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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을 다니다 보니 사람들이 어디가 좋은 곳인지 물어온다. 그럴 때마다 경치 좋은 곳이 도처에 있어도 타이밍이 우선이라는 말로 응수하곤 한다. 거기에 맛있는 음식이 있는 곳을 알려 달라면 어디서 누구와 먹느냐가 참 중요하다는 답을 덧붙인다. 이미 정해진 절대요소보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변수에 따라 만족도가 달랐던 경험의 결론이다. 매번 같은 곳을 가도 새로운 느낌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짜 여행이요, 사진 찍는 재미라 생각한다.
통영에서 낚싯배를 타고 괭이갈매기의 천국이라 불리는 홍도(鴻島·천연기념물 제335호)를 찾아간다. 산을 떠나 바다로 왔으나 산을 벗어났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섬도 역시 하나의 작은 산이나 다름없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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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구역상 한산면 매죽리에 속하는 홍도는 통영항에서 45km 떨어진 외딴 섬으로 뱃길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다. 붉을 홍을 쓰는 전라도 홍도(紅島)와 달리 통영 홍도의 홍(鴻)은 큰기러기란 의미다. 산란할 때면 무려 20만 마리의 괭이갈매기들이 모여드는 곳이니 그런 표현이 잘 어울릴 법도 하다.
그러나 이곳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천국과 지옥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외부의 침입을 받지 않는 환경이 천국인 반면 목숨을 건 개체 간의 치열한 경쟁이 바로 지옥인 셈이다. 주거공간의 최소 거리 40㎝가 유지될 때 평화는 보장되지만 자기 영역이 침해를 받으면 가차 없이 공격을 시도하며 알을 쪼아 먹는 일도 서슴없이 벌어진다. 너무 밀접하거나 가까워서 일어나는 부작용은 사람뿐 아니라 자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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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매기에 관한 한 이십대 시절에 그려진 이미지가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다.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이 바로 당시 장안의 화제였다. 1970년대를 보낸 많은 젊은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닐 다이아몬드의 감미로운 음악 속에 하늘을 나는 갈매기 조나단 리빙스턴의 우아한 날갯짓을.
여름 끝날 때쯤 개체수 많아 촬영 유리
조나단은 소설과 영화에서 단순한 새를 넘어 사유하고 소통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보통 갈매기들이 먹는 것에 치중하는 것과 달리 조나단은 나는 것을 더 사랑한다. 그러나 갈매기족의 전통과 존엄성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추방당해 홀로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더 나은 비행술을 시도하는 새로운 갈매기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로 하여금 지금의 노력 여하에 따라 다음 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눈앞에 펼쳐진 현실보다 도전적 삶을 갈구하던 갈매기 조나단의 메시지이다.
유행어처럼 번졌던 “가장 높이 나는 새가 가장 멀리 본다”는 말은 군사정권 시절의 제약으로 우울했던 젊은이들에게 자유와 비전을 상징했다. 감수성 예민한 그 시절에 조나단을 보지 않았다면 남해안의 외딴 섬 홍도에 갈매기를 찾아가는 발걸음이 보다 사무적이지 않을까 싶다. 홍도는 원래 남해안과 현해탄을 넘나드는 선박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였다. 그러나 1906년에 설치된 이후 50년이 지난 1956년부터 무인등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괭이갈매기의 서식지가 되었다. 병풍바위, 줄바위, 수중바위, 농이바위, 넓적바위 등 다양한 형태의 바위가 동서로 길게 펼쳐져 있으며, 서쪽 끝에는 남북으로 통하는 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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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는 갈매기섬 혹은 알섬이라 불린다. 발을 옮겨놓지 못할 정도로 알을 많이 낳아서 지어진 이름이다. 풀섶과 길, 돌 위 어디든지 2~3개씩 알을 낳고 20~24일 지나 부화되면 약 40일간 자란 다음 둥지를 떠나게 된다. 봄에서 여름이 끝날 때까지 개체수가 가장 많고 경계심이 적어 사진 찍기에 유리하다.
영역다툼으로 시작하는 것이 갈매기들의 일상이고 보면 우선 알에서 깨어난 자리를 지키는 것부터가 생존의 1차 관문이다. 그 후 수많은 위험을 이겨낸 다음 살아남은 새끼들만이 하늘을 나는 연습 끝에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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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철에 남해안의 괭이갈매기들이 산란을 위해 홍도로 몰려오면 갈매기들의 배설물로 섬 전체가 하얗게 물든다. 홍도엔 나무가 거의 없다. 워낙 바위와 돌이 많기도 하지만 갈매기의 독한 배설물로 나무가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괭이갈매기는 물고기의 움직임을 알리는 유익한 새로 알려져 있는데 알이 혈압에 좋다는 소문으로 사람들이 몰래 훔쳐 가기도 한다.
코끝을 자극하는 배설물의 냄새를 맡으며 섬에 상륙하니 계단 주변에 깨진 알과 말라 죽은 새끼들이 즐비하다. 마치 전쟁터에 온 듯 긴장감이 감돈다. 대부분 새끼를 낳아 키우고 있지만 막 집을 짓기 시작했거나 아직 짝짓기도 못한 무리가 뒤섞여 있다. 신경이 예민해진 갈매기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겨 무인등대가 있는 언덕으로 오른다.
일반인 출입통제, 사전허가 받아야
오랫동안 험난한 고비를 넘어 온 수많은 갈매기들이 그곳에서 바람을 타고 있다. 날갯짓이 서툰 새들을 보니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훈련을 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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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괭이갈매기들의 사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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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갈매기들이 기류를 타고 있을 때 비상하는 장면을 찍는 셔터 찬스가 주어진다. 날갯짓을 할 때마다 동작의 정점이 보이기 때문이다. 연발 기능을 사용하지 않고 한 컷 한 컷 셔터를 눌러본다. 갈매기들이 나는 일이 단지 살아가기 위한 방편일지 몰라도 그 몸짓엔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 느낌이 있다. 자연의 현장에서 보듯 세련된 아름다움이란 수없는 실패와 연습에 바탕을 두게 마련인가 보다.
홍도 촬영 가이드
통영항에서 45여㎞ 떨어진 망망대해에 자리 잡고 있는 홍도는 괭이갈매기 번식지로 섬 전체가 천연기념물 제335호로 보호받고 있다. 현재는 보존을 위해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어 있어 학술연구 등을 위한 사전허가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일단 상륙하면 첫 계단부터 갈매기 알이 도처에 널려 있으니 밟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등대가 있는 정상까지는 20분이면 오르지만 산란기에는 갈매기들이 놀라지 않게 천천히 걷는 게 좋다. 등대 주변에서 근접촬영이 가능하고 포란 중인 갈매기, 새끼에게 먹이를 주는 장면 등을 어렵지 않게 찍을 수 있다. 하늘을 나는 모습은 정상에서 바람 부는 곳을 찾아 기류를 탈 때 촬영할 수 있다. 갈매기 촬영에는 20㎜ 광각에서 200㎜ 렌즈가 적당하다. 근접이 어렵지 않기 때문에 초망원렌즈 대신 100㎜ 접사렌즈가 유효하게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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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부가 되기 위한 갈매기의 교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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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괭이갈매기가 상승기류를 타고 하늘을 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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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도 가는 길
서울에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대전에서 통영까지 가는 도로를 이용한다. 고속도로로 인해 통영까지의 흐름이 단순해졌다. 통영 IC를 나오면 이정표를 따라 여객선터미널까지 쉽게 갈 수 있다. 터미널에서 홍도까지는 낚싯배를 이용해야 한다. 홍도는 동쪽과 서쪽에 배가 접안하는 곳이 있지만 대체로 서쪽 방향에서 오르는 게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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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사진 손재식 사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