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2023년 노벨상 수상 작가
욘 포세는 노르웨이 태생으로 금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다. 그러나 이전의 여느 수상 작가들과 달리 그는 수상작품이 따로 명시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그의 수상작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더러는 ‘3부작’이 수상작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것은 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였다. 그만큼 문학에 관해서 나는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평소에 소설을 잘 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밀리의 서재’를 이리저리 휘젓다가 눈에 띤 소설이 바로 이 책이다.
별로 책이 두껍지 않아 금방 읽을 것 같아서 집어 들었다. 바로 어제까지 과학 관련 책을 읽었고 오늘 점심때까지 독후감을 쓰느라 탈진한 상태였다. 그렇기 때문에 가벼운 읽을거리가 필요했더 것이다.
욘 포세의 『3부작』은 ‘잠 못 드는 사람들’, ‘올라브의 꿈’, ‘해질 무렵’ 세 편의 중편 연작을 하나로 묶어 출간한 것이다. 이 작품은 2015년 북유럽 최고의 영예인 북유럽 이사회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북유럽 이사회의 선정 사유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올해의 수상자인 포세는 그가 새롭게 창조해 낸 형식과 시공간을 넘나드는 내용들이 어떻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보여 준 더없이 좋은 본보기이다... 작가는 자신만의 매우 독특한 문학 형태를 일궈 내는 약간 다른 능력을 지니고 있다.”
‘3부작’에 대해 새로운 창조라는 지적은 매우 적절해 보이다. 다른 어느 작품에서도 이런 마치 횡설수설하는 듯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그는 현실과 꿈과 생각을 버무려 이야기를 절묘하게 이끌어 간다.
첫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와 만삭의 그의 아내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두 번째 이야기는 젊은 남자 아슬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지고 마지막 세 번째 이야기는 그의 알리다의 딸 알레스를 통해 알리다의 이야기가 회상된다.
‘3부작’이라는 제목은 무색무취하다. 세 편의 중편 연작을 하나로 묶은 것일 수도 있지만 시간 순서대로 그저 한 편을 서로 목차를 달리하고 있는 듯싶기도 하다. 거기에 마침표조차 없어 읽는데 숨이 막힐 지경이다. 그만큼 긴박하지 않는 긴박함이 있다.
마침표가 없다는 건 생각이 이어지고, 그 속에서는 시간과 장소가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가운데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긴장감 속에 이야기가 이어짐으로써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있다.
나. 첫 번째 이야기, 잠 못 드는 사람들
아슬레라는 젊은 남자와 그의 아이를 밴 만삭의 여자 알리다의 이야기다. 작가는 두 사람이 도시로 와서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끊임없는 웅얼거림으로 조금씩 이야기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제자리를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할 지경이다. 아슬레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알리다로 건너가고 알리다의 이야기는 또 다시 슬그머니 아슬레로 이어지며, 현실이 과거가 하나가 된다.
3부작의 첫 번째 이야기인 ‘잠 못 드는 사람들’은 아슬레와 임신한 알리다가 벼리빈에서 잠자리를 찾아 헤매는 과정을 담고 있다. 만삭의 여인이지만 희망이라고는 어디에도 없이 온통 우울한 분위기다. 약간은 춥고 거기에 비까지 내린다.
두 사람은 그들이 살던 곳 뒬리야를 떠나 벼리빈으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현재와 회상과 꿈이 서로 뒤엉키며 상황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알리다는 금방이라도 출산을 할 것 같지만 어느 곳 하나 기댈 곳이 없는 그들은 벼리빈이라는 거대한 사회로부터 철저하게 버림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조그마한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내일은 없다. 그저 살아야 한다는 원초적 욕망 이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피곤을 달래다 마침내 그들은 한 여인이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뒤따라 들어가 방을 달라고 매달린다.
알고 보니 그들이 처음에 방을 빌리려다 퇴짜를 놓은 바로 그 집이었다. 여인은 그들을 알아보고 완강하게 그들을 뿌리치지만 상황이 너무도 다급하기 때문에 아슬레는 여자를 밀치고 안으로 들어선다. 그 과정에서 여인이 넘어지면서 사망하고 만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태연하게 부엌 침대에서 잠을 자게 되고, 그곳에서 아기 시그발까지 출산을 하게 된다. 이야기는 그 지점에서 끝난다. 이런 그들의 단순한 행적은 현재와 과거와 꿈 등이 한데 뒤엉키면서 아슬아슬하게 드러난다. 소설의 어디에서도 희망을 읽을 수 없었다.
희망이 없는 곳에서 새 생명으로 인해 실낱같은 희망이 피어오르고 있다면 그것이 전부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결국 한 편의 글을 읽고 나서야 한참 동안 그 이야기를 반추해가야 비로소 줄거리를 추스를 수 있었다.
다. 두 번째 이야기, 올라브의 꿈
두 번째 이야기는 아슬레에 관한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에 비해 스토리는 무척 단순하다. 아슬레는 바이올린을 팔아서 생긴 돈으로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아기 시그발이 태어났으므로 알리다를 위해 반지를 사주고 싶어 벼리빈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반지를 사가지고 알리다와 아기 시그발이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알리다는 혹시 누군가가 아슬레를 알아볼지 모르기 때문에 아슬레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지만 아슬레는 자기 이름을 올라브로 바꾸고 벼리빈으로 향한다.
벼리빈에서 그는 선술집을 찾아 맥주를 마셨으며 그곳에서 알게 된 오스가우트라는 사람으로부터 멋진 팔찌를 보게 된다. 그 순간 그는 알리다에게 반지보다는 팔찌를 선물해주고 싶어 한다. 아슬레는 팔찌를 사기 위해 선술집을 벗어나 선창가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멋진 팔찌를 사고 하룻밤을 묵을 곳을 찾아 들어섰다. 그런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자신에게 추파를 던지던 소녀의 집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죽은 산파의 언니였다. 엎친데 덮인 격으로 그를 선술집에서 알아보았던 바로 그 노인의 집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노인에 의해 갇히게 되고 노파는 경찰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확인되지도 않는, 그래서 재판도 없이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그는 단 한 번의 저항도 없었으며, 그가 사람을 죽였다는 정황 증거들만 가득하다.
두 번째 이야기가 이 지점에서 끝이 나지만 나는 이야기의 제목이 왜 ‘올라브의 꿈’인지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저 자기 아내에게 멋진 선물을 해주기를 원하는 젊은이의 허름한 행적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자는 이에 대해 자못 심각하다.
“‘올라브의 꿈’은 기계주의와 욕망에 조종되는 문명의 상징으로 도시를 비판하기도 한다. 모든 것은 팔린다. 심지어 몸조차도 그리고 어쩌면 영혼조차도 그렇다. 마침내 그는 군중 앞에서 마치 예수처럼 희생된다.”
내 무지 탓인지, 나는 이 말을 한 마디도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문명의 상징으로 도시를 비판했다는 말일 텐데, 그 뒤로 붙은 ‘예수처럼 희생된다’라는 말은 참기 힘들다. 아무리 해도 올라브라는 인물이 비판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까닭이다.
라. 세 번째 이야기, 해질 무렵
마지막 이야기는 ‘해질 무렵’이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노년이 된 알리다의 딸 알레스를 통해 알리다의 이야기가 회상된다. 이야기는 주로 남편이 교수형을 당하자 알리다가 어떻게 오슬레이크라는 남자를 따라 그의 농장에서 살게 되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그녀는 오슬레이크의 집에서 하녀가 되었지만 결국은 그곳에서 아이들을 낳게 된다. 결국 세 편의 긴 이야기는 이곳에 이르러 약간의 해피엔딩을 맛보게 되는 셈이다.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창대하리라’ 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알리다는 오슬레이크와 살아가지만 끝없이 첫 남자이나 남편이었던 아슬레의 이야기를 듣는다. 결국 알리다는 바다로 들어감으로써 그녀에게 늘 자리했던 아슬레에게로 돌아간다. 이를 지고지순한 사랑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만약 그렇다면 오슬레이크와의 삶은 그저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웅얼거리며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더디게 이어진다. 그 바람에 책을 읽고 나서도 이야기가 잔상처럼 머릿속을 맴돈다.
포세의 소설을 처음 읽었는데 그의 이야기는 다른 소설에 비해 무언가 독특해 보인다. 이야기에 특별한 갈등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서사적 장치 같은 것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웅얼거리며 짧은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의 소설의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그의 이야기는 설명처럼 보이는 부차적인 것들은 모두 생략된다. 그것이 중요한 부분은 극적으로 강조되는 효과를 가져다주고 있다. 즉, 이야기의 흐름을 어떻게 이해하든 그 것은 온전히 독자의 몫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