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원자력계는 박근혜 대통령 인수위원회 시절 정부조직 개편안을 둘러싼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인수위가 대통령 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를 미래창조과학부 산하로 이관하려는 데서 논란은 불거졌다.
원자력 안전 규제 기능의 독립성 훼손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인수위는 후속조치로 원자력 안전 규제와 진흥 업무를 분리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기존 교육과학기술부 내 원자력 진흥 업무를 산업통상자원부로 일원화하겠다는 게 골자였다.
이때부터 원안위를 둘러싼 논란의 쟁점은 원자력 연구개발의 일원화 여부로 옮겨가는 양상을 보였다. 학계와 연구계를 중심으로 한 원자력계는 인수위 방침에 강하게 반발했다. 원자력 R&D 기능이 산업부처로 넘어갈 경우 단기적인 기술개발을 통한 원자력 진흥에만 치중해 기초·원천연구가 찬밥신세를 면키 어렵다는 위기의식에서였다. 결국 인수위의 원자력 진흥-규제 분리 계획은 없던 일이 됐다.
원자력계가 원자력 진흥-규제 분리 방안, 실상 원자력 연구개발 기능의 일원화에 반대하는 것은 왜일까. 답은 원자력 R&D의 예산구조와 관련이 있다.
원자력 연구 관련 예산은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으로부터 조달하는 원자력연구개발기금 전액과 국민이 낸 전기요금으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 일부 지원된다.
원자력연구개발기금은 한수원이 전년도 발전량에 kWh당 1.20원씩 부담한 금액으로 조성된다. 최근 3년간 한수원이 납부한 부담금은 2010년 1776억원, 2011년 1770억원, 지난해 1849억원이다.
전력산업기반기금에서도 지난해 1000억원에 가까운 금액이 원자력융합원천기술개발이란 명목으로 쓰였다. 이들 사업과는 별개 항목으로 지난 한 해에만 교과부와 지식경제부(현 산업부)가 쏟아부은 핵융합 연구부문 예산은 합쳐서 1070억원이 넘는다.
소관부처가 다르고 기금의 성격이 다른데도 특정 연구 분야에 막대한 금액이 집중될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정책자료에 의하면 원자력연구개발기금은 1997년 당시 과학기술처가 한국원자력연구소(현 한국원자력연구원)가 수행중인 원자로 계통 설계, 핵연료 설계, 중수로 핵연료 제조업무를 한국전력기술과 한전원자력연료로 이관하는 과정에서 생겨났다.
정부는 연구소의 반발을 잠재우기 위해 이관 직원들의 처우를 보장하고 원자력발전량(kWh)당 1.20원으로 하는 원자력연구개발기금을 신설해 연구소의 R&D 재원을 보장하기로 했다. 이른바 원자력계의 ‘칸막이’ 예산이 생겨나게 된 배경이다.
5년 단위로 수립하는 원자력진흥종합계획도 이때부터 추진됐다. 이는 원자력연구개발 5개년 계획과 연간 시행계획 수립의 근거가 됐다. 스마트, 소듐냉각고속로, 파이로프로세싱 등 장기과제연구에 착수하게 된 것도 이 시점이다.
산업계는 산업계대로 2006년 말 원전기술 중장기 기본계획인 ‘원전기술발전방안(Nu-Tech 2015)’을 수립했다. 대형 신형원전과 핵심기술 개발을 앞당기기 위해 2009년 NU-Tech 2012를 재수립한 데 이어 이 계획이 종료된 지난해 말 Nu-Tech 2030을 내놓았다. 2030년까지 무려 5조6000억원의 예산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부처 간 ‘정책 칸막이’만 공고해진 모양새가 됐다. 학계·연구계와 산업계 간의 단절과 중복투자 등에 따른 예산 낭비가 심각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까닭이다.
이근대 에너지경제연구원 박사는 “원자력연구는 그동안 기초연구를 중시하는 학계 위주로 이뤄져왔고, 한수원이나 산업 주무부처는 전력산업기반기금을 통해 상용화를 따로 추진하는 등 이원화 체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중복 투자 사례가 중소형 원자로다. 원자력연구원은 1997년부터 3000억원 이상을 스마트 개발에 매달렸고 지난해 7월 표준설계인가를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1년 지경부는 중복투자 논란에도 불구하고 향후 5년간 2800억원을 들여 또 다른 중소형 원자로(SMR) 개발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탈락해 사업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고 현재 사업은 보류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교수는 “스마트뿐 아니라 확률론적 안전성 연구 등 다른 연구분야에서도 이름만 바꿔단 중복 연구사례가 많다”며 “미래부쪽에서 연구를 하더라도 산업부로 가면 다시 시작하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원자력 R&D에 많은 재원이 집중되는 데 비해 산업체의 눈길을 끄는 결과물은 많지 않다.
미래부는 올해 원자력백서를 통해 2011년 SCI 논문 1022건 게재, 국제학술대회 논문 1311건 발표, 지식재산권(특허) 339건 출원 및 350건 등록, 기술이전 6건, 기술지도 195건 등의 성과가 있었다고 자평하고 있다. 2002년부터 2006년까지 5년간 평균 특허출원 192건, 특허등록 141건을 기록한 데 견줘 2007년부터 2010년 사이에 특허출원과 특허등록은 국내외 합쳐 각각 102%, 17% 증가한 것으로 돼있다.
이는 양적 성장만 앞세운 결과다. 연구성과의 질적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인 피인용 건수는 해마다 하락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3년간 원자력 R&D사업의 피인용 상위저널 논문 게재현황을 보면 2009년 30건, 2010년 14건, 2011년 12건으로 전체 미래부 R&D사업에서도 0.2%의 점유율을 기록했다.
기술료 실적도 미미한 수준이다. 원자력연구원에 따르면 2007년부터 2009년까지 3년간 기술이전 실적은 31억원에 불과했다. 그 이후부터 지난해까지는 기술이전 109건, 기술료 135억원으로 눈에 띄는 실적을 보였는데 이는 지난해 피복관 소재 국산화와 U0₂ 핵연료 소결체 개발 등 핵연료 연구분야에서 성과를 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성과를 두고 평가는 상반된다.
업계 한 관계자는 “사업자로부터 예산을 가져왔으면 사업자에 맞는 연구를 해야 하는데 예산 중에 산업분야에 활용되는 연구가 많지 않다”며 “매년 2000억원에 가까운 예산을 들였는데 이제야 로열티로 100억원을 받게 된 것이 대수인가”라고 잘라말했다.
반면 원자력연구원 관계자는 “산업부쪽에서는 단기적인 목표로 바로 현장에 적용하기 위해 추진하는 사업이 많지만 미래부에서는 중장기적 관점에서 많은 시간과 예산을 필요로 하는 연구가 많다”며 “투자 대비 성과가 바로 안 나온다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인프라가 갖춰지고 발전해 나가는 분야이기 때문에 산업계가 보는 시각과는 달리 봐야 한다”고 말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