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 현충사에 모셔진 충무공 이순신 표준 영정
출생 | 1545년 4월 28일 (인종 원년, 음력 3월 8일) |
한성부 건천동 이정 자택 (現 서울특별시 중구 을지로 18길 19(인현동1가) |
사망 | 1598년 12월 16일 (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향년 53년 7개월 18일 / 19,590일) |
경상도 남해현 노량해협 판옥선 선상. (現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
전사(흉부 유탄 피격) |
시호 | 충무(忠武) |
봉호 | 덕풍부원군(德豐府院君) |
본관 | 덕수(德水, 12세손) |
성 | 이(李) |
휘 | 순신(舜臣) |
자 | 여해(汝諧) |
호 | 기계(器溪), 덕암(德巖) |
재임 기간 | 전라도 정읍현 현감 겸 태인현 현감 |
1590년 1월 6일 ~ 1591년 2월 24일 (음력 1589년 12월 1일 ~ 1591년 2월 1일)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
1591년 3월 8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1년 2월 13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4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3일 ~ 1598년 11월 19일) |
전라좌도 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
1593년 8월 26일 ~ 1597년 4월 12일 (음력 1593년 8월 1일 ~ 1597년 2월 26일) 1597년 9월 4일 ~ 1598년 12월 16일 (음력 1597년 7월 23일 ~1598년 11월 19일 |
묘소 |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고룡산로 12-37(충무공 이순신 장군묘) |
사당 | 충청남도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현충사) |
● 충무공 이순신 가계(家系)
증조부 : 이거(李琚) 미상-1502년
조부 : 이백록(李百祿)
아버지 : 이정(李貞) 1511년-1583년/壽 72세
충무공 : 이순신(李舜臣) 1545년(인종 원년) 4월 28일 -1598년(선조 31). 12월 16일/향년 5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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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조부 : 이거(李琚)
조부 : 이백록(李百祿)
부 : 증덕연부원군(德淵府院君) 이정(李貞, 1511년 ~ 1583년) / 壽72세
모 : 증 정경부인 초계변씨(草溪卞氏, 1515년 ~ 1597년) - 변수림(卞守琳)의 딸
형 : 이희신(李羲臣)
조카 : 이뇌(李蕾)
조카 : 이분(李芬)
조카 : 이번(李蕃)
조카 : 이완(李莞)
형 : 이요신(李堯臣)
조카 : 이봉(李菶)
조카 : 이해(李荄)
동생 : 이우신(李禹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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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 가계(家系)
이순신은 한성을 떠나 외가와 처가(온양방씨)가 있는 충청도 아산으로 이주했다.
조선 중기까지도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은 부인과 처가의 위상을 높였다.
이순신의 처가는 상주 방씨(온양방씨)이다. 장인은 보성군수를 역임한 방진(方震)이다. 방진의 할아버지는 평창군수를 지낸 방홍(方弘)이고, 아버지는 영동현감을 지낸 방중규(方中規)이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1499년~1572년)이 중매를 섰다.
1565년(명종 20) 이순신은 21세의 나이에 방씨에게 청혼하고 결혼하였다.
이순신은 장인 방진(方震)의 격려와 경제적 후원으로 무과 시험을 준비하게 되며, 방진으로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을 배우면서 병학을 익혀 11년만인 1576년 2월에 치러진 무과 시험에서 병과로 급제했다.
《충무공이순신전서》의 ‘방부인전’에 방진(方震)의 활솜씨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방씨 부인은 슬기롭기로 유명하였고, 친정 집에 들어온 도둑들을 지혜를 이용해 물리치기도 했다.
이순신의 무술 연습을 위해 자신의 패물로 말을 사게 할 만큼 내조도 잘했다.
이순신은 방씨와의 사이에서 이회(李薈,1567년 출생), 이열(李茢, 초명은 울, 1571년 출생), 이면(1577년 출생)의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임진왜란 중에 이순신은 아들들을 통해 충청도 아산 본가에 있던 방씨소식을 듣기는 했지만 직접 다녀오지는 못했다.
그러나 방씨가 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잠을 설치며 걱정했을뿐더러 점까지 치며 방씨 부인을 염려하는 내용이 일기에 적혀 있다. 1598년 (선조 31)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이순신에게 우의정이 증직된 후 그 처인 방씨를 정경부인으로 봉하면서 내린 이순신처 방씨 고신교지(李舜臣妻方氏告身教旨)는 보물 제1564-8호이다.
정경부인은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정·종 1품 문무관의 처에게 내리는 명호(名號)로 외명부 부인으로서는 최상급의 품계이다.
장인 :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방진(方震) - 온양방씨 22세손
부인 : 정경부인 상주 방씨(尙州 方氏 : 온양방씨)
장남 : 이회(李薈)
차남 : 이열(李茢) / 초명은 李울)
삼남 : 이면(李葂)
장녀 사위 : 홍비(洪棐) - 청난공신 홍가신(洪可臣)의 아들
첩 : 해주오씨(海州 吳氏)
서자 : 이훈(李薰)
서자 : 이신(李藎)
서녀 사위 : 임진(任振)
서녀 사위 : 윤효전(尹孝全)
첩 : 부안댁 (이름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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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신의 부인들
이순신의 부인은 정실인 상주 방씨와 소실로 해주 오씨와 부안댁이 있었다.
정실 부인 상주 방씨는 이순신보다 2살 아래였으며 『방부인전』에 이로하가 있다.
부인은 어릴 적부터 영민한 품이 어른과 같았다. 나이 겨우 12세 때인데 화적(火賊)들이 안마당에까지 들어오므로 보성공이 화살로 도둑을 소다가 화살이 다 되자 방안에 있는 화살을 가져오라 했다. 그러나 계집종이 도둑과 내통하여 이미 몰래 훔쳐 가지고 나갔으므로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자 부인은 여기있습니다 하고 급히 베 짜는 데 쓰는 대나무를 한 아름 안아다 다락에서 던지니 소리가 마치 화살을 떨어뜨리는 것 같았다. 도둑이 본래 보성공의 활 잘 쏘는 것을 두려워했던 바라 화살이 아직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곧 놀라 도망갔다.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후 상주 방씨는 당연하게 예(禮)에 따라 가장 높은 상훈이 책정되었으며, 당시로서는 드물게 80세가 남도록 살았다. 이순신의 소실은 병마우후(兵馬虞候) 오수덕(吳壽德)의 딸인 해주 오씨로 덕수 이씨 족보에 수록되어 있다. 또 다른 소실 부안댁은 윤연(尹連)의 누이이다.
● 이순신의 아들들.
이순신의 자녀들은 정실부인 방씨와의 사이에서 3남 1녀를 두었다.
큰아들 이회(李薈)는 벼슬이 첨정에 이르렀고 원종공신(原從功臣)의 녹훈을 받았으며 매사에 반듯하고 일처리 깔끔하다는 평을 받았는데 부친인 이순신과 하께 종군하다 노량해전에서 공훈을 세웠다.
둘째 아들 이열(李茢,초명은 이을)은 선조 때는 벼슬을 했으나 시대가 바뀌어 광해군 때에는 세상이 어지러움을 한탄하며 낙향하여 시골에 묻혀 살다 정치가 바뀌자 충훈부도사(忠勳府都寺)에 임명되어 형조정랑(刑曹正郞)의 벼슬에 올랐으며 맏형인 이회와 같은 원종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셋째 아들 이면(李勉)은 아버지를 닮아 말도 잘 타고 활도 잘 쏘아 이순신이 매우 아꼈다. 명향해전 직후(1597년 10월)에 일본군이 민가를 불태우고 약탈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일본군 3명을 죽이고 일본군의 칼에 죽었다.
딸은 인근 동리에 사는 홍비(洪奜)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는 문장공(文狀公) 홍가신(洪可臣)의 아들로 시아버지 홍가신은 홍주목사로 일등공신 반열에 오른다. 이훈(李薰)은 해주 오씨와 이순신의 서자로 무과에 급제하여 이괄의 난(李适의 亂,1624년) 때 한성에서 전사하였는데 훗날 병조참의에 봉직되었다.
이신(李臣) 또한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정묘호란(丁卯胡亂,1627년) 중에 전사하였다.
글 윤인일 행정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