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부터 마산역 등에서 북한 어린이 돕기 거리모금 "비난도 많이 받았고 3만원 주며 여관 가자는 취객도 만났지만 고마운 사람 훨씬 더 많았죠."
연평도 사태 이후 민족통일 염원하며 영하 18도 거리서 생명 평화 기도 요즘도 매주 월요일 새벽 임진각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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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애경 보살은 … 1959년 경남 함안 칠원 출생으로 마산여고를 졸업하고 1980년도부터 마산 국군병원 군무원으로 일했다. 96년부터 정토회 JTS 평화재단 좋은벗들 등에서 자원활동가로 활동하며 한마음선원 중부경남지원, 창원 성주사, 남해 보리암, 지리산 법계사 등 사찰은 물론 마산역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북한어린이 돕기 모금활동을 펼쳐왔다. 연평도 포격 사건 이후 임진각에서 매주 월요일 민족통일과 평화를 기원하는 참회정진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사진=박재완 기자 wanihollo@hyunbul.com |
“민족의 통일을 염원하며, 미움과 갈등, 원망을 해소하기 위해 7천만 민족을 대신해 참회합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염원하며, 소비와 소유를 위한 욕망과 어리석음을 해소하기 위해 뭇 생명을 대신해 참회합니다”
정토회 평화재단 자원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유애경 보살이 매주 월요일 새벽 임진각에서 1시간씩 절기도를 하며 읽는 ‘생명과 평화를 염원하는 참회정진’ 발원문이다. 그녀가 이렇게 매주 임진각으로 향하는 이유는 뭘까? 대한민국이라는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이 시대 그녀의 기도가 던져주는 의미는 뭘까?
평화통일을 위한 간절한 기도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가 연달아 일어나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결국 남북 관계가 안 좋으니 이렇게 젊은 장병들이 죽는구나. 오랫동안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불교사회운동을 해왔는데 또다시 남북관계가 나빠진 것을 보고 정말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래서 다친 병사들과 유가족들을 찾아가 무릎을 꿇고 빌었죠”
2011년 12월 그녀의 ‘평화통일 기원’ 기도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제가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어요. 그래서 법륜 스님께 기도를 하겠다고 말씀을 드렸죠. 처음에는 일주일만 할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광화문에서 기도를 시작했죠.”
영하 18도의 날씨에 그녀는 광화문으로 나섰다. 어떤 도반은 도시락을 싸다 주었고 어떤 이는 옷을 가져다주기도 했고 누군가는 운전을 못하는 그녀를 위해 차를 태워주기도 했다. 아침 7시부터 저녁 5시까지 그녀는 광화문 광장에서 평화를 위한 정진을 했다.
“계속 절하면 안 추워요.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잖아요. 부처님은 고행도 하셨는데 그 정도야 괜찮아요”
춥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환한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답한다. 그 미소는 세상의 아픔을 다 녹이고도 남을 것 같이 평화롭고도 넉넉했다.
그녀의 기도는 일주일을 넘어 연말까지 이어졌고 이후 2012년 청와대 앞에서도 3일간 만배 정진, 또다시 광화문 21일간 철야정진에 이어 임진각에서 6.25희생자들을 위한 천도재 및 300배 정진과 평화명상 등을 이어왔다. 그리고 2012년 7월 첫주부터 매주 월요일 임진각 새벽기도를 정기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그녀가 이렇게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바로 굶어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들 때문이다.
“저는 북한아이들의 부모 입장이 되어 참회를 해요. 만약 내 아이가 굶어죽는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어요? 그 아이들이 내 아이라고 생각하면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좀더 남북 관계가 좋아지고 더 나아가 평화통일이 된다면 최소한 아이들이 밥은 굶지 않을 거 아니예요”
너무 추울 때는 화장실에서 몸을 녹여야 했고 왜 북한을 돕냐는 비난도 받아야 했지만 그녀는 얻은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전한다.
“제가 기도를 시작하니 이제는 김제 대구 부산 등 전국 각지의 도반들이 같이 와 기도를 해주고 격려해줘요. 많은 도반들이 릴레이 기도로 동참을 해주기도 하고 제가 기도할 수 있도록 음식이며 옷도 챙겨주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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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애경 보살은 매주 월요일 새벽 임진각에서 생명평화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2012년 겨울, 기도를 마치고 도반들과의 기념 촬영(사진 왼쪽 세 번째가 유애경 보살) |
평범한 군무원이 거리로 나온 까닭은?
그녀는 96년전까지만 해도 마산국군병원 군무원으로 일하는 직장인이었고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로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 이런 그녀가 통일운동에 나서게 된 것은 정토회 지도법사 법륜스님과의 만남이었다. 당시 그녀는 불교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에 정토회 부산동래법당으로 불교대학을 다녔다.
“법륜 스님께서 법문을 오셨는데 북한 어린이들이 전부 굶어죽고 있다며 눈물을 흘리셨어요. 저도 너무 슬퍼서 같이 울었어요. 그때 마침 우수공무원에게 주는 특별 상려금이 46만원을 받았을 때라 보시금으로 3만원을 낼까 5만원을 낼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스님의 법문을 듣고 23만원을 보시했어요.”
다음날 출근을 해 직장 군법당(마산국군병원)에서 삼배를 하는데 너무 눈물이 났다. 그녀는 북한 어린이들을 더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내성적이었던 그녀가 탁발에 나서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군의관들을 찾아가고 선후배를 찾아가면서 돈을 모았어요. 처음하는 일이라 쑥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다만 할 뿐이다’라고 스스로 되뇌였죠.”
이후 마산국군병원 군법당을 다니며 알았던 스님들의 인연으로 인근의 절을 찾아 다녔다. 한마음선원 중부경남지원, 창원 성주사남해 보리암, 지리산 법계사, 남해 보리암 등을 돌며 모금을 시작한 것이다.
“당시 알던 스님들이 참 많이 도와주셨어요. 특히 한마음선원 중부경남지원 지원장 혜보 스님은 사찰 모금활동을 하게 해주시는 것은 물론 저한테 어느날은 100만원을 주시면서 오늘은 모금 나가지 말고 쉬라고 격려도 해주셨어요. 그 후에도 여러번 큰 돈을 보시해주셨죠”
그러던 어느날 성주사에서 만난 한 할아버지가 이렇게 좋은 일을 사찰 안에서 하지 말고 좀더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서 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는 조언을 듣게 된다. 그녀 역시 그것이 맞겠다 싶어 모금통을 들고 마산역으로 나가 북한 아이들을 도와달라고 외쳤다. 돈을 쥐어주면서 여관에 같이 가자는 취객부터 용돈을 털어주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그녀는 또다시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된다.
“처음 마산역으로 모금을 나갔는데 어떤 술취한 남자를 만났어요. 3만원을 줄테니 여관을 가자고 하는 거예요. 처음엔 당연히 기분이 나빴죠. 하지만 북한 여자들을 생각하며 한순간 돌이키게 됐어요. 그쪽 여자들이라면 어땠을까? 자식들이 굶어죽어가면 몸이라도 팔아서 애들 살리려고 하지 않았을까? 나야 그 돈 안 받고 여관 안 가면 되지만 그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모금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도와줄 것이다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분별심을 내려놓고 사람들에게 진정한 마음으로 호소했다. 그러니 100원 200원도 털어서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진정한 마음으로 다가가니 또 도와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모금함을 들고 다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면 숨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용기가 생겼고 북한의 상황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분단으로 인해 빚어지는 국가적인 손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특히 2001년 떠난 동북아역사기행에서 압록강변서 북한의 민둥산을 보고는 너무 가슴이 아팠던 그녀는 ‘먹고 살기 위해 저 꼭대기까지 나무를 뽑고 밭을 만들었을 땐느 오죽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비난도 칭찬도 그냥 있는 그대로 보았다
그녀는 2002년 직장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모금활동 등을 포함한 불교사회운동에 나선다. 하지만 이런 유 보살의 행동은 가족 친지 친구 그리고 거리의 시민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가장 반발이 심했던 건 남편이었다.
“남편은 나가지 말라고 철사줄로 제 손을 꽁꽁묶어 놓기도 했어요. 물론 제가 차근차근 풀고 밖으로 나갔죠(웃음). 자식들에게도 네 엄마랑 이혼할 거라는 얘기까지 했대요. 그런데 아들이 엄마가 나쁜일 하는 거 아니지 않냐며 남편을 설득했대요. 저는 아이들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맙고 감사했죠. 아들은 제가 높은 사람 되는 것보다 거리에서 모금할 때가 제일 빛난대요. 지금 남편은 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었죠. 제가 복이 너무 많아요.”
이뿐만이 아니다. 6.25참전용사였던 시아버지와 시작은아버지도 그녀의 후원자로 만들었다. 북한을 돕는 그녀의 행동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북한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이 모금이 왜 필요한지를 간절히 이야기하니 명절 때마다 5천원씩 그녀의 모금함에 돈을 넣어주고 있다.
이렇게 가족들에게 이해를 받았지만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그녀를 이해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북한을 돕는다고 하면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고 남북 관계가 나빠지기라도 하면 북한 어린이를 돕는 그녀를 욕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하지만 그녀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이 났을 때 당시의 어려움을 그녀는 이렇게 토로한다.
“그때 북한에 대한 인식이 너무 안 좋아졌어요. 그래서 한의원을 하는 남편 친구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했죠. 그분은 적십자 회원인지라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마음이 열려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부탁을 드렸는데 집에 가서 식구들 밥이나 해주라고 호통을 치더라고요. 적십자 회원까지 이렇게 나오니 상황이 너무 심각하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마산 오동도 문화의 거리에서 모금함을 놓고 밤 11시에서 새벽 4시까지 21일간 철야정진을 하며 모금을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욕도 하고 왜 북한을 도와주냐고 따지기도 하고 반발이 심했지만 그녀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고 두려워하지 않았고 정진을 이어나갔다. 그녀에게는 오직 북한의 굶는 아이들을 살려야겠다는 그 간절한 마음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보다는 배고픈 아이들을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밤이다 보니 술집 아가씨들도 퇴근하면서 돈을 넣어주었고 술 먹고 집에 들어가는 사람들도 모금통에 돈을 넣어 주었죠. 간절히 기도하다보니 21일만에 200만원을 모았어요. 그리고 가장 큰 기적은 21일 기도 마지막 날에 저를 말렸던 남편 친구인 한의사가 만원을 넣어주고 지나갔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역시 절실한 마음으로 기도하니 사람들이 마음을 내어 주더라고요. 너무 감사할 뿐이었죠”
그녀는 이렇게 거리모금을 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을 얻고 또 배웠다고 한다.
“저는 부족한 게 많아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아요. 그런데 제가 북한 어린이를 돕고자 모금을 하고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를 하고자 마음을 내면 주변에서 다 도와줘요. 세상에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어요. 많은 분들이 도와주어 가능한 일이죠”
지식으로 배운 불교의 연기법을 거리에서 몸으로 체득했다고 말하는 유애경 보살.
“불교의 오계에서는 불살생을 첫째로 꼽는 이유는 그만큼 생명이 중요하다는 말이잖아요. 생명의 소중함 앞에서는 이념도 지식도 남북도 없어요. 간절히 그 뜻을 알리면 남이 사는 일이 곧 내가 사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돼요. 저는 일체중생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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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금강산관광객 피격사망사건 이후 남북 관계가 악화되자 마산 오동도문화의 거리에서 21일간 철야정진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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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얘기할 때는 눈물을 글썽이는 그녀, 또 그녀를 도와주는 주변 사람들 얘기를 할 때는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를 지어주는 유 보살은 존재 자체만으로 가슴을 찡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이 세상에 나투시면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현재 북한을 위한 민간지원도 다 끊긴 상태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뿐. 하지만 그녀는 이제 남북 관계가 호전 되었을 때를 대비해 다시 전국을 다니며 거리 모금을 해나갈 생각이다. 우리가 양껏 차린 음식을 먹고 남길 때 또 남북이 서로를 탓하며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을 때도 북한의 아이들은 또 주민들은 한 끼를 제대로 먹지 못해 죽어가고 있다. 우리는 단순히 북한을 적으로 보며 혹은 귀찮은 존재로 보며 그들을 비난만 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동반자로 여기며 함께 미래를 도모할 방법을 구할 것인가? 유애경 보살의 기도는 우리의 작은 실천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정혜숙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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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복돼지 유애경보살은 통일의 역군이자 자비보살이십니다. 관세음보살님이 다른 분이 아니네요. ()()()
진한 감동이 옵니다. 나무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