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에는 조선의 전통과 근대가 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쫓겨 도망가던 선조는 1년 만에 한양으로 돌아온다.
전란으로 궁들이 모두 불에 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거처한 곳이 월산대군의 집인 지금의 덕수궁이다.
월산대군은 세조의 며느리 수빈 한씨의 큰아들이다.
남편인 의경세자가 궁으로 들어간지 2년 만에 죽자 궁밖으로 나와야 했다.
이에 세조는 며느리에게 궁 만큼 화려한 저택을 지어 준다.
어린 나이에 남편 잃은 며느리를 안쓰러운 마음이기도 했겠지만 그녀의 아버지 한확의 공이 컸을 것이다.
세조에게 사돈인 한확은 한명회, 신숙주와 함께 계유정난(1453)을 성공시켜 자신이 왕이 되는 데 일등 공을 세운 사람이다.
더구나 명(明)나라에서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였다하여 왕으로 책봉하지 않겠다는 것을 한확이 직접 책봉사로 베이징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양위라고 설득하여 황제의 고명을 받아낸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과로로 죽음을 맞는다.
수빈 한씨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이 왕이 되자 수빈 한씨는 다시 궁으로 돌아간다.
월산대군이 정릉동 집을 지키면서 산다.
월산대군이 죽고 100여년이 지난 후, 갈 곳 없던 선조가 거처한 곳이다.
정릉에 있다 하여 '정릉행궁'이라고 했다.
정릉행궁은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경운궁으로 불린다.
아관파천 1년 후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경운궁으로 돌아온다.
국가의 자주권을 수호하고 재도약의 기틀을 마련해야 했을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침탈 위협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국 영국 러시아의 세력을 이용하려 했다.
불행히도 고종은 성공하지 못한다.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본에 의해 강제로 황위을 순종에게 물려준다.
순종은 창덕궁으로 옮겨가게 되고, 경운궁은 또다시 덕수궁으로 바뀐다.
고종은 덕수궁에서 여생을 마무리한다.
대한문을 지키고 있는 돌짐승이다.
응당 무서워야 할텐데 장난스럽게 웃고 있다.
여유롭다.
중화전이다.
1904년 4월 고종 황제의 침소인 함녕전의 온돌에서 불이 시작되어 불탔다.
본래는 2층 건물이었으나 비용 절감으로 단층으로 다시 지어졌다.
대한제국 선포와 함께 황국의 위상에 걸맞은 서양식 정궁이 필요했을 것이다.
영국인 ‘하딩’의 설계로 이오니아 양식의 신고전주의 건축물인 석조전을 1910년 완공했다.
이후 이 건물은 대한제국의 정전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3년 이후로는 미술관, 국제회의장, 박물관 등으로 사용되어 왔다.
6·25전쟁 이후부터 1986년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된다.
2014년 대한제국 당시의 가구들을 원래대로 배치해 대한제국의 역사관으로 복원되었다.
석어당은 덕수궁 내의 유일한 2층 목조건물로, 선조가 이곳에서 머물렀고, 승하한 곳이다.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 옆에서 살구가 익어가고 있다.
살구나무에 이끌려 잰 걸음으로 석어당 앞에 섰다.
등불처럼 환하게 핀 살구꽃을 마음속에 그려본다.
내가 태어난 마을은 봄이면 살구꽃으로 온 동네가 환하다 하여 화당이라는 이름이다.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이유이다.
석어당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의 마음이 봄이면 달덩이처럼 피어난 살구꽃에 더욱 싱숭하진 않았을까...
즉조당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즉조당과 복도로 연결된 준명당은 한때 고종이 거처하며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곳이다.
준명당 이름의 ‘명’자는 ‘밝을 명(明)’이 아니라 ‘눈 목(目)’과 ‘달 월(月)’이 합쳐진 ‘밝게 볼 명(眀)’이다.
덕수궁이 화제로 불타고 나서 고종이 거처한 중명전에도 ‘밝을 명(明)’이 아닌 ‘밝게 볼 명(眀)'을 썼다.
시대를 밝게 보아야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나라을 지켜낼 수 있을 거라는 굳은 의지였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커피를 마신 사람은 고종이다.
러시아 공사관에 몸을 피해 있을 때 커피맛을 안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커피를 즐긴다.
고종은 1900년 최초의 서양식 건물을 짓게 한다. 정관헌이다.
러시아인 사바친이 설계한 정관헌은 조선식 주춧돌 위에 서양식 회랑 건물을 앉힌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조석 내부 기둥이 이채롭다.
조선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긴 정자 분위기도 나고, 접견실 분위기도 나온다.
고종은 정관헌에서 커피와 음악을 즐겼다.
한때는 관료들이 가득 들어차서 정무를 논하거나 외교사절의 알현 장소이기도 했다.
을미사변 이후 생명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새벽, 고종과 세자는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을 몰래 빠져나간다.
임금이 타고 다니는 제대로 된 가마가 아니다.
궁녀의 가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여섯 달 만이다.
엄상궁은 이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궁녀의 가마를 영추문에 수시로 드나들게 한다.
그 덕에 경비병들을 속이고 경복궁을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아관파천이다.
아관은 러서아 공사관을 말하고, 파천은 피신하다라는 뜻이다.
1905년 11월17일, 일본은 한일협상조약이라 불리는 불평등 조약을 고종 앞에 내놓는다.
그날 일본은 중명전 안팎에 무장한 군인들을 배치하여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고종은 황제의 도장인 옥새 찍는 것을 끝내 거부한다.
고종을 설득하지 못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데리고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이 바로 을사늑약이다.
을사늑약의 주요한 내용은 첫째,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 업무를 지휘한다.
대한제국에는 외교권이 없다는 뜩이다.
둘째, 일본 정부는 서울에 통감부를 만들고 한 명의 통감을 두겠다.
대한제국 정치를 일본이 마음데로 간섭하겠다는 뜻이다.
사실상 국권을 상실한 것이다.
중명전의 명자처럼 세상을 밝게 볼수 있는 힘이 당시 위정자들에게 있었더라면 하는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