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벌써 왔어요? 늦어서 미안해요”
부리나케 준비한다고 했어도 여자들은 조금만 시간이 남는 것 같으면 할일 다 하고 음식 쓰레기 봉지까지 갖고 나오자니 벌써 아파트 입구에 직원인 S의 카니발이 대어있다. 음식쓰레기 통에 봉지를 얼른 털어넣고 지숙은 차에 올라 탄다.
“안녕하세요, 계장님, 제가 좀 일찍 왔어요”
젊은 직원인 S는 기분 좋게 말한다.
차를 신흥동이 있는 골목길로 가면서 K를 태워 가야 한단다. 매년 연말에 있는 세미나는 전국대회로서 그 해의 사업방향도 얘기하고 학술적인 발표도 하지만 실은 일년동안 수고한데 대한 위로차원의 행사에 가깝다. 그래도 일년에 한번씩 이렇게 여행 갈 일이 있으니 다행이다. 그러나 12월은 날씨가 고르지 못하고 눈이 오는 때도 있어서 기차로 가야하나 걱정했는데 마침 겨울 날씨치고는 화창해서 다행이다. 신흥동 골목길에서 K를 태우고 외곽도로에 있는 군립운동장 주차장에서 인근 D군의 사람들과 만나서 다시 각자의 차로 대회장인 경주를 향해 떠난다.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대전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는 도로라 그런지 아침 햇살이 눈에 부시다. 이 도로는 옆에 금강을 끼고 있어서 항상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언젠가 안개도시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 댐이 생기고 나서 항상 안개가 끼어 있어서 안개 안 낀 화창한 날에는 적응을 못하고 사람이 점점 미쳐 간다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안개는 폐에도 안 좋고 우선 사람들이 새 아침이 되어도 기분이 산뜻해지지 않는 것 같다. 대전이 가까워오며 이제 출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부스스 깨어난다.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은 초겨울 아침, 꾸불꾸불한 시골도로 옆에서 시냇물은 차가운 안개 속에서 조용히 회갈색 빛으로 흐른다.
“내 고향이 포항 구룡포거든요? 지난번에 봤더니 경주 옆 감포에서 구룡포 36키로라고 써 있더라고요? 이번엔 거기를 꼭 가보고 싶은데 가도 되죠?”
“그러지, 뭐, 그냥 놀러 간다 생각하고 가자구, 세미나에 뭐 궁둥이 짓무를 일 있어?”
K가 시원스레 말한다. 그는 운전기사인데 초등학교 선배이고 요즘은 그런 사람들 한테 잘해야 내 일이 편하니 항상 우대를 해 준다. 이번 세미나에도 그가 갈 일이 없으나 여행겸 같이 동행하기로 한 것이다.
의자를 뒤로 밀어 편하게 하고 깊숙이 몸을 파 묻고 상념에 잠기는 지숙은 구룡포에 간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온다.
구룡포!
그곳은 사십여년 동안 지숙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마음의 고향 같은 곳이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듣던 그 바닷가는 어떤 곳일까? 언니 사진으로 보면 바닷가 바위 끝에 첨성대 같은 등대가 있던데, 몇 년 전에 그 등대를 박물관으로 만든다는 신문기사를 보았는데 등대 속에 들어 갈 수가 있고 거기에 옛날 물건들을 전시해 놓았을까? 대학생때 친구인 기자와 함께 홍도를 여행하고 들른 흑산도의 등대는 바닷가 끝에 방파제가 있고 그 끝에 등대가 있었다. 그때 막걸리 집에 들어가니 왁자한 한쪽에서 자기는 저 등대에서 일하는 사람이라고 인사하니 어부들이 수고하신다고 술을 따라주던 광경을 본 적이 있다. 그때의 팔딱팔딱 살아 숨쉬는 것 같은 바다와 어부들, 또 등대지기의 막걸리잔과 자욱한 막걸리집의 담배연기가 생각나는데 그런 바닷가 포구의 등대가 아닐까?
청진이 고향인 지숙의 아버지는 엄마와 같이 서울에서 살다가 육이오를 만나고 엄마는 친정인 충청도에 피난 와서 아버지를 기다렸지만 일년 후 들려온 소식에 의하면 포항에서 어떤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는 얘기였다. 아기인 언니를 업고 포항에 가서 누구와 살겠는가 따졌더니 당신하고 살겠다고 해서 그 여자는 떠나고 다시 살게 된 것이 구룡포라 한다. 아버지로서는 어차피 고향이 이북이니 어디나 타향이긴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전형적인 북방계 몽골족의 높은 광대뼈와 가느다란 눈을 가진 강인한 인상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한평생 부지런하게 일해서 가족을 부양한 사람, 그러나 고향을 떠나 타향을 전전하며 게다가 아들 없는 한탄으로 말년에는 술에 취해서 사신 분이다.
“경주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계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우선 점심 먹고 가야하니 근사한데로 차를 대봐요”
모처럼의 여행이니 맘 푹 놓고 돈 쓰기로 작정한 지숙이 먼저 호기롭게 소리친다.
박물관 뒤편의 개울을 따라 들어 가본다. 경주는 그동안 여러 번 와 봐서 지리를 익히 알고 있기 때문에 지숙이 안내 할 수 있었다. 요석궁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들어 가보니 으리으리한 기와집에 웬 대갓집 같았다.
“집이 아주 고풍이 물씬나는데 옛날부터 있던 집인가요?”
주문을 받으러온 종업원에게 물어본다.
“예 이 집은 최자, *자, *자 댁이십니다.”
뜻밖에도 남자 종업원은 문자를 써가며 대답한다.
“예? 아, 이 집이 15대째 부자로 내려온다는 경주 최부잣 댁인가요?”
“예, 그분은 지금 서울에 사시고 집안 친척이 가든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상호가 요석궁인가요?”
“예, 여기가 신라시대때 요석궁터입니다. 요 앞 개울에 다리가 있었고 원효대사가 물에 빠지신 것을 요석궁으로 모셔와서 요석공주께서 옷을 갈이 입히셨고 그러다 설총을 낳으신거죠.”
그런 소리를 들으니 600년대 신라시대로 돌아 간 것 같고 마당 건너 저쪽 방 어디에선가 오색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요석공주가 아기인 설총을 어르는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경주 거리를 걷다보면 어디선가 불쑥불쑥 김유신 장군의 말발굽소리, 애절한 천관녀의 울음소리, 아사달을 찾아 백제에서부터 온 아사녀를 만날 것 같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신라 여인이 되어 서라벌을 걷는 환상에 빠지곤 하는 재미가 있다.
좌중은 한참동안 요석궁에 대한 얘기에서부터 15대째 내려온다는 최부잣집에 대해 얘기를 나눈다. 집안의 가훈이 ‘가뭄이 들었을 때 땅을 사지 말라, 삼천석 이상은 하지 말라, 또 사방 삼십리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는 얘기하며 그래서 동학 혁명때도 이 집만 피해를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 귀족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얘기할 때 한국의 대표가문으로 꼽혀지는 것 같다.
마침내 한정식으로 깔끔히 차려진 상이 나오는데 종업원은 미리 주문을 받지 못해서 준비가 덜 되었다고 미안해 한다. 기분 좋게 매실주까지 한잔하며 식사를 마치고 먼저 가서 계산을 하니 동행한 타군 계장이 내일 점심은 꼭 자기가 사겠다고 다짐을 한다. 언제든 한턱을 낼꺼면 기분 좋게 먼저 내는 것이 모두를 위해 편하고 생색도 나기 마련이다.
“어이! 이 계장 잘 있었어? ”
“아! 반가워요, 축하하고요!”
저녁 만찬 때 그 많은 사람 중에서도 D시의 서과장이 용케 찾아서 아는 체를 한다. 그녀는 이번에 과장으로 승진한 사람으로 한때는 같은 회사에서 라이벌이었는데 젊었을 때부터 그런 방면에는 귀신이더니 먼저 승진한 사람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먼저 아는 체를 하는데야 축하 인사를 하지 않을수가 없었다. 이놈의 직장이라는 것이 승진한다고 해서 그다지 봉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고 책임만 많고 별것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한자리에 오래 있게 되면 우선 기분이 안 나서 일도 못하고 축 쳐지게 된다. 오죽하면 직장인이 가장 스트레스 받는 부분이 인사라고 했겠는가!
‘친구의 입신양명 소식을 듣고 바닷가에서 게와 함께 거닐었노라!’ 하던 어떤 시인의 말이 생각나서 지숙은 씁스름한 웃음을 짓고 서둘러 만찬장을 빠져 나와 객실로 들어와서 아까부터 같이 온 동료들이 보이지 않아서 궁금해 하며 핸펀을 누른다.
“어디에 있어요? 아까부터 안 보이네?”
“예, 계장님, K주사님이 딴 데가서 자자고 해서 감포에 와 있어요,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에 갈께요.”
“저녁은 먹었어요?”
“ 가다가 어디서 먹으면 돼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내일 아침 일찍 와요”
운전기사인 K는 딴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워 밖에 나가자고 하니 또 숙식비가 들어서 마땅치는 않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멀리서 볼 때는 인간사 단순한 것 같은데도 이렇게 들여다보면 복잡하기만 하다.
다음 날 아침 아직 세미나가 진행 중이지만 서둘러 호텔을 빠져 나왔다. 날씨도 좋고 관광지인 경주이다 보니 같이 온 일행끼리 일찍 나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대회장은 벌써 파장 분위기다. 도중에 기림사, 감은사지에 들러 감포에 갔다. 지숙은 몇년 전 유홍준의 책을 들고 며칠을 콘도에서 자며 따라 다닌 덕분으로 이제 웬만한 경주 유적지는 안내할 수 있게 되었다. 여행을 하며 가장 편한 것이 여자 친구들만의 여행인 것 같다. 가족들과 오면 매끼마다 여자들이 일을 해야 되고 사 먹는 것도 마땅치가 않은데 여자들만의 여행은 일도 분담이 되고 서로 알뜰하게 하여 여행비도 절약되니 부담이 되지 않아서 좋다. 네명의 여자 친구들이 경주를 여행한 때를 생각하며 ‘그때가 좋았는데.......’ 하고 따져보니 벌써 십년이 가까워 오는 것 같아서 기가 막힌다. 나이를 먹으니 바로 엊그제 같은 일도 실제 따져보면 십년 전, 이십년 전일이어서 놀랄 때가 많다.
감포 대왕암 앞의 바닷가에서 차를 내려 횟집으로 들어간다. 어제와 똑 같은 일행이다.
“우리 계장님 부자니까 비싼 걸로 시켜요”
타군 직원인 미자가 애교를 떠니 젊잖아 보이는 최 계장이 허허 웃으며 주문을 하는 사이 미자와 지숙은 바닷가를 거닌다. 대왕암엔 유난히 갈매기 떼가 많이 있어서 새들이 하얗게 바위를 덮고 있는 것 같다. 문무대왕이 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를 막겠노라고 동해에다 무덤을 만들라고 하셨다던가! 대왕암에서 뜬 해가 감은사탑을 지나 석굴암의 부처님 이마에 닿는다고 했으니 옛날 신라사람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바닷가를 거닐다 들어 와보니 싱싱한 회가 차려져 있어서 아침도 변변히 안 먹은 사람들이라 정신없이 포식을 한다. 차 운전할 사람 빼고 술을 먹지 못하는 사람 빼고 보니 지숙이 더 마시게 되었다. 안 그래도 달콤한 매실주는 싱싱한 회와 함께 기분도 알딸딸하게 잘도 넘어 간다. 어쩌면 그토록 가고 싶어 하던 구룡포에 갈 생각을 하니 가슴이 뛰어서 더 마시는지도 모르겠다.
식사를 마치고 미자와 최 계장을 먼저 보내고 지숙 일행이 탄 카니발은 구룡포를 향한다.
“나, 구룡포에서 깨워줘요 ”
소리친 지숙은 술김에 깊은 잠에 빠져든다. 그 바닷가는 어디일까? 단발머리 언니가 추석 빔으로 엄마가 해주신 자주색 비단 옷고름의 저고리를 입고 친구와 같이 어깨동무하고 사진 찍은 등대는 바닷가 끄트머리에 있을까? 생각하며 깊은 잠에 빠져든다.
“내리세요, 구룡포에 다 왔어요”
하는 S의 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뒷자리의 K도 코를 골고 있다.
놀라 깨어 난 지숙은 한동안은 낯선 풍경에 어리벙벙하여 정신을 가다듬는다. 그곳은 지숙이 상상하던 그 쓸쓸한 바닷가가 아니었다. 웅장한 콘크리트 건물이 박물관이었고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니 잘 가꾸어진 정원에 설명서와 함께 타 지역의 등대 모형이 서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나라 등대 초창기의 사진과 등대장의 사진, 불을 밝히는 기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들어가는 입구에 1958년도의 구룡포 등대의 대형사진이 있었다. 그랬다. 황량한 바닷가 한 쪽의 쓸쓸한 등대 사진이 지숙의 언니 사진에서 보았던 바로 그 등대였다. 언니가 보물처럼 간직하고 들여다 보곤 했던 그 사진은 아마 1953년도쯤의 사진이니 언니 것이 더 오래된 등대 사진인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는 인천 팔미도 등대로서 1903년에 세워졌고 이 구룡포 등대는 1908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2003년이 등대의 일백주년이 되는 셈으로 그 해를 기념하여 이 구룡포에 등대 박물관을 세운 것이라 한다.
감회가 새로워진 지숙이 젊은 안내원에게 다가갔다.
“1908년도에 세워진 등대가 지금도 있나요?”
“네, 바로 저 아래에 있는 등대가 그때의 등대입니다. 빛을 발하는 방식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그 당시의 등대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해도 관람객이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일반인의 출입은 통제하고 있습니다.”
“지금 전시되어 있는 사진은 1958년도의 사진이네요? 저에게 1953년도의 등대사진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드릴 수 있습니다. 저희 부모님이 53년도 쯤에 여기서 사셨답니다.”
“예, 감사합니다만 더 이전의 사진도 있을 겁니다”
젊은 안내원은 지숙의 감격과는 상관도 없이 별 이상한 여자 다 보겠다는 듯 서둘러 말을 끝낸다.
밖으로 나온 지숙은 아담하게 조성된 뜰에서 등대를 한참이나 쳐다본다. 지숙은 오랫동안 등대가 첨성대 모양으로 둥그스런 모양으로 생각했지만 실제의 등대는 나팔같이 날씬하고 길쭉했다. 그리고 이층 높이나 될까 너무 낮았다. 53년도의 바닷가에서 일곱 살짜리 계집애에게 세상에서 최고 높은 건물이었던 등대는 지금은 주위의 건물에 치어 나팔모양의 작은 망루에 불과했다.
박물관을 나와 보니 옆 광장엔 새 천년의 해를 제일 먼저 맞이하는 바다와 육지에 손모양의 조형물이 조성된 호미곶 광장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곳은 迎日만으로서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제 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지 4년 정유년(157)에 동해가에 연오랑과 세오녀가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가 두 사람을 일본으로 태우고 가서 왜 사람들이 자기들의 왕으로 받들자 신라에서는 해와 달을 잃었다.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이 오기를 청하자 이미 왕이 된 연오랑은 귀비인 세오녀가 짜놓은 비단을 보내 하늘에 제사 지내도록 했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으므로 그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 (貴妃庫)라 하고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 (迎日懸) 또는 도기야(禱祈野)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 연오랑과 세오녀는 해를 향하여 제사 지낼 때 쓰는 비단을 짜는 직업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해를 맞이하는 손 모양의 조형물 앞에는 새 천년의 해를 맞이한 것을 기념한다는 동판이 새겨져 있었다. 지숙이 주머니에서 핸펀을 꺼내 5번을 길게 누르니 동생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 구룡포에 와 있어, 귀남이네가 여기에서 머니?”
“아니 언제 거기에 갔어? 귀남이네는 아주 바닷가는 아니고 언덕위의 마을이야, 지금 여기는 눈발도 날리고 하니 빨리 돌아 와, 귀남이네는 나중에 나하고 같이 가”
이제 세상에 피붙이라고는 단 하나 남은 동생은 얼마나 살뜰한지 조금 늦기만 해도 걱정을 한다. 언젠가는 ‘언니가 죽고 나면 나 혼자 어떻게 살아’해서 지숙도 울은 적이 있다. 나이 먹고 늙으면 각기 가정이 생겨서 친정 형제 자매가 그리 대수랴 했건만 실제로는 나이 먹으면서 피붙이가 더 살뜰해 지는 것 같다. 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엄마를 모시고 동생이 구룡포에 간 적이 있다. 엄마가 구룡포에 그렇게 가고 싶어 하셨기 때문에 갑자기 밤에 모시고 간 것이다. 엄마는 귀남이네의 주소를 정확히 외우고 계셨다. 그때 귀남이 아버지가 군대에 가 있었는데 엄마가 글을 모르는 귀남이 엄마를 위해 편지를 대필해 주었기 때문에 주소를 알고 계신 것이었다.
포항을 지나 구룡포에 들어서서 엄마가 가리키는 대로 차를 몰고 갔더니 마침내 어떤 골목에서 내리셔서 그냥 내달아가시더니 불이 꺼진 작은 집 마당으로 들어 가시더란다.
‘귀남이 엄마, 귀남이 엄마, 나 정희 엄마여!’하고 신들린 사람처럼 부르시니 깜깜한 밤중에 난데 없는 소리에 놀라 방문이 열리며
‘이게 누구여! 정희 엄마라니! 살아 생전에 정희 엄마를 보게 되다니....“ 하시며 노인이 나오시고 두 분이 부둥켜안고 감격에 겨워 우시더란다.
같이 갔던 제부와 동생이 ’꼭 꿈꾸는 것 같더라‘고 했었다. 꽃 같은 새댁이었던 두 분이 할머니가 되어서 오십여년 만에 다시 만나신 것이었다.
구룡포 바닷가에서 가장 예쁜 계집애였던 언니는 학교를 못 갈 정도로 이태동안을 시름시름 앓고, 어느 날 등이 굽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펴지 못하고 꼽추가 되었다.
“그때는 왜 그리 아이들도 그악스러운지 거리만 나가도 아이들이 놀리고 쫓아 다녀서 나갈 수도 없었단다”. 하며 언니는 쓸쓸해 하곤 했다. 엄마의 친정인 충청도로 이사 오고 나서 한번 구룡포에 갔었는데 친구들이 찾아와 밖에서 부르건만 아이들에게 하두 놀림을 당한터라 친구들이 불러도 나가지 않아서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말았단다. 꼽추가 된 언니는 자기의 가장 예뻤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단 하나의 사진인 등대 앞에서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때로 다시 돌아 갈 수 있다면...........’ 하고 구룡포 시절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언니는 다시는 구룡포 등대를 보지 못하고 몇 년전 세상을 떠나셨다.
언니가 그렇게 그리워했던 구룡포 바닷가에 왔건만 어디에도 언니의 자취는 없이 넓은 호미곶 광장에 관광객들만 무심히 돌아다닌다. 그러나 바닷가 어디에선가 예쁘고 깜찍한 작은 계집애로 다시 돌아 간 언니가 팔짝팔짝 뛰놀다 지숙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아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얘야, 나를 찾아 와 줘서 고맙다. 나는 엄마, 아버지와 잘 있어, 우리 걱정은 말고 동생과 네 식구들 돌보며 잘 지내라, 우리는 여기서도 항상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단다. 걱정 말고 이제 가거라”
엄마도 같이 손을 흔든다.
“우리 걱정은 말고 빨리 가, 너희들을 위해 항상 기도한단다, 추풍령에 눈발이 날린다. 어여 가!”
이윽고 지숙의 눈에 맺힌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린다.
“엄마! 언니!”
지숙의 가슴에서 뜨거운 것이 오열이 되어 터져 나온다.
혹시 은비님 다시 가시면 그 다방 그대로 있는지 봐 주실래요? 콜타르 향이 속옷까지 짓무르던 목조건물 이층 심심찮게 파리 몇 마리와 파도 소리가 친구가 되어주던 선창가 다방, 포경이 금지되면서 발이 묶인 포경선의 서글픈 작살까지.... 산자락님 덕분에 십수년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첫댓글 이런 것도 소설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처음 써 봤습니다. 며칠동안 머리에 쥐가 났습니다.
산자락님 소설을 쓰셨군요 , 제가 지금 속리산을 다녀와서 바빠서 읽지 못하고 조용할때 읽겠습니다. 수고 많으셨네요
^^*........
ㅎㅎ..아시는게 많은 산자락님...새삼스럽게 지명도에 가까이 있는 제가 더 배운것 같습니다..다시 그곳을가게되면 더 자세하게 보며 느끼며 생각할것 같으네요..수고많으셨어요...
혹시 은비님 다시 가시면 그 다방 그대로 있는지 봐 주실래요? 콜타르 향이 속옷까지 짓무르던 목조건물 이층 심심찮게 파리 몇 마리와 파도 소리가 친구가 되어주던 선창가 다방, 포경이 금지되면서 발이 묶인 포경선의 서글픈 작살까지.... 산자락님 덕분에 십수년전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행복한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