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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魏書) 열전 30 오환선비동이전 중에 동이(東夷)전 :
1. 중국 25사와 한국의 삼국사기
중국에는 기원전 91년 한(漢)나라 때 사마천(司馬遷) 이 지은 사기(史記) 이래 25사 라는
25권의 역사서가 있는데, 한국에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는 고려 중엽
1145년에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가 있으니 당시는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 백제본기와
신라 국사는 멸실되어 사료가 빈약하니 저 중국의 25사를 참고해서 삼국사기를 썼습니다.
그런데 단군 조선(檀君朝鮮)에 대해서는 중국의 25사나 삼국사기에는 전혀 나오지 않으며
1282년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에 “위서에 2천년전인 요임금때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했다” 라고 적었는데 정작 위서에는 저런 기사가 전혀 없으며 시기도 삼국지 위지
에서 2천년 전이라면 BC 1711년이니 요임금 BC 2340년 과는 630년이나 차이가 납니다?
기자 조선(箕子朝鮮)에 관해서는 한나라때 상서대전(尙書大全) 에 상(商, 은) 나라 기자는
주(周)나라의 지배를 거부하고 조선으로 망명하였다고 하며 사기(史記) 〈송미자세가〉에
주나라 무왕이 기자를 조선에 봉하니 기자(箕子) 가 조선에 가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위만 조선(衛滿朝鮮)은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에 상세하게 나오니...“조선왕 위만(衛滿)
은 원래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는 진번(眞番)·조선을 약탈하고 복속시켜 관리(官吏)를 두고 보루
와 요새를 쌓았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망시키자 요동(遼東)의 외곽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중략~
“위만(衛滿)이 망명해 천여명의 무리를 모아서 상투에, 만이(蠻夷)의 의복으로 동쪽으로 달아나 패수 건너
진(秦)나라의 빈 땅 보루에서 살면서 왕이 되어 왕검(王險)을 도읍으로 삼았다. 우거(右渠)에 이르러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니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을 파견해 옛 제(齊)나라 땅으로부터 발해〔渤海〕
를 건너니 군사가 5만에 달했고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遼東)에서 나왔다. ~ 한사군을 설치했다”
고구려에 대해서는 후한서, 삼국지 위지동이전, 진서, 남제서, 양서, 진서, 위서, 북제서, 주서, 북사, 수서,
구당서 및 신당서에 보이며 백제에 대해 송서, 제서, 양서, 남사 및 북사에 나오는데 중국의 역사서
가 자기나라 역사만 기록하지 왜 주제넘게도 남의 나라인 한국에 대해 이리도 자세한 기록을 했을까요?
첫째로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천자의 천하관이 있을 것이고... 다음으로는 주변 나라
들이 중국에 조공을 바치고 왕으로 책봉을 받고 벼슬과 의복을 받았으니 제후국으로
거느린다는 사고 외에도, 역사 기록은 문자로 하는 것인데 주변 나라들이 문자를 만들지
못했으니 유일하게 한자(漢字)라는 문자를 만든 중국이 기록해야할 의무라도 느낀 것일까요?
고구려에 대해 처음으로 기록한 25사는 후한서 이나 이는 서기 440년 경에 남조 송나라
범엽이 지었는데..... 진(西晉)나라 사람 진수의 삼국지는 역사시대로 보면
후한 보다 이후지만 편찬 시기는 오히려 후한서 보다도 빠른 서기 290년경이니
후한서 동이열전(後漢書 東夷列傳) 은 진수의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참고했지 싶습니다.
“동이열전 東夷列傳 한韓 : 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國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國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 78개 나라로 백제(伯濟) 는 그 중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여호, 작은 나라는 수천가인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
(辰國) 이다. 마한이 강대하여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하여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제국왕(諸國王)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진한은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되,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로 변진 사람들은 진한 사람들과 뒤섞여 산다.”
2.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오환선비동이전 중에 동이(東夷)전
서기 290년경 진(西晉) 나라 사람인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三國志) 에 보면 위서(魏書) 30 오환
선비동이전 중에 동이(東夷)전에는 부여, 고구려, 옥저, 읍루(揖婁), 예(濊), 한(韓)등 우리나라
와 왜(倭) 에 대한 기록이 있으니 이를 요약하고 한자와 부족한 부분을 일부 보충해서 적어봅니다.
前言(전언) '서경' 에서 말하길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유사에 접한다.' 라고 하니
구복(九服)의 제도를 얻음을 말하는데 거칠은 지역의 바깥에도 중요한 역사들이 이르렀
으나 발자취와 수레바퀴가 미치지 않으면 그 나라의 풍속과 타국을 알 수 없다. '우(禹)'
에서 '주(紂)' 에 이르기 까지 서융은 백환을 받침이 있었고 동이는 '숙신' 의 조공이 있었다.
한(漢)에 이르러 장막을 서역으로 파견하여 '황하' 의 근원에 다다르고 여러나라를 지나
도호를 둠으로써 이를 다스렸다. 위(魏)가 일어나자 서역이 비록 능히 전부 이르르지
못했으나 큰 나라인 '구자', '우치', '강거', '오손', '소륵', '월씨', '선선', '거사' 가
속하니 세세토록 조공을 받치지 않음이 없으니 한(漢) 의 옛 일과 같은 다스림이었다.
공손연(公孫淵)이 조부부터 삼대를 '요동' 에 있으니 천자가 '동이(東夷)' 와 단절하고 나라들은 통함을
얻지 못하다가 경초 중에 군사를 내어 연(淵)을 베고 '낙랑' 과 '대방' 의 고을을 거두어 들이니 바다
가 고요해지고 동이가 굴복하였다. 후에 고구려가 모반하자 또 군사(관구검)를 파견하여 치고(환도)
멀리 까지 쫓아가니 오환을 넘어 옥저를 지나 숙신의 땅 까지 밟았으니 동쪽으로 큰 바다에 임하였다.
다른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해가 떠오르는 곳에 있다 하여 그 법과 풍속을 얻으니 크고 작은 구별
이 있고 이름이 있어 자세히 기록하는 것이다.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조두(俎豆, 제사
지내는 그릇) 모양의 그릇이 있고 중국에서 예를 잃어버리면 사이(四夷) 에서 구한다 하는
것은 믿을만 한 것이다. 그나라의 일을 기록하여 역사가 아직 갖추지 못한 것을 보충하려고 한다.
3. 夫餘(부여) :
'부여' 는 '장성(長城)' 의 북쪽에 있어 현토에서 천리를 가는데 남으로 고구려 가 있고 동
으로 읍루가 있으며 서에 선비가 있다. 북쪽으로 약수가 있으며 이천리에 호수는 팔만
호이다. 백성은 토착생활을 하고 궁실과, 창고, 감옥이 있으며 산과능선이 많으며
연못이 넓으니 동이의 지역중에 가장 평평하다. 흙은 오곡에 마땅하고 오과는 나지 않는다.
그 사람은 과격하고 크며 성격은 강하고 용감하며 후덕하니 도둑질 하지 않는다. 나라에 군옹
이 있고 여섯가축의 이름으로 관직을 명하니, '마가(馬加)', '우가', '저가', '구가', '대사',
'대사자', '사자' 가 있다. 읍락에는 호민이 있고 신분이 천한 사람들을 노비로 하였다.
여러 '가(家)' 주인은 각각 사방을 다스리는데 큰자의 주인은 수가 천집이고 작은자는 백집이다.
음식을 먹음에는 조두(俎豆)를 사용하고 여럿이 모이는 때에는 서로 절하고 잔을 씻어 술을 마시며
서로 읍하고 사양하면서 출입한다. 은(殷)의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모임이다.
연일 음식과 가무를 하는데 '영고(迎鼓)' 라 한다. 이때에는 형벌과 가둠이 없고, 죄인들을 풀어준다.
흰색을 숭상하여 백색 옷에 소매가 넓고 도포와 바지가 있다. 신발은 가죽으로 하며 나라에서 나갈때
는 비단옷을 입기를 숭상한다. 성인(成人)은 여우, 원숭이, 흑색담비 가죽으로 옷을 해 입으며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한다.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전할때 모두 꿇어 손을 땅에 대고 조용히 말을 한다.
형벌을 사용함에 엄하고 급하여 살인한 자는 죽이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한
자는 열두배로 갚으며 남녀가 음탕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이를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를 미워하여 죽은 시체를 나라의 남쪽 산위에 두고 썩히는데 여자 집에서 이를
얻을려면 소나 말로 갚은후 옮긴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처로 삼는데 '흉노' 와 풍습이 같다.
나라에서 좋은 소(제사용)을 기르고 이름있는 말, 붉은 옥과 담비와 아름다운 구슬이 나오니
큰 것은 대추만 하다. 활과 화살 칼과 창으로써 병기를 하고 집집마다 갑옷과 무기가 있다.
노인이 말하길, 옛날 망명인들이 성을 지을때 성책을 둥글게 하니 감옥과 같았다. 밤낮
노래를 부르니 종일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군사를 일으킬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소를 잡아 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는데 굽이 풀어져 있으면 흉하고 합쳐져 있으면 길하였다.
적의 침입이 있으면 모든 '가(加)' 들이 전쟁을 하니 아래 백성들은 양식과 음료를 짊어지고 먹였다.
'가(加)' 가 죽으면 여름에는 얼음을 사용하고 사람을 죽여 순장하는데 많으면 백명이나 되었다.
장사는 후하게 치루고 곽은 있으나 관은 없다. '위략'에, 그 풍속에 장사는 오개월이나 되는데
오랠수록 성한 것이다. 망자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산채로 또고 익히는 것도 있고 흰 베옷을 입는다.
'부여' 는 현토에 속하였는데, 한말에 '공손도' 가 바다 동쪽에서 일어서서 바깥 오랑캐를 위엄으로
복속시키니 부여왕 '위구태' 는 다시 요동에 속하였다. 구려와 선비가 강성해서 '부여' 가 두
오랑캐 사이에 있자 공손도는 종실의 여자를 처로 삼게 했다. 위구태가 죽자 간위거가 섰다.
적자가 없고 첩의 아들인 마여가 있어 위거가 죽자 여러 '가(加)' 들이 함께 '마거' 를 세웠다.
'우가(牛加)' 의 형의 아들이 있는데 그 이름도 '위거' 이니 대사로 하였는데 재물을 가벼이
여기고 선을 배푸니 나라사람들이 따랐다. 세세토록 사신을 파견하여 서울에 이르러
공물을 바쳤다. 정초 중에 유주자사 '관구검' 이 '구려' 를 벌하고 '현토' 태수
'왕기' 를 부여에 보냈는데 위거가 대가를 보내어 성 밖에서 맞이하여 군량을 보태었다.
계부인 우가가 두 마음이 있자 '위거' 가 계부와 아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아 염송관
으로 보내었다. 옛 '부여' 의 풍속에 가뭄이 들고 날이 고르지 못하여 오곡이 익지
않으면 갑자기 그 왕을 책망하는데 '혹 바뀜이 마땅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라고 말한다. 마여가 죽었는데, 그 아들 '의려' 가 여섯살로 왕위에 올랐다.
부여왕은 옥갑으로 장사를 지내는데 항상 '현토군' 에 놓아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가져다가
장사하였다. 공손연을 쳤을 때 현토의 곳간에 옥갑 하나가 있었다. 이제 '부여' 의 곳간에는
옥벽과 규와 제기들이 있으니 세세토록 전하는 보물로 노인이 말하길 선대에 하사 받은 것이
라 하며 '예왕의 도장' 이고 나라의 옛성에 '예성' 이 있다. 예맥의 땅으로 '부여' 가 왕노릇 한다.
위략(魏略)에서 말하길, 북방에 '고리(高籬)' 국이 있었는데 왕의 시녀가 태기가 있어 왕이
이를 죽이고자 하자 시녀가 말하길 계란같은 기운이 있어 내려와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였다. 후에 아들을 낳으니 왕이 돼지 우리에 버렸으나 돼지들이 입기운으로 덥히고
마굿간으로 옮기자 말들도 이와 같아 죽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기고 하늘의 아들
로 간주하여 그 어미에게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름을 '동명' 이라 하고 말을 기르게 했다.
'동명(東明)' 은 궁술에 능하자, 왕이 나라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하여 이를 죽이고자
하였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 에 이르러 활로 물을 치자 물고기와 자라
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었다. 동명이 건너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흩어지자 쫓던
병사들은 건널수가 없었다. '동명' 은 이로 인하여 '부여' 땅에서 왕노릇을 하고 있다.
( 이 기사를 읽다보면 우리에게는 아주 익숙한게 고구려 주몽의 건국신화와 똑 같습니다?
그런데 부여가 시대가 앞선 나라이니... 그럼 고구려인들이 주몽의 건국신화를 쓸때
부여 동명왕의 건국신화를 그대로 베꼈다는 뜻입니다? 역사라는게 원래 이런 것이지요? )
4. 高句麗(고구려) :
'고구려' 는 '요동' 동쪽 천리니 남쪽은 조선, 예맥(濊貊)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도성은 '환도' 로 이천리며 호수는 삼만이다. 산과 계곡이 많으며 벌판과 호수가 없고 골짜기
거주하며 좋은 밭이 없어 열매가 충분하지 않아 배가 고프며 음식을 절약하고 귀신에 제사지낸다.
신령스런 별과 토지신에게도 제사 지내는데 사람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급하여 도둑질함을 즐긴다.
왕이 있고 관직은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 '고추가', '주부', '우태승', '사자', '조의', '선인' 이니
높고 천함의 등급이 있다. 동이의 오랜 말로써 부여와 다른 종류로 언어가 여러가지이나 부여와 같은
것이 많지만 성질과 기운과 의복은 다름이 있다. 다섯 부족으로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가 있다. 연노부(涓奴部)에서 왕을 했는데 점점 약해저 이제는 계루부(桂婁部)에서 대를 잇는다.
한나라때 북치고 피리부는 사람을 하사했고 '현토군' 에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으며
'고구려' 를 영주로 그 이름을 기록하였다. 후에 점점 교만해지고 방자해지더니
군(郡)에 복종하지 않고 또한 동쪽 경계에 작을 성을 쌓았다. 조복과 의책을 그 가운
데 두면 해마다 이를 가지러 왔다. 이제 '호' 들 조차도 그 성의 이름을 '책구루' 라 한다.
'구루' 라는 것은 '구려' 의 성의 이름이니 관을 두고 대로나 패자를 두며 왕의 종족으로 대가
는 모두 '고추가' 로 칭하는데, '연노부' 가 본래 나라의 주인으로 '고추가' 라 칭하며 종묘
를 세우고 제사를 지낼 수가 있다. 절노부는 세세토록 왕과 혼인을 하여 '고추' 라는
이름을 얻었다. 여러 대가들은 '사자', '조의', '선인'을 두어 이름을 왕에게 알리는데
대부 벼슬하는 집의 신하들은 왕가의 '사자', '조의', '선인' 과 같은 반열을 얻지는 못한다.
대가(大家)들은 밭을 갈지 않으니 앉아서 밥 먹는 자가 만여호나 이른다. 아랫사람들이 멀리서
부터 쌀과 양식과 물고기와 소금을 짊어지고 와서 보태준다. 백성들은 노래와 춤추는
것을 좋아하여 나라의 읍락에서는 밤이 되면 남녀가 무리지어 모여들어 서로 따르며 노래
하고 춤춘다. 큰 창고는 없으나 집집마다 스스로 작은 창고가 있어 이름하여 '부경' 이라 한다.
사람들은 탐욕이 없지만 좋은 술을 감춰두는 것을 좋아한다. 꿇어 엎드려 절할 때 다리 하나를 뻗는데
'부여' 와 이것이 다르다. 길을 갈때는 모두 달리며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이 나라의 큰
모임으로 '동맹(東盟)' 이다. 공적인 모임때 의복은 모두 비단이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를 꾸민다. 대가
나 주부는 머리에 두건을 하는데 수건같이 생기고 뒤가 없다. 소가는 절풍을 하는데 형태가 고깔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하나 있는데 '수혈(隧穴)' 이라 한다. 시월 나라의 큰 모임에서 수혈신을
맞이하여 나라 동쪽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수혈신의 자리를 만들어 둔다. 감옥
이 없고 죄가 있으면 여러 '가' 들이 모여 의논하여 죽인후 처자는 노비로 삼는다. 그 혼인하는
풍속은 말로써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큰 집 뒤에 작은 집을 짓는데 이를 '서옥(壻屋)' 이라 한다.
사위 될 사람이 저녁무렵 여자 집 대문 밖에 이르러 꿇어 엎드려 절한 후에 여자와 하룻밤 자기를 청하는
데 두세번 한다. 여자 부모님이 받아들여 작은집에서 잠잘수 있게 하면 돈과 비단을 내놓는다. 아들은
낳아 장성하게 되면 부인과 집으로 돌아 온다. 그 풍속은 음란하며 남녀가 결혼하면 죽어서 입을 옷
을 만든다. 장사는 후하게 하는데 금은 비단을 묻는다. 돌을 쌓아 봉분을 하고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은 작아 산을 오르기 편하며 사람들은 기력이 있고 전투를 익히며 '옥저', '동예' 에 '소수맥'
도 속하였다. '구려' 가 나라를 일으킬 때 큰 물을 의지하여 일어났는데 서안평현 북쪽에
소수가 있어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 의 별종으로 소수를 의지해 나라를
일으키니 인하여 '소수맥' 이라고 이름한다. 좋은 활이 나오니 소위 '맥궁(貊弓)' 이라 한다.
왕망 초에 '고구려' 병사를 일으켜 '호(胡)' 를 치려고 하는데 가고자 하질 않으니 강제로
다그쳐 파견하였는데 모두 변방에서 달아나 버려 도둑이 되었다. 요서 대윤 전담을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살해당하였다. 주군현에서 '구려후 추' 에게 허물을 돌리자,
엄우가 진언하길 맥인이 법을 범한 것이니 죄는 '추' 에게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로함이 마땅합니다. 이제 큰 죄를 뒤집에 쒸우면 반란을 일으킬까 두렵습니다.
왕망이 듣지 않고 우에게 공격하라 명하니 우가 '구려후 추' 를 꾀어 만나길 약속하니
추가 이르자 베고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내었다. '망(王莽)' 이 크게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길 '고구려' 의 이름을 '하구려(下句麗)' 로 바꾸어 명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후국
이 되었다. 한광무제 팔년 '고구려왕' 이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자 ‘왕’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상제와 안제의 사이에 이르러 '구려왕 궁(태조대왕)' 이 '요동' 을 침범하자 다시 현토에 속하게 하였다.
요동태수 제풍과 현토 태수 요광이 군사를 일으켜 쳤다. '궁' 이 거짓 항복하며 화친하길 청하자 두
군이 나아가질 않았다. 궁이 비밀히 군사를 보내어 현토를 공격하여 후성을 불사르고 요수에 들어
와 사람을 죽였으며 궁이 다시 요동을 침범하자 제풍이 제빨리 군사를 내어 토벌하려 했지만 패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서기 47년에 태어난 태조왕이 6살인 53년에 왕위에 올라 93년을 재위한후
아들 차대왕에게 물려주고 165년에 118세로 죽었다고 하는데, 이는 상식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우니 고구려왕계가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혹은 계루부 안에서 다른 핏줄로 왕위가 바뀐
것이라? 그럼 전왕의 재위 기간이 더해진 것으로 실제 출생은 47년이 아닌 75년경으로
보아야 하며 사망도 중국 기록을 참조한다면 165년이 아닌 121년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궁이 죽고 아들 '백고' 가 섰으니 순제와 환제 사이에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 겨향을 약탈하고 '서안평' 을
공격하였다. 길에서 '대방' 태수를 살해하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사로잡았다. 영제 건안 이년 현토
태수 경임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속하였다. '공손도' 가 바다 동쪽에 이르자백고
(신대왕)가 대가 우거 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 의 적을 공격하는데 도움을 주어 이를 깨뜨렸다.
백고가 죽었는데, 두아들이 있어, 장자는 '발기' 이고, 작은 아들은 '이이모(산상왕)' 이다. 발기
가 불초하여 나라사람들이 함께 이이모를 왕위에 세웠다. 백고 때에 수차례 '요동' 을 침략
하고 또한 망한 '호' 의 오백여가를 받아들였다. 건안 중에 '공손강' 이 군사를 내어 공격
하여 고구려를 깨뜨리고 고을을 불살랐다. '발기' 가 형으로써 왕이 되지 못함을 원망했다.
발기가 연노부의 '가(加)' 와 백성 삼만여호를 데리고 공손강(공손도?)에 항복하고 고구려를 공격
하다가 패한 후에는 '비류수' 로 돌아와 살았다. 이이모가 다시 새로운 나라를 세웠는데
금일의 있는 것이 이것이다. 발기는 요동으로 가고 아들을 '구려국' 에 남겼는데 지금의 고추가
인 '교위거' 가 이것이다. 후에 다시 현토를 공격하자 현토가 요동과 함께 공격하여 크게 깨뜨렸다.
이이모는 아들이 없어 관노부와 관계해 아들을 낳으니 '위궁(동천왕)' 으로 이이모가 죽고
왕위에 섰다. 지금의 '구려왕 궁' 이 이것이다. 그 증조의 이름도 '궁' 인데 태어나서
능히 눈을 뜨고 보았다. 장성하자, 흉악하고 사나워져 수차례 도둑질과 노략질을 하여
나라를 헤롭게 하고 깨지게 하였다. 지금 왕도 타지에서 태어나 역시 능히 눈을
뜨고 사람을 보니 '구려' 사람들이 그 증조와 닮았다 하여 서로 부르기를 '위궁' 이라 하였다.
'위궁(동천왕)' 은 힘과 용기가 있고 말을 잘 타며 궁술에 능하였다. 경초이년 태사 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 을 치자 '궁' 이 주박 과 대가인 장수와 병사 수천인을 파견하여 도왔다. 정시 삼년
'궁(동천왕)' 이 서안평을 침략하고 242년 '유주자사 관구검' 에게 깨졌다.(2만 고구려군 중에 1만
8천이 전사하고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되는데 관구검은 환도성을 불내성으로 격하해 버립니다)
5. 沃沮(東沃沮) :
'동옥저' 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으니 큰 바다에 임하며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며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큰 군장은
없고 세세토록 읍락에 '장사(長師)' 가 있다. 그 언어는 '구려' 와 크게는 같으나 조금은 다르다.
한나라 초에 '연(燕)' 의 망명인 '위만' 이 '조선' 에서 왕노릇할 때 '옥저' 가 속하게 되었다.
한 무제 원봉 이년 조선을 치고, 위만의 손자 '우거' 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4군을
두었는데 '옥저성' 은 현토군이 되었다. 후에 '이(夷)' 와 '맥(貊)' 이 침입하여 마을을 구려
서북으로 옮겼는데 지금 현토에 있는 옛 마을이 이것이며 옥저는 다시 '낙랑' 에 속하게 되었다.
'한(韓)' 의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을 나누어 '동부도위' 를 두고 '불내성' 에서
다스렸으며 주령 동쪽을 나누어 칠현을 두었는데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한 건무 육년 변방의 군을 살피고 '도위' 를 없앴다. 그후로 현에 있는 거사
들을 모두 현후로 삼았는데 '불내', '화려', '옥저' 의 여러 현들은 모두 후국이 되었다.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하고 쳤는데 오히려 '불내' 와 '예후' 는 공조와 주박제조를 두었으니 '예(濊)'
의 백성들이 만든 것이다. '옥저' 의 여러 읍락의 거수들은 모두 스스로 삼로라 칭하는데 즉 옛날
현국의 제도이다. 나라가 작고 큰나라 사이에 있어 궁핍하여 신하로써 '구려' 에 속하게 되었다.
구려는 대인들을 사자(使者)로 삼고 조세를 받도록 하였는데 맥포와 물고기, 소금 과 바다음식이다.
천리를 메어 짊어지고 가서 받쳤다. 또한 미녀들을 보내와 첩으로 삼았는데 이는 노비와 같은 것이다.
땅은 기름지고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하며 오곡에 마땅해 밭농사가 좋다. 사람들의 성질은 곧고 강하며
용감하다. 소와 말이 작고 창병과 보병에 능숙하다. 음식과 거처 의복과 예절은 '구려' 와 같음이 있다.
위략에서 말하길 여자는 십세가 되면 사위집에서 맞이해 클때까지 길러 부인으로 삼으며 성인이 되면
다시 여자집으로 돌아오는데 여자집에서 돈을 요구한다. 돈이 떨어지면 이내 다시 사위집으로 돌아온다.
장사지낼때 큰 나무로 곽(槨)을 만드는데 길이가 십여장이나 되고 그 윗부분이 출입구를 하나 낸다.
죽은자는 가매장을 하는데 겨우 형태만 덮은후 피부와 살이 썩으면 이내 뼈를 취하여 곽 안에
둔다. 집안 모두가 하나의 곽에 공동으로 들어가는데 나무를 살아있는 형상처럼 깍으니 죽은자
의 수와 같다. 또한 기와 모양의 솥이 있는데 그 가운데에 쌀을 넣고 곽의 출입구 한쪽에 메어둔다.
'관구검' 이 '구려' 를 칠때, '구려왕 궁(동천왕)' 이 '옥저' 로 달아났는데 추격하니 옥저의 읍락이 깨지고
삼천여급의 머리를 베었다. '궁' 이 '북옥저' 로 달아났는데 '치구루' 니 남옥저에서 팔백여리를 간다.
풍속은 같으며 '읍루' 에 접해 있는데 읍루는 배들 타고 노략질함을 즐기니 북옥저는 두려워하여 여름
에는 산속 바위 깊은 동굴속에서 수비하고 겨울에 춥게 되어 뱃길이 통하지 않으면 내려와 촌락에 거한다.
'왕기' 에게 부대를 나누어 도주한 궁(동천왕)을 토벌하려고 파견하였는데 동쪽의 경계에 이르러 늙은
노인에게 물었다. '바다 동쪽에도 사람이 있는가?' 늙은 노인이 말하길 나라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는데 풍랑을 만나 수십일에 이르러 동쪽에서 하나의 섬을 만나 올라가 보니 사람
이 있는데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았다. 그 풍속에 항시 칠월에 어린 여자를 바다에 받치는 것이 있다.
말하길 한 나라가 있는데 역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모두 여자이고 남자가 없다. 또 말하길 바다
에서 떠 다니는 옷 하나를 얻었는데 모양은 중국인의 옷과 같고 그 양 소매의 길이는 삼장이나
된다. 또 부서진 배를 하나 얻었는데 파도가 밀려와 해안에 닿았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말이
통하지 않고 음식을 먹지 않아 죽었다. 이 지역은 모두 '옥저'동쪽의 큰 바다 가운데에 있는 것이다.
6. 相婁(상루) :
'읍루' 는 부여 동쪽 천여리에 있으며 큰 바다에 닿는다. 남쪽은 북옥저에 닿고 그 북쪽의 끝은 알지
못한다. 산이 험하고 많으며 사람들의 형태는 '부여' 와 유사하다. 언어는 부여와는 다르고
오곡이 있으며 소, 말, 마포가 있다. 사람들은 용력이 많고 대군장은 없으며 읍락 각각에 대인이 있다.
산림사이에 거처하면서 동굴에서 사는데 큰 집은 사다리 아홉개 정도의 깊이고 깊을수록 좋은
것이다. 땅기운이 차가운데 부여보다 심하다. 풍속에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여 그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해 입고 겨울에 돼지 비계를 몸에 여러번 두껍게 칠하여 추운
바람을 막는다. 여름에는 곧 벌거 벗고 한척되는 천으로 앞 뒤를 가리는 것으로 형체를 가린다.
사람들이 깨끗하질 못하여 중앙에 화장실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둘레에서 거한다. 활의 길이는
사척이고 힘이 쇠뇌만큼 드는데 화살은 싸리나무를 사용하고 길이가 한척팔촌이며 푸른
돌로 화살촉을 만들니 옛날부터 '숙신씨' 의 나라라 한다. 궁술에 능하여 사람을 쏘면 눈을
맞치고 화살에 독을 발라 맞으면 모두 죽는다. 적옥과 좋은 담비가죽이 나오니 읍루초 이다.
한(漢)의 말기에 '부여' 의 신하였다가 조세와 조역을 중하게 하니 황초 중에 모반하니 부여가 수차례
정벌하였으나 무리가 비록 적으나 산이 험하고 이웃나라 사람들이 그 활과 화살을 두려워하여 병사
로써 능히 복속시키지 못하였다. 그 나라는 배를 타고 노략질을 잘하는데 이웃나라들의 근심거리
였다. 동이들은 음식류에 모두 조두를 사용하는데 오직 '읍루' 는 아니며 법과 풍속이 가장 기강이 없다.
7. 濊(예) :
'예' 의 남쪽은 진한이고, 북쪽은 고구려와 옥저며 동쪽으로 바다가 있고 '조선' 의 동쪽은 그 땅이니
호수는 이만이다. 옛날 '기자(箕子)' 가 '조선' 에 이르러 팔조(八條)의 가르침으로 가르치자 문을
닫지않고 백성은 도둑질 하지 않았다. 그 사십여세 후 '조선후 준(準)' 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였다.
진승등이 일어나니 천하가 '진(秦)' 을 배신해 '연', '제', '조' 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조선땅으로 들어오니 수만이나 되었다. '연(燕)' 인 '위만(衛滿)' 이 있어 상투 틀고
이족(夷族)옷을 입어 돌아와 왕노릇 하였다. '한 무제' 가 조선을 벌하여 멸하니,
나누어 그 땅에 사군을 두었다. 이로부터, '호(胡)' 와 '한(漢)' 이 점점 나뉘게 되었다.
대 군장이 없고 스스로 한때 부터의 관직에 '후(候)', '읍군', '삼노' 가 있어 하호의 주인으로 다스렸는데
그 늙은 노인들은 옛날부터 스스로 '구려(句麗)' 와 같은 종류라고 한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구려에 구걸함을 청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크게 '구려' 와 같고 의복만은 다름이 있으니 남녀의 옷은 옷깃이 굽었고 남자
들은 넓이가 수촌이나 되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를 매는 것으로 장식 한다. 스스로 단단대산령
서쪽은 '낙랑' 에 속하였다. 령의 동쪽에 칠현을 두었는데 도위가 주인이었으며 모두 예의
백성이다. 후에 도위를 없에고 그 거수들을 후에 봉하니 이제 '불내, 예' 는 모두 그 종류인 것이다.
한(漢)의 말에는 다시 '구려(句麗)' 에 속하게 되었다. 그 풍속에 산과 천을 중하게 여기어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어서 들어와 허망함을 바라지 못하게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못하니 꺼리는게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빨리 버리고 옛집도 버리고 새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짓는다. 별자리를 보아서 근래의 풍년들 것임을 미리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츰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
(舞天)' 이라 하였으며 호랑이를 신으로 모셔 제사지낸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꾸짓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명하여 '책화' 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보상하고
도둑이 적다. 창은 길이가 삼장이고 혹 여러 사람이 함께 창을 들기도 하며 보병전에 능하다.
'낙랑' 과 '단궁(檀弓)' 이 이 땅에서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班魚皮)가 나오며 얼룩표범이 있고
과하마(果下馬)가 나오니 한 환제 때에 바쳤다. 신하 송지가 말하길 과하마는 높이가 삼척이고
타면 과실수를 아래로 해서 지나가니 고로 과하라고 하는 것이다. '박물지', '위도부' 에서 보았다.
정시 육년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 궁준' 이 '동예' 가 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치자
'불내후' 들이 읍을 들고 항복하였다. 팔년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받치니 다시 '불내' 를 '예왕'
이라 벼슬을 내린다고 하였다. 그는 민간들 틈에 섞여 살면서 사시로 군에 나와 조알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이나 세금을 바치는 일과 부역 시키는 일 등을 모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했다.
8. 韓(馬韓 마한) :
'한(韓)' 은 '대방' 의 남쪽에 있으니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東西以海爲限) 로 하며 남쪽은
'왜' 와 접해(南與<倭>接) 있으니 사방 사천리이다. '마한', '진한', '번한' 셋이 있는데 '진한' 은
옛날 '진국' 이다. '마한' 은 서쪽에 있는데 씨를 뿌리며 양잠을 알고 갈포를 짓는다. 장사가 있는데
큰 자는 스스로를 '신지' 라 하고 다음은 '읍차' 라 하며 산과 바다사이에 흩어져 있는데 성곽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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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난국>·<구해국>·<불운국>·<불사분사국>·<원지국>·<건마국>·<초리국>, 등 오십여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가 정도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가 정도로 총 10여만호 이며 '진왕(辰王)' 은 '월지국
(목지국?)' 을 다스린다. '신지' 혹은 '가우' 를 신운견지라 부르는데 안정됨을 지키고 정도에
벗어남을 멀리하고 신하를 받들어 주는 것과 아이에게 베푸는 것이 사(私)됨이 없어 비교할수 없다.
'진지' 는 겸손한 호칭이니 그 관직은 위나라를 따라서,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 이다.
'후준(侯準)' 이 참람되게 왕이라 칭하고 연나라 망명인 '위만' 이 공격하여 빼앗았다. 위략에서 말하길
'주나라' 가 약해짐을 보고 '연(燕)' 이 왕으로 높이고 동쪽의 땅을 다스리려고 하자 옛날 '기자' 의
후손인 '조선후' 도 역시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병사와 함께 연을 공격하여 '주(周)' 의 왕실을 높이고자
하였다. 대부 '예' 가 간해 멈추게 되고 예를 서쪽으로 보내 연에게 말하니 연도 그치고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해지자 '연(燕)' 이 장수 '진개' 를 파견하여 그 땅의 서방을 공격하여
땅 이천여리를 취했으며 '만번한' 에 이르러 경계를 삼자 '조선' 이 약해지게 되었다.'진' 이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을 시켜 '장성' 을 쌓아 '요동' 에 이르게 하였다. 이때에 '조선왕 비'
가 섰으니 '진(秦)' 이 엄습할까를 두려워하여 복속하여 진에 속하였지만 알현하지는 않았다.
'비' 가 죽고 그 아들 '준' 이 섰는데 이십여년 후에 '진', '항' 이 일어나 천하가 어지럽자 '연', '제',
'조' 나라 백성들이 시름해 '준(準)' 에게 가서 망명을 하니 준이 이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이
'노관' 을 연왕으로 삼자 '조선' 이 연과의 경계를 '패수' 로 삼았다. 노관이 모반하여 흉노로 들어
가고 연나라 사람 '위만' 이 망명하여 '호' 의 옷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 를 건너 준에게 항복하였다.
'준' 에게 서쪽 경계에 살기를 구하고 중국 망명인으로 '조선' 을 지키는 병풍이 되고자 하니 준이 믿고
은혜를 베풀어 '박사' 의 벼슬을 주고 규를 하사하며 백리의 땅을 봉하여 서쪽 변방을 지키는 우두
머리로 하였다. '위만' 이 망한 무리들을 꾀여 무리가 점점 많아지니 이에 준에게 사람을 파견하여
거짓으로 고하길 '한(漢)' 의 병사가 열길로 쳐들어 온다며 방비하기 위해 들어와서는 준을 공격하였다.
'준' 이 '만' 과 전쟁을 하는데 대적하질 못하였다. 그 좌우궁인들과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가
'한(韓)' 의 땅에 거하였으며 스스로 '한왕(韓王)' 이라 하였다.(위략에 말하길 그 아들이
나라에 있어 성을 '한씨(韓氏)' 라 하였다. 준이 바다 가운데 있은 후로 '조선' 과 서로 왕래
하지 않았다.) 그 후로 끊어져 멸망하니 지금 '한(韓)' 인이 오히려 그를 제사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에 '낙랑군' 에 속하게 되고 사시 조알하였다. 위략에, 처음 '우거' 가 깨어지지 않았을 때 '조선'
의 재상 역계경이 간하였지만 우거가 쓰지 않았다. 동쪽의 '진국(辰國)'은 이때에 백성들이 따라나온
자가 이천여호나 되었고 역시 '조선' 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때에 이르러 '염사착' 이
'진한' 의 우수거가 되었다. 낙랑이 땅이 좋고 백성들이 부유하다는 말을 듣고 도망쳐 와서 항복하였다.
그 읍락에서 나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는데 말이 '한(韓)'인이 아니었다.
물으니 남자가 말하길 '우리는 '한(漢)' 인으로 이름은 '호래' 이다. 우리의 무리는 천오백명으로
나무를 베려다가 '한(韓)' 인에게 붙잡여서 모두 머리를 깍이고 종이 되었으니 삼년이나 되었다.'
'염사착' 이 말하길 '나는 '한의 낙랑' 에 항복할 것이다. 당신도 같이 가겠는가? 하니 호래
가 말하길 좋다 했다. 염사착이 호래와 함자현에 이르러 현에서 군을 말하니 군에서
'착' 을 통역으로 삼고 금중으로 나아가 큰 배를 타고 '진한(辰韓)' 에 들어갔다.
역시 호래와 함께이다. 항복받은 무리 천명을 얻었으나 그 오백명은 이미 죽었다.
착이 이때 '진한(辰韓)' 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오백명을 돌려 보내라.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병사 만으로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 하니 진한이 말하길 '오백인은 이미 죽었다.
나는 마땅히 재물로써 값겠다.' 하고 진한에서 만오천명(<辰韓>萬五千人?)과 변한에서 포
만오천필이 나오니 착이 거두어 곧바로 돌아갔다. 군에서 착에게 공로를 표시하고 관책과 밭과
집을 하사하였다. 자손이 수대에 내려오다가 안제 연광 사년때에 거듭해 면제(故受復除?)를 받았다.
환제 와 영제 말에 '한예(韓濊)' 가 강성해지자 군현들이 능히 제도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많이
'한국' 으로 들어갔다. 건안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의 남쪽 거친땅을 나누어 '대방군'
으로 삼고 공손모와 장창등을 보내어 유민을 모아 병사를 일으켜 '한예' 를 쳤다.
옛 백성들이 점점 나오니 이후로 '왜(倭)' 와 '한(韓)' 이 '대방' 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 중에 명제가 비밀히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두군의 바다
를 건너서, 여러 '한국(韓國)' 의 신지에게 읍군의 인수를 하사하고 다음으로
읍장에게 하사하였다. 그 풍속에 옷과 두건을 좋아하는데 하호들이 군에 조알
할 때에 모두 옷과 두건을 한다. 이제 하사한 옷과 두건을 한 자가 천여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이 '낙랑' 이 '한국' 을 통일했다고 해서 진한의 팔개국을 나누어 낙랑에게
주었다. 통역하는데 다르고 옳음이 있어 전해지자 신지‘첨한’이 노하여 대방군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 태수 유무가 함께 병사로 쳤는
데 '준' 은 전사하고 2군은 마침내 '한(韓 신분활국)' 을 멸하였다(二郡遂滅<韓>)
그 풍속은 기강이 적어 나라의 읍에 비록 주인이 있지만 읍락에 섞여 살고 능히
제도하거나 다스림에 능하지 못하며 꿇어 앉아 엎드려 절하는 예의도 없다.
거처는 흙으로 만든 집에 풀로 지붕을 올리는데 형태가 무덤과 같다. 그 문
은 위로 내고 가족이 함께 그 가운데 있으며 어른과 아이와 남녀의 구별이 없다.
그 장사는 곽은 있으나 관이 없다. 소와 말타는 것을 알지 못하여 소나 말은 사람이 죽었을때
보내져 쓰인다. 구슬 목걸이를 보배로 삼는데 혹은 옷에 꾀메어 씀으로 꾸미고 혹은 목에
매달기도 하고 귀에 달기도 하며 금은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강하고 용감하며 상투를 트는데 모양이 경병과 같다. 포로 옷을 해입고 신발은 가죽신을 신는다.
그 나라에 일이 있으면, 관가에서 성곽을 쌓토록 시키고, 용감하고 건강한 여러 소년들이
등가죽을 뚫어 큰 밧줄에 이를 묶은후 큰 나무에 붙들어 맨후 종일 지껄이며, 고함을
치며 힘을 쓰는데 아파하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에 힘쓰는 것과 건강함을 권하는 것이다.
오월 씨뿌릴 때가 되면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무리지어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밤낮없이 쉴줄 모르고
술을 마신다. 그 춤은 수십사람이 함께 일어나 따라가면서 땅을 밟는데 손과 발이 서로 응한다.
마디마다 아뢰는 사람이 있어 탁무와 비슷함이 있다. 시월 농사가 끝나면 다시 이와 같이 하는데
귀신을 믿는 것이다. 나라에서 천신에 제사지내는 주인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천군' 이라고 한다.
여러나라에는 특별한 읍이 하나 있는데, 이를 '소도' 라고 하니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메달고 귀신
을 부린다. 여럿이서 그 가운데로 도망하면 이에 돌아오지 못하니 도둑이 일어나기에 좋다. '소도' 의
뜻은 부거와 비슷한테 선악을 행하는 것에는 다름이 있다. 그 북방 군과 가까운 나라들은 예의 풍속
이 있고 먼 곳은 죄인과 같이 노비들과 서로 섞여 살며 다른 보배는 없고 짐승들과 초목들도 중국과 같다.
큰 밤이 나오는데 배만 하고 꼬리가 가는 닭이 있는데 꼬리가 오척이나 된다. 남자들은 때때로 문신을
한다. 또한 '주호' 가 있는데 '마한'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이다. 사람들이 작고 언어는 '한(韓)'
과 같지 않으며 곤두 함이 '선비(鮮卑)' 와 같다. 가죽옷을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고
옷에는 위는 있지만 아래는 없어 벌거 벗은 것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 과 교역을 한다.
9. 韓(辰韓 진한) :
'진한' 은 '마한' 의 동쪽에 있는데 늙은 노인이 세를 전하여 말하길 옛날 '진(秦)' 의 사역
을 피하여 온 망명인이 '한국' 에 오자 마한이 그 동쪽땅을 나누어 주었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 을 '방(邦)' 이라 하고 '궁' 을 '호(弧)' 라
하고 '적(賊)' 을 '구(寇)' 라 하고 '행주를 행상(술마시는걸 잔을 낸다고)' 이라 하였다.
무리로 하니 '秦(진)' 나라 사람과 같음이 있으니, '연' 과 '제' 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 이라 하고 동쪽 사람을 '아(阿)' 라 하는데 낙랑 사람은 본래 그 남은 세력
이다. 이제 이름을 '진한' 이라고 하니 처음에는 육국이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열두나라가 되었다.
10. 韓(弁辰 변진) :
'변진' 역시 열두나라 이며 여러개의 작은 별읍이 있다. 각각 거사(渠師)가 있으니 큰 자의 이름은
'신지' 이고 다음은 '험측' 이라 하고 다음은 '번예' 라 하고 다음은 '살해', 다음은 '읍차' 라 한다.
<이저국>·<불사국>·<변진미리미동국>·<변진접도국>·<근기국>·<난미리미동국>·<변진고자미동국>·
<변진고순시국>·<염해국>·<변진반로국>·<변진악노국>·<군미국(변군미국)>·<변진미오사마국>·
<여담국>·<변진감로국>·<호로국>·<주선국(마연국)>·<변진구사국(김해가야?)>·<변진주조마국>·
<변진안사국(마연국)>·<변진독로국>·<사로국(신라?)>·<우유국>이니 '번', '진한' 을 합쳐
이십사개국 이다. 큰 나라는 사오천가를 이루고 작은 나라는 육칠백가를 이루니 총 사,오만호 이다.
그 열두 나라는 '진왕(辰王)' 에 속하는데 진왕은 항상‘마한’사람이 하여 대대로 잇는다.
'진왕(辰王)' 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다. 땅은 좋고 오곡과 벼에 알맞으며
양잠과 겸포를 하고 소나 말을 탄다. 결혼하는데 예절이 있으며 남녀는 구별이 있다.
큰 새의 깃털로 장사지내는데 그 뜻은 죽은자가 날아 오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위략에 집을 지을
때 나무를 가로로 얽어 매는데 감옥과 비슷하다. 나라에 철이 나오고, '한', '예', '왜' 가 모두 이를
가져다 썼다. 저자에서 돈을 사용함이 중국의 돈 사용과 같으며 또 두 군(낙랑과 대방) 에도 공급했다.
풍속에 노래하고 춤추고 음주함을 즐긴다. 거문고가 있는데 모양이 '축' 과 비슷하고 연주하면 역시
소리와 곡률이 있다. 아이나 태어나면 돌로 머리를 눌르는데 머리를 모나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
지금 '진한' 사람이 모두 '편두' 이다. 왜국과 가까워 남녀가 모두 문신(男女近倭, 亦文身) 을 하며
보병전을 하고 병사의 무기는 마한과 같다. 풍속에 길가던 사람이 서로 만나면 모두 길을 비켜준다.
'변진' 은 '진한' 과 섞여 사는데 성곽이 있으며 의복과 거처는 진한과 같다. 언어와 법과 풍속은 서로
유사함이 있으나 귀신에 제사함은 다른데 부엌신을 문에서 서쪽에 두는 것이다. '독노국(부산
동래)' 은 '왜' 와 접해 있다.(<瀆盧國>與<倭>接界) 열두나라 역시 왕이 있는데 사람들이 모두
크다. 의복은 정결하고 머리를 기른다. 역시 폭이 넓은 가드다란 포를 짓고 법과 풍속은 특히 엄하다.
11. 倭(왜) :
'왜' 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에 있고 산과 섬을 의지하여 나라의 읍이 있다. 예로부터
백여개의 나라가 있어 '한(漢)' 나라 때 알현하는 자가 있었으며 통역으로 통교하는 곳이 30
나라 이다. 군에서 나아가 '왜' 에 이르는데, 물로 가서 해안을 따라 돌면 '한국' 이 나오고 남쪽
으로 가다 동쪽으로 가면 '구사한국(狗邪韓國 김해가야)' 북쪽에 이르러 거리가 칠천여리나 된다.
처음 하나의 바다를 건여 천여리에 '대마도' 에 이른다. 그 큰 관리를 '비구' 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 라 한다. 떨어진 섬에 거주하는데 거리가 사백여리이다. 땅은 산이 험하고
깊은 숲이 많고 도로는 짐승이 다니는 길과 같다. 호수는 천여호이고 좋은 밭은 없어
바다에서 나오는 것을 먹어 스스로 생활하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며 쌀을 사들인다.
또 남으로 바다 건너 천여리에 일명 '한해(瀚海)' 를 건너면 큰 나라(이키섬 일지국)
가 하나 있는데 역시 관리를 '비구' 라 하고 부관을 '비노모리' 라 한다. 사방
삼백리이며 대나무와 나무가 모여 많은 산림을 이루니 삼천가정도가 있으며
차이는 밭이 있어 밭을 경작하는데 부족함이 있어 역시 남북으로 쌀을 사들인다.
또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말노국(末盧國 북규슈)' 에 이르는데 사천여호가 있으며 산기슭의 바다에
거처하는데 초목이 너무 우거져 길을 갈 때 앞사람을 볼수가 없을 정도이다. 물고기와 전복을
잡기를 좋아하는데 물이 깊지않고 얕아 자맥질하여 이를 잡는다. 동남쪽 육지를 따라 오백리
에 '이도국(伊都國)' 이 있는데, 관리를 '이지' 라 부르고, 부관을 '설모고', '병모고' 라 부른다.
이도국은 천여호가 있으며 세세토록 왕이 있는데 모두 '여왕국' 에 속해 있어 고을에 사신이 왕래
하고 항상 머물러 있다. 동남으로 백리에 '노국(奴國)'이 있는데 관리를 시마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는데 호수가 이만여호 이다. 동쪽으로 백리에는 '불미국' 이 있어, 관리를
다모라하고 부관을 비노모리라 부르며 호수는 천여가이다. 남쪽으로 '투마국(投馬國)' 이
있어 물로 이십일을 간다. 관리를 미미라 하고, 부관을 미미나리라 부르는데, 가히 오만여호이다.
남쪽으로 '야마대국(邪馬壹國 야마타이국)' 이 있어 여왕이 거하는 도읍으로 물로 십일을 가고 육지
로는 한달이 걸린다. 관리를 '이지마' 라 하고 다음을 '미마승', 다음을 '미마획지', 다음을
'노가제' 라 하니 가히 칠만여호 이다. 이 '여왕국' 의 북쪽에 있는 나라의 호수와 길을
얻어 기록한 것인데 그 나머지 주변의 나라는 너무 멀어 끊어져 가히 자세히 얻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사마국>, <이백지국>, <이사국>, <도지국>, <미노국>, <호고도국>, <불호국>,
<저노국>, <대소국>, <소노국>, <호읍국>, <화노소노국>, <귀국>, <위오국>,
<귀노국>, <사마국>, <궁신국>, <읍리국>, <지유국>, <오노국>, <노국>,이 있는데,
이 여왕을 경계의 끝이다. 남쪽에 '구노국(狗奴國)' 이 있는데 남자가 왕을 하고, 관리를
'구고지비구'라 하는데 여왕에 속해 있지 않으며 이 국은 '여왕국' 에서 만이천여리나 된다.
남자들은 애 어른 없이 모두 얼굴에 문신을 하는데 사신이 중국에 이르러 스스로를 대부
라 칭하였다. 하후 소강의 아들을 회계에 봉하였는데 머리를 깍고 문신을 함으로써
교룡의 해를 피하였다. 이제 '왜' 의 사람들이 자맥질하여 물고기와 조개잡기를 좋아
하니 문신으로 큰 물고기와 바닷짐승이 싫어하게 하여 후에 점점 꾸미게 된 것이다.
여러 나라의 문신은 혹은 왼쪽에 있고 혹은 오른쪽에 크고 작고 신분의 높고 낮음의 차이가 있다.
길을 계산하는데 마땅히 ‘회계'와 '동치' 의 동쪽에 있으며 그 풍속은 음란하지 않고 남자들은
모두 상투를 틀고 무명으로 머리를 감싼다. 옷은 가로로 하여 연결하여 동여메는데 바느질하지
않는다. 부인들도 머리를 올려 묶고 통채로 옷을 지어 중앙에 구멍을 뚫고 머리부터 옷을 입는다.
벼가 있고 모시 삼 양잠이 있어 길쌈하고 가는 모시와 비단이 있고 그 땅에 소와 말, 호랑이, 돼지, 양,
까치가 없다. 병기로 창과 방패 나무활을 쓰고 목궁은 아래는 짧고 위가 길다. 대나무로 화살
에 쇠나 혹은 뼈로 화살촉을 하기도 하는데 '이(耳)' 와 '주애 (朱崖)' 와 같이 있고 없음에 있는 것이다.
'왜' 는 따뜻해 겨울에도 여름음식이 나오며 맨발이고 집에 부모형제가 함께 거하지만 거처는 다르다.
붉은색 진흙을 몸에 바르는데 중국의 분가루를 사용하는 것과 같다. 음식을 하는데는 '두(豆)' 를
사용하고 손으로 밥을 먹는다. 사람이 죽으면 관이 있으나 곽은 없이 흙으로 무덤을 만드니 십여일
을 상을 치루는데 고기를 먹지 않고 상주는 곡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다.
장사를 마치면, 집안이 모두 물속에 들어가 목욕을 하는데 '연욕(練沐)' 과 같다. 사신으로 바다를 건너
중국에 갈때는 한 사람이 머리에 빗질하지 않고 이나 서캐도 잡지 않고 의복은 더럽게 하고 고기도
먹지 않고, 부인과 가까이 하지 않으니 상을 치루는 사람과 같으니 '지쇠(持衰)' 라고 한다. 길을
가는 자가 좋은 일이 있으면 재물을 그 사람에게 주고, 만일 질병이 있거나 나쁜해를 당하면
죽일려고 하는데 '지쇠' 가 삼가지 않았다(謂其持衰不謹)고 그런 것이다. 진주와 푸른옥이 나온다.
산에는 단사가 있는데 그 나무로는 남·저·예장·유력·투강·오호·풍향 등이 있고 대나무로는 가는
대와 조지가 난다. 생강과 귤, 산초나무와 양화가 있지만 맛을 보태는 것인줄 알지 못하며
원숭이와 검은 꿩이 있다. 그 풍속에 일이 있으면 뼈를 불살라 점을 치는데 길흉을 점칠
때 먼저 점치는 곳에 고하는데 거북점과 같으니 불이 터지는 것을 보아서 점을 치는 것이다.
모임은 앉아서 하는데 부자와 남녀의 차이가 없으며 술을 즐긴다. 위략(魏略) 에,
풍속에 정확히 해와 사절기를 알지 못하며 다만 봄에 밭갈고 가을에 거두는
것으로 그 해의 기준으로 삼으며 어른에게 공경을 보이는 것은 단지 손을 잡고
꿇어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사람들의 수명은 혹은 백살이요 혹은 팔구십살이다.
풍속에 나라의 어른들은 모두 사오명의 부인이 있는데 하호들도 혹 이삼명의 부인이
있다. 부인은 음란하지 않고 투기 하지 않는다. 도둑이 없고 송사가 적다.
법을 범하면 가벼운자는 그 처자를 죽이고 무거운 자는 그 집안에서 종족까지
멸한다. 높고 낮음에 차이가 있으니 복종해야 하며 세금을 거두고 문설주가 있다.
나라에 시장이 있어 교역이 있는데 '대왜(大倭)' 가 이를 관리한다. '여왕국' 의 북쪽에 특별히
큰 기관 하나를 두는데 여러 나라를 살피는 것으로 여러나라들이 이를 두려워 하고
꺼린다. '이도국' 을 다스리는데 나라 중앙에 자사와 같은 것을 항상 둔다. 왕이
경도나 '대방군' 여러 '한국' 과 '왜국' 의 군에 사신을 보내어 여왕에게 하사하는 물건과
문서를 보내와 전하며 하호들이 길에서 대인을 만나면 뒷것을질쳐 풀속에 들어가 엎드린다.
그 나라는 본래 남자가 왕이었으나 칠팔십년후에 '왜국' 에 난이 일어나 서로 공격하다가
함께 여자를 왕으로 세웠다. 일명 '비미호(卑彌呼)' 로 귀신을 부리고 능히 백성을
미혹게 하여 성인인데도 남편이 없으며 남자 동생이 다스림을 도왔다. 왕을 보았다는
사람은 적고 여자종 수천이 시중드는데도 오직 남자 한명이 음식을 대고 나고들면서
말을 전한다. 거처하는 궁실과 누각과 성책은 엄하게 만들었고 항상 병사로써 지키고 있다.
'여왕국' 에서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천여리에 다시 나라가 있는데 모두 '왜' 의 종류이다.
또한 그 남쪽에 '주유국' 이 있는데 사람들의 키가 삼사척으로 여왕국에서 사천여리
이다. 또한 '나국‘ 과 '흑치국' 이 그 나라 동남쪽에 있는데 배로 일년을 가야 이른다. 모두
'왜' 의 땅으로 바다 가운데 섬으로 끊어져 있고 혹은 연해 있기도 하니 사방 가히 오천리이다.
경초 이년 유월 '왜여왕' 이 '난승미' 등을 보내 군(낙랑군)에 이르러 천자에게 조헌하기를 구하자
태수 '유하' 가 서울에 사신을 보냈다. 십이월 조서를 내려 '왜여왕' 에게 말하길 대방태수 유하가
대부 난승미와 사신 도시우리를 보내 남자 4명과 여자 육명, 포 두필이장을 받치니 받았다. 먼데도
사신을 보내어 공물을 받치니 충효가 이와 같아 당신을 '친위왜왕'( 今以汝爲<親魏倭王>) 을 삼는다.
그리고 금으로 만든 인과 붉은 빛 인끈을 봉해서 '대방태수' 에게 보내는 것이니 당신은 백성
을 잘 다스리고 힘써 효도하고 잘 순종하도록 하라. 당신이 보낸 사신 난승미와 도시우리
는 길이 먼데 수고가 많았기로 이제 '난승미' 를 솔선중랑장을 삼고 '우리' 를 솔선
교위를 삼아 은으로 만든 인과 푸른 인끈을 주고 불러보고 위로한 다음 돌려 보내는 바이다.
그리고 강지교룡금 오필과 강지추속계 십장, 청강 오십필, 감청 오십필을 주어 당신이 받친 공물에
대해 답하는 것이다. 또 감지구문금 삼필과 새반화계 오장, 백견 오십필, 금 팔냥, 오척도 두자루,
동경 일백 매, 진주와 공단 각 오십근씩을 모두 포장하여 '난승미'와 '우리'에게 주어 돌려 보내
는 터이니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서 우리 나라가 너희를 아끼는 뜻을 알게 하도록 하라.
정시 원년 '태수 궁준' 이 건중교위 제휴등을 보내서 조서와 인수를 가지고 왜국에 가서 '왜왕'
에게 절하고, 아울러 금백과 금계, 도경, 채물 등을 하사하였다. 이에 왜왕은 표문을 올려
조서와 물건을 내린 은혜에 회답해 왔다. 사년에 왜왕은 다시 사신으로 대부 이성기와
액사구 등 팔인을 보내 포로 몇 명과 왜금, 강청, 겸금, 의백, 포단, 목부, 단궁시 등을 바쳐 왔다.
이에 '액사구' 등에게 한결같이 솔선중랑장의 벼슬을 주고 인수를 주었다. 육년에 조서를
내려 왜국의 '난두미' 에게 황기를 주고 부군을 주었다. 팔년에는 태수 왕기가 와서
보고하기를 '왜국의 여왕 비미호' 와 '구노국' 의 남왕 '비미궁호소' 사이에 불화
해서 왜국에서는 재사, 오월 등을 보내서 그들의 서로 공격하는 모양을 보고했다고 한다.
이에 중국에서는 색조연사 '장정' 등을 보내서 조서와 황기를 내려 '난승미' 에게 벼슬을 주고
화친하도록 타일렀다. '비미호' 가 죽자 크게 무덤을 만들어 직경이 백여 보나 되게
한 다음 여기에 노비 백여명을 순장했다. 뒤를 이어 다시 남왕을 세웠으나 온 나라 사람들이
여기에 복종하지 않고 저희끼리 서로 죽이고 싸워서 이 때 죽은 사람만도 천여 명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는수 없이 비미호의 일가 딸이 되는 '대여' 를 세웠다. 이 때 대여의 나이
는 겨우 십삼세였는데 비로소 나라안의 인심이 정해졌다. '정' 등이 '대여' 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더니 대여는 왜국의 대부 솔선중랑장 '액사구' 등 삼십명을 '정' 에게 보내
와서 뵙고 포로 삼십명과 흰 구슬 오십덩이, 청대구주 두장, 이문잡금 이십필을 바쳐 왔다.
야마타이국(邪馬壹國 7만호) 히미코(卑弥呼) 여왕은 경초 2년(238년) 대방군(帶方郡) 을 통해 조위(曹魏)
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니 위(魏)나라 명제(明帝)는 히미코를 친위왜왕(親魏倭王)에 봉하고 사례품을
하사했는데, 왜국에서 중국에 처음으로 사신을 보낸 것은 후쿠오카시 '노국(奴國 2만호)' 이 서기 57년
후한(後漢)에 보낸 것으로 광무제(光武帝)는 왜의 노국왕에게 “한위노국왕인(漢委奴國王印)”을 하사합니다.
12. 맺는 말 :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기록은 우리나라 중고교 국사 교과서에 많이 실렸으니 낯설지는 않지 싶은데
만약에 중국에서 우리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면 우리 교과서는 뭘로 채워야 할까요? 1145년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할 때 과거로 부터 전해진 역사책이 부실하니, 전해오는 자료가
부족한지라 여러 단편적인 기록들을“ 고기(古記)”라는 이름으로 인용하면서 중국 사서
에서 한반도 관련 기사를 뽑아 편찬할수 밖에 없었는데 고구려본기는 우리 기록을 우선했습니다.
1145년 무렵에 고조선과 삼국시대 기록이 매우 적었던 이유로는 먼저 우리민족이 문자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고조선 나라가 서고도 글자가 없는지라 기록이나 문서, 책 같은게 없이 말로만 다스렸
으니... 성씨가 없이 이름만 썼는데 성기, 최, 노인, 주몽, 유리, 비류, 온조, 소서노, 이사부, 거칠부,
흥수, 성충, 윤충, 검일, 죽죽, 계백, 우륵, 궁예, 견훤, 왕건, 작제건, 걸걸중상(대조영 부친) 등 입니다.
수백여년이 흐르고 한나라에 위만조선 평양성이 함락되고 환도성(국내성)이 2번이나 초토화되는등 우리
나라를 침략하던 불구 대천의 원수이자 적국인 중국에서 한자(漢字)가 전해져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
백제의 백제본기와 신라의 국사가 편찬되었다지만 저 책은 물론이고 내용을 인용한 다른 책 조차 전무
하니 후세에 전해지지 못하고 모두 멸실되어 버렸으니 우리 고대사는 중국과 일본 사서를 보아야만 합니다.
위지 동이전 韓(馬韓 마한) 조에 “'한(韓)' 은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東西以海爲限) 로 하며,
남쪽은 '왜' 와 접해(南與<倭>接) 있으니” 접(接)이라는 글자는 육지에서 경계를 나눈다는 뜻이며
또 韓(弁辰 변진) 조에 “ '독노국' 은 '왜' 와 접해(<瀆盧國>與<倭>接界) 있다” 독로국은 거제도
나 부산 동래(복천동 고분, 일명 거칠산국)로 보는데 역시“왜(倭)와 접(接)한다”는 글자가 보입니다.
그외 倭(왜) 조에 “倭(왜)로 가자면... 동쪽으로 가면 그 북쪽 해안인 구야한국(狗邪韓國)
에 이르는데 7,000여리 이다 到其北岸狗邪韓國” 여기서 구야한국은 김해 금관가야
를 말하는데, 왜로 가는 길목이다 라는 뜻이니 "3곳 모두 왜와 접한다" 는 뜻으로 전남
영산강 일대와 경남 도서 지방에 산재한 "전방후원분" 과 함께 풀어야 할 숙제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