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긴 인생행로 속에서
어려울 때마다 기도로 극복
이젠 남편과 함께 회향의 삶을…
날마다 변화하는 계절따라 올해도 연주암 도반들과 상원사를 거처 월정사를 참배하고 돌아왔다. 사찰은 언제나 든든한 나의 안식처가 되어 주는 곳이다. 그리고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나를 추스리는 곳이다.
1971년 봄, 내 나이 26살에 결혼해 2년 여의 시간이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시골에 계신 시어머니는 씨받이 아가씨를 물색중이니 남편보고 내려왔다 가라며 성화셨다. 주위의 눈치에 주눅이 들대로 든 나는 이혼까지 생각했다.그즈음 다니기 시작한 마을 어귀의 봉은사에서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몇달의 시간이 지난 가을 문턱, 갑자기 입덧을 하기 시작했다. 그 이듬해 5월 첫딸을 낳았다.
그 이후 아이를 낳은지 채 한달도 안돼 남편을 따라 철원으로 이사를 했다. 틈만 나면 애를 업고 심원사에 가 부처님과 스님을 뵙고, 법문을 들었다. 남편도 최전방에서 항상 부처님께 참배를 한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남편은 조금씩 후방으로 근무지를 옮겨갔다. 곧 승진도 했다. 그리고 나는 77년 12월 둘째 아이인 아들을 낳았다. 모든 일이 실타래 풀리듯 순조로웠다.
남편은 다시 소령에서 중령으로 진급했고, 전후방 근무를 마치고 육군본부에서 군복무를 하게 됐다. 그해 가을에 접어들 즈음, 애들 아버지는 퇴근 시간이 늦어지는 것 같더니 대령 진급심사에 들어갔다며 “아무래도 진급이 안될것 같으니 일이라도 열심히 해야지”라며 우울해했다.
나는 늘 하듯 “그래, 부처님께 의지해 보자. 여태까지 어려울 때면 부처님께서 도와주셨는데 이번에도 도와 주실거야” 마음을 다잡았다. 이튿날부터 매일 아침 목욕재계하고 관음사 도량으로 가 오백 나한님 앞에 서서 염주를 굴리며 매일 천배씩 7일동안 7천배의 절을 마쳤다. 7일 기도를 마친날 꿈을 꾸었다.
언제나처럼 관음사 부처님께 갔는데 큰 잔치가 벌어져서 신도들이 도량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법당 안에는 식권을 타려고 줄을 서 있었고, 나는 그 틈을 타 화엄성중께 삼배를 올리려는데 하얀 셔츠를 입으신 키 큰 처사가 나타나 나에게 ‘1000’이라고 쓰인 종이와 ‘10000’이라고 쓰인 종이를 주며 “식권이니 잘 간직하라”고 했다. 나는 화엄님을 응시하고 있었는데 화엄님 옆에 선녀들이 나비모양의 부채를 들고 서 있었다. ‘앗! 저 분이 화엄님이시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보살들이 수군수군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앞에 공양밥 세그릇이 놓여져 있었던 것이다.
“여보, 아침이야, 일어나. 이 사람이 오늘은 왜 이렇게 늦잠이야. 아침밥 안 줄거야”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꿈이었던 것이다. 부랴부랴 남편 출근준비를 돕고 현관문을 나서는 남편에게 나도 모르게 “좋은 일 있을거예요. 잘 다녀오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남편은 “관세음보살님에게서 무슨 편지가 왔어?” 너스레를 떨었다. 마음 한편에는 ‘내년에도 기회가 있으니까, 이번에 안되더라도 너무 실망하지 말자’며 위로를 하긴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초조했다.
오후 1시30분, 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여보,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남편의 목소리였다. 대령진급 심사를 통과했다는 것이었다. 기쁨의 눈물을 말없이 흘리면서 나는 또 한번 입은 부처님의 가피에 감사기도를 드렸다.
남편은 대령 승진 후 광주 보병학교로 가게 되었다. 남편의 불심은 더욱 깊어져 그곳에서 불교회장을 맡아 매주 일요일마다 군불자법회를 이끌며 포교를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우리 가족에게도 시련은 있었다. 큰 애가 중학교 3학년이 되었을 때의 일이다. 딸아이가 버스에서 내리다가 눈길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게 되었는데, 엉치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던 것이다. 오랫동안 물리치료를 받았지만 차도를 보이지 않아 애를 태웠다. 연주대 나한님과 약사여래 부처님을 이틀에 한 번씩 찾아 뵙고 간절하게 기도를 했다. 어린 아기가 엄마에게 젖 달라고 칭얼거리듯 나 역시도 약사여래 부처님 돌담을 끌어안고 어린 중생을 도와 달라며 매달려 마구 흐느껴 울었다.
딸 아이는 학교를 다니며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기를 2년여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차도가 없어 고 3이 되면 휴학계를 제출하고 아예 아버지가 있는 광주로 갈 심산이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대 부처님께 108배를 올리고 내려왔다.
그날 밤, 나는 참으로 신기한 체험을 했다. 머리에 비녀를 꽂고 흰 저고리, 검은 치마에 흰 끈으로 허리를 동여맨 머리가 희끗한 할머니가 꿈에 나타났는데 그 할머니는 딸에게 흰색 전기벨트를 매주면서 ‘이젠 괜찮아’라고 말씀 하시고는 사라졌다. 그 할머니를 부르려는 찰나 나는 눈을 떴다.
다음 날 딸애는 평소 “엄마 나 아파”라며 지쳐있던 모습과는 달리 환한 모습으로 현관문을 들어섰다.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싶었는데 그 후 딸아이는 허리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건강을 되찾았다. 그리고는 휴학도 하지 않고 무난히 대학에 들어가 대학생활을 한껏 누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길고 긴 인생의 행로 속에 받았던 불보살님의 가피였다.
남편은 올 11월말이면 정년 퇴직을 한다. 나는 과천신도회 연주대 도반으로 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남편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면 남편과 함께 봉사활동을 더욱 열심히 하겠다. 부처님께 받은 가피를 이제는 다른 어려운 사람들에게 회향하면서 살아가겠다고 부처님전에 늘 발원한다.
손불심화(경기도 의왕시 왕곡동)
첫댓글 전생에 선근이 깊으신 두분이 부부로 연이 되신 모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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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가 도반이 되셨으니...나무아미타불...()()()...어려우실 때마다 불심을 더욱더 정성스럽게 깊고 넓게 키워가십니다...고맙습니다...
불심이 깊으면은 부처님의 가피가 있는법입니다. 념력의 효가가 입증이 된 셈입니다.
스님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