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광촌에 들려 옛 추억으로의 여행을 하고 있는 모습. 술 한잔의 추억> 북소리·죽비소리·철부지소리(166)
나이 듦과 내가 사는 시간 계산법
해가 바뀐다. 해가 바뀔 때 마다 나이를 먹는다. 해가 바뀌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그것은 미래라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인지 과거라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의 흐름과 추이를 의식한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을 공허하게만 만든다. 우리나라는 해의 바뀜에 따른 12지 간지(干支)가 순서대로 정해져 있다. 해가 바뀔 때마다 육갑을 짚어 본다. 즉 그 정해진 12가지 동물의 순서에 따라 다음 띠로 바뀌면서 새해를 맞이하며 한해의 국운이나 작게는 사람의 명운에 이르기까지 점을 쳐보고 한해의 운세를 가늠해 보거나 토정비결을 뒤져보기도 한다. 그러면서 해가 바뀔 때마다 속절없이 더하는 나이를 떨쳐 버릴 수 없이 먹게 마련인데 그런 시기가 닦아오면 점점 두렵고 서글픈 마음이 앞선다. 이 과정에서 기쁜 마음이 들지 않고 왜 슬퍼질까? 오직 한번뿐인 삶을 살아가야하는 길목, 또 한해의 출발 선상에 서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불혹의 나이쯤에는 나이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었다. 지천명의 나이 또한 거의 무의식한 과거사의 년대였다.
그러나 훌쩍 세월이 흘러 산수(傘壽)고개를 넘어가는 시점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진정 세월이 빠르게 느껴지고, 덧없는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마음에 세월이란 의식이 자꾸만 담겨진다. 그 의식의 저변에는 나이 들었다는 뜻이 담겨있기 때문이라 짐작해 본다. 사람이란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더하며 생활할 수밖에 없고 오래 살아봐야 겨우 인생이 참으로 짧고 순간이란 삶이란 것을 알게 된다. 세월이 유수(流水)와 같다하여 흐르는 빠른 세월을 그려 시인묵객들이 노래한 글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한번 나서 한번 죽는다. 이는 인간생명의 철칙이다. 유한한 생물체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한번뿐인 일회의 생명 원리 속에서 일생을 허둥댄다.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생애를 살 수 있다면 인간의 삶이란 그렇게 존귀하거나 애착을 느끼지도 않을 것이다. 현대과학으로 똑 같은 복제 인간을 탄생시킨다 하드라도 의식이 다르고 사고가 다르고 성장과정이 다르며 행위양식이 천차만별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제 인간도 일회성의 일생일사의 삶뿐일 수밖에 없다. 자연은 우리 인간들에 시간의 흔적을 안기고 남긴다. 노년의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은 백발이 되며, 허리가 구부정해지면서 동작이 느려지고 몸의 이곳저곳이 노쇠해져 성한데 가없고 병원과 약방을 들랑거린다. 노년이 되어 뒤 돌아보면 보이는 시간의 흔적보다 흔적 없이 사라진 시간이 더 많음을 느끼며 후회하기도 한다. 흘려보낸 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지금 손에 잡히는 시간만큼은 낭비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나머지 인생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조바심하며 무엇인가를 찾아 나서본다.
오직 한번 뿐인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삶의 가치란 한없이 값지고 소중하며 존귀하다. 따라서 나는 어떠한 존재이며 내 남은 생명, 즉 삶을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며, 어떤 목표와 종착점을 향해서, 무엇에 쓰임을 당하며, 어떠한 자세로 살아 가야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 이와 함께 젊었을 때는 몰랐고 느끼지도 못했던 시간인식이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의 소중함을 절감한다. 대부분 인간이 나이의 회안을 느낄만한 년대가 되려면 적어도 한 갑자쯤의 세월의 무게를 느껴야 만 알 듯 말 듯 할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나의 시간개념은 한 시간을 하루같이, 하루를 1년같이,1년을 10년 같은 계산속에 황금같이 시간을 쪼개어 쓰고 생활하려고 노력한다. 이것은 내가 사는 근래의 생활시간 계산법이다. 그 시간 개념은 고희(古稀)를 넘기면서부터 그런 시간 개념 속에서 살아야 되겠다고 느끼기 시작해 실천해 오다가 산수(傘壽) 고갯길을 넘어가면서 더욱 시간의 소중함과 시간을 황금같이 느껴지게 되었다. 돌이켜 보면 젊은 시절에는 창창한 미래의 세월을 생각하며 유유 작작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다. 그래서 일까? 요즘 들어서 그 시간들을 보충이라도 할양인 셈으로 단 일분의 시간도 낭비하는 것을 아까워하게 되었다. 이제 늦었다고 생각하지만 늦은 시간이 빠른 시간이라 생각하면 늦다는 개념은 훌쩍 어딘가 날아가고 알차고 생동감의 시간만 남는 것 같다.
이 길목에서 시간에 대한 역사적 흔적으로 유명한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였던 벤 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이 ‘인생은 시간이요, 시간은 인생’이란 말을 남겼다, 시간이란 인생을 구성하는 요소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인생을 사랑한다면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하는 메시지요? 낭비가운데 최악의 낭비는 돈이 아니라 시간이라 했다. 그 프랭클린이 젊었을 때 경영하던 서점과 인쇄소에서의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 신사가 서점에 들러 2달러하는 책을 골라 들고 점원에게 닦아가 깎아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점원이 안 된다고 답을 하니 주인을 보자고 요청해 그 때 주인인 프랭클린이 나타났다. 점원이 말하기를 손님이 책의 가격을 깎아 달라고 요구한다고 말하니 주인은 이에 덧붙여 말하기를 2달러 50센트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 말을 들은 손님은 깜짝 놀라면서 왜 50센트를 더 달라하느냐고 화를 내기에 이르렀다. 그때 주인인 프랭클린은 다시 3달러를 달라고 요구했다. 다시 손님은 왜 똑 같은 책인데 값이 자꾸만 올라가느냐고 항의했다. 그 말을 들은 프랭클린은 말하기를 당신 때문에 책값 이상의 나의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그제야 신사는 그의 말을 알아듣고 3달러를 지불했다. 그러나 3달러를 받은 프랭클린은 선뜻 1달러를 되돌려주면서 자기 말을 이해했으니 정가대로 받겠다고 말하고 책을 손님에 쥐어준 이 일화는 참으로 시간의 중요성을 단적으로 대변해주고 있고 허비한 시간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시간을 저축해 쓸 수도 없고 시간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팔수도 없다는 교훈이 아닌가.
나도 시간을 소중히 여긴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어 쓴다. 시간을 쪼개어 생활 하다 보니 친구들을 만나 한적한 한담이나 하는 필요 없는 시간의 모임은 자연히 멀리하게도고 내게 유익하지 않거나 내 양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전시회나 강연회 등과 집회 같은 곳에도 잘 참가치 않는 경향이 지금의 내 생활을 지배해 웬만한 곳은 애당초 무시하고 내 스스로를 위한 시간만으로 대체하고 메워 버리고 말 때가 점점 늘어간다. 어떤 때는 궁금해서 그런 곳에 참석해 볼까하다가도 나와 상관된 손익계산이라도 하듯 절실한 것 이외엔 기피하게 되고 그런 무익하다 생각되어지는 곳을 피하다보니 조용히 내 시간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많아지기도 한다. 하여간 나이 들어 그런 참여의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오락이나 낭비하는 시간이 없어져 가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무미건조한 삶 같기도 느껴진다. 그러나 오직 하나 뿐인 삶의 시간들을 메우는데 어느 행위 양식이라야 하는가는 나 스스로 잘 알기 때문에 내게 유익한 쪽으로 자연히 시간을 할애하게 되고 내 나름의 시간계산법으로 살며 궁정적인 자세로 생활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글귀 중에서 내 무릎을 친 구절이 떠오른다.
옛날 중국의 위원(魏源)이란 학자가 쓴 묵고(??)라는 글에 “뜻이 있는 남자(志士)는 1년을 소중히 여기고, 현인(賢人)은 하루를 소중히 여기며, 성인(聖人)은 한시를 소중히 여긴다.”라고 적고 있다. 참으로 현명한 시간개념을 비유해 정의해 둔 이 글을 읽고 내 가슴이 뜨끔해 짐을 느꼈다. 왜 내가 젊어서 이런 글귀를 대하지 못했던가 라고 말이다. 이 글을 읽고 평생을 통해 나를 위해 유익하게 소비한 시간이 얼마나 있었나 하고 회한에 잠기기도 한다.
남이 내 인생을 살아 줄 수 없다. 나 또한 남의 인생을 살아주지 못하며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짠 계획, 내 판단, 내 선택 기준에 따라 내 인생의 각본을 쓰고 주인공인 동시에 연출자가 스스로 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지금부터 다시금 나의 삶의 시간계산법을 새로 구축해야 되나 하고 생각되어지면서 언제나 부족함을 느끼는 내 남은 시간을 어떻게 하면 유익하고 알차게 메울 수 있을까에 대해 자꾸만 나를 이끌어가는 그 무엇에 사로잡혀 가고 있는 압박감을 느끼는 때이기도 하다.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내 삶의 시간 계산개념은 “한 시간을 하루같이, 하루를 1년같이,1년을 10년 같은 셈속에 황금같이 시간을 쪼개어 쓰고 생활하려고 노력한다.”라는 것이다.
근래 날이 가고 달을 넘기며 해가 바뀔 때 마다 앞으로 또 몇 번의 새해를 더 맞을 수 있을까하고 절박한 심정을 느껴보기도 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의미가 신중해 진다. 지나온 생평(生平)과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보는 예측 등 모두가 인간이 산다는 것은 갖는 것이요, 또한 꿈을 최대로 실현시키려고 노력하는 존재가 아닐까 자각하게 된다. 스스로의 값진 시간표를 작성하고 삶의 계획표를 새로이 하여야 할 것이라 느낀다. 희망을 품고 땀을 흘려 생활을 할 때 우리 삶의 보람에 꽃이 피고 만족과 행복의 향기가 풍길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 간절한 최소의 소망이라도 이루어 질 것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암 우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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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북소리 죽비소리 철부지소리 원문보기 글쓴이: 청암/정일상
첫댓글 이 수필은 '재경지' 12월 월간지에 기고키 위해 보낸 것이며'
이곳 향우님들께도 읽히게 하기 위해 여기 옮겨 기고해 듭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청암/정일상 고문님 늘 새로운 소식지 올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카페 수정 개편으로 잠시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찾아오기가 힘들어도 청암선생임의 글을 읽고 싶어서 애써 찾아 왓습니다.
찾아오기가 좀 번거로운데 이 에세이만은 기어이 찾아 읽고싶은 마음은 이 글들이 이 카페의
초고의 장이고 청암서냉님의 정열과 열정을 느겨보고 좋은 글을 읽고 싶어서 입니다.
건강하시면서 글 건필 하시길 빕니다.
노익장하시면서
그 아낌의 시간들을 이렇게 글로 표출하시니
존경스럽고 젊으니들에 본이 된다고 느깁니다.
늘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랫만입니다.
별일 없으시지요?
젊은이에 큰 귀감이 될 글로서 감명있게 읽고
나의 앞뒤를 늠해 보면서 내 삶의 지표를 새로 그려봐야 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구구절절 공감이 갑니다.
새해에도 강건하시고 건필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