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상대에 올라가 주변 파노라마를 둘러보고 다시 내려왔다. 지금 이곳은 관광지로 개발하느라 곳곳이 공사 중이었다. 우리는 내려와 정신휘 씨가 살던 마을인 꽈거촌으로 갔다. 이곳에는 관징 스님과 관계되는 두 가지 중요한 유적이 있기 때문이다.
「극락세계 여행기」에 보면 관세음보살이 관징 스님은 전생에 대부분 화상으로 살았고, 다만 한 살이만 재가신도로 살았는데, 청나라 강희(1662~1722) 때였으며, 살았던 곳은 푸졘성 쌍용방 꽈거촌 이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간 것이다. 그 마을에는 바로 그 정웬스 사당이 있었다. 이 고경당은 2004년 중건하였는데, 이때 관징 스님도 의연금 4,300위엔을 냈다. 250년 전 자기 자손이 지었던 고경당을 250년 뒤 다시 태어나서 자신이 세우는 아주 특이한 인연담이 실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고경당이라는 사당을 둘러보고, 이어서 정신휘 거사 집으로 갔다. 문화대혁명 때 관징 스님이 숨었던 정수견 씨 집으로 어머니가 혼자 사시는 집에 내려온 것은 오후 4시다. 맨 먼저 홍위병들을 피해서 관징 스님이 숨어있었던 곳을 보여준다. 보통 벽장은 방안에서 들어가는데 이 집은 밖에 벽장 같은 방이 있다.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면 제법 높은 문이 두 개 있고 그 안에 방이 있는 것이다. 이 방에서 관징 스님은 2년을 지냈는데, 주로 참선을 하거나 경전을 읽었다고 한다. 우리가 이야기 하고 있는 사이에 노모가 와서 똑같은 증언을 해 주었다.
12월 4일, 하루 종일 정신휘 집에가서 인터뷰하고 자료를 촬영하였다. 중국에서 자료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제자였다. 관징 스님이 미륵대전에 자신과 관계되는 중요한 사진들을 모아 제법 큰 사진틀을 만들어 놓았는데 빗물이 스며들어 많이 망가진 것을 집에 가져다 놓았다. 비록 많이 변했지만 아주 중요한 사진이 몇 십장 한 군데 모아져 있는 것은 나에게는 아주 귀중한 자료였다. 한 장 한 장을 정성껏 찍었다. 이 사진틀 속에서 쉬윈 화상과 관징 스님 자신의 사진을 두 장 맨 가운데 위쪽에 배치했는데 쉬윈 화상 사진은 바로 유품에서 나온 것이고, 자신의 사진은 미국에서 바로 가서 찍은 사진으로 사진 아래 아주 중요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뉴욕과 샌프란시스코에서 1983년에 찍은 사진도 이곳에서 나왔다. 미국에서 1983년에 보낸 편지와 편지봉투도 간직하고 있었다. 이 사진과 편지는 쉔화 상인의 관징 스님 비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관징 스님이 지니고 다니던 작은 수첩들도 있었다. 각종 경전이나 진언이 쓰인 것도 있었지만 풍수지리도 적어둔 것도 있었는데 정신휘 거사는 바로 그 비전과 관징 스님이 직접 쓰다 물려준 나침판까지 잘 보관하며 활용하고 있었다. 1980년 산휘사에서 관징 스님에게 가서 받은 계첩도 참 중요한 자료였다.
호텔에 돌아와서 목욕을 하려는데 탁교수가 전화를 했다. 정선생 부부가 86세 먹은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관징 스님 군대 이야기를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저녁대접을 하기로 해서 2층에서 만났다. 예쌍머우 씨의 증언 때문에 관징 스님이 20대에 항일유격대 참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음날 새벽에 우리가 떠나기 전 관련 책자를 한 권 전해 주었다. 이 자료를 바탕으로 관징 스님 일대기에 이 사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증언자는 마지막에 이야기하였다.
” 미국에 다다라 대단한 환영을 받고 미국, 홍콩, 동남아 등지에서 두루 돌아다니며 법을 폈다. 그는 미국 불교협회의 종신 회장과 미국에서 가장 큰 절의 주지가 되어 아주 많은 보시금을 받았다. 그는 이 보시금을 푸졘성에서 수많은 절을 다시 세우고 고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다시 부활한 활불이라고 했다.“
글쓴이는 「극락세계 여행기」에 관징 스님이 중국에서 ‘활불’이라고 칭송받는다는 글을 읽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만난, 그것도 예정에도 없는 인터뷰를 한 사람의 입에서 ‘활불’이란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4) 관징 스님이 출가한 카이핑사
12월 5일, 다시 차를 한 대 내서 난핑시에 있는 카이핑사를 찾았다. 이곳이 바로 관징 스님이 출가를 한 절이기 때문이다. 이 절에는 마침 관징 스님을 두 번이나 만난 웨이롱 스님이 아주 유익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바로 자신의 스승인 총다오 스님이 관징 스님과 함께 출가하여 50년간 도반으로 지냈는데, 당시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전해 주었다.
특히 ”총다오 상인이 1982년 관징 스님이 미국 갈 때 복주 공항까지 가서 배웅했다. 관징 스님은 복주에서 비행기로 상하이에 가서 상하이에서 배를 탔다.“ ”이곳을 관징 스님과 방문했던 혜군 스님이 150달러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같은 아주 구체적인 증언을 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5) 관징 스님이 계와 정법안장을 받은 난화사와 쩐루선사
지금까지의 여행은 모두 푸졘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관징 스님이 계와 정법 안장을 받은 난화사와 쩐루선사는 모두 다른 성에 있는데 그 거리가 모두 먼 곳이다.
12월 7일, 난핑시에서 밤기차로 아침에 난창에 내리니 현지 에스페란토 회원이 나와서 차를 렌트하는 과정을 도와주었다. 교통문제나 일정의 편의상 관징 스님이 계를 받은 난화사보다 정법안장을 받은 쩐루선사를 먼저 가게 되어 있었다.
원쥐산 쩐루선사로 가는 도중에 바오펑사가 있어서 들렀다. 이 절에는 쉬윈 화상으로부터 계를 받은 이청 스님이 계신다고 하였으나 우리가 갔을 때는 계시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극락과 정토선」에서 문화대혁명 역사를 볼 때 홍위병들이 바로 이 절에 있는 마조도일의 유골을 끌고 다녔다는 기사를 보았기 때문에 확인하고 싶었다. 이 절에 설치된 불교대학에 마침 우리 동포 스님이 한 분 계셔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점심공양을 대접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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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는 「극락세계 여행기」에 관징 스님이 중국에서 ‘활불’이라고 칭송받는다는 글을 읽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생전 처음 만난, 그것도 예정에도 없는 인터뷰를 한 사람의 입에서 ‘활불’이란 단어가 나온 것을 보고 적이 놀랐다.
12월 5일, 다시 차를 한 대 내서 난핑시에 있는 카이핑사를 찾았다. 이곳이 바로 관징 스님이 출가를 한 절이기 때문이다. 이 절에는 마침 관징 스님을 두 번이나 만난 웨이롱 스님이 아주 유익한 정보를 많이 제공해 주었다. 바로 자신의 스승인 총다오 스님이 관징 스님과 함께 출가하여 50년간 도반으로 지냈는데, 당시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전해 주었다.
특히 ”총다오 상인이 1982년 관징 스님이 미국 갈 때 복주 공항까지 가서 배웅했다. 관징 스님은 복주에서 비행기로 상하이에 가서 상하이에서 배를 탔다.“ ”이곳을 관징 스님과 방문했던 혜군 스님이 150달러를 우편으로 보내왔다.“ 같은 아주 구체적인 증언을 해주어 큰 도움이 되었다.
(5) 관징 스님이 계와 정법안장을 받은 난화사와 쩐루선사
지금까지의 여행은 모두 푸졘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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