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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굴
진달래가 피기 시작하는 길섶에는 파릇파릇 산나물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지난가을 갈잎 풀들이 추운 겨울을 지나서 희뜩희뜩 한풀 꺾여 늘어진 산길이다. 몇 차례 봄비가 내렸는가 산골 물이 졸졸 소리를 낸다. 휘덮은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중턱 절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헐레벌떡 곧게 오르다 휘어진 길을 따라 절 밑에 이르렀다.
돌담이 높게 쌓여 있다. 경사진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지으려니 흙을 밀어내고 평평하게 해야 절터가 되었는가 보다. 가지런하게 담을 쳐올렸는데 가운데 꽤 굵은 바위가 들어있다. 저걸 어찌 옮겼을까. 천축사로 오르는 길이 적적하다. 많이 다닌 산길은 밟혀 납작하게 매끄러운데 오래도록 뜸하게 비워졌던가 낙엽이 뒹구는 길이다.
절간도 사람이 보이질 않고 풍경소리만 딸그랑거린다. 언덕 위의 작은 법당이 덩그렇다. 그 아래 거처지는 착 가라앉아 고요하다. 웅장한 뒷산의 큰 바위들이 울퉁불퉁 불거져 노송나무에 가려있다. 바위산 절벽 경치가 그저 그만이다. 멀리 서쪽이 훤히 내려다보인다. 올망졸망 산들 머리만 가지런하다. 점점이 멀어지며 아득하다. 서방정토 천축국이 보이려는 천축사이다.
물을 받아 내리는가. 낙수 소리가 차랑차랑하다. 곧은 나무에 골을 파서 골짝 물을 내리받는다. 자작자작 걸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우측 밭에 꿈적이는 사람 모습이 띄어 가까이 갔다. 회색 승복을 입은 스님이 어린 인삼을 한 움큼 쥐고 나란히 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뽑아 이랑에 띄엄띄엄 놔 줬다. 수월한가 퍼뜩퍼뜩 심어나간다. 이런저런 얘길 하다가 때가 되어 점심을 들었다. 어디 있었는지 공양주 보살이 부엌 작은 종을 쳐서 알렸다. 열너댓 청년 아니 아이인 나 강수남을 반긴다. 스스럼없이 머슴처럼 일해 주니 아랫마을 사람인가 나무하러 올랐다가 들렀을 거라 여겼을 것이다.
따르라며 법당 우측 돌담 아래로 내려 왼쪽 숲속으로 들어간다. 큰 바윗길을 넘어 개울가에 이르렀다. 몇 해 동안 비어있던 초가집이 오도카니 앉았다. 방 두 칸 부엌이 딸렸다. 갓방을 가리키며 거처하란다. 바쁠 땐 일도 거들 테니 빈방이 있으면 책을 보면서 있게 해 달라 부탁했다. 고맙긴 한데 요사채 구석방을 내줄 줄 알았는데 외딴 초가이다.
“어디 이리 으슥한 데 낡은 집이 있었나.”
우선 일하다 얻은 남은 한 줌 인삼을 개울가 여기저기에 심었다. 나중에 굵은 삼이 되라고. 그런데 겨울잠에서 깬 뱀이 곳곳에 꿈틀거려 기겁했다. 물컹하여 보니 뱀을 밟았다. 머리가 세모진 살모사 독뱀이다. 정나미가 떨어져 살겠나 생각이 든다. 며칠 뒤 다시 찾아 문풍지를 바르고 자리를 털고 깔아 사과 상자를 옆으로 눕혀 책상을 만들었다.
점심 먹을 때 한복에 조끼를 입고 머리를 기른 처사 한 분이 더 있었다. 같이 인삼 심던 태주 스님과 겸상하면서 여기에 있게 하라 이른 것 같았다. 그때 토굴이란 말을 했다. 오래 안 써서 지붕은 내려앉고 방은 거미줄로 구석구석 어룽거렸다. 관창이 서쪽 벽 가운데 작게 나 있다. 밀치면 반쯤 열려 빛과 바람이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깊은 산속 적막한 곳에 외딴 토굴이라.”
창마 우곡 어른에게 한문을 배웠다. 동몽선습을 읽으며 시작하다가 소학과 대학, 논어를 익혔다. 불기 마을 봉진이와 주섭이 함께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너다리를 건너지나 다녔다. 마치고 내려오면 초등학교 옆 교회에서 고등공민학교 과정을 가르쳤다. 중학 학습으로 한 분 선생님이 국어, 영어, 수학, 과학 등을 지도했다.
물야 시골에는 초등학교를 마치면 꼴 베고 나무하며 논밭 일 거들기에 바쁘다. 내성 읍내 중고등학교 다니는 일은 꿈같은 얘기다. 한번은 안동 사범 중학교에 합격하여 간다는 학생을 조례 때 소개했다. 단 위에 세워 모두 보게 했는데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어쩌면 거길 다 가나. 멋진 선생님이 되는 길이 눈에 보였다.
삼십 리 봉화 중학교에 가는 것도 술도가와 면장네 과수원집에서나 다녔다. 농사짓는 우리는 감히 엄두도 못 낸다. 버스는 무슨, 어쩌다 이곳 면 소재지 바닥에 산판 차가 들어오면 뒤따라 달린다. 그 뿜는 휘발유 냄새가 좋아서이다. 다행히 학당에 가서 꿇어앉아 백발 노 스승에게 또박또박 한문을 익혔다.
우리는 바로 보고 훈장은 거꾸로 대하면서 가는 대나무로 줄 따라 꼭꼭 짚으며 곡을 넣어 읽게 하고 침을 꿀꺽꿀꺽 삼키며 해석해 줬다. 윗목 벽을 의지해 셋이 좌우로나 앞뒤로 반동을 넣어 낭랑하게 읽었다. 각자 다르게 이어지는 낭송이다. 소학 읽는 친구는 계몽편을 배우는 사람에게 가르쳐 줬다. 훈장 수고를 덜어주는 잠깐 접장 노릇이다.
공맹과 요순시대를 보는 듯했다.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선생님이라 여겼다. 들어가며 큰절하고 마치고 나오면서 또 굽혔다. 학교에 가지 못한 마음을 풀었다. 가부좌를 개고 오래 앉아 꼿꼿한 모습이 남다르다. 장죽에 담배를 비벼 넣고 읽는 것을 들으며 뻐끔뻐끔 피웠다. 그 담배와 쉬쉬한 노인 냄새를 익숙하게 맡으며 여러 계절 보냈다.
“탁!”
“이놈아 틀렸어.”
잘못 읽어 그만 손때 묻어 반질반질한 편달이 머리를 내리친다. 잠깐 찡하다. 좌우로 반동하면서 읽어나가는데 어찌 틀린 걸 기막히게 안다. 마치 제비가 입 벌린 새끼들에게 차례로 먹이를 먹이듯 찾아낸다. 한지에 한 줄 쓰고 따라 적게 하는데 아무래도 비뚤배뚤하다. 우리는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배움에 굶주려서 집으로 가다가 또 교회에도 들렀다.
나이 드시고 생활이 여의치 못하자 다 오래 가지 못했다. 어쩌나 하다 생기 돋아나는 봄날 남서쪽 문수산 중턱을 바라보면서 절에 가 볼까 맘먹었다. 비 오거나 흐린 날은 유난히 기적소리가 잘 들린다. 문수산 쪽에서 울려온다. 영주에서 강릉을 오가며 장성과 철암, 도계의 석탄을 실어 나르는 기찻길이다. 달그락달그락 레일 위를 굴러가는 소리도 들린다.
먼 곳인데도 바로 앞을 지나가는 듯하다. 그 산을 넘으면 봉화이고 저 아래로 가면 안동이다. 앞이 툭 튀어나온 버스는 타 본 적이 있어도 기차는 소리만 들었지 어찌 생겼는지 모르는 맹꽁이다. 중고등학교 과정의 통신강의록 책을 구해 싸 짊어지고 토굴로 가게 됐다. 저녁을 해 먹고 호롱불을 켜서 늦도록 보다가 누워 자면 부엉이 울음에 밤공기가 으스스하다.
어른 목소리는 굵고 낮다. 가녀려도 높아 절 쪽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가 성일이다. 왔다 하면 이곳으로 달음질쳐 오는데 요즘 잦다. 방학인가 보다. 대여섯 아래여서 형아 형아 하며 달려든다. 구차해도 적적한 곳을 찾아오는 게 어딘가. 숲속은 뱀이 우글거리고 바위가 구를 수 있으며 가시와 죽은 나무들이 넘어질 듯해 위험하다.
법당 주위를 서성이며 다니다가 성일이 아버지 태주 스님의 밭일을 도왔다. 무와 배추를 뽑아내면 마당과 부엌으로 날랐다. 오후 내내 놀다가 해거름 아랫마을 결단으로 내려간다. 장난기가 많고 얼마나 상냥한지 안 보면 ‘왔나’ 하고 살핀다. 성일이 오면 보살이 더 맛있는 반찬을 낸다. 같이 점심 먹는 게 즐겁다. 몇 달을 지나니 외딴 산속 토굴이어서 사람이 그립다.
“여기 웬 집이 있네.”
하고 나물 뜯어 내려가는 여자들이다. 가끔 약초 캐는 사람이 어슬렁어슬렁 지나가면서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는다. 섬돌과 문지방에 걸터앉아
“어느 골짝으로 들어가야 하나.”
하면서 높은 곳을 응시한다. 뱀 나오고 돌 굴러내리는데 약초는 무슨, 그만 ‘내려가세요’란 말이 나오려 한다. 어떤 사람은 산을 헤매다 늦어져 허기진 듯 쩔쩔맨다. 먹다 남은 찬밥을 주니 걸신들린 사람같이 먹어 치운다. 어떨 땐 한 달이 지나도 사람 그림자 하나 얼씬하지 않는다. 저쪽 길로 오르고 이쪽 개울 있는 구석진 곳으론 잘 안 다니는가.
마침 성일이가 가끔 올라오니 견딜만하다. 신라 때 지은 절이란다. 예전엔 신도들 발길이 잦고 스님이 많았다. 쌀뜨물이 아랫마을 월계에서 결단으로 저 아래 문양까지 흘러내렸다 한다. 그리로는 내려가지 않고 중간에서 산 고개를 여러 개 넘어 도사리와 솔안으로 해서 불기 집을 다녔다. 그땐 어찌 다녔는지 모른다. 지금 가라면 가겠나.
“형아”
아침 일찍 성일이 소리가 들린다. 숙제한답시고 책가방을 들고 왔다. 같이 한참 긁적거리다가 이제 쉬자며 나가잔다. 어머니가 같이 공부하라고 보낸 것 같다. 바람 씌어 바야 절간 주위를 다니는 것 밖에 갈 곳이 없다. 옆 개울에 세수하고 물 뜨다 보면 버들치와 가재가 다닌다. 이 깊은 산골짝에 어찌 올라왔을까. 아랜 작은 절벽도 있는데 신기도 해라.
가재와 피라미를 잡아 병에 넣어 들고 다니다 아버지 태주 스님에게 들켜 그렇게 하면 생물을 죽인다고 야단맞았다.
“당장 물에 넣어줘라 그런 거 잡으면 안 돼.”
몇 살 더 먹은 내가 민망하다. 하도 뭐 할 짓이 없어 그냥 심심풀이로 한 재미였는데 무안하게 그런다. 성질 급한 건 벌써 배를 뒤집고 헐떡거린다. 얼른 물에 쓸어 넣어 줬다. 저녁 먹고 법당 앞에 물 뜨러 가면 공양주 보살이 경을 읽어 달란다. 한글을 몰라 가르쳐 주고 경 외우는 것을 도와준다.
천수심경으로
“정구업진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나무사만다 못다남 옴도로도로 지미사바하---.”
만날 때마다 읽어주어서 배우는 보살은 더디고 나는 그사이 달달 외운다 외워.
그러다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다. 백호로 설설 밀어 내린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데 잘한다. 마지막 뒷부분은 서로 도와주는데 나보고도 시켰다. 면도를 처음 만져 보아 불안하다. 석 베기라도 하면 어쩌나. 이만저만 조심이 아니다. 발발 떨면서도 잘 해냈다. 한번 하고 나니 목덜미는 자신 있다. 성일의 머리도 깎았다.
물을 적셔 비누로 거품을 낸 뒤에 썩썩 밀어내면 둘둘 거품에 뭉쳐진 머리카락이 뚝뚝 바닥에 떨어진다. 머리를 들이밀고 다 깎을 때까지 잘 참고 견딘다. 헹구고 나면 개운한가 팔짝팔짝 뛴다. 나도 깎자 하는데 싫다. 박박 민둥한 머리가 왠지 거북하다. 불안해서 맡길 수 있나. 그런데 성일은 몇 번 피가 났는데도 참았다. 엉성한 나를 믿고 그대로 숙여댔다.
태주 스님이 염불을 마치고 내려와서
“아! 이런 어머니도 있나.”
내성 읍내에 사는데 자고 나니 아들 내외가 홀어머니를 버리고 줄행랑을 놨다. 기척이 없어 문 쪽을 보니 휑하니 열려있고 세간살이를 몽땅 싸 챙겨서 나갔다. 어미 자는 사이에 살그머니 야반도주했다. 어디 방직공장으로 가자 영등포로 가자 해도 말을 듣지 않자 나간 것이다. 남편과 살던 정든 집이고 뒷산 대대 조상산소 선산을 버리고 어딜 가나.
자주 티격태격 다퉜는데 그만 몰래 떠나버렸다. 아들도 덩달아 구미 공업단지 단지 하더니 남쪽으로 따라간 것 같다. 쌀을 한 말 이고 몇 푼 돈을 품에 넣어 삼십 리 북쪽을 걸어 걸어왔다. 부모 버린 자식 벼락 맞지 않고 잘 살게 해 달라 부처님께 빌러 왔다. 해가 뉘엿한데 자고 내일 내려가래도 곧장 떠난다.
다시 법당에 올라간 태주 스님은 저녁 공양 시간을 넘기면서까지 아들 내외 잘되라고 빌고 빌었다. 그 구성진 염불 소리가 애잔하게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하다. 목탁 소리가 산사를 쩌렁쩌렁 울린다. 낭랑한 목소리가 높았다 낮아지며 쟁쟁하게 아랫마을로 퍼져 내린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한번은 뒷산을 가자 졸라댔다. 문수산 정상을 오르는 길이 요사 우편으로 나 있다. 그리 가지 않고 성일이와 길 없는 고추 선 절 뒤편 능선으로 기어올랐다. 쳐다보면 풍치가 너무 좋다. 바위 사이 사이에 커다란 소나무가 붉은 배를 드러내고 서 있는 게 그림이다. 바위틈에 어찌 저리 큰 소나무가 서 있을까. 한번 보자 하고 올랐다.
정자나 암자를 지을 만한 펑퍼짐한 너럭바위와 탑처럼 우뚝한 잘생긴 돌이 소나무처럼 서 있다. 아래 자그만 법당과 편안히 앉은 요사채가 한눈에 들어온다. 저 멀리 숱한 마을은 보이지 않고 산 꼭지만 나란하게 아득히 펼쳐졌다. 봉황산 부석사도 산 중턱이지만 앞산이 가려 멀리 볼 수 없다. 여긴 맑은 날은 서역까지 내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아 천축사 멋져라.”
저 아래 법당 마당에서 큰 소리가 들려온다. 내려다보니 태주 스님이
“돌 굴리지 마라.”
발에 걸려 돌이 굴러떨어졌다. 구르면서 큰 돌을 건드려 여러 개가 요란하게 굉음을 내며 골짝으로 굴러 박힌다. 자칫 법당으로 구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는 토굴에서 책을 싸 들고 쫓겨나야 한다. 다음 날 아침 물 뜨러 갔을 때 태주 스님은 인사를 받고 아무 말이 없다. 가정을 이룬 대처승이어도 대단한 불심이어서 너그러움이 부처님 같다.
저녁 공양 예불을 마치면 아랫마을 처자가 기다리는 결단 마을로 내려갔다가 새벽에 올라와 예불을 드린다. 온갖 일을 해야 한다. 청결한 사찰을 만들고 끙끙 땔나무를 저 나른다. 산기슭 밭을 일궈 공양 올리는 주식 외에 부식을 심어 가꿔야 한다. 중요한 밑반찬 소금과 놋그릇, 질그릇, 옹가지, 사기, 양초, 향 가루 등 무거운 것들을 이 언덕바지로 짊어지고 오른다. 그런 머슴이 없다.
신도들이 찾아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남자이면서 중성인 청아한 목소리가 듣기 좋아 자주 온다는 불자들이다. 앞머리가 솟아올라 부처님을 닮았다. 세상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태주 스님은 한낱 미물인 처자까지 알뜰살뜰 보살핀다. 월급 대신 공양미를 안아다가 가족을 먹여 살린다. 등록된 참배자 명부에 남자는 드물고 다수가 여자들이다. 이 높은 곳을 이를 악다물고 오른다.
“어휴 높기도 숭칙해라.”
초하루나 보름에 신도들이 간간이 찾아온다. 구정이나 정월보름, 삼짇날, 한식, 단오, 유두, 칠석, 가베, 시제, 동지 등 세시에는 적막하던 절간이 북적인다. 초파일은 예불드리러 온 신도들로 종일 북새통을 이룬다. 공양간 일을 돕는다고 팔을 걷어붙인 보살도 보인다. 이때 성일이 엄마도 올라와 하루 내내 돕는다. 토굴에 있는 품앗이로 태주 스님 주위를 돌며 눈치껏 심부름을 해줘야 했다.
하룻밤 자고 가는 신도들도 있다. 긴 고래에 장작불을 밤새도록 지펴 뜨끈뜨끈한 큰 방에서 지지고 잔다. 찜질방이다. 아랫목은 너무 뜨거워 장판이 거무스레 하다. 자꾸 윗목으로 등치고 몰려 엉덩이를 밀어 넣는다. 각처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집안일에다가 마을 사정을 샅샅이 일러바쳐 얘기한다. 늦은 밤이 떠들썩하게 깊어만 간다.
“어이 사골댁아 빈소 같이 갈래.”
누가 눈에 불을 켠 짐승을 봤다는 말에 바깥 정낭을 가기 꺼린다. 참다가 겨우 한 말이다.
“안 그래도 뒷간에 가나 기다렸대이.”
“잘 됐다 나도.”
불기에서 거렁골로 옮기고 나자 가족 일로 더 있을 수 없게 됐다. 내려가면 바로 월계이고 오른쪽으로 틀어 고개를 넘으면 동생 마을이다. 함께 짐을 싸 들고 내려가면서 높은 나뭇가지에 걸린 머루 다래를 따 담았다. 벌레 먹어 꺼칠하고 덜 익어 비릿해도 익은 것을 골라서 입에 넣으니 달짝지근하다.
“잘 있어.”
하고 벽을 토닥토닥 두드려주며 토굴을 둘러보고 내려오니 몇 번이고 뒤돌아 보였다.
“몇 해 뒤엔 심어둔 인삼을 캐러 가야지.”
고개를 넘어서니 바로 계동이다. 겨울을 보내고 이듬해 봄 애전 쑥밭 뒷산 기슭으로 갔다. 남서향 박달재이다. 대구에서 온 생식하는 60대 독실한 기독교 신자와 같이 머물렀다. 손수 지은 초가삼간이다. 대패질한 어린 솔잎 조각과 생콩가루, 두꺼운 느릅나무 뿌리껍질을 벗겨 짓이겨 섞어서 맛있게 들었다. 마치 먹음직한 고기를 떼는 듯했다.
그는 성경책을 나는 역시 꺼칠한 과일 상자에다 책을 펼쳐놓고 늦게까지 읽었다. 예전엔 이곳 산마루를 올라 금정광산으로 다닌 보부상이 길을 이었다. 꼬불꼬불 바닥 돌이 닳아서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그냥 오르내려도 힘든 고갠데 무거운 등짐을 잔뜩 지고 다녔을까. 조상이 살아왔던 길이 참 고달프고 험했구나. 생각하면서 가끔 잿마루 그 서낭당에 운동 삼아 올랐다.
장사꾼들이 잘되게 해 달라고 고갯마루에 쉬어가면서 당에 들어가 옹기와 사기, 질그릇, 놋그릇, 양은, 옷가지, 명태, 조기, 미역, 양미리, 멸치, 쌀 곡식, 산나물, 약초 등을 바쳐 주렁주렁 너저분하다. 사방을 둘러보니 빽빽한 숲으로 뒤덮였다. 참나무와 싸리나무, 억새, 띠 등 온갖 초목으로 뒤엉켜 자욱하다.
어쩜 이리 하늘 가득히 흐르는 구름떼처럼 드넓은 바다의 파도처럼 일렁이는가. 무섭게 나뭇가지가 빼곡히 치솟아 기를 죽인다. 정답게 사람 사는 마을이나 논밭은 하나 보이지 않는다. 죽자 살자 등짐장수의 거친 숨소리가 난다. 다 보이고 들려온다.
윗마을 친구 종호도 찾아와 같이 지냈다. 추운 겨울이 오자 뿔뿔이 다 흩어졌다. 여름날 비가 많이 와서 부엌에도 물이 들어찼다. 밥을 지을 수 없어 머뭇거리다가 하는 수 없이 정평화 노인이 날것으로 먹으니 오늘 우리도 생쌀을 먹자며 한 주먹씩 입에 넣고 우물우물 질겅질겅 씹던 게 생각난다. 살자면 넘겨야 한다.
“익혀 먹으나 그냥 먹으나 마찬가지지 뭐.”
하루는 낯선 남자 두 분이 찾아왔다. 박달령을 넘다가 보여 쉬어가려 들렀다. 어찌 이리 좋은 양달 진 곳에 사냐며 들먹거렸다. 양과자와 사탕을 주고 시원한 콜라도 목마르다며 나눠준다. 싱글벙글 사진도 찍어주며 환심을 까짓것 샀다. 그러다가 정 노인에게
“장성 호텔에 모시겠습니다.”
“함께 가시겠습니까.”
경찰서에서 나왔다며 늦게서야 신분을 밝혔다. 우리 둘은 어디서 살며 어느 학교 졸업한 것과 대학 입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었다. 순순히 생식을 싸 짊어지고 부축받으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산속에 있으니 수상히 여겼나 보다. 경북인데 어찌 강원도에서 나왔을까. 사진까지 찍혔으니 속아도 감쪽같이 넘어가고 말았다.
하나도 바쁜 게 없이 느긋하며 ‘예’, ‘그렇지요’, ‘그리하세요’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광야에서 기도하며 날 것을 들었다는 예수님 삶을 살아가는 정 노인은 살던 대구로 내려가고 친구는 서울의 대학으로 합격해 올라갔다. 우물을 파서 덮개를 하고 홈을 낸 나무를 길게 부엌으로 이어서 멋지게 만들었는데 잠시 정든 집을 버려두고 나도 떠나야 한다.
“성큼성큼 멧돼지 다니고 늑대 나오는 언덕에 무슨 수로 혼자 사나.”
옆 골짝에 작은 마을이 있어서 외딴집 갓방 사랑채를 빌려 들어갔다. 상자 안에 책을 넣고 필요한 것들을 꺼내 본다. 주인이 아직 추우니 쬐라며 화롯불을 들여주었다. 머리에 퉁퉁하는 소리가 들리며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불 머리가 일었다. 얼마나 머릿속이 복닥거리는지 앉아있을 수 없어 드러눕고 말았다.
올리고 토하고 쓰러져 하루 내내 비실거렸다. 마냥 이럴 수 없어 맑은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한배령과 주실령 바람을 한참 쐬다가 정신을 차렸다. 아직도 머릿속이 찡찡거린다. 괘종시계 추가 일렁이며 이리저리 치는 것 같다. 대학 가는 일은 가망이 없는 아니 턱없는 집안 형편이다. 농사일 도와야지 어디 산골이 다 뭔가.
“언감생심 어찌 하늘을 쳐다보나.”
정선 땅 하청 업체에서 일하게 됐다. 굴을 비워둘 수 없어 3교대로 이어서 일하는 곳이다. 탄광 맥을 따라 작업하기 편하게 파서 들어간다. 착암기에 물을 넣고 파야 하는데 그냥 파니 돌가루가 자욱하다. 굴진 길이에 따라 도급액을 받으니 막 서둘러 일하게 된다. 수십 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이면 얼른 뛰어 다른 굴로 가 기다린다.
“쿠쿵 쿵 쿵.”
몸이 흔들리며 굉음을 낸다. 바람을 세게 틀어 화약 연기를 밖으로 내뿜어야 한다. 들어가 광차에 무너진 돌을 실어 담아 밀어내 편 입구에 줄을 세운다. 저 높은 곳 비탈을 내려와 굵은 삭도 줄을 연결한 뒤 여러 개를 이어 끌고 올라간다. 다시 긴 굴 밖으로 나가 버럭 더미에 버린다. 발파할 때 바닥에 철판을 깔아놓아 삽으로 퍼 담기 좋다.
굴을 파면 이내 좌우 벽에 동발을 세우고 그 위에 둥근 나무를 떠받쳐서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히 감싸야 한다. 금 간 돌이 떨어지지 않게 판자를 대고, 물도 좌우로 굴러가게 해야 한다. 바닥에는 레일을 깔아 작업이 잘되도록 돕는다. 도랑을 파서 물이 한 곳으로 흐르도록 하고 광차가 다닐 때 사람이 피할 수 있도록 보도도 만들어 놓는다.
쿡 찌르면 한 삽 떠진다. 작업이 한결 빠르다. 밀고 나가다 매듭이나 굽어진 좁은 곳에서 탈선되면 큰일이다. 가득 실은 무거운 것을 모두 비운 뒤 바로 하기까지 작업이 중단된다. 모두 매달려 허우적거려야 한다. 등에 땀이 김으로 무럭무럭 난다. 어느새 때가 되어 도시락 먹고 일하다 보면 벌써 교대가 들어온다. 그래도 책 보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엇진 함경도 억양의 엄 항장이 레일 일을 할 수 있겠냐고 했다. 고된 작업에서 벗어나 좀 쉬운 선로기술을 익히게 됐다. 침목을 고르게 깔고 영차영차 레일을 메고 와 까는 작업이다. ㄱ자 못을 좌우로 꽝꽝 박아 무거운 광차가 벗어나지 않게 튼튼하게 해야 한다. 정확한 넓이를 재서 굴진한 곳마다 놔줘야 했다.
일그러졌다면 연락받고 바로 뛰어가야 한다. 그게 불편하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급히 들어가야 하니 날벼락이다. 깊은 땅속은 모두 야문 바위로 되어있다. 천장 곳곳에서 물이 줄줄 샌다. 바닥을 흘러 한곳으로 모이면 펌프로 퍼 올려 밖으로 내보낸다. 나무가 무르고 썩어져서 일이 생긴다. 시꺼먼 탄 물로 잠긴 곳을 파고 일하려면 내키지 않는다.
못을 박을 때 검은 물이 칭칭 튀어 얼굴과 몸에 착착 달라붙는다. 철길을 만들어 줘야 일할 수 있다. 셋이서 일하는데 두 분은 나이 들어 힘들어한다. 내가 많이 해댔다. 선로 사고가 생기면 나에게 연락이 온다. 두 노인에게는 미안한가 보다. 또 고치기를 잘해서 기술자처럼 보였는가 보다. 삭도 레일을 내려가면서 여러 좌우 굴들을 다 둘러보면서 손봐야 한다.
폐갱은 으스스하다. 들어가 레일을 일일이 걷는다. 삭은 냄새가 고약하다. 다들 급할 때 여기로 오는가 보다. 낮에만 일하고 들어온다. 책 보다가도 밤중에 부러지거나 비틀리면 얼른 들어가야 한다. 작업이 없을 땐 폐갱 구석에 앉아 잡담하고 노닥거린다. 얘길 듣노라면 지난날 용머리를 뽑은 사람들이다. 산나물 뜯으러 갔다가 젊은 여자와 놀아난 얘기를 구수하게 한다. 그게 그리웠던가 몇 번이나 들려줬다.
“옛 늙은이 호랑이 안 잡은 사람 없다더니.”
허풍스러운 얘길 들으며 하루 일이 끝나간다.
“사람이 굴에 갇혔대.”
야단났다. 막장 탄 캐다 무너져 깔렸다니 재빨리 구해야 한다. 모두 걱정하며 살아나야 할 텐데 애태웠다. 손에 일이 안 잡힌다. 바락바락 살리려 매달렸지만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차에 죽은 사람을 싣고 나왔다. 탄을 깔고 비스듬히 누웠는데 보니 아는 사람이다. 온통 검정 복장에 검은 얼굴이 바로 친하게 지냈던 고향 사람이 아닌가.
죽은 사람은 무서운데 하나도 그렇지 않다. 편안하게 누워있는 게 잠자는 모습이다. 얼굴을 쓰다듬어 주었다. 철길 일할 때 지나면서 등을 툭툭 치며
“어이 강수남. 수고하네.”
하는 몇 시간 전 말이 귀에 스친다. 낭패다. 아래 사택에 사는 그 가족이 알면 얼마나 슬퍼할까 기막힐 일이다. 굴 앞에서 울고불고할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저려온다. 권양기에 이끌려 스르르 올라간다. 손을 흔들며 잘 가라 인사했다. 이 굴 저 굴에서 소리치며 달려 나오는 탄 차가 요란하다. 좁은 굴에서 부딪치기라도 할라치면 큰일 난다.
사고로 험한 모습을 자주 본다. 사골 마을 사람이 이리되니 허전하다. 탄가루와 돌가루를 여러 해 조금씩 들이키니 폐에 쌓여 진폐 환자가 된다. 콜록콜록 기침하면서 가래를 뱉으며 평생 살아가야 한다. 다른 장기는 청소할 수 있지만 폐는 그게 어렵다. 쌓인 탄이나 돌가루를 긁어내거나 씻어낼 수 없다. 그대로 굳어진 채 평생 지내야 한다.
굴 밖에서 일하게 됐다. 화약고 일을 맡았다. 필요한 양을 나눠주는 일이다. 함백산 중턱 정선에서 황지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다. 철조망으로 쳐진 화약고 옆에 사택이 있다. 정암탄광 이희찬 화약 주임 집이다. 사무실에 죽치고 있다가 달라하면 필요한 양만큼 전해주는 일이다. 주로 굴진 때 발파하기 위해서다. 간단하다. 되게 복잡해서 어려운가 했는데 세 가지다.
줄 심지 끝에 담배 필터 크기의 뇌관을 붙여 누런 종이에 싸인 찐득찐득한 좀 굵은 엿가락 같은 폭약에 꽂아 넣는다. 착암기로 뚫은 한발 구멍에 밀어 넣고 심지에 불을 붙이면 타들어 간다. 이때를 틈타 멀리 피하면 바위가 깨지고 산이 무너져 내린다. 폭약의 위력이다. 사택을 짓는데 바위가 나와 깨달래서 갖고 갔다. 이주임이 허락해서이다.
주위 사람을 피하게 하고 지나는 차들도 세운 뒤에 폭파했다. 돌이 튕기고 날아다녀서 위험하다. 한주먹거리가 그리 대단할 수 있나. 이것 아니면 굴을 어찌 파며 그 큰 바위를 무슨 수로 깨트리나. 쓰고 남은 것을 개울 깊은 곳에 던져 물고기를 잡는다는 얘길 들었다. 그땐 그리해도 정선 경찰이 뭐라 하지 않았나 보다.
태백산이 건너다 뵈는 함백산은 석탄 굴로 마구 뚫렸다. 정상이 바로 위에 가깝게 보인다. 주위 중턱과 아래는 온통 사택과 버럭 더미, 석탄 저장소로 흘러넘쳐 형편없다. 문곡역으로 석탄을 실어 나르려 사방으로 길이 났다. 석탄 가루와 흙먼지로 뒤덮여 거무튀튀하다. 강은 갱도에서 나온 석탄 물로 새까만 빛이다. 초등학생 미술 시간에 산천을 그릴 때는 강을 푸르게 색칠하지 않고 온통 시꺼멓게 그린다.
그러다 사무실로 들어갔다. 측량 일을 배웠다. 휜 줄 막대를 들고 깃발을 흔들며 이 언덕 저 골짝 숲으로 달렸다. 도면을 그리게 종이와 제도기 연필 등을 준비하고 청사진을 만들었다. 다시 굴속에 들어가 막장 굴진 방향을 청사진 계획대로 일러주곤 한다. 석탄이 있는 바로 밑을 뚫어줘야 일하기 편하다. 긴 삼각 발 위에 측량기계를 올려 어깨에 메고 다녔다. 배우자면 심부름부터 고분고분 잘해야 한다.
산속은 온갖 굴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도시의 거리와 같이 사통오달이다. 그 속을 광부들이 가스 불을 들고 다닌다. 대개 들어가다가 지하로 내려간다. 좌우로 뚫어 1편 2편 3편 -- 아득히 아래로, 아래로만 내려간다. 탄맥을 예측해 따라가는 측량이다. 탄 층은 한 발 정도로 경사면을 이루며 돌벽 사이에 쌓였다. 사람이 캐기 좋도록 지층을 이룸이 신기하다.
한층 털고 내려가다 보니 그렇게 자꾸 밑으로 가게 된다. 물을 퍼 올려야 하고 공기를 넣어줘야 하므로 살아 숨 쉬는 갱도이다. 비워두면 무너지므로 사람의 운기가 굴을 지탱하게 하는가 보다. 내 책상에서 일도 하며 책을 볼 수 있어 안성맞춤이다. 여름은 문 열어놓으면 높은 산 속 맑은 공기가 시원하고 모기도 없다.
겨울은 드럼통 난로가 벌겋다. 연료인 무연탄이 무진장이다. 쿡쿡 쑤시면 가루가 밑으로 내려가고 그 위로 덩어리 석탄을 올려두면 종일 간다. 후끈후끈하여 눈 쌓인 강원도 엄동설한 겨울 같잖은 곳이다. 갱도는 온도가 일정하다. 바깥바람을 밀어 넣어도 사철 비슷한 영상이다. 일하다 보면 덥다. 옷이 땀에 젖는다.
“군 징집 영장이 나왔다.”
대구에서 훈련받고 원주 통신학교 교육을 마친 뒤 가평 포병부대에서 병영 생활하다 제대했다.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부산으로 내려왔다. 동래 전자 회사 직업훈련소에 들어가 교육받고 작업장에 배치됐다. 일하면서 야간을 다녔다. 처음 맡은 일은 텔레비전에 들어가는 채널 부스이다. 코일 감긴 것으로 1에서 10쯤 됐다. 붙여 두드렸을 때 껌벅이지 않으면 합격이다.
불량품을 모아 일본으로 보내는 일을 했다. 하다 보니 코일을 조금씩 움직이니 화면이 잘 나왔다. 쌓아둔 반송품을 다시 풀어 모두 손보아 고쳤다. 갑자기 뜨는 강수남이다. 계기도 없이 맨손으로 채널 박스를 이리저리 만져 고치다니 놀랍다나.
“느낌으로 하다 보니 그리된 걸 가지고---.”
총무과로 옮겨 사보를 맡아 글쓰기와 편집을 담당했다. 서울 본사와 전국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계열 회사의 소식을 전하는 월간 회보이다. 싣고 보니 예쁜 글이 보여 다시 읽어보았다. 알프스 회사의 여성으로 일본을 다녀와서 쓴 기행문이다. 그곳에 갈 일이 있어서 주재 기자인 직장 예비군 중대장의 안내로 부품 공장 내부를 돌아봤다. 마침 궁금했는데 글 쓴 여인도 만났다. 글처럼 아리따운 예쁜 서양이었다.
따르릉 종이 울면 잠시 쉬는 시간이고 점심 식사 시간이다. 또 마치는 퇴근 종이다. 같은 종소리여도 다 알아서 움직인다. 탄광에서 일할 때와는 달리 얼마나 깔끔하고 정갈한지 멋스러움이 넘치는 회사이다. 다들 공장 다닌다는데 여긴 ‘회사에 간다.’는 말을 한다. 사원과 공원이 구별되어 경비실을 들어갈 때부터 갈라진다. 사원은 경비들의 인사를 받으며 그냥 들어가고 공원은 카드를 찍어 경비 확인으로 출근하고 퇴근 때도 그리한다.
텔레비전과 라디오,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전화기, 통신기기 등 작업장으로 들어가고 사원은 2층 각종 사무실에 근무하며 구름다리를 다닌다. 명찰과 입은 옷도 다르다. 식사 때 배식구도 따로 되어 받는 음식이 구별된다. 봉급도 차이가 있다. 일한 만큼 주는 공원과는 달리 사원은 일정한 노란 봉투 봉급과 보너스를 받는다. 홀몸일 땐 회사 뒤 아름다운 솔숲에 싸인 희성장이란 곳에서 생활한다.
사원은 아주 소수여서 그런가. 공원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드넓은 텔레비전 공장 내 두려운 직장과 반장이 공원이고, 수많은 작업자도 모두 그렇다. 쳐다봐야 할 사무실 과장과 기사 두셋만 사원일 뿐이다. 예전 양반과 상민의 모습이다. 사원 시험이 있을 때 각 부서 내로라하는 간부 추천받은 공원 수백 명이 응시해서 겨우 대여섯 명이 발령되니 우쭐댈 만한 벼슬이다.
수남은 거제도 천주교 재단의 학교에 있다가 부산 보수동으로 옮겨 수십 년 근무했다. 봉화군에서는 주로 가깝고 아는 사람이 많은 서울로 간다. 대구와 구미, 공업 도시 울산으로 가는 사람이 간혹 있어도 이곳 부산은 드물다. 정 장로가 일본이 쓰다 두고 간 소천 제재소를 받아 태백산 나무를 각목과 판으로 다듬었다.
선교활동도 하면서 부산 성창 목공장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열대 원목이 들어오고 합판을 만들면서 산천의 무른 소나무 산판은 쓸데없어 시답잖은 뒷전이 됐다. 그 무렵 내려온 사람들이 있다. 고향 사람을 만나면 그저 반가워 찾게 된다. 동창 모임을 하면서 보니 졸업한 지 모두 수십 년이 넘었다. 긴 세월 살기 바빠 잊고 지나다 뒤늦게서야 그리운 어릴 때 친구들을 찾아 나섰다.
부산과 울산, 대구의 대여섯으론 적어 안동, 영주, 청송, 고향 봉화까지 넣어 수십 명 동창생을 만났다. 모이면 호들갑을 떨며 그때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여자들이 더 설쳐댔다. 형제처럼 가깝게 지나면서 또 수십 년이 지났는데 회를 이끌 회장 할 사람이 없어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한 번씩 돌아갔는데도 두세 번씩 맡아야 한다. 세상을 떠나거나 병들어 빌빌하는 팔순이 넘거나 다 된 나이여서 깨질 때가 됐다. 점점 수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나는 이젠 더 못 나가.”
해방 전후 출생으로 굶주리고 고달팠던 어린 시절이어서 다들 팔팔하지 못하다. 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었는데 난데없이 향우회가 생겼다. 재부 경북 대구 향우회를 해운대에서 가진 뒤로 얼씨구나 만났다. 부산시장이 경북이고 교육감은 유기그릇 만드는 곳 봉화 동향 사람이다. 한자리에 앉아서 손잡고 얘기를 나눴다. 그 여섯이 만나면서 하나하나 늘어났다.
들쭉날쭉한 선후배 나이로 초등학교 출신이다. 몇 해간 모진 코로나 전염병으로 뜸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던지 자주 모임을 하잖다. 배 시인과 나는 문인으로 나이 든 축이어서 미안해 가끔 빠지면 오라 바리바리 전화이다. 서울 간 사람들은 그런대로인데 여긴 다 잘 된 것 같다. 일꾼으로 들어가서 기술을 익혀 입지의 기업을 일군 사람이 몇이나 된다.
대학을 졸업한 사람과 꿈의 농장을 경영하고 건재상으로 자녀 창업을 이룬 친구도 있다. 하단과 구포에서 만나다가 이달은 느닷없이 최 형준네 집으로 가잔다. 송정을 지나 기장군 장안읍 쪽이다. 이곳 강서에서는 동쪽 해운대가 백 리이다. 거기서 더 들어가는 산골 농장 그 먼 곳을 가겠나 멈칫해진다.
가자는 배 회장의 전화다. 농장을 한다는 말에 아내가 ‘죽고 못 사는’ 시골 텃밭 타령인데 어떤가 보고 싶다. 혹시 옆에 빈집이라도 있어 군불 때고 잉걸불로 간고등어를 구울 수 있을까. 찾아봐야지 맘먹었다. 일찍 서둘러 부전역으로 들어섰다. 동해선을 타고 마주 앉아 즐거운 얘기를 나누며 갔다. 택시를 나눠타고 대룡마을을 찾아가는데 기사가 잘 몰라 헤맸다.
시골길이 산지사방으로 나 있어 어느 길인지 알 수 없다. 야산 자락에 검은 비닐 농막을 짓고 골짝 밭을 일궈 살고 있었다. 겨울비가 내려 진창길이다. 장화를 신고 마중 나온 형준이다. 깍듯하게 서로 반기는 인사를 나눈 뒤 그냥 들어가자마자 점심상을 차려 먹기 바빴다. 출출했는가. 오리 불고긴지 탕과 함께 걸쭉하게 차려 내왔다.
자리가 좁아 배 시인과 나는 한쪽으로 앉아 밥상을 받았다. 배추절임에 산초인지 재피를 넣어 향기가 일품이다. 술도 곁들여 흥이 나는가 얘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한 시간 두 시간 뭉그적거리며 일어설 줄 모른다. 형준이를 처음 본다. 낯선 얼굴이어도 오록에 있는 초등학교를 함께 다녔다니 반가웠다. 나보다 한 5, 6년 뒤인 것 같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아버지가 스님이었다. 춘양 각불사에서 승려를 시작했는데 그때 어머니를 만나고 태어났단다. 그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애석하게 병으로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재작년에 청도 동생댁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천축사에서 나와 부산 근교 암자에서 고령에도 부처님께 예불을 올려드렸다. 90을 훨씬 넘겨서 열반하셨다.
평생 절을 건사하고 일찍 떠난 아내 대신 자녀를 보살피느라 많은 업보를 짊어지신 아버지 태주 스님이다. 뛰어놀던 그 천축사 법당과 요사채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펑퍼짐 넓혀 웅장한 사찰로 바뀌었다. 밥 지어 먹고 들앉아 공부하던 구렁의 토굴과 졸졸 흐르던 나무 수로며 텃밭도 간곳없이 뭉개졌단다.
오래도록 철물 도매업을 하다가 접고 부산역 앞 초량 아들 식당에 채소를 대준다. 무와 배추, 상추 등을 가꿔 놓으면 가져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찾아오는 아들 내외와 손주를 보고 농사짓는 즐거움도 맛본다. 산돼지와 고라니가 자주 내려와 휩쓸기에 그물을 쳤다. 둥근 비닐 집이어도 방 두 개 마루, 부엌이 그럴듯하다.
남녘이어서 겨울에도 눈 날리지 않고 무서리 조금 내린다. 농작물이 푸릇푸릇하다. 대파와 포기 배추, 시금치, 봄동은 싱싱하다. 얘기마다 얼마 전 여읜 아버지를 그리워함이 배어있다. 참배한 뒤 장삼을 걸치고 부축받으며 걷는 모습을 휴대전화에 동영상으로 담아 보여주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이다. 젊은 날 예쁜 어머니 사진도 곁들였다.
각불사는 나라 역사 기록을 보관하여 지키던 사고 절이다. 한번 가 본다. 하면서도 들어가는 길 입구 이정표만 보고 지나쳤다. 조선왕조실록과 중요 기록을 여러 권 필사하여 왕실 사고와 전국 각처 은밀한 곳에 보관해 뒀다. 강화도와 태백산, 서벽 각불사 등 곳곳에 옮겨 병란이나 화재로 소실 되어도 남을 수 있게 했다.
강화도 사고 역사서는 구한말 프랑스 군함이 들이닥쳤을 때 가져가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여긴 절 뒷산 정상 부근에 사고를 짓고 승려들이 왕명을 받들어 승군 복장으로 지켰다는데 왜군이 알고 쳐들어와 태워 없앴다. 식민지에 무슨 문화는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그곳에 올라가 보려 했으나 점점 희미해져서 승려들도 잘 모른다.
그 터도 어디쯤인지 분간하기 어렵단다. 태주 스님은 천축사로 옮겨 젊은 시절을 보낼 때 만났다. 부처님을 정성껏 떠받들고 신도들과 가족을 보살폈다. 아버지 스님을 찾아 절에 올라오기를 잘한다. 어리광을 부리며 절 마당을 뛰어다니는 성일이가 지날 때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성일이가 개단에서 몇 고개 넘어 초등학교에 들어갔다. 방학 때면 절에 와 산다. 멀리까지 울리는 목탁과 맑은 풍경 소리를 들으며 아버지 곁이 좋기만 하다. 더더욱 독경하는 아버지 음성이 듣고 싶어 주위를 맴돈다. 가까이 졸졸 따르고 싶어도 멀리서 지켜볼 뿐이다. 꽤 심이 든 성일이다. 예불드린 뒤 공양간에서 저녁 들고 아버지 손 잡혀 산길을 내려 집으로 갈 때가 즐겁다.
친구도 없는 절간에 종일 뛰어다녀선가 잠이 들어 업혀 갈 때도 있다. 마침 토굴에 수남이 들어오자 ‘형아’, ‘형아’ 하며 달려갔다. 성가셔도 워낙 붙임성이 좋고 명랑하기 그지없는 성일이어서 올 때마다 좋았다. 안 올 때면
“뭐하나.”
싶다. 그때 지금까지 서서 문설주에 기대 듣기만 하고 조용해서 형준이를 쳐다보니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다. 눈시울이 붓고 붉어져서 훌쩍거리고 있질 않나. 깜짝 놀라
“왜 그럽니까.”
내가 뭘 잘못이라도 했나. 저리 울고 있으니 적이 궁금하다. 콧물까지 흘리면서
“그 성일이가 바로 이름을 바꾼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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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내용은 가슴 먹먹하도록 절실했던 삶의 현장이 아리는데
샘의 짧고 명료한 문장이 술술 이어지는 미에 푹 빠져 감탄합니다.
존경합니다.
태백산이나 함백산에 펑펑 뚫렸던 석탄광 아래 어디쯤에서 제가 태어났을것입니다.
아버지가 3년을 체광하였을 때 어머니가 따라가서 제가 많은 형제 중 유일하게 외지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실부모하여 상세한 것은 모르지만, 샘의 글에서 기억에 없는 본능의 고향을 만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역사 기록부 같은 귀한 글 많이 많이 쓰시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십시오.^^
얼마 전에 함백산에 가 보니 그때 모습은 하나도 없습니다.
산으로 변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화약고며 사택 사무실 갱도가 모두 참나무 숲으로 뒤덮였습니다.
정선으로 가는 도로만 포장되어 뻥 뚫렸습니다.
수채화 같은 소설처럼 읽히다가...이건 아니다 싶어서 신중히 읽었습니다.
전혀 상상 할수 없이 고되었던 젊은 날들을 어떻게 견뎌오셨을까? 싶었습니다.
뭐라고 댓글 남기기조차 죄송스러워지는 글입니다 저는 짐작할수없는 상황들이라서요.
이 편한세상에서 하루하루 허투루살면 안되겠단 생각이 듭니다.
좋은글 시간내서 쓰시노라 고생하셨습니다.생각하기조차 버거운 힘든과거이셨을건데...ㅠ
반가워요 와 주셔서
성도님 지난날 수남이 살아온 얘기가 물결처럼 일렁입니다.
모두 사실입니다.
한생전의 일이 필름처럼 돌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