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7일 아침이다.
진수성찬일세~~!
원영이네는 보통 일품요리로 해먹는다는데, 우리 때문에 정말 다양한 반찬을...!!!
아침을 먹고 찾아간 곳은 글렌 뷰 공립도서관.
아주 크진 않았지만 열람실 분위기가 매우 편안하고 좋아보였다.
영주 서 있는 각도 보소.
내가 들고 있는 건 중고책 열람실에서 산 몇 권의 중고동화책.
원영이는 이때 미국 초등학생들이 읽을 법한 수준의 영어책을 아무렇지도 않게
쉽게 읽는 유진이의 영어 실력(정확히 말하면 친숙한 태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저렇게 영어 책을 자유롭게 읽지 않고 입시공부에 매몰된 지..
벌써 2년 반이 넘는다.
실력이 없어지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뭔가 이도저도 안되게 만들어버린 건 아닐까.. 가끔 복잡한 심사가 인다.
채운이는 3살 때 미국에 왔으니 영어가 훨씬 편하다.
토요일마다 한국어학교에 다니는데, 숙제가 많아서 싫어한다나.
오늘의 주요 일정은 보타닉가든에 갔다가
저녁 때 크리스마스 시즌 공연을 보는 것.
Chicago botanic garden.
Glencoe라는 지역에 있는데 글렌 뷰에서 한 30분 정도? 차를 타고 왔다.
"Wonderland Express"라는 시즌 기획전시가 열리고 있다.
천연나무로 시카고의 랜드마크들을 미니어쳐로 꾸며놓았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를 증기 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린다.
사진 속의 저 건물에도 자세히 보면
"Chicago Stadium"이라고 써 있다.
영화 캐롤에서도 보면 1950년대 백화점에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크게 부각된 것 중에 하나가
달리는 기차 모형세트이다.
이상한 나라로 가는 고속열차,
미국인들에게 뭔가 특별한 문화적 코드가 있는 부분인 거 같다.
시카고의 식물원에선 매년 겨울 이 전시를 연례행사로 하는 것 같다.
매년 하는 전시니까,이 조형물들은 당연히 창고에 보관하겠지?
저것도 시카고의 유명한 건물일 텐데, 뭔지 못알아보겠다.
귀여운 리스.
내가 젤 마음에 들어했던 초록색 네모 리스.
유진이에게 서 보라고 했더니, 저 뾰루퉁한 표정은 뭣인고.
와우.
이건 결혼식에나 쓰일 법한 디자인~
하늘 빛은 꽤 음울하다.
바람도 불고 꽤 추웠던 날씨.
자작나무를 심은 마당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낭만적인 소원은
웬지 이제 점점 멀어져간다.
난데없는 가위바위보는 무엇인가.
저 작위적인 표정은 또 어떻고.
시카고에 간지, 만 6년이 된 원영.
5년이면 돌아온다더니, 영구 이주하게 될 거 같다. ㅠㅠ
드러내놓고 인종차별이 있지는 않지만,
아무래도 인종끼리 문화가 형성되기 때문에,
채운이에게 영원히 비주류로 사는 삶을 물려주게 될 거 같아 안타깝다고 한다.
그래도 채운이는 미국 소년이나 한국 소년보다도
"미국에 사는 한국인 소년"인 것이 좋다고 한다.
뭘 아직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의 모습을 긍정하는 아이 나름의 자존감이 멋지지 않은가.
어머나, 채운이가 가방에 가렸네.
누가 찍어줬는지 정말 잘나왔네.
바깥에서 우리 어린이들을 사로잡은 건,
바로 이 오리 떼.
엊그제 원영이네 집 근처에서 본 오리 떼와 비슷한 거 같다.
비슷비슷한 사진이 이렇게 많은 건,
사진 찍는 걸 좋아하는 영주 때문이다.
찍어달라고 열심히 요청하다가,
이렇게 가끔 바꿔서 찍어주기도 한다.
대학 다닐 때도 학과공부보다 연극 동아리 활동을 더 열심히 했는데,
천상 배우 기질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가 되면
아빠는 대형 십자가를 입체로 만들어서 한지를 붙이고 그 안에 조명을 달아
약국 간판 위에 걸어놓았다.
물론 십자가에는 "축 성탄" 같은 문구를 크고 멋지게 쓰기도 하셨다.
집 마당에 있는 향나무 한 그루에도 각종 조명 장식을 달고,
약국 안에도 물론 아이 키 만한 트리를 세워서 이런저런 장식을 달아 놓으셨다.
아빠를 다음에 만나면 그 대형 십자가를 어떻게 만드셨는지 꼭 물어봐야겠다.
사북 그 깡 시골에서 정말 선진적인 성탄 문화가 아닐 수 없다.
식물원은 매우 큰 규모였는데, 계절이 계절이니만큼
기획전시와, 온실, 약간의 바깥 구경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저녁을 먹으러 온 곳은
동네에서 맛있는 버거로 유명하다는 "Polli".
아주 전형적인 미국의 버거 집 분위기다.
버거를 먹지 않는 유진이는 저 프렌치 프라이만 열심히 먹었다지,
뉴욕에서도 유명하다는 버거 집에 가면,
괜히 유진이 버거까지 시켜서 내가 두 개나 먹고
유진인 온리, 감자튀김만 먹었다. -.-;;;
7살 때 버거를 먹다가 토한 적이 있어서 그렇다나..
유진이가 절대 먹지 않는 음식들은 다 그런 어두운 역사가 있다.
토마토, 표고버섯, 단호박 등등등~
이날 저녁엔 또 하나의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Mariott 씨어터에서 하는 크리스마스 시즌 공연
"White Christmas"관람이었다.
원영인 영주 자리까지 세 자리를 어렵게 구했다는데,
제목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여러 커플들의 소동극같은 거였는데, 그다지 흥미로운 작품은 아니었다.
채운이 베이비 시터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공연애호가이신데,
볼 만한 작품이라고 추천하셨다길래 원영인 망설임없이 예매했다지만,
영주도 별로였다고 해서, 정작 작품을 보지 않고 예매한 원영이가 조금 미안해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떻게 해서든 재즈 클럽에 가보는 거였는데 말이다.
시카고 시내에는 유서깊은 재즈 바가 많은데,
채운이와 유진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가 애매해서 결국 야간 외출은 못했다.
미국에선 만 14세 아이를 집에 혼자 두는 일이 불법이다.
첫날, 유진이가 잠들어서 집에 두고 원영, 채운, 나만 미시간호수에 다녀왔는데,
나중에 채운아빠가 알고 깜짝 놀랐다. 앞으론 절대 그러지 말라며.
그런데, 생각해보니 재즈클럽은 나 혼자라도 갈 수 있는 거였는데 말이다.
시카고에서는 내내 원영이의 계획 아래 움직였던 터라,
혼자 가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기는 했을까 의문이다.
아마도 유진이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을 것고 같다.
그리고 아마 원영이도 좀 불편했을지 모를 일이다.
이런 식으로 모든 과거를 합리화~
그러나, 돌아와서
원영이가 쟁여둔 와인을 꺼내마시며
우리는 늦도록 수다를 떨다가 잤다.
식물원의 화려한 장식이나 요란한 공연보다도,
그렇게 다시 만난 친구와의 밤수다가 더 즐거운 법이다.
첫댓글 후기 빠르게 쓰니 아주 좋아요~ Cheer up~!!
당신 말 듣기 전까지 채운이가 가방 뒤에 있다는 거 몰랐네요~ㅎㅎ
다시 시작된 미국여행기~ 근데 이거 게시판이 저쪽 미국 동부 게시판에 있어야 하는 거 아냐?
추억을 즐기며 게시판이 대문에 있기 때문에 여기에다 쭉 올리고, 다 정리되면 하위 지역 게시판으로 옮기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