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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행병조참지(行兵曹參知) 퇴사암(退思庵) 경주이공 묘갈명(慶州李公墓碣銘)
국가가 100년 동안 평안하여 백성들은 전쟁을 겪지 않았고 중외(中外)가 느슨해져서 전쟁을 잊은 지 오래 되었다. 갑자기 임진왜란을 당하여 큰물의 흐름에 휩쓸리듯이, (왜적이) 지나간 성읍은 풍문만 듣고 달아나서 삼도(三都)에서 달아나 오묘(五廟)의 무덤마저 지키지 못하였다. 옛부터 전쟁의 참상이 이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당시 우리 선조와 같은 분도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선생이 창의(倡義)하여 의병을 일으키고 격문을 돌려, 원근의 열사(烈士)들과 함께 향응(響應)하여 서원(西原: 청주의 옛 지명)에서 크게 승리하고. 다시 금산으로 다시 공격하려고 하였다. 공께서는 당시에 남원의 시골집에 계셨는데, 변고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같은 뜻을 지닌 선비들을 규합하고, 집안에 있는 장정들을 거느리고 위험에 빠진 선생을 쫓아서 칼을 밟고 도끼를 무릅쓰고 기꺼이 달려 나갔으나 많은 적을 대적하지 못하고 힘이 다하여 운명하셨다. 운명을 함께 한 칠백 명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더더욱 천고(千古)에 다시없는 일이었다.
공은 본관이 경주이고 이름이 이윤(李潤)으로 자는 존중(存中), 호는 퇴사암(退思庵)이다. 시조 알평(謁平)은 신라 좌명공신(佐命公臣)이었다. 고려말의 문희공(文僖公) 이세기(李世基), 문효공(文孝公) 이천(李蒨), 조선의 월성군(月城君) 이경중(李敬中)은 삼대가 계속해서 재상이 되었다.
다시 내려와 이정석(李廷碩)은 관직이 판서에 이르렀는데 공에게는 5대조이시다. 고조부 이동(李侗)은 감찰(監察)을 지냈으며,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증조부 이길안(李吉安)은 사정(司正)을 지냈으며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부 이감(李堪)은 전라감사를 지냈으며, 아버지 이주신(24世 李周臣)은 임실현감을 지냈다. 어머니는 안동김씨로 현감 김맹성(金孟誠)의 따님으로 아들 일곱을 낳았는데 공은 넷째 아들이다.
일찍이 경학(經學)으로 율곡 이선생과 종유(從遊)하였고, 만년에는 중봉선생과 도의(道義)로써 교유하며,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마(講磨)하였다. 선조조에 출사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를 지냈는데 후에 관직을 버리고 남원(南原)의 북쪽 말천방(秣川坊) 사인동(舍人洞)에 거주하였다. 이곳은 감사공(監司公)께서 전라감사로 있을 때에 정한 곳이었다. 감사공의 관직이 사인이었기 때문에 그 이름이 되었다.
공은 선조의 사업을 이어서 경술(經術)에 뜻을 두고 벼슬길을 나갈 뜻은 끊어버렸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죽는 것을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기시고,316) 그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으니 어찌 이렇게 분별할 수 있는 것인가? 이로부터 후손들이 영락하여 타향살이를 하다보니 임금님께 상달(上達)하지 못하여 끝내 표창[포총(褒寵)]되는 은혜를 입지 못하여 사림들이 답답해하며 탄식한 지 오래되었다.
얼마나 다행인지 우리 고종(高宗) 임금이 5회갑이 되는 임진년(1892)에 임금이 거둥하실 때 선비들이 올린 상언(上言)을 돌아보시고 감응하여 특별히 화곤(華袞)을317) 내려 아경(亞卿)의 관직에 증직되었다. 조정에서 은전을 내렸으니 남은 서운함이 없으며, 눈감지 못하였을 충현(忠賢)의 영령에게도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집안사람들이 일찍이 공의 의관(衣冠)을 사인동(舍人洞) 뒷산의 자(子)의 방향 언덕에 부인과 함께 안장하였다. 부인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김사길(金思吉)의 딸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아들이 한명 있다. 아들 이천행(李天行)은 첨정(僉正)을 지냈고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되었다.
손자는 둘인데 장손은 이희(李凞)이고 첨정(僉正)을 지냈는데 후사가 없다. 둘째 손자 이점(李點)은 학행(學行)으로 동몽교관에 증직되었다. 증손은 다섯인데, 이지고(李志皐)와 이지설(李志卨)은 품행이 방정하고 뛰어났으며, 이지익(李志益)은 효성으로 교관(敎官)에 증직되었다.
이지열(李志說)과 이지석(李志奭)은 모두 학행으로 고을에서 이름이 났다. 이지석은 우암(尤庵) 송선생(宋先生)을 사사하였다. 후손들 가운데 문학과 행의가 있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어찌 선조들이 선을 쌓아서 얻은 보답이 아니겠는가?
공의 후손 이규필(李圭弼), 이종원(李鍾元), 이동우(李東雨)가 나에게 공의 공적을 보여주면서 일언(一言)을 얻어서 무덤가에 세우고자 한다고 하였다. 내가 비록 적임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선대의 정의를 생각하여 사양할 수가 없었을 뿐이다. 간략하게 서술하고 이어서 명을 짓는다.
有氣浩然(유기호연) / 호연(浩然)한 기운 있어
克塞穹壤(극새궁양) / 천지 사이에 지키셨으니
人孰不受(인숙불수) / 사람이라면 누군들 받아들이지 않겠냐마는
患不能卷(환불능권) / 그 행적을 남기지 못할까 걱정이었네.
有時而餒(유시이뇌) / 그때에 굶주림에
禍福所動(화복소동) / 화복(禍福)이 흔들렸으나
公之所存(공지소존) / 공께서 사는 동안
義重身輕(의중신경) / 의를 중히 여기시고 몸은 가벼이 여기셨으니
旣見死所(기견사소) / 이미 돌아가실 곳을 알고
勇往力行(용왕력행) / 용감하게 앞장서서 힘껏 싸우셨으니
有來千秋(유래천추) / 앞으로 오래오래
證諸幽堂(증제유당) / 무덤 가에서 증명되리라.
무술(戊戌) 정월 하한
통정대부(通政大夫) 전행상주목사(前行尙州牧使) 진천(鎭川) 조원식(趙元植) 삼가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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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贈嘉善大夫 吏曹參判 行兵曹參知 退思庵 慶州李公墓碣銘
國家昇平百年 民不見兵 中外恬嬉 忘戰已久 猝當龍蛇之變 如河流橫失 所過城邑 望風奔潰 遂放三都 失守五廟邱㙻 自古兵火之悿 未有甚於此者 時則有若我先祖 重峯先生 倡義起兵傳檄 遠邇烈士響應 大捷西原 再鏧錦山 公時在南原鄕第 聞變痛哭 糾合同志士子 收率家丁 從先生於危險之中 蹈刃冒鉞 如赴樂地 衆寡不敵 力盡而死 七百倂命 無一人苟活者 此尤千古 所未有之事也 公慶州人 諱潤 字存中 退思庵其號也 始祖諱謁平 爲新羅佐命功臣 麗季文僖公世基 文孝公蒨 本朝月城君敬中 三世相繼爲相 再傳而有諱廷碩 官至判書 於公爲五世 高祖諱侗 監察 贈吏曹參議 曾祖諱吉安 司正 贈吏曹參判 祖諱堪 全羅監司 考諱周臣 任實縣監 妣安東金氏 縣監孟誠女 生七男 公其第四也 早以經學 從遊栗谷李先生 晩與重峯先生 爲道義交 講磨春秋大義 仕穆陵朝 爲兵曹參知 後乃棄官 屛居于南原北 秣川坊舍人洞 卽監司公 按節時所卜之地 而監司公官舍人以是名焉 公承祖業 有志經術 絶意榮途 遭世板蕩 視死如歸 不有所卷 曷能辦此 自是雲仍 淪落遐陳 不能上達天聰 迄未蒙褒寵之眷 士林之齎鬱久矣 何幸 我聖上壬辰五回甲之年 一省章甫上言蹕路 九天晙感 特蒙華袞 贈以亞卿之秩 朝家酬報之典 靡有遺憾 而忠賢不寐之靈 庶可慰矣 家人曾以衣冠 葬于舍人洞後麓 負子之原 與夫人墓同封 夫人順天金氏思吉女 贈貞夫人 一男 天行 僉正 贈戶曹參議 孫男 二人 長曰 凞 僉正 無嗣 次曰 點 以學行 贈童敎 曾孫 五人曰 志皐 志卨 禮行卓邁 志益孝 贈敎官 志說 志奭 俱以學術聞于鄕 志奭師事尤庵宋先生 後孫多以文學行義 見稱於世 豈非積善之報歟 公之裔孫 圭弼 鍾元 東雨 甫袖示公蹟于余 曰願得一言 以意阡隧 余雖知非其人 仰念先誼 辭不獲已 略敍梗柒 遂系以銘曰
有氣浩然 克塞穹壤 人孰不受 患不能卷
有時而餒 禍福所動 公之所存 義重身輕
旣見死所 勇往力行 有來千秋 證諸幽堂
戊戌(1898) 元月(1월) 下澣(하순)
通政大夫 前行尙州牧使 鎭川趙元植 謹識 (重峯 兒孫)
[각주]
298) 이윤(李潤) 신도비에 따르면 고종 29년(1892)에 호남 유생 황원룡, 박해관 등이 상언하여 "선정 조문열 공이 금산전투에서 의사 이
윤 등 700여 명을 이끌고 싸우다 동시에 전사하여 사적이 의록에 실려 있는 것이 타당하고 간절하게 표어할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수
백년 동안 포창하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비단 사림에 유감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성대한 조정의 흠전이라고 하겠습니
다.“라고 하였다.
이어 이조에서는 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의금부 부사를 추증한다. 이로 인하여 이종원과 이동우가 최익현(1833~1907)에게 신도비
문 작성을 요청하였다. 299) 전국 시대 제(齊)나라 맹상군(孟嘗君)이 처음 설(薛)에 봉해졌을 때, 그의 문객 풍훤(馮諼)이 그에게 말
하기를, “교활한 토끼는 세 굴이 있기 때문에 겨우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狡兎有三窟 僅得免其死耳]”라고 하면서 세 가지 계
책을 건의하여, 맹상군이 그대로 따른 결과 그 후로 맹상군이 제 나라 재상을 수십 년 동안 지내면서 조금의 화도 입지 않았다는 고사
에서 온 말이다.
300) 원문의 웅장(熊掌)은 맹자가 “생선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웅장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생선을 버리
고 웅장을 취하리라. 삶도 내가 바라는 바이고 의(義)도 내가 바라는 바이지만, 이 둘을 다 가질 수 없다면 삶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
다.”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孟子曰 魚我所欲也 態掌 亦我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魚而取態掌者也 生亦我所欲也 義亦我
所欲也 二者 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301) 원문의 병령지수(炳靈)는 타국 사람을 모셔 놓고 제사 지낼 때 쓰는 말로, 신령은 땅속의 물과 같아서 어느 곳에서나 정성껏 받들면
그곳으로 온다는 것이다. 소식(蘇軾)의 조주한문공묘비문(潮州韓文公廟碑文)에 “공의 신령이 천하에 있는 것이 물이 땅속에 있는
것 같아 어느 곳이나 있지 않는 곳이 없다.[公之神在天下者 如水之在地中 無所徃而不在也]”에서 유래하였다.
302) 여지(荔枝)는 복건·광동·사천성에서 생산된다. 줄기는 3~4장이며 잎사귀는 우장복엽(羽狀複葉)으로 투명한 작은 점이 있다. 과실은
외피(外皮)에 거북이 등껍질 문형(龜甲汶)이 있고, 안은 하얗고 맛이 달며 즙이 많으며 용안에 비슷하다. 『당서』에 양귀비가 여지를
좋아하여 남해에서 바쳤는데 나르듯이 진상하였다. 그러나 더워야 열매가 익는데 묵으면 즉시 부패한다. 이 여지를 진공한 고사이다.
『후한서』 화제본기에 옛날 남해에서 용안과 여지를 헌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303) 원문의 淸蹕路는 왕이 거둥할 때 지나는 길에 사람의 통행을 금하고 길을 치우는 일을 가리킨다.
304) 진후산(陳后山 후산은 송(宋) 나라 진사도(陳師道)의 호임)
305) 첨소(瞻掃) : 살피고 빗질하여 쓴다는 말이다. 묘제 축문에 “무덤을 살피고 쓴다.[瞻掃封塋]”라는 말이 있고, 산신 축문에 “모친모
관 부군의 묘에 세사를 공손히 거행한다.[恭修歲事于某親某官府君]”라는 말이 있다.
306) 이 제기는 참지공의 후손 이규학이 서울에서 예조판서로 있을 때 이승유를 찾아가서 받은 글인데, 1893년에 지은 글이다. 이승유는
대한민국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형의 아버지이다.
307) 여수례(旅酬禮) : 제례(祭禮)를 마친 뒤 많은 사람들이 함께 술을 권하며 공경하는 것이다.
308) 원문의 乙帳은 진귀한 보옥으로 장식한 갑장과 을장이 있는데 정전(正殿) 양 기둥 사이에 설치하였는데, 갑장은 한 무제 때 연회석에
치던 장악(帳幄)인데 칠보의 구슬로 장식하고 야광주(夜光珠) 등 보옥(寶玉)으로 만들었으며, 을장(乙帳)은 어전(御殿)에 둘렀다고
한다.
309) 원문의 천대(泉臺)는 땅속의 묘혈(墓穴)을 가리킨다.
310) 자고(紫詁) : 금랑(錦囊)에 담아 자니(紫泥)로 입구를 봉한 뒤 인장(印章)을 찍어서 반포하는 임금의 조서(詔書)를 말한다.
311) 난곡(鸞鵠) : 한유(韓愈)의 〈전중소감 마군 묘명(殿中少監馬君墓銘)〉에 “물러나 소부(少傅)를 보매 푸른 대 푸른 오동에 난새와 고
니가 우뚝 선 듯하였으니, 능히 그 가업을 지킬 만한 이였다.〔翠竹碧梧 鸞鵠停峙 能守其業者也〕” 하였다. 여기서는 뛰어난 인재들
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古文眞寶後集 卷4》
312) 진운(陣雲) : 층층으로 두텁게 쌓여서 마치 전진(戰陣)처럼 보이는 구름을 말하는데, 옛사람들은 이것을 전쟁의 조짐으로 여겼다고
한다.
313) 광감(曠感) : ‘광세지감(曠世之感)’의 준말로, 동시대에 태어나지 못해 서로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한 감회이다.
314) 기성(騎省): 기조(騎曹), 병조(兵曹)라고도 함. 조선시대 육조의 하나로 군사와 우역 따위의 일을 맡아보았다.
315) 무채(舞彩) : 색동옷을 입고 춤을 추는 것으로, 부모에게 효도함을 뜻한다. 춘추 시대 초(楚)나라 사람인 노래자(老萊子)는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어, 일흔 살의 나이에도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의 놀이를 하여 어버이를 기쁘게 한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小學 稽
古》
316) 정의를 위해서는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사기(史記)》 〈채택열전(蔡澤列傳)〉에 “이러므로 군자는 난리에
의로써 죽는 것을 마치 자기 집에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다.[是以君子以義死難, 視死如歸.]”라고 하였다.
317) 화곤(華袞) : 옛날 왕공(王公) 귀족(貴族)이 입던 화려한 의복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