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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도 경주고등학교 간부 여행의 행선지는 청풍명월의 고장, 청주이다. 꼭히 청주를 선택한 이유는 없고 그저 윤정수 교장선생님이 서울에서 연수를 받고 같이 합류해야 했기에 서울 근방을 잡다보니 청주로 정한 것이다. 나는 여행계의 담당자가 아니었지만 여행에 관한 경험과 지식이 많다하여 계획을 세워달라는 부탁을 받고 전체 행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그래서 버스를 렌트하고 또 운전을 맡고 행선지는 보은 삼년산성-청주 상당산성-운보의 집-초정광천수약수터-청남대 등으로 잡고, 원래 청주가 음식과 숙박지가 이름 났다기에 식당과 모텔을 모두 예약했다. 그리고 떠난다. 오늘 중부지방에 비가 내린다던데 꽤나 신경 쓰이는 운행을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에서 경부고속도로로 출발하여 김천에서 중부내륙고속도로로 바꾸고 다시 낙동에서 상주청원고속도로로 갈아 타 단숨에 충북 보은으로 들어선다. 우리의 첫 행선지는 보은 삼년산성이다. 아직 개발이 덜 되어 네비게이션에도 불명확하게 나오는 삼년산성을 저녁답에 도착한다. 그리고는 바로 산성으로 올라간다.
삼년산성은 충북 보은군 보은읍 북쪽 2km 지점의 오정산에 있는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사적 235호로 지정되어 있다. 면적이 22만 4,000제곱m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 산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성하였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며, 신라는 이곳을 백제 공격을 위한 최전방기지로 삼았다고 한다.
성문(城門)은 보은읍을 내려다볼 수 있는 서쪽 수구(水口) 부근에 있다. 성벽은 주위의 능선을 따라 견고하고 웅대하게 구축하였는데, 높이는 가장 높은 곳이 22m에 달하고, 너비는 5∼8m이며, 전장(全長) 1,680m에 이른다. 성벽의 구축 방법은 내외면 모두 석축으로 수직에 가까운 벽면을 이루게 하였고, 전형적인 협축공법(夾築工法)을 채용하였는데, 특히 이 협축성벽은 토사(土砂)를 전혀 섞지 않고 내부까지 전체를 석축으로 견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눈이 와서 좀 미끄러웠지만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산성으로 올라갔다.
삼년산성은 고려(高麗)와 후백제(後百濟)의 대결장으로 삼년산성 전투는 지금도 역사적으로 유명하다.
고려는 건국과정에서 야기된 정치적 혼란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후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충북일대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925년 10월에 고려 유검필(庾黔弼)을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으로 삼아 후백제 영향권에 있던 연산군(燕山君)(문의)과 임존군(任存郡) 대흥(大興)을 공략하여 후백제 장군 길환(吉奐)을 죽이고 3천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926년 4월에 견훤은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웅진(熊津)으로 진군하게 되는데 그 결과 웅주(熊州)(공주), 운주(運州)(홍성) 등 중서부 일대의 10여개 주현이 후백제의 영향권 내에 들어갔다. 이후에도 중서부 일대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양측간의 접전이 계속되는데 927년 3월에 왕건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운주(運州)를 공략하였고, 928년 7월에는 왕건이 이끄는 고려군이 삼년산성을 공격하였으나 곧 패배하고 청주로 퇴각하고 말았다. 후백제군은 삼년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청주까지 쳐들어갔으나 왕건은 유검필 군대의 도움으로 후백제군을 청주에서 퇴각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928년까지만 해도 고려측의 전세는 연산진 전투를 제외하고 삼년산성‧청주, 죽령 일대에서 매우 불리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내분을 겪게 되는 930년 이후 후백제의 중서부 일대의 지배권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 해 8월에 고려가 천안에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였고, 또 청주에 행차하여 청주나성을 축조함으로써 그 전초기지를 마련하였다. 고려군의 전세 역전은 무엇보다도 매곡성주(昧谷城主) 공직의 귀부(歸附)가 결정적인 것이다. 이 일로 인해 중부일대가 고려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공직이 귀부한 직후 932년 7월에는 왕건 자신이 일모산성(一牟山城)(문의)을 정벌하였고, 이어 934년에는 웅주(熊州) 이북의 30여성이 고려에 귀부하였던 것이다.
날은 어두워 가는데 삼년산성에 올랐다.
후삼국시대 이후로 삼년산성에서 특별한 전쟁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역사스페셜 측에서 삼년산성에 대해 조명해본 적이 있었는데, 일단 삼년산성이 위치한 보은은 신라가 결코 적국에게 내줘서는 안되는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고 한다. 경주와 서울을 연결하는 중간기착점에다가 고구려와 백제로 통하는 길목이고 특히 보은에서 백제의 수도인 사비도 노려볼 수 있는 위치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라는 이곳에 굉장한 노력을 기울여 말그대로 난공불락의 성을 쌓아놨었다. 삼년산성이 있는 곳은 높이 500미터 정도의 야산이지만 성벽 부근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성벽으로 공격을 한다는 건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따라서 성문을 노릴 수밖에 없었는데 신라인은 여기다 갖가지 함정들을 설치해놓다. (참고로 삼년산성으로 가는 길목은 조그만 샛길 하나밖에 없다) 각 성문 별로 전혀 다른 함정들을 설치해 놓아 적이 도저히 성을 공격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해놓았다고 한다. 또 이 성 안에는 저수 시설과 군영이 있었던 자리, 방비 초소, 망루 등과 우물 등이 있어 이곳에 대규모 병력이 상주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신라에게는 중요한 곳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삼년산성은 신라의 요충지이니만큼 대규모 전투가 벌여졌을 법도 한데 기록에 남겨질만큼 대규모의 전투는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백제와 신라의 최대 결전이었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급습해 목을 벤 장수인 도도가 삼년산성 출신 장수인 것으로 봐서 삼년산성을 지키던 장수들은 매우 유능한 이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를 칠 때 삼년산성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어 삼년산성의 위용은 당시에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이 삼년산성 전투가 나오지만, 대부분 픽션이고 그 전투 경과에 대한 기록은 현재 없다.
산성의 성루에 올랐을 때에는 날이 이미 어두워지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한장이라도 찍어 놔야지. 찰칵!!
성루에서 보은읍을 내려다 보았다. 이제 어두워진다.
보은 삼년산성에서 내려오니 밤이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에 우리는 발걸음을 바쁘게 하여 청주로 향했다. 상주청원고속도로로 나가서 달리니 비가 와서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청원JC에서 경부고속도로를 만나 달리다가 다시 남이JC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북으로 올라 서청주에서 내려서 청주시 내덕동에 있는 가화한정식을 찾았다. 청주에서 가장 고급이고 유명한 한정실이라나........경주에서 이미 예약을 해 놓고 왔다.
가화한정식 입구에 내 이름으로 이미 예약이 되어 있었다. 식당은 깨끗하고 우아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물론 음식도 좋아야 할테지. 청주에서는 가장 고급 한정식이라는데.......
드디어 음식이 나오기 시작한다. 두텁떡이 처음으로 나왔고 먹기가 바쁘게 활어회와 육회가 나왔다. 경상도 음식보다는 순한, 그러나 맛깔스러운 음식이었다.
그 다음으로 나온 굴돼지고기보쌈, 오징어야채요리, 건어무침이다.
이 지역의 명물인 대추술이 나왔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해산물과 육고기로 섞인 전, 낙지무침, 브로콜리와 건어무침이 차례로.....서서히 배가 불러오기 시작한다.
뒤이어 나온 신선로와 곤약과 해초 냉채.............
맛있게 식사들을 하시는 경주고 간부선생님들..............전체적인 분위기가 맛 있어하는 분위기이다.
한우갈비찜이 나오고...............
이제 본격적인 정식이 나온다. 국은 청주의 유명한 청주해장국 스타일이다.
부른 배를 두드리고는 이제 숙소를 찾아간다. 숙소도 물론 예약해 놓았다. 청주는 숙박업소와 음식점이 유명하다고 했던가? 나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모텔인 청주의 '잉카의 작은 마을'을 예약하려고 했으나 룸이 없어 또 다른 유명한 모텔인 '시네마호텔'을 예약했다. 경주도 모텔이 좋기로 유명하다지만 청주가 오히려 나았다. 시네마호텔은 거의 호텔 수준인데도 룸 1실에 숙박료가 4만원이었다. 회원들의 분위기를 보니 모두가 만족해 하는 눈치이다.
청주의 밤은 뻔하다. 우리는 늘 하는대로 한다. 술 한잔씩 걸치고 노래주점 가서 논다. 늘 그렇지. 뭐, 크게 대안이 있으랴!
주독이 아직 풀리지 않았지만 아침에 출발하여 청주의 상당산성으로 온다. 이곳 성안마을 식당촌에서 아침 식사를 하기로 한다. 우선 상당산성의 동문으로 가서 성 전체를 둘러 본다. 사적 212호로 지정된 상당산성은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에 구축된 조선시대 산성으로 산성이 처음 축성된 것은 백제시대 때 토성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상당산성이라는 이름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통일신라 때 행정구역인 서원소경이 청주에 설치되는데 이때 김유신의 셋째 아들 김서현(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이후 조선시대 선조 29년 임진왜란 당시 개축되었다가 숙종 때 석성으로 개축하였다.
동문쪽의 성곽이 늘어서 있다. 우리는 성곽을 따라 걸어본다.
상당산성은 청주에서 동쪽으로 7.5km에 청주와 청원군의 경계를 이루는 상당산(해발 491.2m)위에 쌓인 석성으로서 그 성제(城制)가 훌륭하여 1970년 10월 1일 사적 제212호로 지정 보호 되고 있다.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 높이 34m, 면적 54,700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상당산성은 청주 동쪽 6km의 율봉역 북산에 있는데, 옛「상당기지」에 '조선 숙종 42년 병사 유성추가 개석축(改石築)하였다'라고 이 성의 규모에 대해 적고 있다. 즉, 그 둘레가 4.21km에 달하고 있다. 동문루는 1층에 수문과 암문이 있고, 서문루는 1층이며, 남문은 홍예 1층이다. 동문은 진동문(鎭東門), 서문은 미호문인데 북쪽은 산세가 매우 급하여 당초부터 문을 내지 않았으며, 성안에 4개의 연못과 구룡남악의 두개의 사찰 이외에 하개의 암자(청심암)가 있었다.
동문에서 성을 따라 걸어가니 저 멀리 남문이 보인다. 중간에 보이는 큰 정각이 보화정이다.
동문에서 별로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는 1992년에 복원된 동장대가 나타난다. 장대는 보통 탁 트여 사방을 조망하기 좋은 곳에 세워진다. 이곳 동장대에는 보화정(輔和亭)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맹자에 나오는 천시불여지리지리불여인화(天時不如地利地利不如人和)에서 따온 말이다. 하늘이 주는 좋은 때는 지리적 이로움만 못하고 지리적 이로움도 사람의 화합만 못하다는 뜻이다.
상당산성 안마을이다. 지금은 식당가로 채우고 있다. 성안이 제법 넓은 편인데 청주의 외곽 산속에 있는 것을 보면 읍을 지키는 외곽성의 개념이 아니고 읍이 점령 당했거나 위기 시에 이 산성으로 들어와 진을 치며 지역을 방어하는 기능을 발휘한 것 같다. 원래는 청주의 방어에 대비하기 위해 축성된 것이지만 읍성을 지키기가 불가능할 경우, 읍성의 관민이 이곳에 들어와 수성하여 장기전의 태세를 갖추던 요충지였단다. 그래서인지 성안 마을에는 군부대가 위치한 유적들이 더러더러 남아있다.
우리는 아침밥을 전통음식점인 손맛집에서 먹는다. 단순히 '손'자가 붙었다고 들어간 것 같았으나 기대보다는 괜찮았다. 왜 '손'자 냐고? 손영락선생이 자기 종씨집에 간다고 고집하여 이곳을 택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전부 손씨들이다. 손맛집, 손두부.........ㅋㅋ 하긴 나도 외가가 손씨지.
주인이 재미있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좋아서 그런지 모두들 웃고 있다. 교장선생님의 유머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
주인이 직접 손두부를 만들고 있다. 콩가루에 간수를 부어 끓인다. 간수 때문에 콩가루는 모여서 굳는다. 그리고 그 액을 틀에 부어 간수를 빼내고 두부를 만들어낸다. 우리는 간수를 소금물로 알았는데 화학 전공인 교감선생님이 아니란다. 간수는 염화마그네슘이란다. 그게 콩을 응고시키는 기능을 한다고 했다.
틀에 부었더니 간수가 밑으로 빠지고 남아있는 콩가루는 서서히 굳어 두부가 된다.
남는 찌꺼기는 이렇게 모아서 수분을 빼고 비지를 만든다.
드디어 올라온 손두부, 맛이 제법 괜찮다. 옛날같이 부두량을 늘리기 위해 석회를 붓고 하는 위험한 짓들은 하지 않으니 요즘 두부는 대체로 맛이 있는 편이다. 아마 우리가 어릴 때는 제대로 된 음식을 먹은 적이 없는 것같다. 전부 음식에 무엇무엇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하니 그동안 우리 몸도 많이도 오염되었겠지. 콩나물은 비료물로 키우고 도라지는 공업용백반수를 부었고 수박은 빨간 잉크를 주사했고 미원에는 비료를 섞어서 팔았고 두부에는 석회를 넣어 부피를 늘렸고.......뭐 전부 이런 식이었다.
너무나 맛이 있어 급하게 먹어버려 미처 촬영를 하지 못하고 뒤늦게 카메라를 대어본 충청도 청국장이다. 약간 꾸룽내가 나기도 하는 이 청국장은 주인이 직접 띄운 메주인지라 맛이 그만이다.
식사를 하고 다시 남문으로 가본다. 교감선생님이 우연히 사진에 잡혔다.
이 산성은 상당산의 8부능선에서 시작하여, 성안의 골짜기(이곳에 중요시설인 운주헌, 관아사, 군기고, 동 서창 등이 있었고, 지금 민가 45호가 있다)를 감싸고 있는 서쪽의 연백(連脈)과 동쪽 지백(支脈)의 등성이를 타고 나아가다가 남동의 수구를 향하여 꺾여서 합쳐져 있다.
성안의 서문이나 산꼭대기 또는 서장대(西將臺)나 남서치(南西雉) 위에서 사방을 바라보면, 서쪽으로는 우암산으로 가리워진 중심부를 제외한 청주시와 남 북부 및 미호천, 증평평야까지가 바라 보이나, 동쪽으로는 성 주변의 300 - 1,000m가 보일 뿐이어서, 이 산성이 동쪽(신라쪽)에 대비한 축성이 아니라, 오히려 서쪽(백제쪽)에 대비한 축성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것 같은데, 이 점은 고서에도 그 기록이 나온다.
성밖의 산세가 가장 험하고 가파른 북벽은 자연지세만으로도 바깥쪽이 험하여 방비에 큰 문제가 없는 곳이어서 당초부터 문도 만들지 않았으며, 서 남 동벽보다 축성에 힘을 덜 기울였던 듯 성의 높이가 낮으며, 4개의 봉우리에 포루 4개소를 두었다. 서쪽의 산세도 북쪽만큼 험하고 가파른데 성 높이가 4벽 중 가장 높고 잘 다듬어져 있으며 서문 바깥쪽에 외곡성(外曲城)과 용도(甬道)가 있고 서장대와 포루 3곳이 배치돼 있다.
동벽은 이 벽과 평행하는 산능선이 800m 앞에 있어 그 방어에 문제가 되는데도 1개소의 암문(暗門)과 동문 및 포루(鋪樓) 3곳 만이 있어 평범하다.
남벽은 가장 낮은 곳인 수구(水口)가 이곳에 있고 정문인 공남문에 옹성(甕城)과 적대가 없으며, 남문 부근의 성벽에 곡성(谷城)이 없는 취약점을 보강하기 위해 수문(水門), 장대(將臺), 치성(雉城) 3곳, 포루(鋪樓) 4곳, 남문 안에 용도(甬道) 등을 마련하여 정문으로 육박해 오는 적의 예봉을 분쇄할 대비를 갖추었다.
둘레 4,2km의 크고 넓은 성벽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많은 병력이 소요되며, 1,176타에도 5,880명의 군사가 있어야 하는데, 상당산성 소속은 우후(虞候)와 983명의 장졸뿐이어서 이를 보강하기 위해 성 안의 남서쪽 계곡에 남악, 구룡의 두 절의 세워서 승군(僧軍)이 머물러 지키게 한 점도 주목해야 한다.
성의 정문에 해당하는 남문이다. 교무부장, 연구부장, 인문과학부장이 보인다.
남문 밖의 성벽
상당산성을 나와 우리는 바로 청주시 북편인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있는 '운보의 집'으로 간다. 운보라면 귀머거리 화가인 운보 김기창 선생이 생전에 조성한 집이다. 독창성을 지닌 대단한 현대화가라는 사실만 알지 사실 우리는 미술에 대해서는 문외한들이다. 이제 이 곳을 방문함으로서 우리는 운보의 세계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학습 능력이 뛰어나기에.............
운보의 집 주차장에서 조금 오르막으로 운보의 집으로 들어간다. 앞의 좌측이 운보의 집이고 정면 뒤가 운보미술관이다.
운보 김기창은 서울 출생으로 7세 때 장티푸스로 청각을 잃고, 17세에 승동(勝洞)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당화숙(以堂畵塾)에서 김은호(金殷鎬)에게 그림을 배워 6개월만에 《판상도무(板上跳舞) 널뛰기)》(1931)로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처음 입선한 후, 연 5회의 입선과 연 4회 특선을 기록했다.
수조(水鳥)》(제11회), 《여인》(제12회), 《정청》(제13회), 《엽귀》(제14회), 《해녀》(제15회)로 입선, 《고담(古談)》(제16회), 《하일(夏日)》(제17회), 《고완》(제18회), 《여일(麗日)》(제19회)로 특선하여 추천작가가 되었다. 1946년에 우향 박래현과 결혼하였고, 1956년 국전 초대작가·심사위원·수도여자사범대학과 홍익대학교 교수를 역임했으며, 백양회(白陽會)의 중심인물로 활약하는 동시에 수많은 해외전을 가졌다.
운보 김기창의 작품은 대략 다섯 단계로, 초기의 사실적 작품을 그린 구상미술 시기, 예수의 일생을 한국인의 모습으로 담은 신앙화 시기, 구상미술에서 추상으로 변하는 전환기의 복덕방 연작 시기, 청록 및 바보산수화 시기, 그리고 말년의 추상미술 시기로 나눈다. 산수·인물·화조·영모(翎毛)·풍속 등에 능하며, 형태의 대담한 생략과 왜곡으로 추상과 구상의 모든 영역을 망라하고, 활달하고 힘찬 붓놀림, 호탕하고 동적인 화풍으로 한국화에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만 원짜리 지폐에 세종대왕 얼굴을 그렸으며, 1993년 예술의 전당 전시회 때 하루에 1만 명이 입장한 진기록도 세웠다. 대표작으로 《가을》(1934), 《보리타작》(1956), 《새와 여인》(1963), 《소와 여인》(1965), 《태양을 먹은 새》(1968), 《나비의 꿈》(1968), 《군마도》(1970), 《웅(雄)》(1970), 《달밤》(1978) 등이 있다. 5·16민족상(1986)·서울시문화상(1986)·색동회상(1987)을 받았다.
맨 먼저 들어가 본 운보의 집이다.
운보 김기창 화백은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변신을 거듭한 한국화단의 거목이다. 타고난 예술혼과 활화산같은 창작열로 호평받았으며 청각 장애로 인한 침묵의 고통을 딛고 우뚝선 의지의 인물로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운보에게 미술 공부를 시켰던 어머니는 아들에게 운포라는 아호도 지어주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이자 어려운 젊은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고난을 털고 선전에서 입선과 특선을 거듭해 추천작가가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광복 후 아호 운보 (雲 口에甫)에서 口자를 없애 장애의 굴레를 벗고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과 의지를 보여줬다. 그리고 이듬해 동료화가 우향 박래현과 결혼했는데, 이는 그의 삶과 예술에 일대 전기가 됐다. 필담으로 의사를 교환하는 데 한계를 느낀 그는 우향에게서 입으로 말하는 구화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아내의 작품세계에서도 크게 영향받았다.
한국전쟁은 그에게도 뼈아픈 고통이었다. 기만, 기옥 씨 등 동생들이 사상 차이로 월북한 것. 그는 피난지 군산에서 조선시대 한국인의 모습으로 예수의 일대기를 그린 <성화> 연작을 2년에 걸쳐 제작했다.
그는 전통 한국화의 평면구성에서 탈피해 입체 구성의 <노점>, <구멍가게> 등 대표작을 제작, 입체파 선두로 나선 것도 이때였다. 야생마의 움직임이 격정적 구도로 나타나는 대작 <군마도>와 전통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등 춤 연작으로 힘찬 운필을 구사했다. 나아가 완전 추상인 <문자도>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밖에 1천여 마리의 참새 떼가 양편에서 날아와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담은대작 <군작>은 운보의 표현적 특징과 스케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대표작으로 꼽힌다.
60년대 들어 해외 화단에 나선 운보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가장 뚜렷한 변화를보이는 완전추상 <태고의 이미지>, <청자의 이미지> 등 이미지 연작으로 한국화의새 가능성을 제시했다.
부인이 60년대 후반 미국에 유학하자 적색, 황색이 주를 이루는 <태양을 먹은새> 등을 발표하는 등 천변만화하는 작품세계를 과시했다. 이어 장식적 산수화 <청록산수>를 선보이고, 민화풍 산수화인 <바보산수>와 해학성이 돋보인 <장생도>도 차례로 발표해 호평받았다.
그러나 수차례 부부전을 가진 화업의 친구이자 인생의 반려인 부인이 1976년에 타계하자 그는 말할 수 없는 허탈에 빠졌다.일생에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했던 게 바로 그 이후로, 공백을 메우고자 하는 그의 안간힘을 느끼게 한다. 아내를 기려 성북동에 운향미술관을 세운 그는 성화집 「예수의 생애」 발간을 기념해 예수생애 연작으로 `운보 김기창 성화전'을 갖는 등 미친듯이 화면에 빠져들었고, 만년에는 대걸레 작업인 <심상> 연작을 내놓기도 했다.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운보 김기창 팔순기념 대회고전'을 계기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발간위원회가 작품 4천여점으로 <운보 김기창 전작도록> (전5권)을 발간했다. 전작도록이 발간된 것은 그가 최초. 이 과정에서 그가 제작한 작품이 상상을 초월할 만큼 많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의 30-40년대 작품 32점이 북한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돼 있음도 이 무렵 확인돼 화제가 됐다.
운보는 90년대 중반 서울 롯데화랑에서 `운보 김기창 예술 60년-미공개 작품전'을 갖는 등 `붓을 움직일 힘이 있는 한 그림을 그린다'는 신념으로 제작한 작품들을속속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갤러리현대 등에서 미수기념전이 개최돼 병상의 그에게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안겼다.
전농인 운보는 농아복지에 남달리 관심이 컸다. 세계 스케치여행중 선진국의 농아복지시설을 돌아보고 낙후된 국내 농아복지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자신이 회장으로있던 한국농아복지회를 국제농아연맹에 가입시켰다.
80년대 중반 외가가 있던 충북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에 `운보의 집'을 세우고그 옆에 운향미술관과 도예전시관, 운보공방 등 문화공간을 조성했다. 이중 운보공방은 농아들에게 도자기 기술을 가르쳐 자립기반을 닦도록 한 곳으로, 청각 장애인의 권익옹호에 앞장선 운보의 자상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거구였던 운보도 79세 때 심장질환으로 쓰러졌다가 기적적으로 원기를 회복하는등 만년에 건강문제로 고생을 했다. 그러다 지난 96년 후소회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참석한 뒤 뇌출혈 증세를 보이며 더이상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운보의 정원 뒤편.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기고 평생 그들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우리나라 복지사업의 볼모시대였던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청각장애인복지기관을 최초로 설립한 인물인 운보 김기창 화백은 청각장애인으로서 자신의 고통을 예술과 청각장애인복지사업으로 승화시켜 그의 전 생애를 청각장애인의 입장과 권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는 일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많은 가르침을 일깨워주는데 온 노력을 바쳤으며 바로 그러한 인물들 중의 하나임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숱한 나날을 좌절(挫折)과 인고(忍苦)로 보냈을 운보 김기창의 땀방울이 청각장애인들에 대한 관심을 자아냈고, 나아가 오늘날의 사회복지법인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를 있게 한 원천력이 되었을 것이다. 1979년 초 사설단체에서 유명무실하게 운영되어온 여러형태의 단체를 한국농아복지회라는 이름으로 통합하였고 1985년에는 국가로부터의 지원체계가 가능한 사회복지법인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로 인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후 청각장애인종합복지관인 청음회관과 직업훈련기관인 운보원을 각각 두어 청각장애인 대상 직업·사회·교육 재활 및 청능훈련, 각종 연구개발사업 등의 사업을 현재까지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를 장애인이자 화가일 뿐 대단한 자선사업가가 아니라고 밝히고 싶다는 게 생전의 그의 뜻이었다.
운보미술관 옆에 전시된 분재 공원. 대단한 작품들이 많은 것 같았는데 분재에는 관심이 없어 사진 한장으로 전한다.
그리고 운보미술관. 여기서 우리는 운보의 모든 작품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머님 나 아무 소리도 안 들려요!"
온몸으로 고열의 장티푸스를 앓고 난 후 왠지 조용하기만 했던 주위를 느낀 건 그의 나이 예닐곱 살 무렵이었다. 소리의 세계로부터 완전히 멀어지게 된 것이다. 물론 말을 꺼내는 것조차도 어렵게 되고 말았다. 그 후부터 전개될 운보의 인생은 현재 87세 고령의 나이를 맞기까지 마치 드라마처럼 열정적이지만 너무나 고된, 소리는 없지만 아름다운 빛으로 세상을 비추었다.
뒤늦게 학업을 계속하였으나 소리가 들리지 않는 탓에 수업시간을 낙서와 그림 그리는 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어린 시절의 운보였다. 찢어질 듯한 가난에도 헌신적인 어머님의 가르침은 그를 한글은 물론 산술, 일본어까지 깨우치게 하였으며 훗날 운보 평생의 업이 될 미술의 길로 인도하게 되었다. 운보의 나이 15세 때는 어머님이 직접 건네준 소년지 <어린이>에 직접 지은 동시 「매암이와 쓰르람이의 노래」가 당선되기도 한다.
1946년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이후 이전까지는 할 수 없었던 말을 할 수 있게 이끌어 준 존재가 있었다. 바로 30여년 동안 아내로서, 친구로서, 비서로서, 교사로서 예술의 반려로서 운보와 동거 동락해 온 우향 박래현이 그이다. 처음엔 말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여 포기하려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영원히 침묵으로만 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그의 개방적인 기질과 풍부한 독서량이 맞물려 구화 연습 1-2년 후 스스로의 힘만으로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었다. 재담가 못지 않은 운보의 말솜씨는 청송교도소 재소자를 대상으로 한 강연에서도 드러난다.
"나는 귀도 멀었고 말도 잘 못합니다. 그런 장애인인 내가 왜 이곳에 와서 여러분들을 교화하고 있겠습니까. 내 몸은 비록 불구지만 정신만은 건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정신이 불구입니다. 진짜 장애인은 생각을 건전하게 하지 못한 채 사회를 어지럽히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아름답다는 말은 결코 한 송이 장미처럼 그 색상이나 생김새를 가지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는 시냇물이 얼마나 맑은 것인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매일 동네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받고 돌팔매질을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유도가 3단이나 되도록 운동을 했고, 눈물을 참는 훈련도 했습니다. 여기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여러분 이제부터라도 잘못을 뉘우치고 아름다운 마음을 가집시다. 나는 여러분들의 개과천선을 믿습니다. 그대신 나도 사회에 나가서 여러분의 사회진출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푸른 수의가 푸른 하늘의 빛깔이 되도록 말입니다."
어느 누구의 강연보다도 호소력 있는 운보의 몸짓과 구화(口話)로 진행된 강연은 재소자들을 매료시켰다. 만약 눈물을 흘리시며 매를 드셨던 어머님이 아니었다면 운보의 잘못된 말소리을 하나하나 지적해가며 말문을 열게 한 아내가 아니었다면 끈질긴 집념으로 청각장애를 극복한 오늘날의 운보도 없었을 것이다.
운보미술관의 판화전시관.
청각장애인으로서 최초로 홍익대학교와 수도여대의 교수직을 역임하고, 국내·외 미술전시회를 40여 회 가졌으며, 조선미술전 최고상을 비롯한 각종 미술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아니더라도 예술분야에 남긴 운보의 업적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당사자인 운보는 이러한 것에 초연하다. 예술은 완성될 수 없기에 끊임없이 창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예술관이다.
운보가 펼친 복지사업은 자신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천대받는 장애인들을 위해 사랑을 베풀어 그가 주위에서 일방적으로 받은 사랑을 보답하려는 의지의 결정체이다. 그의 청각장애복지에 대한 의지는 이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듣지 못하는 사람이 말을 배운다는 것은 힘들지만 청각장애인도 교육만 받으면 말을 할 수도 있고 피아노도 잘 칠 수 있어요. 교육이 그만큼 무서운 거지요." 이 의지가 오늘날의 한국청각장애인복지회를 발전케했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판화.
그림의 제목을 잘 모른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는데 몰래 급하게 막 찍다보니 제목까지는 파악을 못했다. 관리하고 있는 학예사가 촬영하는 것을 봐도 가만히 있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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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도
문자도
백두산 천지 같기는 한데................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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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운보 김기창.................
월북한 동생 김기만의 작품
이것도 판화 작품
여인
미당 서정주의 글에 운보 김기창의 사군자라...............
풍경
강가에서
운보 김기창의 동상
조각 공원
운보의 집에서 나와 우리는 남으로 차를 달려 청원군 문의면 대청댐 부근에 있는 과거 대통령 별장이었던 청남대로 갔다. 청남대 매표소가 있는 문의까지 와서 차를 세우고 이 셔틀 겸용버스를 타고 청남대로 들어간다.
청남대에 도착했다. 겨울이라 관광객이 크게 없다. 꽃피는 봄에는 인산인해를 이룰건데...................
청남대는 충청북도 청원군 대청댐 부근 약 55만 평에 지은 대통령 전용 별장으로 '남쪽에 있는 청와대'라는 의미이다.
제5공화국 때 지은 것이다. 하긴 전두환이 말고는 누가 저런 거대한 시설을 지었을까? 대통령의 별장은 이승만 대통령 시절부터 김해를 비롯해 4군데가 있었으나, 김영삼 대통령 시절 모두 폐쇄하고 청남대 한 곳만 남겼다.
그동안 청남대의 전경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지다가 1999년 7월 1일 사진이 처음 공개되었다. 청남대는 김영삼 대통령이 공식휴가나 비공식적인 휴식을 위한 장소로 자주 애용하기 시작해 현재는 대통령이 휴가를 보내는 전용 휴양지로 정착되었다. 이런 이유로 대통령의 청남대에서의 휴가기간이 끝나면 새로운 정국구상이 있을 거라는 의미에서 '청남대 구상'이라는 정치용어가 생기기도 했다. 그밖에 청남대에서 국빈을 영접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들어선 뒤인 2003년 4월 18일 청남대는 20여 년간의 베일을 벗고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되었다. 어떻게 보면 국민들의 혈세로 저런 시설을 지은 전두환이가 국민들한테 욕 좀 먹으라고 노무현이가 의도적으로 개방한 것 같다. 아니나 다를까 같이 가는 선생님들은 거의가 시발시발.....이었다. 세금 내었더니 이런 사용의 호화판 시설을 지었다고..........
청남대 본 건물
대통령 가족이 휴양 중 식사를 하던 식당
휴게실
대통령 가족 거실
회의실
본관 뒤 정원. 봄이면 꽃으로 만발할건데..............
정원 끝 오각정으로 가니 대청호가 내려다 보인다. 청남대는 일일이 다 기록하지 않는다. 열 받는 부분도 있지만 이런 것도 역사의 한 장소이다. 그저 그대로 보고 과거를 반성해보면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