정전이었던 숭정전의 기단부와 제자리에서 옮겨진 석수, 댓돌 등이 있고 이 밖에 바위에 새진 글이 남아있다. 공터 북쪽에 돌로 쌓은 축대의 길이는 약 100m로 건물로 오르는 계단에는 용머리조각과 구름무늬가 있어 주목된다.
10.덕수궁
종 목 사적 제124호
지 정 일 1963.01.18
소 재 지 서울 중구 정동 5-1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궁궐로서 경운궁으로 불리다가, 고종황제가 1907년 왕위를 순종황제에게 물려준 뒤에 이곳에서 계속 머물게 되면서 고종황제의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궁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덕수궁 자리에는 조선 9대 임금인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궁궐이 모두 불에 타고 없어서 임시로 월산대군의 집을 거처로 정하고 선조 26년(1593)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근처의 계림군과 심의겸의 집 또한 궁으로 포함하였다.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은 즉위 3년(1611)에 이곳을 경운궁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창경궁으로 옮길 때까지 왕궁으로 사용하였다. 그후 선조의 왕비인 인목대비가 경운궁으로 쫓겨나와 있게 되었는데 그 후로 광해군은 이 곳을 서궁으로 낮추어 부르게 하였다.
광해군이 인조반정으로 1623년에 물러나면서 인조는 즉조당과 석어당만을 남기고 나머지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버렸다. 그 뒤로 고종황제가 러시아공관에서 옮겨오면서 다시 왕궁으로 사용되었는데, 그 때부터 이 궁은 비로소 궁궐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1904년의 큰 불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에 타 없어지자 서양식 건물인 석조전들이 지어지면서, 원래 궁궐 공간의 조화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이 바뀐 것이다. 덕수궁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다시 지으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이름도 대한문으로 고쳐 정문으로 삼았다.
비록 조선 후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1.선농단
종 목 사적 제436호
지 정 일 2001.12.29
소 재 지 서울 동대문구 제기2동 274-1
시 대 조선시대
선농단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일컬어지는 고대 중국의 제왕인 신농씨와 후직씨를 주신으로 제사지내던 곳이다.
선농의 기원은 기록에 의하면 멀리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태조 이래 역대 임금들은 이곳에서 풍년이 들기를 기원하며 선농제를 지냈다. 또한 제를 올린 뒤에는 선농단 바로 남쪽에 마련된 적전(籍田)에서 왕이 친히 밭을 갊으로써 백성들에게 농사일이 소중함을 알리고 권농에 힘쓰기도 한 우리나라 전통 농경문화의 상징적 유적이다.
왕이 선농단에서 친경하는 제도는 조선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 융희 3년(1909)을 마지막으로 일제하에서 폐지되었으며 지금은 사방 4m의 돌단만이 남아 있다.
12.독립문
종 목 사적 제32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941
시 대 조선시대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의지를 다짐하기 위해 세운 기념물이다.
갑오개혁(1894∼1896)은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하였던 개혁운동이다. 그러나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성공하지 못하였고, 나라의 자주독립 또한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서는 어떠한 간섭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중국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의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하였다.
화강석을 쌓아 만든 이 문의 중앙에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 있고, 왼쪽 내부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층계가 있다.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홍예문의 가운데 이맛돌에는 조선왕조의 상징인 오얏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그 위의 앞뒤에는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글씨와 그 양옆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앞에는 영은문주초(사적 제33호) 2개가 남아있다.
원래 남동쪽으로 70m떨어진 길 가운데에 있었는데, 1979년 성산대로 공사에 따라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고려의도읍지
개경
1> 선죽교
개성 선죽동에 있는 돌로 만든 다리이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이방원의 부하들에게 죽음을 당한 곳으로, 비가 오면 핏자국이 나타난다는 전설이 있다.
고려시대의 돌다리. 국보급 유산으로 개성시 선죽동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노계천에 있다. 원래 이름은 선지교였으나 정몽주가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 대나무가 났기 때문에 그 이름을 선죽교로 고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다리 난간의 너비는 2.54m, 길이는 6.67m.
2> 만월대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 시대의 왕궁터로 지금은 건물이 모두 없어지고 받침돌만 남아 있다.
만월대의 가장 큰 풍수적 특징은 건물을 배치할 때 인위적으로 균형을 잡으려 하지 않고 자연 지형의 흐름을 따르려 했다는 것이다.
송악산 남쪽기슭에 있는 고려의 왕궁 자리로 왕궁의 넓이는 125만㎡. 원래 달을 바라보는 곳이라는 뜻에서 망월대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전해오면서 만월대로 되었다고 한다. 오늘 여기에는 궁터와 주춧돌만이 남아있다
3> 공민왕릉
만수산 언덕에 있으며, 고려 말에 왕권을 크게 떨쳤던 공민왕의 무덤으로, 규모가 웅장한 고려 시대의 대표적 왕릉이다.
개성에서 서쪽으로 약 11km 떨어져있다. 고려 31대 공민왕이 살아있을 때에 만든 왕과 왕비의 쌍무덤. 공민왕은 44살까지 살았는데 왕비가 죽은
다음 7년동안 이 무덤을 건설. 무덤의 아래쪽에는 구름무늬와 12지신을 부각한 화강암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으며 그밖에 돌로 조각한 범과 양을 세워놓았다
4> 나성
거란의 침입이 있은 뒤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현종이 이가도에게 명하여 축성하였으며, 착공 21년 만인 1029년(현종 20) 완공하였다. 규모는 송악산 남쪽 사면과 남산을 둘러 시가지 전체를 포위하듯이 쌓았으며, 둘레길이는 2만 9700보에 나각이 1만 3000칸에 이르렀다.
5> 숭양서원
고려 말의 학자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1573년에 세운 서원이다.
개성시 선죽동 소재. 사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이고,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지었다.
6> 현화사 7층 석탑
고려 초기의 탑으로, 규모가 웅대하고 탑을 쌓은 솜씨가 세련되었다.
개성시 장풍군 월고리에 있는 고려 초기의 석탑. 국보급 유산. 현화사는 1018년에, 현화사 탑은 1020년에 세워졌다. 높이는 8.64m로 고려 시대 탑으로서는 큰 편에 속한다. 각 탑신마다 불상과 연꽃을 조각했으며 기단부(받침대)에 벽돌처럼 돌을 쌓은 것이 이색적이다. 현재 현화사는 없어지고 그 터에 이 탐과 현화사비, 당간지주, 돌다리 등만이 남아 있다.
7> 경천사 10층 석탑
고려 말에 건립된 대리석 석탑. 국보 제86호. 높이 13.5 m.
원래 경기 개풍군 광덕면에 있었는데 한말에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가 불법으로 해체하여 일본으로 반출하였다.
그 후 반환되었으나 파손이 심하여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60년에 재건되었고, 다시95년 해체된 후 문화재연구소·한국자원연구소·원자력연구소의 공동작업으로 98년까지 완벽 보존처리하기로 하였다.
석탑의 형식은 고려시대에 들어서서 신라형식을 이은 평면직사각형이다.
8>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충남 논산시 은진면 관촉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 보물 제218호. 화강석제.
높이가 l8.12 m나 되는 커다란 불상이라는 점과 토속적인 조각이라는 점에서 대표적인 불상이다. 얼굴은 이마가 좁고 턱이 넓은 삼각형이며 옆으로 길게 째진 눈, 넓은 코, 한일 자로 꼭 다문 큰 입이 토속적인 느낌을 준다.
목은 굵고 삼도가 있으며 귀는 어깨까지 내려와 매달린 느낌이다.
몸은 거대한 돌을 원통형으로 깎아 만든 돌덩이에 불과하여 인체라는 느낌은 전혀 없으며, 왼손은 아래로 내려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모습이 관음보살인 것 같다.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는 어깨에서 양쪽으로 길게 내리고 있으며, 가로무늬가 있고 몸 중앙으로 몇 개의 U형 옷주름을 돌렸을 뿐 매우 단조롭다.
이 불상은 968년(고려 광종 19)에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9>8각 9층 석탑 : 강원 평창군 진부면 동산리. 국보 제48호
월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4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15.2m이다.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경내에 있는 9층석탑으로, 석탑 앞에는 공양하는 모습의 보살상이 마주 앉아 있다. 이 석탑은 우리나라 북쪽 지방에 주로 유행했던 다각다층석탑의 하나로 고려 초기 석탑을 대표하는 것이다.
10>팔만 대장경판
경남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국보 제32호. 고려시대. 해인사 경내의 2동의 경판고에 보관되어 있는 대장경.1995년 12월 석굴암·종묘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11>부석사 무량수전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에 위치하고 있다. 국보 제18호이고, 고려시대 문화재이다. 1962년 12월 20일 지정되었고, 크기는 정면 5칸, 측면 3칸이다.
12>청자사자 유개향로
종 목 국보 60호
분 류 청자
지정일 1962.12.20
고려 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경에 만들어진 청자향로로, 높이 21.2㎝, 지름 16.3㎝이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는 3개의 짐승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는데, 전면에 구름무늬가 가늘게 새겨져 있다. 몸체 윗면 가장자리에도 세 곳에 구름무늬를 배치하였다.
13>영인오층석탑
종 목 문화재자료 239호
명 칭 영인오층석탑
분 류 석탑
지정일 1984.05.17
아산 관음사 근처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탑이 속해있던 절의 역사나 구체적인 유래는 전하지 않는다. 형태는 2층 기단 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14>부석사 소조여래좌상
국보:45호
명칭: 부석사소조여래좌상
소재지: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9 부석사
시대: 고려시대 중기
부석사 무량수전에 모시고 있는 소조불상으로 높이 2.78m이다. 소조불상이란 나무로 골격을 만들고 진흙을 붙여가면서 만드는 것인데, 이 불상은 우리나라 소조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으로 가치가 매우 크다.
15>녹청자 도요지
이 곳은 토기에서 자기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생산된 녹청자를 제작했던 곳이다. 단실요(자기를 굽던 가마가 한 개임)로서 22도의 경사면에 만들어진 이 가마는 길이 7.3m, 폭 1.05m, 봉통(아궁이) 폭 1.2m로 보기 드문 소규모 가마이다. 인천광역시 서구 경서동 438-21에 위치되어 있다.
16>고려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 743에 위치하고 있고, 이곳은 고려가 몽고의 칩략에 줄기차게 항전하던 39년간의 궁궐터이다. 1232년 6월 고려 고종은 자주적 정신으로 항몽의 기치를 높이 든 고려 무인들의 주장에 따라 지세가 험한 강화도에 도읍을 옮겼으며 1234년 궁궐과 관아 건물을 완성하였다.
17>강화 5층 석탑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장정리에 위치하고 있고, 강화 하점면 5층 석탑은 단층기단 위에 탑신부를 형성한 일반형 석탑이다. 기단 면석에는 양 우주가 모각되고 갑석은 부연 없이 상면에 낮은 1단 괴임으로 탑신부을 받고 있다. 탑신는 탑신, 옥개석 각 1매씩으로 각 층 탑신에는 양 우주가 양각되어 있다
18>봉천대
인천광역시 강화군 하점면 신봉리 산에 위치하여서 봉천대는 봉천산에 위치하고 있다. [강도지]에 의하면 고려때 축리소로 사용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나라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그 뒤 조선시대 중엽에는 봉수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규모는 높이 5.5m, 밑지름 7.2m의 정방형 사다리꼴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구려의도읍지
국내성→평양성
1.중원고구려비
종 목 국보 제205호
지 정 일 1981.03.18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부락 280-11
시 대 고구려
국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구려 석비로,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된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된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석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처음에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부대사자’·‘제위’·‘사자’ 등 고구려 관직 이름과 광개토대왕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등의 글자가 보이고, ‘모인삼백’·‘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들이 쓰여 있어 고구려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로,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충주지역에까지 확장되었음을 말해준다. 또한 역사적으로 고구려와 신라, 백제 3국의 관계를 밝혀주는 귀중한 자료로서,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고구려비라는 점에서 커다란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2.충주장미산성
종 목 사적 제400호
지 정 일 1997.11.11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장천리 산77-1외
시 대 고구려
충주시 가금면에 있는 장미산의 능선을 따라 둘러 쌓은 둘레 약 2.9㎞의 삼국시대 산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14권에 보면 ‘하천 서쪽 28리에 옛 석성이 있다’라는 기록과 『대동지지』에 ‘장미산의 옛 성의 터가 남아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1992년 조사결과 성 안에서 발견된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들을 통해 백제·고구려·신라가 차례로 이 성을 점령, 경영하였음을 짐작하게 해준다.
북쪽에 있는 절인 봉학사 지역 일부를 빼고는 성벽이 원래 모습대로 남아 있다. 성벽은 돌을 대강 다듬어 직사각형으로 쌓았는데, 서쪽과 서남쪽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또한 북쪽 정상부분의 성벽을 따라 있는 좁고 긴 군사용 참호는 주변 성벽의 재료를 이용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쪽의 대림산성과 강 건너편 탄금대의 토성, 충주산성과 서로를 보호하며 도왔을 것으로 보인다.
파주의 오두산성(사적 제351호)과 지형조건이 비슷해 성을 쌓은 시대나 배경 등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유적이다.
3.포천반월성지
종 목 사적 제403호
지 정 일 1998.02.20
소 재 지 경기 포천시 군내면 구읍리 산5-1외
시 대 고구려
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포천시 군내면에 있는 산성이 있는 자리로 길이는 1,080m이다. 산성은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가 쌓았다고 전해지나, 조사결과 고구려 때 쌓은 성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여러 책에 고성(古城), 산성, 반월산성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대동지지』를 통하여 광해군 10년(1618)에 고쳐 쌓고, 인조 1년(1623)부터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연려실기술』, 『포천군읍지』, 『견성지』에서도 돌로 쌓았다는 기록과 함께 여러 가지 당시 성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현재 성의 옛 자취를 엿볼 수 있는 시설물로는 남쪽과 북쪽의 문터, 성벽 바깥쪽에 사각형 모양으로 덧붙여 만든 치성 4개소, 건물터 6곳, 배수시설이었던 수구터, 장수의 지휘대였던 장대터, 적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 세웠던 망대터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