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레오바고 10월 서울강좌
◾일시 : 2013.10.10 오후4~6시 ◾ ◾장소 : 청파교회 세미나실 ◾좌장 : 김기석 목사 ◾강사 : 김용규 선생 ◾도서 : [백만장자의 마지막 질문] 김용규. 서울: 휴머니스트, 2013.
김기석:
오늘 아레오바고 모임, 김용규 선생님 두 번째로 와주셔서 감사드린다. 고 이병철 회장이 던졌던 24가지 질문에 대해서 신문에 모 목사가 국민일보에 ‘답’이라고 쓴 적이 있었다. 보면서 당혹스럽고, 신학자들이 왜 이 작업을 안 해주나 불평 아닌 불평을 했었다. 그 무렵, 의뢰 들어온 게,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서 촉발된, 재계 CEO 모임에서 각 종교인, 예수, 붓다, 공자 등등에 대해서 그분들이 어떤 물음을 품고 살았는지, 질문을 만들고, 답을 내달라는 거였다. 이병철 회장의 질문과 비슷한 거였다. 예수에 대해서 한일장신대 교수 차 교수와 내가 25꼭지 썼다. 출판 예정이다. 쓰면서도 섬세하게 다뤄주었으면 하는 찰나에 귀한 그리고 진지한 답을 써주셨다. 유치한 질문으로 들릴 수 있지만, 진지하게 받아주셔서, 근원에서 파헤치며 새롭게 얘기를 해주셔서 아마 이 책은 신학생들의 필독서로 옆에 두고 신학적 사고를 어떻게 해가야 하는지 참고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 일관해서 나타나는 태도는,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안티 기독교 운동과 더불어 소개되고 많은 사람들에게 먹히고 있는데, 그들 담론의 문제에 대해 상세하게 잘 얘기해주었다. 과학적 무신론들에게 할 얘기를 여기서 배울 수 있다.
『신을 옹호하다』(테리 이글턴 저; 모멘토, 2010), 이 책도 귀한 책이다. 참고 하면 좋을 거다.
아무튼 이 책이 갖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는데, 철학자로서 신학자로서 모시게 되어 기쁘다.
김용규.
김 목사께서 그렇게 좋은 말씀해주셔서 몸둘 바 모르겠다. 사실은 이 책을 내고 사방에서 꾸중을 많이 듣는다. 책을 읽어보았으면 짐작하겠지만, 우리 집안에는 4대째 기독교 집안이고 그러다 보니 집안에 온통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 많이 있다. 종손 집안인데, 내 항렬에서만도 아우들이 목사들 3명, 전도사들 몇 명이 있다. 책을 내서 한권씩 보내줬더니, 왜 이 책을 썼냐고 하더라. 어른들도 왜 그러냐 하더라. 나를 알고 있던 신학교수 몇 분이랑 목사님은 연락을 끊더라.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꾸중 듣겠거니 하며 왔다.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고, 인문학적 입장을 취하겠다고 서문에 밝혔다. 인문학적 입장이 어떤 것인지는 서문에 언급했듯이, 문헌학적, 문법과 논리에 호소하며, 고전을 인용하는 등등의 몇 가지 원칙을 지키겠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책을 보고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들은, 이성적 사고가 마음의 상처랑은 다르니까, 나에게 연락도 안하더라.
왜 이런 책을 썼는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책에 다 들어있다. 본래 출판사에서 300매 이내로 쓰기로 하고, 만원 남짓으로 결정하려고 부탁받은 책이다. 너무 길어서 출판사도 난감해 했고, 원고를 많이 잘라냈다, 편집과정에서, 그나마도. 질문 하나하나가 책 한권을 쓸 만한 논란 있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독교인으로서 하나님에 관해 어떤 식으로 언급하고 책을 낼 수 있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저자로서는 책 팔아 먹고 사는 사람이니까, 저자로서는 손해이다. 내 자신이 잘 알고 있다. 데카르트도 그랬고, 『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휴머니스트, 2010)도 그렇고, 이런 책이 나가는 정도를 대강 알고 있으니까, 출판사에서도 예측하고. 그래서 내가 인문학 책을 쓰면 이것보다는 3~10배 정도 더 판다. 그런데 1년 걸려서 썼다. 수입이 1/3로 줄어드는 거다.
이런 저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썼다고 말씀드리려 이 자리에 왔다. 책 내용은 읽어보면 알거다. 좀 전에 말씀하셨듯이, 외부로부터 가해오는 새로운 무신론자들, 도킨스, 데닛, 히친스, 이들의 공격이 결코 심상치 않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다. 기독교가 이런 공격에 놓아둔다면, 멀지 않은 날에 도저히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받게 될 것이다, 교회가 지금처럼 인간과 세상의 구원이라는 본래 사역을 뒷전으로 하고, 나 하나 잘먹고 잘사는 현세 구복이나 가르친다면, 교회는 머지않아, 어쩌면 곧 무당집과 같은 처지로 전락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 여기 목사님들께서는 걱정이 과하지 않느냐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말씀드리려 한다. 책 서문에서 밝혔듯이, 21세기 되면서 9.11사태, 새로운 무신론자의 등장하여 기독교를 공격한다. 계몽되지 않은 미개인들로 치부하여 기독교 말살론이나 기독교 해악론을 전개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세계적인 인물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이 공격하는 무기가 ‘과학’이라는 점이다. 무신론자들이 말하는 과학이란, 이미 내성이 생겼고, 그냥 모른 채 내버려두면 된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오늘날 과학은 지난 300년 동안 발전했던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와있다. 이미 오늘날 과학은 신이 되어 있다. 여호와가 신이 아니고, 과학기술교를 믿는 거다. 이미 바뀌었다. 의식하고 있지만, 이 역시 과장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다.
이미 과학은 신이 되었고, 과학기술은 오늘도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고, 우리는 한시도 과학기술 없이 살수 없게끔 신도 노예가 되었다. 일어나자마자 핸드폰을 집어든다.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하다가 잔다. 어떻든, 전기밥솥으로 밥을 지어먹고. 세탁기로 빨아낸 옷을 걸치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고, 컴퓨터로, 기계시설 속에서 일한다. 저녁에도 돌아와서 TV나 컴퓨터를 작동하다가 핸드폰을 만진다.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한순간도 과학기술 없이 살 수 없는 문명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핸드폰이 없어서 자꾸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끼고 산다. 대화중에도 수시로 핸드폰을 확인한다. 실례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런데 그렇게들 한다. 얼마 전에 뉴스를 보니까, 일본에서는 젊은 남녀가 통신을 통해 알아서 실제 만나 맞선을 보고 마주 앉아 얘기하려니까, 쑥스러워서 핸드폰으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이미 우리가 그렇게 되고 있다. 핸드폰이 비단 시간만 알려주는 게 아니다. 건강도 체크해주고. 이런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오늘날 심지어 기독교인들 마저도 세상을 창조하고 이끌어가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서 의심한다. 그렇지만 과학기술의 혜택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고 창조론 가르치지 않기에 과학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살게 하는지는 배우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삶의 가치를 풍요롭게 하는지는 배우지 못한다.
우리는 과학기술에 헌금하고 사는 신자들이다. 한 주에 교회에 1만원 헌금하는 신도들은 핸드폰 사용료로 2만원 가량 지불한다. 한 달에 자동차 연료비 20만원 들어도, 이웃을 돕는데 10만원도 안 쓴다. 과학기술에 쓰는 돈이 하나님과 이웃에 쓰는 돈보다 훨씬 많다는 거다. 그래서 내 분류로 보면, 오늘날의 유신론자와 무신론자가 있는 게 아니라, 무신론자인 과학기술교도와 유신론자인 과학기술교도, 이렇게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기독교인은 여호와와 과학기술을 함께 섬기고 있다는 거다.
이럴 때 도킨스 해리스, 데닛의 과학기술의 흑기사 4인방들이 종교는 전염병이다, 살인마다, 이렇게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다. 특히 한국 기독교는, 내가 과문해서 활발하게 변증하는지 모르지만. 김 목사님 책 기대하지만, 기독교가 아직 반응하지 않고 있다. 처음에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김영사, 2007)을 김영사에 가서 한권 받아와서 시중에 나오기 전에 읽었었다. 이런 책이 나올 수 있나 깜짝 놀랐다. 기가 막힌 책이다. 한편으론 그걸 읽으면 읽는 사람마다 그날로 기독교를 떠날 것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론 다 거짓말이다, 거짓말로 이런 책을 낼 수 있나, 세계적인 학자가.
이런 얘기다. 간단히 얘기하면, 10여년 전에 이런 문제를 냈다. 한 과학자가 질문했다. 신은 자기가 들을 수 있는 돌을 만들 수 있나? 딜레마다. 어떤 대답도 곤경이다. 신이 전능하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이렇게 증명하는 문제를 낸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없다. 왜 답을 하고 있지 않은지. 내 생각에는 이런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합리적인 계몽된 교육을 받는 젊은이들, 우리가 아는 모든 젊은이들의 정신을 병들게 한다는 거다. 이럴 때에 교회 나오는 청년이 있다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거다. 신의 전능이란 말은 거짓말인데, 그 거짓말하는 종교를 믿으러 나간다는 얘기가 되니까 말이다.
왜 답들 하지 않는가. 논리적으로 보면, 간단하게 답할 수 있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자기가 들을 수 없는 돌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신은 그 정의 상, 규정 상 무한하기 때문에, ‘신이 들을 수 없는 돌’이란 말 자체가 모순이 된다. 둥근 삼각형처럼 문제가 성립이 안되는 거다. 간단하게 설명해 줘서 젊은이들의 정신을 건강하게 해주어야 한다. 도킨스의 말에는 이런 식의 말이 가득 차 있다.
‘전지전능’, 신이 오늘 우리가 모이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면, 오늘 이렇게 모이게 않게 할 수 없다는 공격적인 말을 하더라. 다들 함구하고 있지만, 신이 전지하다는 뜻이 미래의 뜻을 아는 거라는 게 아니다. 모든 일의 가능성을 다 알고 있다는 뜻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가능성 중의 하나를 자신의 뜻으로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게 전능하다는 말이다.
이렇게 설명하면 도킨스의 논증은 단지 무식을 자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의 전능이란 개념을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헌데, 이렇게 답해줄 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한국 기독교는 ‘침묵은 금이다’라는 원칙 하에 입을 닫고 있는가, 나는 궁금했다. 그래도 시간이 가면, 누군가 답하겠지. 나야 신학자도 아니고, 기독교계에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도 아니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계속 무신론자들의 책이 번역되어서 상당수가 팔리더라. 많은 수가 팔렸다. 『만들어진 신』은 10만권 넘게 팔렸을 거다. 무신론자, 어중간한 사람들이 샀을 거다. 그들이 주변 기독교인들에게 얘기했을 거다. 간단한 얘기 하나로 기독교 신의 거짓됨을 증명할 때, 기독교인들이 어떤 답을 할지 궁금했다.
여기까지가 우리의 현주소다.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라도 현실을 똑바로 직시하고 정신을 차려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과학기술이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21세기 들어서는 지난 300년 간의 발전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야말로 빅뱅이다. 20세기 말부터 시작된 IT 혁명. 디지털 공학기술이 근원이 될 터. 이런 것이 유전공학, 나노 로봇공학과 접목되어서, 전혀 다른 문명의 차원이 시작될 거다. 미래학자이자 발명가인 레이 커즈와일(Ray Kurzweil)은 『특이점이 온다』(김영사, 2007)에서 이 사람이 말하는 특이점이란, 가속적으로 발전하던 과학이 갑자기 폭발을 하는, 그런 특이점이 있다는 거다. 완전히 새로운 문명을 낳는 시점으로 들어간다는 거다. 이 사람 예측이 재미있는 것은, 그의 예측이 95%맞췄다는 거다. 앞으로 30년 안에 인간의 노화가 역전되고, 젊어지는 현상이 일어나고, 질병이 극복되고, 환경이 회복되는, 그 시점이 온다고 예측했다. 800페이지 책이니까,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과학 지식과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대강 얘기는 이렇다. 나노 기술 활용 에너지 기술 발전, 기후 변화 온실가스 문제해결 가능, 디지털 칩으로 뇌속 정보로 컴퓨터와 통합해서 교류하는 지식을 생성할 것이고, 유전공학의 도움으로 질병 치료는 물론이고 인공신체며 장기를 다 새로워질 수 있다는 거다. 버전 2.0 신체, 새로운 버전 2.0의 인체를 지닌 인간들이 살게 될 날이 곧 20~30년 안에 온다는 거다. 그럼으로써 이 사람의 얘기는, 수 백 만년의 걸친 선사시대, 역사 이전 시대, 3000년 역사시대를 걸쳐서, 이제 다른 차원의 문명으로 들어갈 날이 곧 우리 생애 안에 온다는 거다.
지나친 과장인 것 같기고 하고, 무책임한 낙관론으로 느껴지고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과학기술, 대중들에게 알려지는 수준의 것들만 봐도, 구글 안경 컴퓨터, 삼성 옷 컴퓨터 등등이 시판되고 있다. 2-3년 내로 일상화 될 것이다. 10년 안에 신체에 심는 컴퓨터가 개발될 거다. 최근 미국에서는 이미 시각장애인들도 인공눈을 심으면 볼 수 있게 된다더라. 사람이 착용하면 뇌파를 감지해서 사람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팔과 다리가 개발되어 있다. 곧 시판할 거다. 팔이 전혀 없는 사람도 착용하면 신발끈을 매는 정도의 정밀도를 획득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다리 잃은 한 사람은 로봇다리로 103층까지 걸어올라가 봤다더라.
문제는, 과학기술을 더 신봉하고 의지하게 될 것이란 점이다. 노화 방지, 질병 치유, 이런 시대가 곧 온다면, 사람들이 과연 누구를 믿을 것이며,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불신이 상대적으로 더 커질 것이다. 지금도 현세구복이나 가르치는 한국 기독교는 무당집 점집 같은 대우를 곧 받게 될 것이다. 커즈와일 예언대로 30년 안에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독교는 종교개혁 이후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11세기 동방 정교회 갈라졌다. 500년 후에 프로트스탄트 갈라져나왔다. 21세기가 딱 500년이다. 둘 중 하나 선택해야 한다. 하나는 대대적인 개혁을 하던지, 점집으로 전락하든지.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는 이 같은 사태에 기독교인으로서 염려스럽다. 내 입장에서 보면, 개인의 몸 하나 영혼 하나 주체를 못하지만, “너나 잘하세요”라고 기독교걱정을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있다. 인문저자가 책을 쓴다고 한다면, 어떻든 보편인으로 보편적 주제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보니 이런 걱정을 하게 되었다. 기독교인으로서 단순히 염려하는 게 아니라, 건전한 이성을 가진 일반인으로서도 대단히 우려된다.
이미 잘 알다시피, 헛소리처럼 내 말이 들리는 것은, 과학기술은 머리만 크고 뇌는 작은 초식동물 같은 속성이 있는 까닭에 그럴 거다. 과학기술을 신으로 섬기고 있지만, 그건 우상이다. 과학은 엄청난 능력이 있지만, 스스로 조절할 능력이 없기에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예를 하나 들면 이렇다. 논지는, 과학기술이 과연 신이라면, 불후, 영생, 환경문제해결, 장애자문제해결 등등 해낼거다, 그렇게 위대하다면. 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거다.
로마 클럽(The club of Rome)에서 발표하는 것을 보면, 농업 기술의 발달, 유전 공학, 이런 것들을 통해 이미 지구 인구 70억이 먹고도 남는 식량이 생산되고 있지만, 1년에 1,800만 명이 굶어주고 있단다. 이것은 2차 대전 7년 동안 죽은 수보다 더 많은 거다. 생산된 식량이 남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문제의 본질은 뭐냐? 과학기술이 없어서가 아니다. 원인은 다른 데에 있는 거다. 우리의 탐욕에 있다. 과학기술의 진보만으로는 우리 삶에 관한 모든 문제들, 가난한 자, 옥에 갇힌자 등을 어떻게 과학기술로 회복할 수 있는가. 자연도 마찬가지다. 극지방의 얼음이 녹아내리고 있다. 한파, 가난과 폭염. 식량부족 문제. 전쟁 테러, 이렇게 예측된다. 생태학자들은 해마다 3,000에서 3만의 생물종이 멸종되고 있다고 한다. 100년 후는 반절이 없어지는 거다, 견해들이 분분하긴 하지만.
해양학자도 바다 역시 거대한 쓰레기장이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플라스티키: 바다를 구해줘』(북로드, 2013), 『플라스틱 바다』(미지북스, 2013). 한 해에 10만 마리의 바다거북이, 고래, 돌고래, 해양 포유류들을 죽게 만든다고 한다. 창자에서 플라스틱 조각들이 발견된다고 한다. 알바트로스 새 역시 그걸 자기 새끼한테 먹이는 것도 목격되었다고 한다. 만여마리의 새가 죽어가고 있다.
과학기술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는 거다. 과학기술자들은 관심도 없고 해결방안도 모른다. 인간의 탐욕을 죄로 여기시는 하나님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 인간이 하나님께로 돌아가, 지극히 무참한 탐욕, 자신의 삶마저 죽음으로 몰아가는 탐욕, 오직 그 길 밖에는 없다.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쓰면서 가진 문제의식이었다. 형식은 이병철 회장의 질문에 대한 답을 하는 것이지만, 이에 대한 내 입장은, 하나는 과학을 무기로 삼는 무신론자들의 공격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된다는 거다. 바로 대항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변증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2000년 사를 두고 위대한 신앙인은 위대한 변증가임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변증에 무관심하다면서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면 안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을 가진 과학기술을 포용해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해야 한다. 공룡과 같은 과학기술에게 머리를 달아주는 마지막 방법이며, 희망이다. 기독교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과학기술을 맞상대해서 싸운다거나 또는 그에 굴복한다는 일은 아니다. 오랜 신학 전통으로 봐도, 제2의 원리, 특별섭리가 아닌 일반섭리, 자연에게 맡겨준 자유로운 법칙들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제1 원리이자 특별섭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으로 역사해 나가야겠지만, 과학기술을 포용하는 신학적 전통이 이미 기독교 신학 안에 있다. 진화론을 포용할 만한 신학적 근거도 찾을 수 있다. 그것이 성경에도 맞는다고 생각한다. 자연의 법칙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법칙으로 받아들어야 한다. 과학기술을 포용하고, 그 과학기술자들과 과학기술을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움직이도록 무릎 꿇게하는 게 우리의 사명이다.
둘째는 종교개혁과 같은 혁신으로 주님이 맡기신 사역,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는 일에 교인들을 성화시키고, 교회는 이 땅에서의 현세구복만 아니라, 병든자 옥에 갇힌자를 돌보게끔 그리스도를 닮아가게끔 교육해야 한다. 이게 교회에 맡겨진 유일한 일이다. 교회가 구원을 줄 수 없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는 거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다. 단지 교회는 성화를 교육할 수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그 일을 소홀히 하고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나가는 교회들이 염려스럽다. 하나님의 창조하신 자연을 구하는데도 앞장서야 한다. 자연은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가 지배하고 적대시할, 그래서 망가뜨릴 대상이 아니다. 작은 일이 아니다. 다른 종교 간에 그리고 내적으로 교회 분리하게 한 잘못된 교리들을 정비해야 한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 이 교리는 1215년 라테란 공의회에 만들어졌는데, 그 때 에클레시암(ecclesiam)이란, 카톨릭(catholic)을 뜻했다. 왜 그런 말이 나왔냐면, 천년동안 없던 얘기가 왜 나왔냐면, 십자군 전쟁 300년 동안 이슬람과 싸웠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 종교개혁을 할 때, 미켈란젤로 카셀라(?) 추기경, 프로테스탄트들을 가장 많이 학살한, 그가 프로테스탄트한테 똑같이 얘기했다더라. “카톨릭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그때 종교개혁자들은 그건 거짓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추기경이 마16:18-19을 얘기했다. 예수가 베드로 위에 반석위에 천국 열쇠주겠다는 얘기 말이다. 이 열쇠 없이 나가면 지옥간다는 거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입을 모아 해온 얘기는, 마16:18-19은 마태가 지어서 쓴 것이며, 에클레시아(ecclesia)에 대해 예수는 한 마디도 안했다는 거다.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 바실레이아(basileia) 이 말만 했지, 교회란 말을 하지 않았다. 마태복음에만 두 번 ‘교회’란 낱말이 나오는데, 그 당시에 지어낸 거다. 베드로 계열과 바울 계열이 패권 다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태가 집어넣은 거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말은, 프로테스탄트가 거부하고 나온 얘기다. 바티칸공의회 때,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수정했는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는 지금 로마 카톨릭도 고쳐버린 교리를 고집하고 있다. 그 원인이 뭐냐. 고집하면서 연합을 힘들게 하는 이유가 뭐냐. 이걸 책에 썼더니, 반응이 좋지 않더라.
인문학적, 객관적, 문헌학적으로 썼다. 여러 가지가 불편해서 상처 받는 것에 대해서는 본의가 아니라 죄송하다. 물론 내가 의도한 것은, 이 책에 다 담을 수 없다. 능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표현해내지 못했다. 곳곳에 문제의식들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읽으면서 생긴 의문이나 꾸중이 있다면 해주시길 바란다.
김기석.
교회가 사회적 성화를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하면서, 존 웨슬리를 거론했다. 그 대목에서 흥미롭게 읽었다. 오늘의 감리교회의 현실은 웨슬리의 신학의 방향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다. 사회적 성화라고 하는 아름다운 전통이 한국에서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고, 교회가 이 지경이 되었다. 인용하신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 책에서 나온 대목이 참 다가온다. “교회는 남을 위한 존재, 곧 세계를 위한 존재다. 남을 위해 자기 생명을 내주는 것이 교회다.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잃을 태세가 갖추어져 있을 때에만 교회는 구원받을 수 있다.”(409에서 재인용) 교회의 자기 보존 때문에 교회가 더 어두워져 간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터이지만, 이런 논의를 용기 있게 하게 할 단초가 아닐까 싶어 감사드린다.
김민호.
이렇게 좋은 책 써주셔서 감사드린다. 시, 소설, 철학자의 명제들 인용되어 있어서 지적으로 읽는 재미도 있었다.
임성호
사도적이다, 이런 느낌을 받았다. 기독교 신학적 입장에서 답하려 한 듯하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입장에서 답하지 않아서 읽을 때는 조금 의아스럽기는 했다.
김용규.
이 책 출간 후, 하도 꾸중을 많이 들어서, 격려해주시니 어안이 벙벙하다. 돈도 안되고, 고생만 되는 책을 써서. 주변사람들도 떠나고. 마음이 무겁다. 그러나 이 마음은 내가 말한 문제의식보다는 너무도 가벼운 거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우리 생애 안에, 정말 교회가 무당집처럼 되어버리고 점집처럼 찾아다니는 사람처럼 될까봐 정말로 걱정스럽다. 낙관론은 안이함으로 느껴진다.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과학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는구나!
독일에서 히틀러가 600만에 달하는 인간들을 가스실에 몰아 죽이고, 가죽 벗겨 구두를 만들고. 이 때, 대부분의 독일 사람들은 몰랐다고 한다. 직접 관여한 사람들이 아니라면 몰랐다고 한다. 모름에도 불구하고 역사적 일은 다가온다, 도둑처럼. 우리가 안이하게 생각하고, 모르고 있는 동안에, 엄청난 위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한편으론 공연한 짓을 해서 관계도 나빠져 괜히 썼다고 생각도 들지만..
내 성품이, 이 책을 제외한, 단 한 줄도 다른 사람을 비판해본 적이 없다. 인문학, 철학은 비판을 생명으로 하기 때문에, 어느 인문학 책을 펼쳐도 비판이 들어 있다. 그런데 나는 단언컨대, 열 몇권의 책 중에 단 한 줄도 남을 비판한 적이 없다. 동감하거나 좋아하는 말들을 인용하면서 높였을 뿐이다. 때문에 이 책은 나랑도 맞지 않는다. 무신론자 비판하고 기독교 교리 옹호하는 사람들 비판하는 게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었다. 그럼에도 쓰게 된 것은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정말 큰일 나겠다. 출판사 사람과 신문사 편집장 만나면, 자신은 무신론자라고 얘기한다. 무신론자가 계몽되고 스마트한 사람들의 상표처럼 되어가고 있다. 교회 밖에서 돌아가고 있는 사실들을 교회 안에서 얼마나 인식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무신론자다” 대놓고, 물어도 안봤는데, 한다는 것은 사회 분위기가 엄청 바뀌었다는 거다. 유신론자들은 점점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점집에 다녀왔다고 들을 때의 감정과 비슷한 추세가 될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종교와의 분쟁을 일으키는 교리들, 내분시키고, 여러 가지 의미 있는 일을 가능성들을 막아버리는 교리들을 이유도 없이 붙들고 옹호하는..
자주 질문 받기를, 철학 공부하려면 무슨 책이 좋겠냐 물어보더라. 한 경영학 교수에게 철학사 책을 읽으라고 했다. 정치든 경제든 알고 싶으면 역사를 읽는다. 그게 지름길이라고 얘기한다. 우리가 신학공부를 한다면, 조직신학까지 읽어야 하지만, 일반인으로서는 기독교역사, 교리사를 한권정도 읽으면 좋을 거다. 이유는 지금 읽는 책이 진리가 아니라, 어떤 역사적 상황에 생겨난 것이기에, 어떤 것에 목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자명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위험들이 삽시에 범세계화 되고 있는 상황에 살고 있으면서, 종교 간의 화합을 저해하고, 하나님에 관한 많은 일들을 하면서, 방해하는 교리들을 붙들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 우리는 교리를 믿는 게 아니라, 복음을 믿는 사람 아닌가. 교리로 진리를 아는 한, 성경 말씀은 덧없는 이름 뿐인 것이다.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처럼 말이다.
김기석.
큰 도전과 격려가 된다. 우리가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서두에 말했듯이, 이 책이 갖고 있는 또 다른 의미가 있는데, 우리는 너무나 자주 신의 존재는 자명하다고 사고한다. 그런데 평신도의 질문은 하나님이 정말 있느냐는 거다. 정면으로 답할 준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데, 이병철의 초보적인 질문들, 자명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어떻게 질문과 맞닥뜨려야 하는지 좋은 전례를 만들어 주셨다. 사고를 확장시켜 나가는 면에서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한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신학적 사고를 어떻게 전개해 나가야 하는지,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이 책이 신학자들에게도 이 책이 도전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이 있다.
80년대에 펄시 콜레의 『내가 본 천국』, 이런 걸 내면, 많은 기독교인들이 읽고 영향을 받고, 잘못된 신앙의 길로 가는데, 신학자들이 책임 있게 답해줘야 하는데,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무시하고, 논할 가치도 없다고 도외시 했다. 무책임한 태도다. 사소해 보이는 문제에도 씨름할 수 있어야 한다. 내 판단에는, 실력이 없어서 그렇다. 왜냐하면 책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있어도, 삶의 문제로 만들고 사유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 아닌가 싶다. 이병철의 질문은 애들의 질문과 같지만, 하버마스가 말했듯이 무의미한 질문은 없다. 참고서로 꽂아놔도 좋지 않겠나 생각이 든다.
독일 베를린의 마르티움 제단 천국 그림.(309쪽) 오랫동안 머물러 있었다. 성당 재단에 그런 그림이 있는지 몰랐다.
김용규.
나는 학교에 있는 게 아니고, 주로 울타리 밖에 있기에 대중들을 상대로 글을 쓰면서, 늘 부딪히는 게, 하나님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얘기하면 우리한텐 의미 있는 얘기이지만, 은혜스럽고 감격스럽고. 기독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닭살 돋는 이야기다. 대화, 의사소통이 안 된다.
임의대로 바꾸는 게 아니라, 안셀무스가 말했듯이, ‘최고의 사랑’, ‘최고의 진리’, ‘최고의 선함’, ‘최고의 정의’, 이렇게 바꿔 얘기하면 맞는 말이라고 수긍할 텐데. 말하는 어법의 차이로 우리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안으로 얼마든지 끌어들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표현법, 그것이 소설이 되었든 영화가 되었든 회화가 되었던,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하는 문제들에 연관시켜서 얘기해주면, 얼마든지 우리에게 귀한 복음이 그들에게도 될 수 있다. 의식적으로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기독교적 가치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게 가능하다면, 타종교인들과 대화하는 것도 어려운 것도 아니다. 종교가 갖는 커다란 공통분모가 있다면, 다들 인간의 탐욕과 싸워야 한다, 그게 아니겠는가. 탐욕이 죄고, 죄의 시작이자 결과이고. 모든 종교가 하고자 하는 게 그 탐욕을 현세욕, 재산욕, 명예욕, 성욕, 권력욕, 늘 자나깨나 시달리는 그런 욕망들이 아닌가. 이것을 단연코 부처는 그런 망상은 없다고 하지만, 하나님은 단연코 죄라고 한다. 그런 종교가 사실은 기독교밖에 없다. “그리고 가치로 돌아오라, 등을 돌리면 산다”, 살고 죽고 단언하는 그런 종교에 진리를 얼마든지 거부감이 없이 사람들에게 보편적이고 그런 형식으로 전해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노력하는 게 이 점이다.
목사.
왜 교회가 점집처럼 될거라 우려하시는지 궁금하다. 인간 실존에서 각자가 가진 문제들로부터 희망을 주는 게 교회의 역할 아닌가. 사람의 필요를 그리스도적으로 해석해서 나눠주는 것인데.
김용규.
나이를 먹으면, 걱정이 많다. 사실은 무당집 되는, 그런 일은 안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려는 가져야 한다는 거다. 과학이 엄청난 속도로 발달하고 있고, 나날이 우리가 의지하여 살고 있다. 그런데 그 과학이 기독교를 공격하고 있고, 기독교가 거기에 대응을 잘하지 않고, 이런 상황이 나를 걱정이 되게끔 이끌어갔다. 이런 우려를 공유하자, 나누자는 것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자는 거다.
병 낫고, 부자 되고, 자손 잘 되고 하는 일은 다른 종교에서도 다 하지 않는가. 무당집가도 병이 낫는다. 유독 샤머니즘, 현세구복이 강하다. 우리나라 종교는 샤머니즘 밖에 없다. 모든 종교가 토착화되면 샤머니즘과 다 결합되었다.
그런 게 부질없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은 아니다. 예수는 두 가지만 가르쳤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병 낫고 부자 되고 자식 수능 잘 보는 거 안 가르쳤다. 그 이웃은 헐벗은 자, 굶주린 자, 옥에 갇힌 자 돌보라 했다.
우리는 짧은 생애, 한 가지 일도 하기 힘들지 않은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스스로를 성결케 하고, 사회를 성화케 하는 그 일에 죽도록 충성해야 할 것이다. 현상이 아니고 본질에 말이다.
김영명.
한국 교회에서 아직까지도 과학시대에 대부분의 보수적인 교회와 많은 사람들이 창조과학에 경도되어 있어서 상당히 우려스러운 게 반복되어서, 세련된 지적설계로 과학기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인문학적인 성서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결여되어서..
김용규.
내가 신학자도 아니면서, 그분들을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궁금한 것은, 창조과학이니 유신론적 진화론이니, 지적 설계론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이런 말들이 나오는 저변이 무엇일까? 딱하다. 젊은 아이들이 물어보는데, 성경과 과학이 모순 없이 접목시킬까, 당신으로썬 할 길이 없으니까, 한 권 읽고 얘기해준다. 신학자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 거기에 대응할 수 있는 위대한 전통적인 신학자들의 말로 얼마든지 답할 수 있는데, 목회자들이 현장에서 젊은이들의 질문에 비기독교적인 창조과학이니 유신론적 진화론이니 이런데 준한 이상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다. 신학자들이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알려줘야 하는데, 그런 게 하나 둘이 아니다.
상담학도 그렇다. 정신분석으로 상담하는 것도 비기독교적이다. 신학자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방임해서 그렇다. 자기가 기독교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덜 성화되어서 죄를 짓거나 상의할 때가 없어서 얘기할 때, 무언가 성령의 역사에 적합한 기독교적인 상담이론들을 만들어 내서, 성령의 메커니즘을 상담이론에 적합하게 만들어서, 정신분석학이나 인지과학 이론들을 빌리지 않아도 상담할 수 있도록 이론들을 만들어서 제공을 해야 한다. 그러지를 않으니까, 현장의 상담할 때, 심리학을 배워서 하고 있지 않은가. 신학자들이 자기 책임을 방임하는 것 아닌가.
김영명
유신론적 진화론까지 그런 범주에 넣는 게 의아하다.
김용규.
나는 창조론이 진화론을 충분히 포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하나님은 그렇게 작지 않다. 자연과학 이론 받아들일 자리가 충분하다. 내가 알고 잇는 유신론적 진화론에 대한 불만은, 전통 신학에서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성경과 전통 안에서 찾아야 한다. 두 번째는, 논리적인 모순이 없는가, 이 두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인인 과학자, 과학에 관심 있는 기독교인들이 창조론과 진화론의 대결이 답답하니까, 적절한 선에서 타협케 하는 방식은 옳지 않다. 올바른 방법이란, 성서와 전통신학에서 이론적 근거를 찾을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주장들에서 생기는 모순들을 해결해야 한다. 큰 틀에서 해결되지 않나 싶다.
김기석.
용어 차이 이지만, 김 목사 말한 것과 김용규 선생 말한 것은 같은 것 같다.
목사.
두 가지 질문인데. 카렌 암스트롱과 김용규의 차이? 독일 낭만주의와 김용규?
김용규.
카렌 암스트롱 서적, 다 읽어본 건 아니고, 필요한 것만 읽어왔다. 훌륭한 신학자라 생각하지만,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단지 공감하고 동감하는 것을 인용하고 소개하는 거다.
독일 낭만주의는 17세기 프랑스 중심으로 시작된 계몽주의, 이성의 빛으로 밝게 한다, 이성 중심 사상이다. 이성적 동물 인간, 사회도 만들고, 17세기 계몽주의가 힘을 얻은 것은, 많은 혁명들이 성공하면서, 이성에 의해서 신이 주지도 않은 파라다이스를 원하는 게 아니고, 이성으로 이 땅에 유토피아를 만들겠다, 이성의 제국을 만들겠다, 그래서 잘 살겠다, 자유 평등 박애, 이러면서 성서에 나오는 고전적 가치들을 대신할 수 있는 인간적 가치들을 재창하지 않았나.
독일과 프랑스 관계가 항상 좋지 않다. 독일의 많은 학자들이 생각하기를, 내놓은 것이 낭만, 인간의 감정/열정, 알폴론과 디오니소스처럼.
독일 낭만주의가 가는 길은 결국 자기를 이성에 의해서 얘기하는 보편적 인간Man이 아니라, 자기 나만의 길을 찾아가는 것, 파우스트 같은 작품. 정말 나로 살고 싶다. 끊임없이 욕망에 의해서 자기를 찾아가는 인간들의 자기 발견. 독일 낭만주의가 한 일이다. 이게 나와 왜 관심이 있는지.
목사.
과학적 합리주의에 경계하고, 종교가 이성 외의 것도 필요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데에 있어서 생각했다.
김용규.
그렇게 말한다면, 조금 거리가 있다. 이성과 감성이 다 같이 있는 것이고, 그 안은 다 포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어느 것을 버릴 수도 없는 것이고, 양립주의를 항상 취하는 입장이다.
3d입체영화, 두 개의 프로젝터로 약간의 사이를 두고 상영한단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태도도 이래야 하지 않나. 과학과 종교, 대립하는 둘을 하나로 통합하기보다는 같이 드러나게, 같이 화면에 쏘아서 다른 차원의 진실에 더 가까운 진리가 드러나게끔 겸허한 마음으로 우리는 받아들이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과학 입장에서 다 통제하려는 통섭이란 말, 이런 것도 옳지 않고, 종교 입장에서 전부 통제하려는 것도 옳지 않다. 양립주의는 불편하다. 완전한 인간이면서도 신일 수 있는가.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될 수 있는가. 모든 기독교적 진리는 그런 문제를 어떤 하나로 극단론으로 취급당하지 않았는가. 이런 것을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고 해서 억지로 하나로 만든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본다. 인간 이성은 마지막까지 자기를 주장하면 이단이다. 마지막에는 무릎을 꿇을 때 그게 옳은 것이고, 종교가 하는 일일 것이다.
아레오바고 11월 서울강좌
◾일시 : 2013년 11월 14일(목) 오후4시 ◾장소 : 청파교회 세미나실 ◾강사 : 구미정 박사 (숭실대학교 기독교학과 겸임교수) ◾도서 : 두 글자로 신학하기
아레오바고 12월 서울강좌
◾일시 : 2013년 12월12일(목) 오후4시 ◾장소 : 청파교회 세미나실 ◾강사 : 김진호 목사 (제3시대 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실장) ◾도서 : 리부팅 바울 문의 : 010-6291-2651 (박정인)
http://cafe.daum.net/are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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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교우들 중에 이 책을 읽어본 분이 많은 것으로 안다. 나도 어느 권사님의 소개로 책을 사서 3독째 하고 있는 책이다.
김용규 선생은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개념 정리를 확실히 해놓으시고 있다. 이 신개념이 변선환 교수께서 말씀하시고자 했던 게 아닌가 싶다.
김용규 선생이 제일 경계하는 것이 성서적 문자주의와 우주론적 문자주의이다. 근본주의적 유신론과 과학적 무신론의 대립이다. 저자는 그 좁은 길을 명쾌하게 설명을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성서가 우리가 생각하는 만만한 책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필히 읽어볼만한 책이다.
청파교회는 참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많이 하는군요.
혹시 제가 아는 임성호 목사님이라면 바쁘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