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일시 : 2009. 10월 07일(수)/운행거리 :18.8km/운행시간 : 08:10 날씨 : 비, 강풍
운행구간 : 인제군 북면 용대삼거리~백담계곡 백담사~영시암~구곡담계곡 쌍폭~봉정암
운행경로 : 용대삼거리 09:30~백담산장10:50~영시암 13:00~쌍폭16:00~봉정암17:00
서대문구 홍은동 집을 나선시각이 04:40분, 동서울터미날용대삼거리행 첫차가 06:15분차이기에 첫 지하철을 탈 계획으로 홍제역에 도착한게 05시경인데 첫차가 05:38분이라니 동서울터미날 버스출발시간에 대려면 지하철은 어림도 없어 아내와 함께 계획외의 택시경비\16,000원지출댓가로 다소 여유있게 터미날에 도착했다. 버스가 원통을 경유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용대삼거리에서 내렸을 때에는 빗줄기가 굵어져 있었다.

기상악화로 운행도중 아침식사를 지어먹을 상황이 아니어서 추어탕 메뉴가 붙은 식당엘 들어갔고 초행인 듯 여겨지는 부부가 우리를 뒤따랐다. 부인이 봉정암탐방을 노래를 불러 부인을 위해 이번 길에 나섰다는 쌍용자동차에서 기감을 지내다 명퇴한 김복원씨는 호탕한 성품에 화끈한 입담 또한 걸출한 분인반면 함씨 성을 가진 부인은 남편과 매우 대조적이어서 말수도 적으면서 잔잔한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런 분이었다. 비옷으로 무장을 한 채 한참을 걸어올라가 셔틀버스정류소에 도착하니 재가불자들, 일반등산객의 버스대기행렬이 끝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백담계곡을 따라 쉴새없이 봉정암을 오르려는 승객들을 실어나르는 셔틀버스(1인당 \2,000원)를 타고 절정의 색감을 빚어내는 단풍과 계곡을 흘러내리는 옥류에 넑을 잃은 채 백담사에 도착했다. 빗줄기는 더욱 더 굵어져 있었고 바람마져 오늘 하루 기상이 심상치 않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산신각과 대웅전에 참배를 하고 전씨가 묶었었다는 요사채를 일별하면서 정권을 찬탈키위해 무고한 민초들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앗아간 장본인을 품에 안아 교화(?)시켰을 부처님의 원력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등을 보인 채 템플스테이 안내를 살피고 있는 청정화 보살>

<백담사 앞 계곡에 갖가지 사연을 담고 조형된 소형 돌탑, 돌탑들..........>
百潭寺 로 들어가기위해 修心橋를건너야 한다. 속세의 오욕에 물든 더러운 마음을 씻고 또 씻으라는 듯 수심교 밑으로 이른 아침부터 내리는 장대비에 불어난 계곡의 여울물은 쉼없이 흐르고있다.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턱없이 적을 세월의 한 조각이 여울물과 함께 흘러간다.
계속 내리는 비로 중간 중간 쉬면서 체력을 보충할 간식거리를 먹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속옷까지 젖어들고 한기가들어 입술이 파래진 채로 한 발자욱 또 한 발자욱 봉정암을 오르는 길을 재촉하는 행렬 행렬들........회갑을 넘기고 칠순을 넘어보이는 노 보살님들도 심심찮게 뵐 수 있었는데 장난이 아닌 이 험난한 여정의 봉정암길을 왜 오르고 있는것일까? 나름대로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있을것이리라! 먼저 세상을 떠난 이의 극락왕생을 위해...........머지않아 뒤따라 갈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육신의 고통을 경감받고 평온하게 영면하길 염원하면서...........아들, 딸 자식들의 입신양명을 위해서, 증오와 질시가 없는 화평한 가족관계를 기구하면서......................

<중학교 선생님이 된 막내딸 뒷바라지로 일년가까이 산을 가까이하지못해 장딴지에 쥐가 나도 참아야.......>


<<< 오들오들 떨면서 영시암에서 점심공양중인 탐방객들>>>
영시암은 내설악의 중심에 위치하며 백담사를 출발하여 오세암 봉정암을돌아 내려오는불교성지순례코스의 길목이기도 하다.
조선조의 당쟁은 때로는 나라의 위기를 가져오기도 했다. 많은 선비들이 사화(士禍)의 소용돌이 속에서 죽어갔고, 화를 피하기 위해 첩첩산중으로 피했다. 숙종16년(1689)에 있었던 기사환국(己巳換局)은 왕비 인현왕후 민씨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으로 승격되면서 정권이 노론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는 엄청난 사건이다. 숙종의 비 민씨는 아기를 낳지 못해 늘 근심과 걱정으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데 임금의 총애를 받은 후궁 장ㅍ빈은 아들을 낳았고, 그아이가 원자(原子)로 책봉 되었다. 장희빈을 사랑하던 숙종은 그녀를 왕비로 승격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을 당시 권력을 잡고 있던 노론이 반대하였고, 그래서 숙종은 이들을 숙청하고 남인을 등용했다. 희빈이 낳은 아이의 세자 책봉문제가 나오자 노론의 총수 송시열은, "임금의 보령이 이제 겨우 29세시고 중전은 23세로 아직 젊으신데, 후궁의 아들로 세자를 책봉한다는 것은 시기상조다." 라고 극구 반대했다. 숙종은 송시열의 말을 묵살하고 그에게 사약을 내렸으며 정권을 남인에게 넘긴 것이다.
숙청된 노론 중 김수항(金壽恒)이 이었다. 그의 아들 김창흡은 어지러운 속세와 인연을 끊고 수도를 하겠다고 암자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영시암이다. 그런데 이 암자를 세우지 6년이 지난 어느날 그의 하녀가 호랑이 한테 물려죽고 만다. 이후 김창흡은 암자를 떠나 어디론가 떠났다고 한다. 혼란한 시대의 뒷면에 존재하는 슬픈 사연이다.

<너무 춥고 떨리고 다리에 쥐까지 나고........평소에 체력관리를 열심히 하리라 다짐하면서..........>


<유명한 쌍폭에서........오른쪽 폭포가 귀때기청봉에서 발원한 폭포>

<체력이 한계점에..........춥고 떨리면서도 졸음이 엄습한다>

<은은한 선률처럼 층층이 흘러내리는 환상적인 소폭포를 보노라면 피로도 잊어버린채 샘솟는 희열이!>

<드디어 봉정암이 200미터 남았다! 힘을 내자 힘을!.........>

<1,000여명이 넘는 탐방객들의 저녁공양모습!>

<1천이상 탐방객들에게 미역국에 오이지까지 무료공양..........>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을 참배하고 다라니경을 넣은다음 세바퀴 돌린다>
적멸보궁 봉정암은 해발고도 1,224m인 설악산 마등령에 위치한 우리나라 5대 寂滅寶宮중 하나로, 선덕여왕 13년(644년)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사 3,7일(21일)기도를 올리던 마지막날, 문수보살이 현신하시어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전해주며 해동에서 불법을 크게 일으키라고 부촉하였는 바, 이를 모시고 귀국한 자장율사는 진신사리를 모실 길지를 찾아 이곳저곳을 순례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아름다운 빛을 내는 봉황이 나타탔으니 자장율사는 이를 범상치 않게 여겨 몇 날 며칠을 쫒아갔다. 마침내 봉황은 어느 높은 봉우리 위를 선회하기 시작하다가 갑자기 어떤 바위 앞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자장율사가 그 바위를 가만히 살펴보니 부처님의 모습 그대로였으며, 봉황이 사라진 곳은 바로 부처님의 이마에 해당하는 부분이었다.
또한 부처님 모습을 닮은 그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가 병풍처럼 둘러져 있었으니, 가히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한 길지중의 길지임을 알게 되었다. 이에 부처님 형상을 한 그 바위에 부처님 뇌사리를 봉안한 뒤 오층사리탑을 세우고 암자를 지으니, 이곳이 바로 봉정암이다. 봉정암이란 봉황이 부처님의 이마로 사라졌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설악산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암자가 鳳頂庵이다. 해발 1,244M로 5월 하순에도 雪花를 볼 수 있는 암자로 백담사에서 대청봉을 향하는 내설악에 최고의 절경을 이룬 용아장성 기암괴석군 속에 있다. 봉정암은 내설악 백담사의 부속 암자로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에 자장율사가 중국 청량산에서 구해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려고 始創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후 원효대사와 고려 때 보조국사가, 조선조 때는 幻寂스님과 雪淨스님이 쓰러진 암자를 다시 중창했던 것이고, 봉정암 가는 길은 그야말로 극기훈련과 다름없는 자기자신과의 싸움의 길이다.
암자의 법당인 적멸보궁에는 일반 법당과 달리 불상이 없다. 산정의 5층석탑에 불사리가 봉안돼 있기 때문이다. 참례하는 이는 나그네만이 아니다. 산봉우리에 솟구친 거대한 바위들은 천년을 하루같이 탑을 향해 참례하고 있는 것이다. 봉정암에서 1km를 더 오르면 소청봉에 닿고 계속해서 중청봉과 대청봉에 이른 후 오색약수나 천불동계곡으로 하산 할 수 있다.

<보살과 처사들이 묶는 요사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