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무공 생각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이 충무공을 생각하면 모친인 변씨부인도 아울러 떠올리게 된다. 모친에 대한 정성이 지극해서일까. 장군은 어머니를 "천지(天只)라고 지칭했다. 난중일기에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100여회나 등장한다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에서 잘 쓰지 않는 말인데, 이는 사서삼경 중 시경(詩經)에 나오는 말이라고 한다. 이를 보면 장군은 정말 모친을 하늘로 여기고 살았던것 같다.
나는 아침이면 운동 삼아서 자전거를 타는데 그 길옆에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고 있지만 결코 의미가 적지 않은 유적지가 한 곳 있다. 바로 ‘충무공 자당 기거지’이다. 이곳에 장군께서 80가까운 노모를 모셔와 5년 남짓을 돌보신 곳이다.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공께서 정읍현감으로 있다가 잡자기 전라좌수사 직첩을 받고 여수로 부임할 때, 그곳에 모시고 있었다. 장군은 먼저 부임하면서 남은 식솔이 걱정되었다. 이때 장군 휘하에 있던 정대수군관이 효심이 지극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둘러 여수 웅천에 모시게 되었다. 이곳이 무엇보다도 안전한 곳이었다. 마을의 지형지세가 밖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고 군관 정대수 일가가 잘 돌봐주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곳의 지형지세는 구봉산 지맥이 서편으로 흘러내려서 소쿠리 형태로 감싸고 있다. 고을 지명이 웅천(熊川)인데 방언으로는 ‘곰챙이’라고도 한다. 난중일기에 보면 장군은 이곳을 이두식 표현으로 고음천(古音川)이라 적어놓고 있다.
이 마을은 공께서 집무를 보던 전라좌수영 관아와는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래서 동력선도 없던 그 시절에는 이곳을 올려면 한시간여를 노를 저어 왔을 것이다. 그런데도 난중일기에 보면 수없이 문안을 드린 기록이 보인다. 어느 때는 조석으로 방문했다고 적혀있기도 하다.
이곳 유적은 충무공 정신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곳이다. 한평생 충무공 연구에 매진한 헌법재판관 출신 김종대님은 그런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힘주어 말한다. “충무공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어머니를 빼놓을 수는 없다.”라고. 효심이 극진했음을 강조한 한편으로 우국충정의 힘이 효심에서 발휘된 것을 이르는 것이다.
기록에 보면 변씨 부인의 담대함은 과연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느 날 공께서 문안을 드리니, “진중(陣中)에 어서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씻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그 말씀을 난중일기에는 “거듭 타이르시며 조금도 석별의 말을 하지 않으셨다.”라고 기록해두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지만 공의 충정은 오롯이 이런 효심에서 발현되었다. 일대 화재를 모은 영화 명량의 한 대사에서 “무릇 장수된 자의 의리는 충을 좇아야 하고, 충은 백성을 향해야 한다. ”고 한 것도 효심 못지않게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심중에 간직하고 있었던 것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다.
그런 마음을 가졌기에 살던 곳이 적의 손아귀에 들어가 살길이 막막해진 피란민들이 장군이 있는 곳을 찾아오자 차마 내치지를 못했을 것이다. 둔전(屯田)을 일구어 살게 한 것이 좋은 본보기이다. 당시 장군을 아끼는 측근조차도 "둔전은 왕실의 소유이니 나중에 말썽이 날 수도 있다."며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그야말로 백성을 아끼는 어버이 마음으로 그들을 거둔 것이었다.
임란전쟁 7년 동안 거둔 승전은 23전 23승의 전무후무한 대기록. 여기에는 물론 장군의 뛰어난 전술전략이 적용되었지만 백성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원도 크게 한몫을 했음도 사실이다. 영화 명량에서 급물살에 빠져든 대장선을 백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한 것도 그러한 신뢰와 고마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도 섬에 산 백성들이 소를 끌고 와 바친 것은 좋은 사례이다. 그렇지만 공의 마음은 늘 편치가 않았다. 적의 위세가 강성해서가 아니라, 임금이라는 사람이 끊임없이 질투를 하고 시비를 걸며, 조정을 장악한 서인세력들도 장수를 모함하기에 바빴기 때문이다.
특히 공이 1597년 4월. 임금의 명을 거역했다며 파직시켜 도성으로 압송한 일은 어처구니가 없다. 명군이 강화교섭을 하던 중, 간자 요시라(要時羅)가 “다시 쳐들어올 움직임을 보이니 지금 막아야 한다”고 하자 출동명령을 내렸던 것인데, 이는 꼬임이 빠진 것이었다.
그런데도 임금은 간자의 말만 신뢰한 것이었다. 장군이 병력을 움직이지 않는 것은 나름의 판단이 섰기 때문이었다. 이미 부산을 적이 장악한 상태에서 그 건너편으로 진출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임금은 어명을 받들지 않았다며 장군을 문초를 하여 거의 초죽음에 이르게 했다. 그러고서도 다시 백의종군을 명한 것은 얼마나 가혹한 조처인가. 그렇지만 장군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오직 나라를 구할 일념에만 몰두했다.
한편, 아들이 압송을 당 했다는 소식을 들은 노모는 80을 넘긴 연세에도 배를 타고 아산으로 향하였다. 그러던 중 안흥량에 이르러 그만 배안에서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 분통함이 어찌했을까. 더구나 장군은 상주된 몸으로 손수 치상도 치를 수가 없었다. 그대로 고향땅을 지나쳐야만 했다. 그 비통함이 어찌했을까.
그러고서도 눈을 감기전 “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고 한 것은 나라사랑 백성사랑의 표현이었으니 어찌 그 마음을 다 헤아리랴.
장군은 전쟁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마음 편할 날이 없었다. 시기와 증오심에 가득찬 선조는 장군이 전사했다는 말을 듣고도 닷세 후에 고작 한다는 말이 “오늘은 밤이 늦었으니 내일 비변사에서 처리토록 하라”고 하였다. 그렇게 임금이라는 사람은 옹졸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견제받고 임금의 미움을 산 장군이 죽은 후의 예우는 어떠했는가. 우 리가 다 아는 지금의 충무공 시호가 내려진 것은 장군이 전사한 후 46년 후인 1644년(인조 21) 이며 영의정 추증도 1793년 정조임금에 의해 195년에야 이루어졌다. 얼마나 대접이 소홀했던 것인가. 그런 저런 일을 생각하면 장군을 홀대한 것에 대한 소회가 적지 않다.(2015)
첫댓글 충무공이순신장군의 효성과 충성심은 우리민족이 존재하는 한, 하늘에 해와 같고 달과 같고 혜성과 같이 빛날 것입니다.
충무공이순신 장군 자당 기거지인 자랑스러운 땅 여수 송현 마을 근처를 매일 자전거를 타고 건강을 지키시니 참 좋아 보입니다.
안전을 보존하시고 평안하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지나쳤습니다. 바다에서는 수영선수들이 힏든베이에서 하수종말처리까지 수영을 하고 있어서 색다른 구경을 했습니다. 충무공 자당 유적지를 잘 개발하여 여수의 관경명소가 되도록 했으면 합니다.
충과 효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본을 보여주신 분이 충무공 이순신장군이 아닌가 싶습니다. 후대들이 본을 받아 그분의 충효의 반에 반만이라도 따를 수 있다면 이 나라는 더욱 부강한 나라가 될 것이라 믿습니다. 충구공유적지를 매일 아침 거닐며 그런 마음을 다지시는 선생님의 일상이 부럽습니다.
자전거를 탈때는 매일 그옆을 지내다녔습니다. 여수는 이충무공의 유적지가 많은데 앞으로 잘 보존하여 후손에게 그 정신을 물러주어야 할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