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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불교: 동아시아 불교의 맥락에서 (성원스님 영어본을 번역)
7. 국가불교: 동아시아 불교의 맥락에서 성원스님께서 영어로 쓰고 한창호가 한글로 번역함
불교는 후한 (後漢) 왕조(25-220)의 황제 명(明 r. 58-75)이 통치하는 동안 중국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220년에 후한이 멸망한 뒤, 수왕조가 천하를 통일한 589년까지 중국에서는 오랫 동안 혼란스런 분열의 시대가 지속되었다. 대개 터키와 티벳 혈통인 비(非)중국계 통치자들은 단명했던 왕조를 세워, 316년부터 300년이 채 되지 않는 동안 북중국에서 토착 중국인들을 통치했다. 이에 중국 지식인, 관료, 식견있는 승려 들은 북중국을 떠나 남중국으로 가 문명화되지 않은 그곳에다 자기네 고유의 문명을 이식했다.
추방당한 중국인들은 남중국에 동진 왕조(317-420)를 세우곤, 북중국의 서진 왕조(265-316)의 진정한 계승자로 자처했다. 중국의 유교와 도교로부터 비교적 강한 영향을 받았으므로, 불교 승려들은 “불교와 중국적 학문 모두를 강조해 철학적 토론, 문학활동, 도교 사상과 불교 사상의 결합, 승려와 중국 문화 엘리트 간의 원활한 교류에 주력했다.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황제 세력이 취약했으므로, 승가는 세속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주장할 수 있었다.”
인도불교는 종교와 국가간의 분리를 꽤 잘 유지했다. 승려들은 국가의 율령이 아니라 계율에 토대해 승가 공동체를 관할했다. 국가는 승가 공동체에 자치적 통치권을 부여했다. 국가의 통치자들은 하류계급 출신 승려조차 존경했다. 하지만 중국 관료들은 전통 유교이념에 토대해 종교와 국가 간 분리라는 인도(India)적 개념에 강력히 반대했다. 유교는 이념적으로 법률, 정치, 외교, 종교, 교육, 의례 등을 포함하는 모든 영역에서 나라를 통치할 권위를 오직 통치자에게만 부여했다. 그리하여 유학자들은 심지어 황제를 하늘의 아들로까지 일컬을 정도였다. 유학자들은 종교를 정치에 복속시켰던 것이다.
유교적 관료인 우평(宇平; Yu Ping)과 환현(桓玄; Huan Xuan)은 불교의 치외법권적 지위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 불교 조직을 정부의 직접 통제 하에 두고자 했다. 신실한 재가자인 호충과 저명한 승려 혜원(慧遠, 334-416)은 승가 공동체와 나라 간의 분리된 지위를 옹호했다. 특히 유명한 저서 사문불경왕자론(沙門不敬王者論: 승려는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을 편 논서)에서, 혜원은 불교를 두 집단으로 나누었다. 즉 재가자 집단과 승려 집단이 그것이다. 혜원은 재가자는 세속에서 불교 가르침을 따르기 때문에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지만, 승려는 세속을 초월해 있어 세속 일과 무관하므로 통치자에게 경의를 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불교 승가 공동체가 꽤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독립적 지위를 확보한 남중국에서와는 달리, 많은 비중국계 통치자들은 북중국에서 정치적 목적으로 불교를 활용했다. 북중국에서 활약한 저명한 승려 다수가 정치군사적 고문 역할을 했다. 불도징(佛圖澄, 232-348), 담무참(曇無懺, 385-433) 같은 승려는 불교를 전파하고 대중화시키기 위해 통치자와 국민들에게 마술적 기교까지 부렸다. 그래서인지 이따금 불교는 국교(國敎)로서도 이바지 했다. 그리하여 비(非)중국계 통치자들은 비(非)중국적 기원을 지닌 불교에 강한 호감과 공감을 드러냈다. 자기네 역시 중국 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비중국계 인사들은 자기네를 야만족으로 취급하는, 중국에 기원을 둔 보수적 유학을 추종하기가 개운치 않았다. 그들은 유학에 대한 강한 적대감 속에서 불교를 포용했다.
투르크족일 가능성이 있는, 북위(北魏, 386-534) 건국자 도무제(道武帝 r, 386-409)는 법과(法果)를 국사(國師)로 임명해 승가 공동체에 대해 행정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하게 했다. 불교 교리에 따르면, 승려는 정부 관리로서 세속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으며, 황제에게 예를 표해서도 안되었다. 하지만 그와는 정반대로 법과는, 황제 도무제는 통치자가 아니라 부처이므로 자신이 예를 표할 때는 세속 통치자가 아니라 부처로서의 황제에게 그러는 것이라 강변하기까지 했다.
같은 왕조의 황제 문성제(文成帝 r. 452-465)는 아마 460년에 사망했을 사현(師賢)을 국사로 임명해 승가의 관료적 체계를 확립했다. 승려를 통제하는 최고위급 정부 관공서는 ‘지안푸카오’(관리의 덕성을 관찰하는 관공서)였다. 이 관직의 보좌관은 도유나(都維那)라 불렸다. 정부는 ‘셍카오’(승가를 관장하는 관공서)라 불리는 지방관청을 여러 지방에 설치했고, 국통(國統)이 주사문통(州沙門統)이라 불리는 지방의 승려 수장과 보좌관인 유나(維那)를 임명했다. 정부는 불교를 아주 순조롭게 통제하기 위해 승가 공동체와 사찰을 관료화시켰다. 사현으로부터 관료제적 불교 모델을 본따, 담요(曇曜)는 중앙집권적 정부 통제 하에 불교 사찰과 불교 활동을 더욱 관료제적으로 만들었다.
중국 분열의 시기 동안 불교가 급속하게 성장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불교는 유학자들이 유교 이념으로 이상화시켰던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가 해소되자 유행하게 되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자기네 전통 사회의 윤리이자 정치이념인 유학의 대안으로 불교를 상정했던 것이다.불교와 유학은 다음과 같이 여러 측면에서 모순적이다. (1) 불교의 수도원적 금욕제도는 유교의 가족주의와 상반된다. (2) 불교가 국가와 종교 간의 분리를 뒷받침하는 반면에, 유교는 종교가 국가에 종속된다고 생각한다. (3) 이론적으로 평등사회를 옹호하는 불교는, 위계적으로 구조화된 불평등한 사회를 이론화하는 유교와 대비된다. (4) 세상이 고통으로 가득 차 있다는 불교적 견해는, 세상이 조화로운 행복으로 가득하다는 유교적 견해와 상반된다.
둘째로, 주문을 외고 점치는 일이 포함되었던 정교한 의례를 거행하는 불교 승려들은, 특히 북중국에서 대중과 통치집단에게 불교 전통을 유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불교 승려들은 주술적 능력을 활용해 국가를 뒷받침했고, 그 보상으로 국가로부터 든든한 지원을 받았다.
셋째로, 계속되는 전쟁 동안 군역과 노역을 피하려는 많은 이들이 불교 승려가 되었다. 승려집단에 합세하게 되자, 그들은 정부가 부과하는 세속적 규칙과 조세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었다.
넷째로, 정치 영역에서 지식과 재능을 선보일 기회를 얻을 수 없었던 많은 지식인과 학자 들이 불교에 의지했다. 그들은 문제많은 당대 사회로부터 물러나 불교의 이론(지식과 연구)과 실천(참선) 속에서 정신적 평정과 행복을 추구했다. 상층계급 역시, 특히 남중국에서 형이상학적이고 신비적인 쟁점에 관해 불교도와 대화하기를 즐겼다.
다섯째로, 불교는 험난한 시기에 매우 잘 적응했다. (1) 유교는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에서 백성들의 종교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다. (2) 불교의 업설(業說)은 억압받고 희망을 잃은 사람들이 적어도 미래에 대해서나마 다시금 희망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이런 사상에 따르면, 만일 사람들이 건실한 행동을 할 경우, 좀 더 나은 처지로 환생한다고 했다. (3) 불성(佛性)에 관한 교리 역시 모든 존재가 성불하고 구원을 얻을 가능성을 제공했다. (4) 보통 사람들에게 손쉬운 실제적 기법과 구원을 제공한 정토불교로 인해 불교가 대중화되었다.
북주(北周, 557-589)의 장군이자 수(隋, 581-618)나라 건국자 문제(文帝 r. 581-604)는 북쪽에 있던 나라를 대체하고 남쪽의 진(陳, 557-589)을 정복함으로써 300년 이상의 오랜 분열의 시기를 마감하고 마침내 전중국을 통일했다. 문제는 통치년간에 여러 차례 불교진흥을 위해 칙령을 반포했다. 문황제는 불교도가 지방에 45개 국영 사찰을 짓도록 도왔다. 황제는 또한 다섯 군데 신령스런 산에 불교사찰을 건립하도록 포고령을 내렸고, 이 사찰들을 지원하고 유지하기 위해 토지를 헌납했다.
남중국과 북중국을 통일한 뒤, 문제는 통일된 나라의 이념으로 불교를 활용했다. 문제는 스스로를 불교 전통에서 말하는 전륜성왕으로 자리매김하고자 애썼다. “수문제의 동기는 아주 분명했다. 그는 모든 계층이 성스러운 유적을 경배하는 미덕을 공유하길 바랬다. 탑은 황제의 불교 지원을 상징했으므로, 경치가 특별히 뛰어난 자리에 건립되었다. 관리와 승려 들이 참여한 가운데 탑의 제막과 동시에 유물이 봉안될 무렵, 문제는 온 제국이 불교를 받드는 가운데 통일된다는 사상을 전달하고 싶어했다.”
수양제(隋煬帝 r. 604-617)는 아버지를 살해한 뒤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처럼 양제도 역시 독실한 불교도로 여러 측면에서 불교를 지원했다. 양제는 거대한 건설공사를 벌였다. 두 개의 수도인 장안과 낙양을 운하로 잇는 공사였다. 장안은 북쪽 수도였고, 낙양은 남쪽 지방 양자강 계곡에 위치했다. 양제는 수도 두 군데를 유지하면서 두 곳에다 왕궁을 짓기 위해 백성들에게 세금을 부과했고 재산을 요구했다. 또한 문제는 고구려에 맞서 세 차례 군사작전(37 BCE - 668 CE)을 벌여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백성들에 대한 부담의 강요와 연이은 패전으로 말미암아 수왕조는 618년에 종말을 고했다. 그 뒤 불교는 국가 공식 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했다.당(唐, 618-907) 왕조가 이전 수 왕조가 건립했던 통일 국가를 계승했다. 당나라 건국자는, 자기 집안이 전설적 도교 창시자인 노자의 직계 후손이라 천명했다. 자연스럽게 당왕조는 도교에 호의적이었고, 또한 다른 종교들도 꽤 잘 대접했다. 즉 네스트리우스교, 이슬람교, 마니교와 같은 새로이 수입된 종교와 불교나 유교 같은 정착된 종교를 잘 대접했던 것이다.
불교는 황족으로부터 보통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전계급 사이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지녔다. 중국 불교도는 과거와 당시 번역가들이 소개한 수많은 번역된 경전을 자기네 전통의 일부로 삼아, 불교를 자기네 고유의 토양 위에서 중국화시켰다. 중국 불교도는 자기네 고유의 불교 전통, 교리와 실천을 창출해내었다. 예를 들어 선종, 천태종, 화엄종, 정토종 등이 그렇다. 당왕조에서는 정부가 불교를 강력하게 감독하고 통제했다. 당왕조는 승가의 관리들을 국가 공무원의 통제 아래 두었다. “이전 왕조 치하에서는 살인과 같은 중한 범죄로 기소된 승려들이 국가에 의해 재판을 받았지만, 사소한 위반을 저지른 승려들은 승려법의 심판을 받았다. 하지만 당나라 치하에서는 조금이라도 범죄를 저지른 승려는 일반 민법의 심판을 받았다.”
동아시아 불교도는 자기네 종교의 이름으로 호국이념을 실천했다. 그리하여 심지어 인왕호국반야경 (仁王護國般若經: 자비로운 통치자들이 국가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한 지혜의 경전. 줄여서 인왕경이라 함)이라는 제목이 붙은, 출처가 불분명한 경전을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그들은 법화경과 금강명경(金光明経)과 더불어 인왕경을 독송하곤 했다. 특히 자기네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의식을 거행하면서 그렇게 했다. 이 세 경전은 동아시아 불교에서 나라를 지켜주는 주요한 3대 경전으로 꼽힌다.
만일 통치자와 백성 들이 인왕경에서 ‘호국품(護國品)’과 금강명경에서 ‘사천왕호국품 (四天王護國品)’을 암송하면, 칠난(七難)을 없애고 나라를 편안케 할 수 있으며 외적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낼 수 있다는 믿음이 유포되었다. 중국 불교도는 남북조 시대(386-589)라는 중국불교 초기 역사로부터 이 두 가지 경전을 자주 암송했고, 이에 관한 법문이 활발히 행해졌다. 남조와 북조 간의 혼란스럽고 끝없는 전쟁으로 인해 이 두 경전은 더욱 인기를 끌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으로 된 불교도는 자기네 나라를 수호하고자 이 두 경전에 의지했다. 많은 저명한 승려들이 이 경전을 주석했고, 나라를 보호하기 위한 의례를 거행했다.
수나라와 당나라 시대(581-907)에 통치자들은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했다. 이곳에서 불교도는 특별히 나라의 번영과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예를 들어 당 태종(r. 626-649)이 반포한 칙령에 따르면, 승려들은 죽은 영웅들을 위한 위령제를 열어야 하고, 풍작을 위해 기원해야 하며, 인왕경과 대운경(大雲經)을 암송하여 제국의 번영과 안전을 위해 기도해야 했다. 태종은 또한 제국의 영적 안녕을 위해 신령스런 산에 소재한 주요 사찰 일부를 후원하기도 했다. 당 고종(r. 649-683)은 국가에서 후원하는 국분사(國分寺)라 불리는 사찰을 각 지방 행정구역에 설립해, 승려들이 이 사찰에 머물면서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기도하고 황제의 덕성을 백성들에게 널리 전하게 했다.
당 무후(武后: 684-705)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니, 행정을 장악하기 이전에조차 용문석굴(龍門石窟)에 다양한 불상을 조각하도록 뒷받침했다. 무후는 여성이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데 차별을 두는 유교가 아니라 불교를 빌어 자신의 국정 지배를 정당화했다. 무후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운경(大雲經)을 활용했다. 대운경에는 두 가지 번역본이 있는데, 하나는 축불념(竺佛念)의 번역이고 다른 하나는 담무참(曇無讖)의 번역으로 모두 37장으로 이루어졌다. 자신의 권력을 이념적으로 공고히 하기 위한 무후의 칙령에 의해 어떤 한 승려나 여러 승려가 이 경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었다. 대운경에서 붓다는 대운보살이 제기하는 의문에 답하면서 가르침을 편다.
특히 담무참의 번역본 제 4권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그녀가 과거세의 어느 한 붓다로부터 대반열반경을 들은 과보로 이제 (정광[淨光]이라 불리는) 여신으로 환생했지만, 속세를 초월한 붓다의 심오한 가르침을 이미 접했으므로 여신으로서의 모습을 바꿔 나라를 통치하는 전륜성왕으로 나툴 것이다.” 같은 번역본 제 6권에서 붓다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다. “내가 방편으로 열반에 든 뒤 700년 지나, 남인도의 작은 왕국 출신 젱장이라는 공주가 부왕이 사망한 뒤 왕권을 승계해 점차 온 세상을 통치하게 될 것이다. 나라를 통치하면서 여황제는 자기 나라에 불교를 유포해 백성들을 불교로 교육할 것이다.” 붓다는 심지어 이 여황제가 젱장이라는 이름의 붓다가 되리라 예언하기까지 했다. 이 여성 통치자는 백성들의 정신적 훈육을 위해 대운경을 활용했고, 20년 동안 대운경을 읽고 사경한 공덕으로 여성의 몸체로 바뀔 수 있었다 한다.
무후는 국가적 차원에서 대운경을 배포했고, 전국에 걸쳐 각 지방에 대운사(大雲寺)를 건립했다. 자신의 부당한 왕위계승을 정당화하고, 여성 통치자로서 주(周)라 불리는 새로운 왕조의 설립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다. 이념적으로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얻어내기 위해 회의(懷義)를 비롯한 승려들은 당시 유행하던 미륵신앙을 활용해, 장차 오게 될 미륵불이 범속한 세상에 환생한 존재가 무후라고까지 주장했다. 무후는 691년의 황제 칙령에서 도교에 비해 불교를 우위에 두었으니, 도교를 선호하던 당나라의 이전 통치자들이 재위 기간 실행했던 종교 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당 중종(中宗 r. 683-710)은 무후로부터 왕권을 되찾아 705년에 당 왕조를 부활시켰다. 중종은 불교와 도교를 평등하게 대하려 애썼고, 모든 지방 행정구역에 건립된 사찰 이름인 중흥사(中興寺)를 707년에 용흥사(龍興寺)로 바꾸었다.
당 예종(睿宗 r. 710-712)은 모든 황실 의례에서 불교와 도교를 똑같이 예우하기 위해 711년에 포고령을 반포했다. 한편, 현종(玄宗 r. 712-756)은 불교에 비해 도교를 우위에 두어 백성들에게 도교 경전을 읽도록 권장했다. 그렇기는 해도, 현종이 불교를 차별하지는 않았고, 당시 공공 사찰인 용흥사에 덧붙여 전국 모든 행정구역에 개원사(開元寺)를 건립했다. 현종은 불교도로 하여금 두 군데 공식 사찰에서 나라의 수호를 위해 기도하게 했다. 그리하여 당시 불교도는 다양한 호국적 불교 의례와 의식을 거행했다. 현종은 또한 불교를 정부 관리 지배 하에 두고자 했다.
반면에 당 무종(武宗 r. 840-846)은 불교 탄압의 선봉에 섰다. 무종에 의해 자행된 저 유명한 불교박해인 회창법란(會昌法難)의 요인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첫째, 이념적 차원에서 도교 신봉자들이 불교도에 대해 오랫동안 반감을 품었다. 둘째, 주요한 두 정치 집단 중 하나인 유교적 관리들이 황제의 불교 탄압조치에 편을 들었던 반면에, 또 다른 정치 집단인 환관들은 불교 수호를 위해 불교측을 지지했다. 셋째, 경제적으로 보아 황제는 엄청난 면세특권을 누리는 사찰 토지와 재산을 자기 잇속에 맞게 활용하고 싶어해, 면세 혜택을 보는 선원에 세금을 매기고자 했다.
무종은 845년의 네 번째 달에 행정관청에 명을 내려 선원과 사찰 수를 조사하게 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사찰 수가 대략 4600개였고, 선원 수는 26만 5000개 이상이었다. 무종은 같은 해 다섯 번째 달에 두 개의 수도 각각에 소재한 사찰 네 군데와 각 군과 현에 위치한 사찰 한 군데를 제외하고 모든 사찰을 파괴하라는 칙령을 반포했다. 각 수도의 사찰 및 군과 현의 사찰에 단지 30명의 승려만 살 수 있었고, 중간 규모 사찰에는 10명의 승려가, 소규모 사찰에는 5명의 승려가 살 수 있었다. 위에 언급된 비구와 비구니를 제외한 모든 승려는 승복을 벗어야 했다. 또한 무종은 청동불상과 동종은 동전 재료로 삼게 했고, 철불상은 농업용구 재료로 삼게 했으며 금, 은, 비취로 된 불상은 정부에 양도하도록 명령했다. 무종은 845년의 여덟 번째 달에 칙령을 반포해 불교탄압의 결연한 의지를 천명했다.
당 무종은 846년 세 번째 달에 질병으로 사망했다. 두 달 뒤 당 선종(宣宗 r 846-859)은 12명의 도교 성직자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이들 중에는 불교를 박해하는 데 협력했던 주요 인물인 자오 구에이젠, 류 수안징, 덩 얀차오가 포함되었다. 선종은 이전 황제인 무종이 실행했던 불교에 대한 적대적 억압조치를 폐지하고, 불교에 호의적인 조치를 취했다. 847년 세 번째 달에 선종은 845년부터 시작된 박해로부터 불교를 다시 활성화시키고자 칙령을 반포했다.불교 박해는 중국불교 역사에서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회창법란은 중국에서 가장 광범위한 불교 박해였다. 446년에 북위에 의한 불교 억압과 574년과 577년 사이에 북주에 의한 불교 억압은 중국 북부 지역에 한정되었다. 그렇지만 회창법란 이후, 불교와 국가 간의 연관성은 갈수록 약화되었다. 불교가 지닌 지적이고 학문적 분위기는 급격하게 퇴색했고, 오직 선불교와 정토불교라는 두 가지 형태의 실질적 불교만이 계속 보존되어 현대에 이르기까지 번창했다.
불교도, 특히 한국 불교도는 침략국에 맞서 싸워 나라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을 지녔다. 심지어 승려들도 자발적으로 군인이 되어 침략국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중세 일본에서 수행자와 재가자 들을 포함한 불교도는 자신들의 분파적이고 정치적 목적을 위해 끊임없이 폭력과 전쟁을 일삼았다. 불교도, 특히 현대 일본 불교도는 이웃 나라에 대한 일본의 공격을 정당화했고, 침략 전쟁에 참여했다. 일본 불교도는 이를 방어적 입장에서 설명한다. 즉 불교가 호국이념으로서 이바지했다 하면서, 나라와 국민을 보호하는 종교로서의 불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다.
종교와 국가 간의 분리라는 원칙을 어긴 채 많은 승려들이, 심지어 정부 관료집단으로까지 합세해 통치 활동을 수행했다. 활동의 정당성 여부와는 상관없이, 승려들은 통치자들의 행복, 번영, 장수를 위해 기도했다. 승려들은 불공정한 자기네 활동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동아시아에서 몇몇 통치자는 정부 차원에서 선원에다 관료체계를 세워 국가고문, 황실고문, 심지어 하급 선원 관료직까지 임명했고, 불교를 자기네 감독 아래 두고자 했다. 불교도는 피압박 대중의 목소리를 경청하지 않은 채, 지위와 권력의 확보 및 유지를 위해 정부를 지원했다. 나아가 불교도는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를 갈망하는 백성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무력화시키는 데 협조했다.현대에 들어 일본이 이웃 나라들을 침략했을 때, 소수 불교도가 부정의한 전쟁에 반대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대다수 일본 불교도는 침묵을 지키거나 마지 못해서든 적극적으로든 전쟁을 지원했다. 한편, 일제 식민지 시기에 소수 불교도가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반대해 시위를 벌였지만, 대다수 한국 불교도는 전쟁에 대해 계속 침묵을 지키거나 소극적으로나 적극적으로 전쟁을 지원했다.
우리는, 동아시아 불교도가 일반적으로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수용했던 관료주의, 국수주의, 애국주의에 의문을 제기해야만 한다. 방어적 싸움이라 해도 불교에서 폭력과 전쟁을 일삼는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불교에 따르면, 국수주의와 애국주의가 정당하게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자랑스럽게 자기네 나라를 보호하기 위해 폭력과 살인을 일삼았던 많은 승려와 재가자 들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적어도 한국과 일본에서 동아시아 불교도는 그런 인물들을 심지어 존경하고 민족적 영웅으로까지 여긴다. 그들의 주장이 원래의 근본적 불교 가르침에 비추어 합당하고 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8. 화해: 현대 한국불교의 사례 1910년에 일본은 한국을 병합했고, 1911년에 일본 총독부는 사찰령을 제정해 효과적으로 한국불교를 식민지화했다. 사찰령은 일제 점령기간(1910-45) 동안 현대 한국불교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고, 현재까지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이 법령을 완전히 묵인하면서 1962년에 불교재산 관리법을 통과시켜, 한국 불교사찰의 모든 재산을 독재자 박정희의 통제 아래 두었다. 진보적 불교 활동가들이 ‘민중 (해방) 불교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비민주적 법률에 맞서 항거했기 때문에, 정부는 이 법률을 1987년에 전통사찰 보존법으로 대체했다. 정부의 통제 범위가 모든 불교 사찰로부터 전통 사찰로 축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한국 정부는 여전히 한국 불교도의 반대를 회유하기 위해 끊임없이 법률을 개정하는 식으로 한국불교를 교묘히 조종하고자 비민주적 법률을 강요하고 있다.
사찰령에 토대해 일본 식민정부는 한국의 모든 불교 사찰을 관료제적 위계질서 하에 조직했고, 본부 사찰과 각각의 말사(末寺) 간의 수직적 관계가 엄격하게 유지되는 30개 교구 본사 체제를 확립했다. 일본 총독부는 한국불교를 용이하게 통치하고자 주지를 승인했는데, 이는 선원 구성원들의 만장일치로 된 추천에 따라 주지가 임명되는 한국불교 전통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30개 교구 본사의 정관과 부칙 역시 총독부 승인을 받아야 했다. 또한 사찰령 규정에 따르면, 모든 한국 사찰은 자세한 사찰 업무를 총독부에 보고해야만 했다.
일본 대학에서 불교 연구과정을 공부하는 동안이나 공부를 마친 뒤, 많은 한국 수행자가 결혼했다. 일본 불교의 대처승 제도 영향 탓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30개 교구 본사가 결혼한 친일본적 승려들이 주지가 될 수 있도록 정관과 부칙을 변경하도록 권장했다. 친일 승려들을 통해 일본이 한국불교를 순조롭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지직이 총독부에 의해 승인되었기 때문에, 총독부 뜻에 충실히 따르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주의깊고 지각있는 행동처럼 여겨졌다. 결혼한 승려들은 또한 자기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사찰 재산을 사유화했다. 요컨대, 일본에서 유래한 대처승 제도로 인해 한국의 전통적 독신 승가가 파괴되었고 선원 재산이 상실되었다.
이에 맞서 한국의 진보적 활동가들은 한국불교의 사찰과 재산을 일본이 관리하는 데 반발했다. 1920년대 초반, 즉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한 1919년 3월 1일의 대규모 궐기 바로 직후에 진보적 활동가들은, 일본 총독부가 사찰령과 교구 본사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찰령을 무효화시키는 데 성공하지는 못했다. 친일 주지들과 일본 식민정부가 그런 움직임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참선 수행자들은 3.1 운동 직후 1920년에 참선 연구원을 개원해, 한국불교의 독신 전통과 그밖의 한국 선불교의 관례를 회복하고자 애썼다.
일본으로부터 독립된 이후 남한 불교 역사에는 두 가지 주요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시대순으로 보면 ‘불교정화 운동’이 맨처음 등장했고, 이어 민중불교 운동이 출현했다. 불교정화 운동은 1954년에 시작되어 1962년 무렵 대체로 종결되었다. 이 운동은 한국에서 일본불교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불교 종단을 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 운동은 초대 남한 대통령 이승만의 행정명령으로부터 시작되어, 전통 선원에서 대처승을 몰아냈다. 본질적으로 한국불교 종단은 일본 정부에 의해 일본화될 때까지는 독신 계율을 줄곧 지켜왔던 터였지만,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지 시기 동안 상당한 정도로 왜색화되었다. 이 시기 일본 총독은 한국 불교종단에 대한 지배를 용이하게 하고자 강제로 한국불교 승려들로 하여금 결혼하게 만들었다.
1955년 8월 12-13일에 열린 전국 승가대회 뒤, 독신 승려들이 종단에서 지도력을 획득했다. 지도력을 상실한 대처승들은 독신 승려들의 지도력에 강하게 반발했다. 두 집단 간의 대치국면은 1962년 4월에 통합종단이 설립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대처승 측은 통합종단을 박차고 나왔다. 1962년 9월에 독신 승려측이 시행한 차별 조치 때문이었다.대법원은 대처승 측과 독신 승려 측 간의 길고도 지리한 법적 절차에 종지부를 찍어, 1969년에 일본화된 대처불교가 아닌 정화불교의 종권을 인정했다. 이에 대처승들은 태고종이라 불리는 새로운 독립종단을 세웠고, 1970년에 정부는 불교재산관리법에 토대한 새로운 종단 등록을 인가했다.
정화불교에는 두 가지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우선, 일본불교의 대처승 제도로부터 한국불교의 독신 승가 전통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대처승들이 자기네 가족을 재정적으로 부양하기 위해 사찰 재산을 사유화했기 때문이고, 불교 내에서 더욱 높은 지위를 획득하고 유지하기 위해 임명권자인 일본 관리들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이다.정화불교의 두 번째 임무는 한국불교의 참선수행 전통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참선 수행자들은 수행할 절을 상실했다. 결혼한 주지와 종단 고위 행정 책임자들이 그 당시 한국의 거의 모든 사찰을 관할했기 때문이다. 정화운동은 엄밀하게 참선 수행의 정신을 보여주었다. 참선 수행자들은 이런 맥락에서 정화불교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불교정화 운동의 특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로, 이 운동은 국가의 지원에 크게 의존했다.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대통령이 이 운동을 적극 지원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1일과 1955년 8월5일 사이에 6차례 유시(諭示)를 발표함으로써 불교정화 운동을 선도했다. 박정희 대통령도 불교정화 운동을 지원하는 성명을 여러 차례 발표했다. 둘째로, 이 운동은 헌법에 명시된 정교(政敎)분리 원칙을 어겼다. 이승만 대통령은 1954년 5월 21일의 대통령 유시를 통해 불교정화 운동을 선도했다. 유시에 앞서 한국 불교도가 불교계 정화를 위해 애썼지만,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첫 유시 이후, 정부 행정 부처들이 종교업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셋째로, 대처승 집단과 독신승려 집단은 제각기 자기네 이해관계에 기반해 다른 식으로 불교 종단을 정의했다. 독신승려들은 전통 불교종단이 고수해왔던 선원 청규(淸規)에 기반해 종단을 보수적으로 규정했다. 한편, 대처승들은 종단이 세속적 삶으로 산란해지지 않은 상태로 수행과 깨달음에 집중하는 독신 승려들과, 세속적 삶을 통해 불교 포교에 초점을 맞추는 대처승들의 조합이 될 수 있지 않느냐고 제안했다.
넷째로, 불교정화 운동 과정은 법원과 국가의 중재에 지나치게 의존했다. 두 집단은 자기네 활동 양식에 대한 지지를 얻기 위해 각자의 주장을 법원과 국가에 내세웠다. 법원과 국가는 대체로 독신승려 쪽에 우호적이었다. 한국불교는 재산과 돈을 소송 비용으로 소모했다. 그 과정에서 한국불교는 친정부적 종교로 되었고, 자연히 정부 지지를 천명했다. 한국불교는 비민주적 정권의 사회적 부정의를 방관했다. 그러는 사이 정부는 두 개의 불교 집단 간의 갈등을 자기네 목적에 맞게 조종했다.
다섯째로, 양측의 활동 양식이 비(非)불교적이었다. 폭력이 행사되었고, 자기 배를 가르고 법정으로 난입하는 이들까지 등장했으며, 불교 승가의 화합이 전면적으로 깨졌다. 반대측을 공격해 사찰을 차지하고자, 심지어 강패를 고용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불교정화라는 목표가 정당화될 수 있을지라도, 정화를 주도한 측이 채택한 방법은 불교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었다. 불교는 불자들의 폭력을 엄격히 금지하기 때문이다.
불교정화 운동의 목표가 일본의 영향력으로부터 선원 질서를 회복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운동은 기본적으로 종교적 영역 내부로부터 한국불교를 개혁하고자 시도한 셈이다. 그런데 이와 대조적으로 민중불교 운동은 인권, 정의, 평화, 노동, 민주주의, 통일 등의 보편적 쟁점을 도입함으로써 근본적으로 사회 안에 일종의 정토(淨土)를 건설하려는 한 시도였다.이하에서 필자는 민중불교 운동을 그 역사, 발전, 의미의 견지에서 한국불교와 한국사회라는 더욱 커다란 맥락 안에서 논의한다. 필자는 또한 두 운동이 언제, 어떻게 서로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지도 기술한다. 민중불교가 사회참여 운동이었던 반면, 정화불교는 사회적 쟁점에 무관심했다. 정화불교는 정부 지원에 기반해 성공을 거두었으므로, 자연히 정부 통제 아래 제도권화되었다.
‘민중’이란 말은 ‘대중’, ‘사람들’, ‘서민들’을 뜻하는데, 피압박 계급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민중불교는 특별한 사회적·정치적·종교적 목적 달성을 목표로 하는 집단적이고 지속적으로 활동하는 하나의 운동으로 되었다. 민중불교 운동은 현대 한국불교에서 대표적 운동으로서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민중불교 운동은 1980년대에 진보적 종교운동으로서 가장 커다란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럼에도 1990년대 초 이래로 민중불교가 쇠퇴한 데는 두 가지 주된 이유가 있다. 하나는 국제적 상황, 즉 동유럽 공산주의 블럭과 소련의 경제적·정치적 붕괴로부터 연유한다. 민중불교는 그 이론과 실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에 빚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동유럽 공산주의 블럭이 붕괴되자, 민중불교는 가장 중요한 본보기 중 하나를 상실한 처지가 되었다.
민중불교 쇠퇴의 두 번째 이유는 국내 상황과 관련된다. 설혹 보수적 통치 진영과의 협력을 통해서긴 해도, 1992년에 만년 야당 지도자 김영삼이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많은 한국 지식인들이 김영삼의 대통령 선거 승리를 독재타도라는 관점에서 불완전하게 여겼지만, 어쨌든 정권교체를 통해 국회밖의 수단을 통한 민주주의 요구의 필요성은 명백히 감소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뒤 김영삼은 내각과 여당 내 중요 직책을 맡기기 위해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야당 지도자들을 불러들였다. 김영삼의 조치들을 통해 행정의 많은 영역에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장기 집권해 온 보수집단의 권력 기반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설사 김영삼이 보수집단의 지지에 의해 선출되었다 해도, 변화의 폭은 컸다. 김영삼의 목표는 보수 정객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사업가, 관료, 은행가 들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통치 세력 내에 강력한 민주적 주도권 확립을 위해서였다.
민중불교가 지닌 특징의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우선, 민중불교는 전통불교나 제도권 불교에 대해 예리하게 비판적 거리를 유지한다. 이런 측면에서 민중불교의 비판적 시각은 주로 이론이나 교리 그 자체와 대비되는 실천을 겨냥한다. 민중 불교도는, 피압박 대중이 해방되지 않는다면 불교의 진정한 이상이 실현될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전통적 불자들이 현상유지를 고수하면서 이런 생각에 반대 입장을 드러낸다고 비판한다.
둘째로, 민중 불교도는 정치, 경제, 사회내의 모순적 구조를 혁파함으로써 대중들의 실질적 고통을 경감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주요한 자기네 원리 중 하나로 계급투쟁 이념을 채택한다. 이런 이유로 민중불교적 구원의 방법은 순수히 ‘영적’ 수단에 의해 중생의 고통을 없애려 애쓰는 전통불교의 방법과 사뭇 다르다.
셋째로, 민중불교 활동가들은 전통적 교판 체계에 입각해 교리를 해석하지 않고, 현대 사회과학에 의거해 해석한다. 예를 들어 민중불교는 고통을 인간의 내적 욕망이나 무지로부터 유래하는 것으로 여기지 않고, 외적 사회구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하여 고통에 대한 그들의 해결책은 개인적 무지보다는 구조적 모순 타파에 초점을 맞춘다.
넷째로, 민중불교 활동가들은 자기네가 선진적 의식을 갖추었다 여기면서 파벌적 배타주의를 행사한다. 앞서의 가정에 입각해 그들의 노선을 따르지 않는 이들을 강하게 비판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믿는다.
다섯째로, 전통 불교도와 그밖의 학자들은 실천뿐 아니라 교리의 관점에서 민중불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민중불교가 불교냐고 의문을 제기하며, 민중불교를 새로운 불교나 이단적 불교로 간주한다. 그들은 민중불교 측한테 자기네 운동 강령을 선전하고자 폭력적 방법과 같은 비불교적 방법에 의존하지 말도록 촉구한다.
9. 맺음말 불교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이상적인 것과 실제적인 것이다. 앞서 논의되었듯이 불교는 원리상 평화를 강력히 옹호한다. 평화는 불교의 이상이다. 많은 불교도가 실제 불교와 이상적 불교 사이에서 모순을 느낄 수 있다. 불교학자와 지도자 들은 문제로 가득한 세상에 평화를 진흥시키기 위해 두 가지 서로 다른 유형의 불교에 제대로 대처해야 한다.만일 우리가 전세계에 걸쳐 불교 역사의 실제를 살펴볼 경우 쉽사리 발견할 수 있는 많은 사례들은, 불교도가 독재나 군국주의 혹은 제국주의 등과 같은 비민주적 사회구조에 매우 관용적이었던 사례와 사회정의, 인권, 불공정한 경제정책, 불평등,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국수주의 및 그밖의 문제들을 아주 심각할 정도로 무시해버린 사례들이다.
지도자들이 불교도한테 특별한 호의를 베푼다면, 불교도는 쉽사리 불공정한 정치 지도력을 수용해버린다. 요한 갤퉁에 따르면, 독재자들이 불교에 호의를 보인 나라의 사례를 아마 태국, 스리랑카, 버마, 한국 등에서 용이하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예를 들어 남한 불자인 잔혹한 독재자 박정희가 불교정화 운동을 옹호해 독신 승려들을 지원하자, 독신 승려들은 박정희의 비민주적 행태에 항의하지 않았을 뿐더러 나아가 그의 독재를 용인하기까지 했다.
전세계 불교 역사의 사례들에서 우리는 많은 부정적인 측면들, 즉 고립주의, 도피주의, 회피주의, 의식주의 등을 쉽사리 목격할 수 있다. 평화와 사회정의에 관한 자신들만의 이상적 가르침을 미시적 수준에서 선원 공동체 내로 사유화(私有化)시켜버리고, 사회적·정부적·세계적 사안의 견지에서 거시적 차원으로 그 가르침을 활성화시키지 않았던 불교 승려들의 사례가 많다. 불교도는 승가 공동체 내에서 매우 평화적이고 평등주의적인 모범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승가의 본보기를 좀 더 광범위한 맥락, 이를테면 마을, 정부, 세계, 나아가 자연에 이르기까지 확대시키려 노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정치적 평등, 민주주의, 환경보호주의, 인권, 사회정의, 세계평화 등과 같은 사회적 쟁점에 침묵을 지켜왔다.
단선적 과정이 아니라 순환적 과정을 강조하는 불교적 관점은 자칫하면 쉽사리 운명주의에 빠지게 만들 가능성이 높으며, 항상은 아니어도 불교도로 하여금 실패를 너무 쉽게 받아들이게 만든다. 역사에 대한 순환적 관점은 실패를 전제한다. 불교도는 실패와 마주쳐도 강력하게 실패를 극복하려 애쓰지 않고 쉽사리 실패에 순응해버린다. 불교도는 또한 실패해도 성공을 기대한다. 민족마다 실패에 직면할 때, 두 가지 상반되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실패에 아주 긍정적으로 응답하면서 성공을 기대하는 민족이 있고, 실패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민족이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실패에 아주 비관적으로 반응하는 민족이 있을 수 있고, 실패를 자연스런 현상으로 수용하는 민족이 있을 수 있다.
후기 대승불교에는 불성(佛性)이나 여래장(如來藏)에 관한 교리가 있다. 이 교리에 따르면, 모든 중생한테는 예외없이 불성이나 여래장이 있다. 그런데 이 교리를 상당히 존재론적 맥락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겠다. 또한 이 교리를 구제론적(救濟論的) 목적을 위해 가설적으로 필요로 되는 논리적 장치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다. 불성론이 사회적 차별, 일본풍 선호주의, 국수주의, 자민족 중심주의의 이념적 배경으로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리는 이 교리를 사회적 차별을 옹호하기 위해 활용했던 통치자들과 통치계급의 많은 역사적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또한 피압박 대중이 평등주의적인 사회적 행복, 반란 등과 같은 그들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 교리를 높이 평가했던 상반되는 역사적 사례를 들 수도 있다. 특히 삼계교(三階教)에서 그랬다.
불교도는 전세계에 걸친 불교 역사에 만연한 현실 불교의 부정적 측면들을 극복해야 하며, 구체적인 역사적·사회적 맥락에서 이상적 불교의 긍정적 측면을 현실화시켜야 한다. 불교도는 직접적이고 구조적이고 문화적인 폭력을 제거할 방법을 진지하게 탐구해야 하며, 그 결과로 불교계 내에서, 특정 사회 내에서, 나아가 일반 세상 전체를 통틀어 평화를 구축할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불교도는 불교 지도자들의 평화 활동 으로부터 몇 가지 실제적 본보기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버마인으로 과거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우탄트, 태국인으로 민주주의 지도자인 술락 시바락사, 인도에서 망명 티벳 정부의 정치적·종교적 지도자인 제 14대 달라이 라마, 스리랑카 사람인 사르보다야 쉬라마다나 산가마야,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 자두마을 공동체 지도자 틱 낫 한, 버마인이자 민주주의 지도자인 아웅 산 수 치 등등.
불교도는 또한 비불교도 지도자들로부터도 평화에 관한 귀중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인도 힌두교인이자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지도자 모한다스 K. 간디, 미국 크리스천이자 민권운동 지도자였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독일인으로 녹색당 설립자인 페트라 켈리, 남한의 퀘이커 교도이자 민주주의 지도자였던 함석헌, 남아프리카 카톨릭 주교로 민주주의 지도자인 데스몬드 투투, 인도 힌두교도이자 샨티 세나(평화군)와 비폭력 G. 라마찬드란 학교 설립자인 N. 라다크리슈난, 러시아 크리스천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소설가이자 평화 활동가였던 레오 톨스토이 등등.
또한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평화를 진작시키려 애쓰는 많은 종교 기관들로부터 평화정착 노력의 좋은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인도의 자이나 교도,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 교도, 일본의 세계평화와 인류애 협회, 프랑스의 불교 자두마을 공동체, 아프리카의 시몽 킴방구 교회, 러시아와 캐나다의 두호보르(‘영[靈]의 투사’) 평화주의자들, 미국 내 유대인 평화협회 등등이다. 매일같이 개인적인 폭력과 제도적 폭력을 다루는 많은 신문 기사가 우리 눈에 띈다. 물론 3대 아브라함의 종교들이라 할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비롯해 모든 종교들이 나름의 해답과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런지 모른다. 하지만 필자가 계속 주장하듯, 아브라함의 종교들과 전통 서구 철학자들은 만물을 상반되는 것으로 양극화시킨다. 예를 들어 검은 것과 흰 것, 선과 악, 진실과 허위, 중심과 주변, 창조주와 피조물, 인간과 자연 등등으로. 반면에 불교 교리에 따르면, 불교도는 그런 대립적인 것들을 조화시켜야 한다. 불교에는 다른 종교와 철학자 들에게 평화 구축의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는 교리가 있다.
실체없음(無我[무아]), 무상(無常), 중도(中道), 연기(緣起) 등과 같은 불교 교리는 인간 중심주의, 자아 중심주의, 계급 중심주의, 인종 중심주의, 종교 중심주의를 부정한다. 필자는 불교의 공생적(共生的) 관점이 세계에 평화공존을 가져올 강력한 이론적 수단임을 확신한다. 이런 관점에 설 때 우리는 인종, 종교, 계급의 측면에서 서로 다른 집단 간에 평화와 통일 및 협동과 화합을 이루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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