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C 성서연구 – 제21B강 역대상하 메시야왕국의대망-
(51) 르호보암의 어리석음 대하 10:1-11
이스라엘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윗과 솔로몬의 시대도 지나고, 이제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솔로몬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르호보암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국력도 많이 기울었고, 왕을 향한 백성들의 지지도 급격히 멀어졌습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르호보암은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이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하나님 선택하신 이끌어오신 이스라엘 나라의 분열과 통합이, 흥망이, 성쇠가 오늘 르호보암의 태도와 뜻에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은 이미 다 알고 계시는 대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최악의 선택을 내렸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오늘 말씀을 보면서 그 이유를 확인해 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오늘 우리의 선택 역시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르호보암이 세겜으로 갔으니 이는 온 이스라엘이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여 세겜에 이르렀음이더라"(대하10:1)
르호보암과 온 이스라엘이 세겜에 모입니다. 그 이유는 르호보암을 왕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대적하고 갈라서기 위해서 모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온 지파를 자신의 본거지인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지 못하고 백성들의 요청대로 세겜에 내려간 것을 보면, 그의 정치적 입지가 많이 약했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유다와 베냐민을 제외한 10지파들이, 르호보암을 왕으로 인정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고자 했습니다. 4절에 보면, 백성들은 르호보암에게 그들이 가진 불만과 요구사항을 말합니다.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대하10:4)
백성들은 선왕인 솔로몬 왕 시절의 그 많은 건축공사로 인해, 과중한 부역을 떠 안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과중한 부역을 감해달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을 들어주면 왕으로 섬기겠노라고 말입니다.
이에 르호보암은 3일의 말미를 정하고, 다시 만나기로 합니다. 그런데 이 3일,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른 방향을 여쭤보려고 얻은 말미가 아니었더라구요. 그는 먼저 노인들에게 조언을 구합니다.
"르호보암 왕이 그의 아버지 솔로몬의 생전에 그 앞에 모셨던 원로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이 백성에게 어떻게 대답하도록 권고하겠느냐 하니" (대하10:6)
백성들을 돌려보낸 르호보암은 먼저 하나님에게 물어야만 했습니다. 신앙이라면 하나님을 먼저 찾고, 하나님께 묻는 것이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사람의 지혜를 구하고, 내게 도움이 될 사람을 찾겠지만,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이 가장 확실한 문제의 해결자가 되시며, 도울 사람 보내주시고, 능력주심을 알기 때문에, 먼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사람에게 달려갑니다. 그만큼 그가 영적으로 어둡고, 믿음 없었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것입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제대로 물을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바른 답을 줄 수 있는 노인들을 찾아갔습니다. 솔로몬 왕을 섬기며,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고, 솔로몬과 함께 국사를 의논하고, 솔로몬이 자문을 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대답은 합당하고 지혜로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대하10:7)
백성을 후대하고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밥을 잘 멕이고, 좋은 옷을 사주고, 개그콘서트를 틀어주어 웃게 하는 일일까요? 소원을 적어오라하여 이뤄주는 것일까요? 열왕기상에는 이 표현,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확인해보겠습니다.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왕상12:7)
보십시오. 충분한 경험과 깊은 신앙을 가진 원로들은 젊은 르호보암에게 제대로 조언을 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왕이 백성을 섬기고 섬기는 자가 되라'는 말입니다. ‘후대하고 기쁘게 하고’를 ‘섬기고 섬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왕에게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놀라운 얘기입니까? 고대세계에서 왕에게 '백성을 섬겨라.' 이건 도무지 있을 수 없는 말입니다. 정말 깊은 신앙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고대에 왕들은 신의 대리인, 혹은 신이라고 여겨졌습니다. 신을 대신하여, 혹은 신으로서 백성을 통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시 왕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이방신들과 다르셨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힘과 권위로 압제하고 굴복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통치하십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왕 역시,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왕이 먼저 백성을 섬기고 섬기십시오', ‘후대하여 기쁘게 하십시오.’, '그들에게 좋은 말로, 선한 말로 대답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지혜로운 대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합격점을 받고, 하나님께 낙제점을 받아온 솔로몬의 실정을 이어가지 않도록 하는, 어쩌면 목숨을 건, 용기를 낸 원로들의 대답이었습니다. 충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충언을 르호보암이 귀담아 듣지 않습니다. 이런 얘기가 그에게 들릴 턱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미 자기에게는 듣고 싶은 답이 정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8절, 그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이지요. 젊은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같이 자라난 르호보암 또래의 사람들입니다.
“왕은 원로들이 가르치는 것을 버리고 그 앞에 모시고 있는 자기와 함께 자라난 젊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이르되 너희는 이 백성에게 어떻게 대답하도록 권고하겠느냐”(대하10:8-9a)
보십시오. 이처럼 장로들의 좋은 지혜를 들었으나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물은 것은, 세대를 아우르는 균형잡힌 결정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듣고 싶은 대답이 노인들에게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 마음에 답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답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그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로 갔던 것입니다. 아니, 그 대답이 나올 때까지 르호보암은 계속 자문을 구하고 구했을 것입니다.
누가 생각나십니까? 왕자병쟁이 압살롬이 생각나시는 것이지요. 내가 공을 세워야하고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아버지를 일망타진해야하는데, 아히도벨이 뭐라고 해요? 군사를 내게 달라고 내가 밤에 쫓아가서 내가 다윗만 쳐죽이고 오겠다고 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베푼 것과 같더라는 저 모략을 압살롬이 듣질 않습니다. 왜요? 내가 정해둔 답이 아니었던 까닭이지요? 왕께서 직접, 다윗이 있는 성을 밧줄로 매어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강에다 쳐박으시라는 그 허풍 가득한 후새의 모략을 선택했던 것이 아닙니까? 압살롬은 그렇게 스스로 망하는 길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만 그럴까요?
많은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은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괜찮은지 의심스러운 일들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저기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하고, 심지어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런데 가만 들어보면 이미 자기 마음에 답은 정해져 있어요. 그런데도 그가 사람들의 의견을 묻는 것은, 내 선택, 내 결정에 대한 책임을 줄여보기 위해서입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게 아니야, 저 전문가가, 저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라고 했어. 라고 피할 구멍을 만들어 두기 위함인 것이지요? 마음의 부담을 덜어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것이 맞고 틀리고가 옳고 그르고가 궁금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내 뜻대로 하고 싶어서 자꾸 묻는 것입니다. 다 고개를 젓고 있는 데도, 내 뜻과 같은 사람 하나를 찾아 결국 그 길을 가고야 마는 것입니다.
지혜가 무엇입니까? 듣는 마음이었습니다. God-listening Heart였습니다.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듣고 심리하여 판결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열린 마음, 열린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정말로 어떤 게 옳은 말인지, 들을 수 있는 귀가 열리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냥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극에 달한 이기심입니다.
르호보암은 자신이 원하는 말이 나오질 않는 원로들의 의견을 버리고, 내가 원하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나섰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때요? 유유상종이라고, 같이 자라난 소년들이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딱 해 주었습니다. 10-11절 이렇게 기록합니다.
“함께 자라난 젊은 신하들이 왕께 말하여 이르되 이 백성들이 왕께 아뢰기를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우리를 위하여 가볍게 하라 하였은즉 왕은 대답하시기를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가 너희에게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하였으나 이제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가죽 채찍으로 너희를 치셨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하리라 하소서 하더라”(대하10:10-11)
무슨 대답을 원했던 것입니까? 군림하는 왕 지배하는 왕이 되라는 답입니다. 섬기는 왕, 좋은 말을 하는 왕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함께 자라난 소년들은 원로들의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강압적으로, 더 엄하고, 무겁게 그들을 다스리라고 조언을 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왕이 되고 싶었던, 그렇게 천하만국의 영광을 갈망했던 철부지 르호보암은,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마음을 품고, 그렇게 죽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판단하고 심판하는, 사람의 가치를 나누는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어떤 말을 들어야 옳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이런 선택의 기로에 놓여진다면 어떤 말을 듣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일전에 이미 살펴보셨지요? 듣기를 속히 하라. 무엇을요?
우리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들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신 말씀을 붙들고, 내 뜻을 내려놓기까지, 기도하고 인내해야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의 사도, 우리 하일교회가 해야 할 일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우리의 예배, 우리의 기도는, 나를 위한,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종삼고 부리기 위한 것이 될 뿐인 것입니다.
성경말씀은 딱딱 우리에게 꼬집어서 답을 주시지는 않습니다. 기계적이고 수동적인 신앙이 아닌 인격적인 신앙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몰라라 하시지 않으십니다. 바르게 반응하고 응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중요한 원칙들을 분명하고 뚜렷하게 이미 허락해주신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고 타인의 유익을 지켜내고 내가 손해보는 방향으로 모든 결정을 내리시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오늘 너의 결정, 오늘 너의 걸음, 오늘 너의 선택이,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이웃을 살릴 수 있는 것이냐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판단과 결정에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근저에 깔려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가 맺혀지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를 위해 망설이거나 주저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손해나 희생이 따르더라도 지체 없이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지고 재보고 간보고 하다가 때를 놓치고 기회를 놓치고 사람을 잃어버리는 불상사를 경험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앞으로 계속해서 수많은 선택과 결정들을 해야 하는 상황에 서실 것입니다. 말하기 전에 성내기 전에 하나님께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으셨으면 이제는 내 생각과 비교해 보는 것이 아닌, 철저하게 내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선택하시고 행동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십니다.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잃어버리는 것 같지만, 빼앗기는 것 같지만, 잘못될 것 같지만, 심지어 망할 것 같지만, 아뇨,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내 손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견고한 나라를 세워서 안겨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르호보암의 어리석음을 반면교사 삼으시고, 우리로 인해 하나님이 기쁘시고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희락을 누리게 되는 복된 축복의 통로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