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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시집 [나를 오른다]의 앞표지(좌)와 뒤표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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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오른다]
최영규 시집 / 문학아카데미학시선 242 / 문학아카데미(2012.08.01) / 값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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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오른다
최영규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산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새 산이 또 하나 쑥 솟아 오른다
내 안은 그런 산으로 꽉 차 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산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 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산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환생還生 - 안데스 1
최영규
폴리쉬빙하의 설벽은 밤새 불어댄 눈보라에 한겨울 광목 빨래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두 명의 공격조는 빙하중단 세락*지대의 테라스나 크레바스의 틈새에서 이 눈보라를 견뎠을 것이다 새벽의 여명이 설벽 그 깊숙한 곳으로 푸르고 그리고 투명하게 천천히 스미고 있었다 설벽을 올려다보며 공격조의 생존을 확인하려는 나의 눈빛도 밤새 숨도 못 쉴 것 같던 가슴도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위태롭게 얼어붙어 있었다 순간 순백색 빨래에 묻은 검은 티만한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의 저 미미한 동작이 이 거대한 산 전체를 순간 되살려 내고 있었다.
* 세락(Serac) : ㅂ빙하의 크레바스(갈라진 틈)에 의해 생긴 탑 뫃양의 얼음덩이 일명 빙탑(氷塔)이라고 함.
카라반(Caravan)* - 안데스 6
최영규
고통스러움마저 말리려 드는 태양, 볕을 피할 곳이라고는 없는 바카스(Rio de Las Vacas)계곡의 사막 같은 카라반(Caravan)* 루트. 잔설을 걸친 능선 위로 너무나 아름다운 에메랄드빛 하늘이 대원들을 내려다보며 비웃고 있다 어쩌다 작은 그림자를 만들고 있는 바위라도 나타나면 그 밑으로 기어드는 대원들, 팔뚝 한 쪽씩을 그 그늘 밑으로 쑥 밀어 넣으면 전신을 달구던 화염 위로 한 바가지 냉수가 퍼부어지는 느낌이다 막막하게 갇혀 있던 정신을 잠시 되찾는다 저 멀리 이틀쯤의 거리에 동빙하계곡의 희다 못해 푸른 만년설의 설벽이 어릴적 이발소에 걸려 있던 그림처럼 아른거린다.
* 카라반(caravan) : 실제로 본격적인 등반이 시작되는 기점인 베이스캠프까지 등반용 물자를 운반하면서 전진하는 것을 말한다.
하늘을 걷다 - 안데스 8
최영규
카라반* 사흘째, 급경사의 진흙탕 길이지만 아름다운 초지草地가 마음에 힘을 주는 렐린초스(Relinchos)계곡, 땅바닥에 납작 붙어 마치 꽃문양의 돗자리를 펴 놓은 듯 지천으로 피어있는 민들레, 거친 바람 속에 굳이 꽃대를 높이 올릴 이유는 없겠지, 머리를 디밀어 샘물을 마시다 고개를 돌려 올려다 본 민들레는 파란 하늘 한 가운데에 홀씨마냥 가볍게 떠 있어 보였다 샘에서 올려다보는 능선으로 이어진 지평선, 위는 하늘, 아래는 땅 두 곳만이 보였다 그래, 아무리 천천히 걸어도 힘겹기만 한 고산의 거친 비탈이든 이틀은 족히 걸어 내려가야 하는 저 아래 초원지대이든 이 산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서로를 바라보게 되는, 이 지상에 나오는 순간 이미 하늘에 도달해 있는 것 아니겠는가? 헐떡거리며 급경사를 차고 오르는 무겁고 힘겨운 이 발걸음, 그래, 가볍게 가볍게 하늘길을 걷고 있다 생각하자.
조향산 햇덩이
최영규
11월
조향산 숲은 텅 비어 있었다
아니다 그렇지 않았다
잎이 떨어져 나간 자리마다 하늘이 가득
들어와 있었기 때문에
숲은 전보다 오히려 밝고 맑아져 있었다
가지의 끝에 잎을 달고
잎을 키우고
잎의 색을 바꾸고 잎을 떨구어
숲을 비우고
거기에 하늘을 불러들이는 숲
숲에 가득한 빛으로 빠짐없이
다시 잎을 달고
잎을 키워
또다시 풍성해질 숲
11월의 조향산엔
햇덩이 같은 열매 가득 달고 서 있는
아가위나무가 반기는
환한 숲이 있다.
*조향산(952m) : 경상북도 문경시 능암면 소재.
망월사
최영규
은색 달빛 아래에서
달을 잃어버리고ㅓ
달을 그리워하고 있는
“눈目빛 달‘이라는 화두話頭 안고
깊이
잠들어 있는
내 눈에 고여 있는
망월사望月寺.
산이 나를 부른다
최영규
나를 부른다
그를 본다
때를 놓친
낮달 마냥
한낮 햇살 속에서
나는,
아무도 없는 길 앞에 서 있다
너는….
천년 입맛
최영규
배추에 소금을 뿌리다 보면
배추란 놈
꼭 천년 입맛을 구워내는 고려高麗가마 같다
이슬에 햇빛에 달빛에 소금에
온갖 것에 절여져서는
익어 갈수록
우리 입맛을 채워주는
텅빈 웃음이다.
섣달 열아흐레
최영규
마을 앞 저수지 속 깊이
파랗게 얼어붙은 하늘
그 하늘엔 까마득히
늘어진 연줄 같은
비행운飛行雲을 꼬리에 달고
은박지 조각처럼 반짝이는
비행기 하나
끝도 없어 보이는 그 얼음벌판을 내달리는
아이들이 내뿜는 입김은
하얀 토막구름이 되어 흩어지고
댓돌 아래
질퍽이던 진흙 발자국 가운데
녹아 고인 물에도
투명한 겨울하늘이 담겨 있다
그렇게 마당에 가득한 하늘빛
겨울 햇살들이
꼬들꼬들
무말랭이처럼 말라가는
섣달 열아흐렛날 오후.
가을
최영규
변심變心을
못견뎌하는
바람
숨이 가빠
붉게 달아오른
가슴.
부의賻儀
최영규
봉투를 꺼내어
부의賻儀라고 그리듯 겨우 쓰고는
입김으로 후- 불어 봉투의 주둥이를 열었다
봉투에선 느닷없이 한웅큼의 꽃씨가 쏟아져
책상 위에 흩어졌다 채송화 씨앗
씨앗들은 저마다 심호흡을 해대더니
금세 당당하고 반짝이는 모습들이 되었다
책상은 이른 아침 뜨락처럼
분홍 노랑 보랏빛으로 싱싱해졌다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여름내 계속 피워낸다 그리고 그 많은 꽃들은 다시
반짝이는 껍질의 씨앗 속으로 숨어들고
또다시 꽃피우고 씨앗으로 돌아오고
나는 씨앗 속의 꽃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한 알도 빠짐없이 주워 봉투에 넣었다
봉투는 숨 쉬는 듯 건강해 보였다
할머님 마실 다니시라고 다듬어 드린 뒷길로
문상을 갔다
영정 앞엔 늘 갖고 계시던 호두알이 반짝이며
입 다문 꽃씨마냥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봉투를 가만히 올려놓았다.
아침에게
최영규
매일 새벽 나의 차는 강물에 실려 달린다
시속 100킬로미터의 급류로 달리기도 하고
정체된 길목에선 소용돌이치기도 한다
강과 강이 만나는 양수리 정류장에서는
눈부신 아침노을을 태우기도 하고
솜덩이처럼 하얗게 뭉쳐 있는 물안개를 태우기도 한다
강의 새벽이 가득 실려 있는 나의 차는
갈대밭 사이를 가볍게 날아오르는 물새처럼
힘차게 달린다 창문의 틈새를 지나가는
강바람 소리가 새소리보다도 가볍다
창을 활짝 열어버린다 뒷좌석에 타고 있던 물안개가
차창을 빠져나간다 안개가 빠져나가고 나면
나의 차 안은 붉은 햇살로 가득 찬다
강물이 다시 소용돌이친다
그제서야 나의 차는 용진나루에 아침 햇살을
내려놓는다.
작은 꽃씨 몇 알
최영규
담장 아래에
꽃씨를 뿌렸다
새싹을 기다리는 마음에 물을 준다
싹이 터올랐다
무거운 물통을 가누며
바라보는 딸아이의 눈망울에 서둘러
나팔꽃이며 채송화가 자란다
딸아이는 금세 꿀벌이 된다
온종일 붉은 얼굴로 꽃밭 주변에서 웅웅거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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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詩人의 말
세상을 나올 때 받아든
運命이란 소쿠리에
하나 더
덤으로 던져주셨던
시인이라는 名牌
내 삶의 마지막까지 걸고 가야 할
名牌.
2012년 여름
夏童山房에서 최 영 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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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영규 시인의 작품 세계 ]
적막을 듣고 보아내는 황홀의 미학
정 진 규
(시인)
최영규의 시산(詩山)을 올랐다. 그 산들은 흔히 말하듯 그냥 거기 있어서 오르는 산들이 아니었다. 그 산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빙하의 길고 긴 세월 그 너머, 한 동작의 실수면 수백 미터 아래의 동빙하 계곡으로 날아가 버릴 설벽의 한가운데 ― 그곳에서 마주친 바다.”(「바다 ―안데스 2」) 그런 극한 그런 초월의 시간과 공간으로 무한 증대되고 있는 산들이었다. 그래서 시산(詩山)이었다. 아니 시해(詩海)였다. 그의 존재의 영역엔 그런 대자유(大自由)의 열림이 있었다. 최영규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을 때까지 오르고 있다.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山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나를 오른다」)고 고백한다. 그의 치열한 존재 행위가 거기에 있다. 그의 존재 행위는 치열하면서도 ‘비워냄의 충만’을 터득해가는 그런 절대 순수 과정이다. 최영규의 「안데스」연작(連作) 13편을 비롯한 또 다른 시산(詩山)들을 오르면서 주역의 ‘감지(坎止)’라는 말이 거듭 떠올랐다. 물이 흘러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다 채워 넘칠 때까지 기다린다. 묵묵히 역경과 시련을 감내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는 진솔한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감지(坎止)’의 정신이 최영규의 시정신이요 존재론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에 거듭 믿음이 갔다. 아울러 저러한 대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품고 있는 ‘적막’을 듣고 보아내는 황홀의 미학이 구체화된 시편들이 (「하늘길 잠적潛跡」, 「강경들녘 폭염」 등)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음에 격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너스레와 순간이동의 시적 마력
오 탁 번
(시인)
최영규 시인의 작품세계는 손때 묻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향기가 풋풋하게 넘쳐난다. 자연친화(自然親和)라는 평범한 강목(綱目)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다양한 상상력이 시공(時空)을 휘게 하면서 번뜩인다. 산악인으로서 안데스를 오르는 투혼이 만년설처럼 차갑게 빛나는가 하면, 유년의 고향을 바라보는 샤머니즘적인 맹목(盲目)의 진한 상실감도 독자들을 전율케 한다. 그가 등반하는 험난한 안데스는 어쩔 수 없는 현재이지만, 정복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고향의 “두렵고 어두운 산”을 “내 안의 나를 불러내는 내 전생前生 같은 산山 -그리움의 안데스”라고 순간적으로 변용시킨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산(山)은 시인의 생애가 원석처럼 박혀 있는 무비(無比)의 절대적 심상이 된다. 가공과 세공 이전의 원석이야말로 진짜 보석인데, 덧칠과 개칠에 물든 뭇 시인들은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산허리를 안고 돌아가자/ 길을 터주는 나뭇가지들이 처음 보는 나를 만져보느라/ 야단이다”라고 시치미 딱 떼는 너스레와, 백자 달항아리를 “삼베보자기에 눌러 빚은/ 토종두부의 낯빛”으로 순간이동시키는 시적(詩的) 마력(魔力)은 물량위주의 허명(虛名)에 물든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보기 드문 시적 성찰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시인의 가파른 벼랑을 쉬엄쉬엄 뚜벅뚜벅 오를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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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규 詩集 [나를 오른다]
[ 최영규 시인의 시세계 ] -
본지풍광과 정신의 환희감
박 제 천
1.
최영규 시인의 제2시집 『나를 오른다』를 읽었다. 시집에는 모두 48편의 신작시가 3부로 나뉘어 수록되었고, 아울러 그동안 국내외에 발표되었던 영, 불, 독, 스페인어와 일어시 등 5개 국어로 번역된 17편은 제4부에 모아놓았다. 번역시들은 시인의 초기작 「부의」로부터 최근의 시 중에서 선별된 작품들이므로 신작시집과 더불어 시인의 대표작 모음까지 더불어 읽을 수 있는 보너스인 셈이다.
시집을 열면서, 산악의 비의와 속살을 보여주는 제1부의 <안데스 연작>에서 우리 시에 부족하였던 남성적 상상력의 진수를 흠뻑 맛보았고, 잇달아 나오는 제2부의 <산이 나를 부른다>에선 그동안 우리네 산들이 갖추어 온 위의를 더듬으며, 문자 그대로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느낄 수 있었으며, 제3부 <천년 입맛>의 시편들이 뿜어내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향기로 하여 가슴에 내내 향기가 감돌았다. 좋은 시집은 이렇듯 소리내어 읽으면 그대로 가락이 되고 울림이 되며, 마음으로 음미할수록 정신의 환희감을 가져온다는 것을 확인시켜 준 귀중한 사례라 할 것이다.
최영규 시인은 이미 첫시집『아침시집』으로 좋은 시들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 바 있다. 그 중에서도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으로 세상에 나온 「부의」는 지금에 이르도록 좋은 시의 전범으로 자리잡아 왔다. 한 편의 시가 단순하게 손끝에서 빚어내는 게 아니라, 삶과 정신을 타오르는 불길에 태워서 얻어낸 불물로 형상화하는 것임을 알고 있는 시인이다.
따라서 그가 이번에 보여주는 시집『나를 오른다』는 간행되기 전부터 이미 화제가 되어 왔다. 2001년에 첫시집을 펴낸 후 12년만에 제2시집이 간행될 만큼 과작의 시인이지만 한 편 한 편 공들여 만들어 낸 작품의 성취도가 하나같이 우월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개별적으로 발표된 <안데스 연작>은 2010년 한국시문학상을 수상했고, 다른 독립 시편들도 한결같이 주목을 받아 왔다.
최영규 시인의 이번 시집『나를 오른다』는 시집 한 권에 펼쳐놓은 시인정신의 멋과 맛, 그 향기와 청렬한 기운에 감싸인 20년여의 적공이 더해져 읽을수록 시의 묘법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자연을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을 만큼 원숙해진 시인의 경지는 시를 방편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묘법연화경이라 할 만큼 미학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2.
시집의 제1부는 널리 알려진 <안데스 연작>이다. 표제작을 비롯해 연작 13편 등 모두 16편이 실려 있다. 표제의 안데스산맥은 남미의 7개국에 걸쳐 남북으로 형성된 지구상에서 가장 장엄한 지형으로 불리운다.
안데스 연작의 대부분은 실제 상황이다. 마치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가 그렇듯이 10여 년에 걸쳐 개별적으로 창작 발표된 <안데스 연작>은 이 시집으로 일단 마무리가 된 셈이다. 자연과 맞서는 극한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이 연작은 작품마다 사투 속에 시인의 정신이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묶어 내는 초절한 정신의 자화상을 담아내고 있다. 시공을 휘어돌아 안데스산맥 등반대가 겪어내는 과정 하나하나를 생생하게 재현한 현장은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큼 강렬했고, 작품을 이끌어가는 동력 역시 정신의 최절정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자연의 거산준령이 뿜어내는 포스를 이렇듯 작품화할 수 있었던 것은 시인이 더불어 전문적인 산악인이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최영규 시인은 코오롱등산학교, 정승권등산학교를 졸업한 정통 산악인이다. 국내의 한북정맥, 백두대간 종주, 백두산(2,844m) 등을 등반했고, 일본 북알프스 및 남알프스 연속 종주, 말레이시아 키나발루(4,010m), 요세미티 트레킹, 몽고 트레킹,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 호주 최고봉 코시어스코(2,230m), 중앙아시아 레닌봉(7,134m), 안데스 연작의 중심무대인 남미 최고봉 아콩가구아(6,962m) 동면 폴리쉬빙하 다이렉트 루트 등 세계 각지의 트레킹과 등정 기록을 갖고 있다.
산은 자연의 하나이지만 그 자체가 독립된 소우주이기도 하다. 지상에서 하늘로 솟아오른 산이기에 지상도 하늘도 아니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이 걸어서 하늘로 가는 최극점이기에 예로부터 영적인 것으로 분류돼 왔다. 단군신화가 그러하듯 산은 종교의 거점이기에 신의 것이라고 한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곳, 산은 하늘과 땅의 경계이기에 신을 찾아가는 곳,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곳으로 여겨져 왔다. 사람살이의 목숨줄이 강으로 이어져 있다면, 정신줄은 산으로 이어진 셈이다.
다시 말해 최영규 시인의 작품들은 그 목숨줄과 정신줄을 동시에 산으로 이어놓고 있다. 시인에게 있어 산은 관념이 아니다. 음풍농월의 대상이 아니다. 산은 삶의 현장이자 정신의 현장이다. 산과 하나가 되어 살고자 하는 시인, 산이 곧 시인이기에 시인은 이 시집의 서두에 표제시「나를 오른다」를 배치하고 있다. 안데스 연작에 포함되지 않은 이 작품은 산에 대한 시인의 선언이자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산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산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산으로 꽉 차있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그래서 내 안은 비좁다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산을 오른다
나를 오른다
간간이 붙어 있는 표식기를 찾아가며
나의 복숭아 뼈에서
터져나갈 것 같은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그리고 어렵게 등뼈를 타고 올라 나의 영혼에까지
더 높고 거친 나를 찾아 오른다
기진맥진 나를 오르고 나면
내 안의 산들은
하나씩 둘씩 작아지며 무너져 버린다
이제 나는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지울 수 있다
나를 비울 수 있다.
―「나를 오른다」 전문
이 작품에서 눈에 띄는 것은 “매일같이 내 속에는 자꾸 산이 생긴다/ 오르고 싶다고 생각만 하면/ 금세 산이 또 하나 쑥 솟아오른다/ 내 안은 그런 산으로 꽉 차 있다”는 도입부다. 그에게 있어 산은 외부의 것이 아니라 내부의 것이다. “갈곳산, 육백산, 깃대배기봉, 만월산, 운수봉” 등등 비좁을 정도로 산이 가득차면 “비좁아져 버린 나를 위해 산을 오르”는 것이다. 속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인은 다시 산을 오르지만 이 역시 외부의 산이 아니다. 시인의 육체가 곧 시인이 올라가야 하는 산이다. 복숭아뼈에서 장딴지를 거쳐 무릎뼈로, 다시 무릎뼈에서 허벅지를 지나 허리로 등뼈를 타고 올라 시인의 영혼에까지 이르는 등반이지만, 이 산은 외부의 산보다도 “더 높고 거친” 산이다. 시인이 영혼에 이르러야 등정은 끝이 난다. 산들이 작아지고 무너지기 때문이다. 속에 가득찬 여러 개의 산이 한꺼번에 비워지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인의 육체는 마치 산맥처럼 여러 개의 산이 생성되면 비우고, 비우고 나면 다시 하나 둘 산이 솟아나는 산맥이 된다.
여기서 문득 시인에게 영혼은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무엇이 그 욕망과 실체를 가졌다 버리는 것인가. 시인은 초기 시「부의」에서 “씨앗들은 자신보다 백배나 큰 꽃들을” 피운다고 말했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은 그 씨앗을 영혼에 전이시킨 것이다. 산을 정복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를 산에 대입시킴으로써 시인은 장자식으로 말하자면 자연의 육기를 정신으로 다루었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신의 상승은 안데스 연작에서 보여주듯 등반 체험을 정신으로 전이시키는 그만의 독특한 수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된다. 이제 그 작품들을 읽어보자.
폴리쉬빙하의 설벽은 밤새 불어댄 눈보라에 한겨울 광목 빨래처럼 하얗게 얼어붙어 있었다 두 명의 공격조는 빙하중단 세락*지대의 테라스나 크레바스의 틈새에서 이 눈보라를 견뎠을 것이다 새벽의 여명이 설벽 그 깊숙한 곳으로 푸르고 그리고 투명하게 천천히 스미고 있었다 설벽을 올려다보며 공격조의 생존을 확인하려는 나의 눈빛도 밤새 숨도 못 쉴 것 같던 가슴도 날카로운 유리조각처럼 위태롭게 얼어붙어 있었다 순간 순백색 빨래에 묻은 검은 티만한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그들의 저 미미한 동작이 이 거대한 산 전체를 순간 되살려 내고 있었다.
―「환생還生 ―안데스 1」 전문
안데스 연작은 사실 작품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을만큼 화자와 장소와 시간의 통일성이 뛰어나고, 시각적인 세밀한 묘사가 일품인 작품들이다. 연작의 첫머리인 이 작품 「환생」이 보여주듯 “새벽의 여명이 설벽 그 깊숙한 곳으로 푸르고 그리고 투명하게 천천히 스미고 있”는 시점을 똑 떼어내, 밤새도록 설벽 어디에서 눈보라를 견디고 돌아오는 공격조 2명의 귀환이 포인트다. 공격조의 생존을 확인하는 순간의 기쁨을 “그들의 저 미미한 동작이 이 거대한 산 전체를 순간 되살려 내고 있었다”로 마무리하는 솜씨가 그야말로 화룡첨정의 환희감이다. 시인의 마음 속에 지워져 있던 산이 비로소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참으로 절실하면서도 공교로운 울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의 내공이 기교를 뛰어넘은 기교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꼭 허리띠를 맨 것 같아!”라고 얘기하곤 했던 대관령 올라가는 굽이길, 바위 틈새마다 작은 소나무들을 멋지게 꽂고 서 있던 뼝대라 부르던 절벽, 탄광의 입구가 되어버린, 늘 사태가 나던 장작골 넘어가는 들이봉 산허리 너덜지대, 딱딱해 팔매질꺼리밖에 안되던 흙담에 붙어살던 돌배나무, 화려한 꽃문양의 물뱀이 나를 숨가쁘게 유혹하던 목다리 아래 물웅덩이, 뒷마당 굴뚝 옆에서 뽀얗게 나이 먹은 흙벽처럼 삭아가던 고무신짝, 마구간 옆 깨진 독에 따로 모아두었던 푹 삭은 오줌 빛깔, 상목橡木 껍데기 같은 등짝을 가졌던 두꺼비, 일본사람같이 언제나 머리를 빡빡 깎으셨던 외할아버지, 궁금해 수시로 들쳐보았던 촌스러운 자수가 놓인 보자기가 덮였던 작은 점심상, 얼음을 부셔놓았다고 고집부렸던 겨울 밤하늘.
이렇게 고향은 깊은 밤 두렵고 어두운 산속처럼 나의 모든 것이 숨겨져 있는 곳, 새벽의 여명 속에 어렴풋하지만 겹겹이 끝도 없이 드러나는 산자락 같은 내 안에 나를 불러내는 내 전생前生같은 산山 -그리움의 안데스Andes.
―「고향故鄕 ―안데스 12」 전문
“사고자 한 명은 팔과 어깨가 탈골된 상태로 한 명은 침낭에 싸여 꽁꽁 묶인 채 구조보드에 실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날 짐 수송 내내 나는 그 붉은색의 침낭이 수정처럼 투명하게 그리고 차갑고 단단하게 얼어버린 얼음덩이였다는 착각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사고, 안데스10」)에서 보듯 언제이든 죽음을 만날 수 있고, 사고가 곧 죽음일 수도 있는 산행에서 시인은 안데스 연작을 써내면서 안데스에서 나를 찾고, “얼굴을 감싸 쥔 채 끅끅거리다 결국 소리내어 울었다 그러나 그 울음은 내 욕심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내 안에서 무거운 무게로 나를 지치게 했던 그 욕심”(「하산, 안데스 9」)을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두려움이며 욕심과 같은 인간의 오욕칠정을 확인하면서 새롭게 만나는 것이 바로 시인의 고향이다.
이로써 안데스 연작은 단순한 산악시, 산을 소재로 한 시에서 시인의 유년과 고향으로 그 영역을 넓혀간다. 시인이 안데스 연작에서 고향과 유년을 찾아낸다는 것은 단순한 추억을 뜻하는 게 아니라 시인의 정신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고향의 굽이길, 산허리 너덜지대와 같은 자연물, 돌배나무, 물뱀, 두꺼비와 같은 생물, 외할아버지와 점심상 등을 매개로 시인의 숨겨진 모든 곳이 겹쳐지는 정신사는 안데스와 만남으로써 “새벽의 여명 속에 어렴풋하지만 겹겹이 끝도 없이 드러나는 산자락 같은 내 안에 나를 불러내는 내 전생前生같은 산山 -그리움의 안데스Andes.”로 확대된다.
그것은 대우주 속의 소우주인 시인이 그 자신의 세포마다 숨겨진 소우주를 확인하는 일이자 윤회의 갈피를 뒤져내는 일이다. 산이 곧 시인이자 정신이기에 가능한 작업이다.
3.
불교에 ‘본지풍광’이란 말이 있다. 성철스님의 법어집 제목이 되어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필자 역시 이 말을 좋아하여 마음수행의 구심점으로 삼아왔다. 말의 뜻인즉 본래의 진면목, 태어나기도 전의 본모습을 가리키니, 곧 천진이자 보리며 열반이라 할 수 있다. 만의 하나, 시인된 자로서 이런 마음가짐을 가졌다면 그가 쓰는 말, 그가 하는 말이 구구절절 시라 할 것이다. 최영규 시집『나를 오른다』를 읽다가 제2부 <산이 나를 부른다>에 이르렀을 때 문득 이 말이 생각났다. 제2부엔「문안산 물감빛」등 산을 주제로 한 15편이 수록되어 있다. 대체로 산행 중에 만난 풍광이다. 싱싱하면서도 풋풋한, 그야말로 싱그럽기 그지없는 향기로 가득 찬 작품들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산에서 만난 자연의 본지풍광을 전해주는 작품들이어서 읽을수록 마음이 환해지고 서늘해졌다. 이 작품들은 그의 첫시집 『아침시집』이 보여주었던 마음풍경의 연장이지만, 전보다 더 섬세하고, 맑은 눈길을 지니고 있었다. 마음을 거울처럼 닦아내고, 닦아내야만 보아낼 수 있는 풍광이리라.
능선은 줄기마다 밝은 붓질을 하며 달려가다
그 끝에 푸른색 물감을 뚝 떨어뜨린다
그러면 산은
솜털이 뽀얗게 번져 있는
갓난아기의 귓등처럼 밝아진다
푸른색으로 흘러내리는 계곡
마른 가지마다 새순들은
눈부신 연두색의 등燈으로 그려지고
물살은 소란스럽게도
얼굴을 파묻고 있던 돌들에게
봄칠을 해댄다
산 아래 능선의 끝자락엔 진달래며 산벚꽃이 벌써
봄 준비를 마쳤고
산어깨에 걸린 햇살은
물감을 풀은 듯 붉게 번지고 있다.
―「문안산 물감빛」 전문
반짝반짝 빛나는 색감이 서로 침칠을 하며 묻어가듯 수채화처럼 번져나가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시인 최영규의 내면이 보이는 것 같다. 산이며 능선, 계곡과 같은 낱말들로 얼개가 짜여져 남성적이면서도 웅장한 뉘앙스를 풍기며 마치 자연이 만들어 걸어놓은 대형 걸개그림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하지만 이들을 묘사하는 단어들은 정반대로 섬세하고, 여성적인 부드러움으로 감싸놓았다. ‘능선’은 ‘붓질, 물감’, ‘산’은 ‘솜털, 갓난아기 귓등’, ‘계곡’은 ‘새순, 연두색 등’, ‘물살’은 ‘봄칠’, ‘산어깨’는 ‘햇살, 물감’과 같이 대칭적인 수사를 사용하였기에 마치 개구쟁이 그림처럼 청명한 미감을 자아내고 있다. 다시 말해 밝은 붓질에 묻힌 푸른색 물감은 작품의 바탕이자, 작품에 나오는 갖가지 물감을 찍어다 쓸 수 있는 팔레트 역할을 한다. 푸른색 물감이 튄 산은 갓난아기의 귓등처럼 밝아지고, 새순들은 연두색 등이 되면서 봄칠을 거쳐 햇살의 붉은 물감으로 슬그머니 넘어가는 테크닉이 참으로 절묘한 작품이다. 여기의 비밀은 ‘봄칠’이 쥐고 있다. 봄칠은 무슨 색으로 칠해지는가. 시인은 능청스럽게 색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그것은 읽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 혹은 푸르고 붉어지는가 하면 푸르고 붉은 색이자, 산의 능선과 계곡에서 이미 봄준비를 마친 색채의 집합이기 때문이다.
산허리를 안고 돌아가자 길을 터주는 나뭇가지들이
처음 보는 나를 만져보느라 야단이다
나는 잠시 앉아 쉬기로 한다
산옥잠이 저만치 떨어져서 하얀 꽃을 흔들어 보인다
깨알같은 꽃들을 접시만하게 묶어 피운 당귀
곰취의 꽃은 길게 뻗어 오른 줄기 끝에서
흩어질 것같이 피어있다
바람이 분다 머리 위의 나무가지가 흔들린다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나뭇잎들은
비질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숲은 금세 비질하는 소리로 가득차 버린다
기억 속에 있는 많은 것들이 그 소리에
지워진다
투명해진 숲을 바라본다
이미
산은 내 안에 들어와 있다.
―「덕항산 동무들」 전문
마찬가지로 제2부의「덕항산 동무들」은 시인의 자연이 곧 천진임을 보여준다. “산허리를 안고 돌아가자 길을 터주는 나뭇가지들이/ 처음 보는 나를 만져보느라 야단이”라는 능청스러움은 산과 시인을 동일시하고, 자연과 나의 경계를 허물었기에 가능한 도입부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능청스러움은 어른의 시각이다. 아이들의 천진한 느낌 그대로 읽어야 한다. 동심이 만난 자연이기에 자연의 모든 것들을 낯설게 보기보다는 신기하게 맞아들인다. 산옥잠은 수줍은 듯 “저만치 떨어져서 하얀 꽃을 흔들어보이고”, 당귀는 “깨알같은 꽃들을 접시만하게 묶어 피우고”, “곰취의 꽃은 길게 뻗어 오른 줄기 끝에서/ 흩어질 것같이 피어 있다.” 이윽고 바람이 불고,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이 흔들리고, 나뭇잎들이 비질하는 소리를 내고 있다. 시인과 산이 일체화하는 순간이다. 산은 어느새 시인 안으로 들어가고, 시인은 산을 품은 채, 산속의 동무들과 자연의 하나가 되어 있었다.
「덕항산 동무들」과「문안산 물감빛」이 말해주듯, 본지풍광을 여실히 보여주는 천연의 자연은 그대로 옮겨 적기만 해도 눈부신 시가 된다. 백지와 같은 순심의 시인이기에 이렇듯 청명한 시가 태어난다.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자연의 묘사이기에 자연 그 자체의 시를 자연 속에서 얻어냈다 할 수 있다. 시와 하나가 된 시인, 자연과 하나가 된 시인의 시편들은 자연의 선물이자, 그 은총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씌어진 시인의 마음풍경이다. 그 마음풍경 속에서 우리는 문득 자연의 화엄경에 마주치게 된다. 제1부 <안데스 연작>이 자연의 몸체라면, 제2부의 <산이 나를 부른다>는 자연의 얼굴이자, 그 마음이다. 자연을 몸과 마음으로 나누어 읽을 수 있을 만큼 원숙해진 시인의 경지이다. 최영규 시인의 시를 방편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묘법연화경에 비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
제3부 <천년 입맛>에는「달항아리」등 17편이 실렸다. 제2부 <산이 나를 부른다>의 작품들이 첫시집『아침시집』의 연장선에서 자연의 서정을 한 알 한 알 열매처럼 거두어내었다면, 제3부의 작품들은 시창작교실처럼 신선하면서도 다양한 기법을 모아놓고 있어 매력적이다.
삼베보자기에 눌러 빚은
토종 두부의 낯빛
주발에 수북이 퍼 담은
따끈한 햅쌀밥
한 그릇
아니, 날개깃 한쪽을
뚝!
떨구는
옥양목 빛깔의
백목련 한 송이.
―「달항아리 ― 국보 제310호 백자대호白磁大壺」 전문
「달항아리」는 투명한 이미지와 과감한 상상력을 폭력적으로 결합하면서도 경이로운 미감을 자아내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3연으로 구성되어, 연들 하나하나가 달항아리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만, 연과 연은 서로 연결되지 않은 채 돌올한 이미지들을 나열해 오히려 더 극적인 성취도를 얻어낸 사례이다. 이 작품의 독립된 이미지들은 독자에 따라 천변만화할 수 있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시인은 그 이미지들을 단편적으로 나열하면서 독자로 하여금 완성해 보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토종두부와 햅쌀밥 한 그릇. 백목련 한 송이는 개별적인 이미지들이지만 달항아리를 매개로 각종의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는 통로다. 예컨대 토종두부의 낯빛같은 푸근함, 햅쌀밥 한그릇의 넉넉함, 날개깃 한쪽을 뚝 떨군 백목련 한 송이의 처연함을 동시에 보여준다고 할 수 있지만, 독자에 따라서는 토종두부의 순박함, 고봉밥의 풍성함, 백목련의 날씬함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현대시는 독자가 완성한다는 작시법의 실체가 한눈에 드러나는 사례다.
배추에 소금을 뿌리다 보면
배추란 놈
꼭 천년입맛을 구워내는 고려高麗가마 같다
이슬에 햇빛에 달빛에 소금에
온갖 것에 절여져서는
익어 갈수록
우리 입맛을 채워주는
텅빈 웃음이다.
―「천년 입맛」 전문
「달항아리」가 고난도의 테크닉을 구사한 작품이라면「천년 입맛」은 그야말로 착시현상을 기법에 도입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무심히 읽어나갈 때는 배추와 우리 입맛의 연결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작품이지만, 자세히 읽어볼 때는 배추와 고려가마의 이질성을 통합하는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은 우선 “꼭 천년입맛을 구워내는 고려高麗가마 같다”는 은유를 사용함으로써 배추와 고려가마를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잇달아 보조 오브제로 등장한 고려가마에서 연상될 듯한 “이슬에 햇빛에 달빛에 소금에”처럼 모호하면서도 반복적인 리듬을 거쳐 주 오브제인 배추로 돌아온다. 시인은 다시 여기에 ‘구워내는’과 ‘익어갈수록’과 같은 속성을 내세워 ‘우리 입맛’이 곧 ‘천년 입맛’이라는 마무리를 완성시킨다. 우리 시단에 이처럼 자유자재로 언어의 자력과 탄성을 운용하는 시인이 얼마나 더 있을까. 괄목할 만한 미학적 성취라 할 것이다.
병아리 같은 유치원생들 따라 들어섰던
박물관
마주쳐버린
7천년쯤
전
그때의
햇살
물살
바람결.
―「빗살무늬토기」전문
「빗살무늬토기」는 박물관과 병아리 유치원생을 병치시킴으로서 7천년쯤 전 그때의 햇살, 물살, 바람결을 불러오고 있다. 불과 9행, 13개 낱말, 40개의 문자로 7천년, 박물관, 유치원생을 하나로 연결시켜 말로 표현되기 어려운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을 빗살무늬토기의 몸에 새겨넣은 빗살무늬라 할 것이다. 실로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정신을 사물로 대치해 그의 이름을 물어보고, 던져보고, 깨뜨려보고, 짓밟아도 보고, 물어뜯기도 하며 혹은 몸이 으스러지라 껴안아보기도 하고, 샅샅이 핥아보면서 그의 입내며 땀내며 속내를 맡아봄으로써 오브제와 일체화되어 본 시인이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작품이다.
이처럼 좋은 시들은 시인이 저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준다. 사물 속의 나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사물의 속성과 정보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물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공간과 시간을 확장해야 하는 정신의 충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시인의 한평생이란 결국 그가 만난 사물 속의 나와 벌이는 한 편의 연극이자 오페라, 씨름판이자 광대놀이라 할 수 있다. 좋은 시는 이렇듯 부단한 트레이닝 끝에 얻어내는 결실이기에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시인에게서 태어난다. 최영규 시인의 제2시집『나를 오른다』를 읽으면서 나는 문득 그러한 시인의 집중과 내공이 절차탁마의 빛을 발하는 시경을 보았고, 본지풍광의 환희감을 느꼈고, 두고두고 시의 그윽함을 사랑하리라는 믿음을 얻었다.(시인, 문학아카데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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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사의 글 ◆
적막을 듣고 보아내는 황홀의 미학
본지풍관과 정신의 환희감
그의 존재 행위는 치열하면서도 ‘비워냄의 충만’을 터득해가는 그런 절대 순수 과정이다. 최영규의 「안데스」연작(連作) 13편을 비롯한 또 다른 시산(詩山)들을 오르면서 주역의 ‘감지(坎止)’라는 말이 거듭 떠올랐다. 물이 흘러가다가 구덩이를 만나면, 구덩이를 다 채워 넘칠 때까지 기다린다. 묵묵히 역경과 시련을 감내하면서 본래의 자신을 찾아가는 진솔한 과정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 ‘감지(坎止)’의 정신이 최영규의 시정신이요 존재론이다. 이러한 그의 자세에 거듭 믿음이 갔다. 아울러 저러한 대자유의 시간과 공간이 품고 있는 ‘적막’을 듣고 보아내는 황홀의 미학이 구체화된 시편들이 (「하늘길 잠적潛跡」, 「강경들녘 폭염」등) 시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음에 격려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정진규(시인)
그는 고향의 “두렵고 어두운 산”을 “내 안의 나를 불러내는 내 전생前生 같은 산山 -그리움의 안데스”라고 순간적으로 변용시킨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산(山)은 시인의 생애가 원석처럼 박혀 있는 무비(無比)의 절대적 심상이 된다. 가공과 세공 이전의 원석이야말로 진짜 보석인데, 덧칠과 개칠에 물든 뭇 시인들은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다. “산허리를 안고 돌아가자/ 길을 터주는 나뭇가지들이 처음 보는 나를 만져보느라/ 야단이다”라고 시치미 딱 떼는 너스레와, 백자 달항아리를 “삼베보자기에 눌러 빚은/ 토종두부의 낯빛”으로 순간이동시키는 시적(詩的) 마력(魔力)은 물량위주의 허명(虛名)에 물든 우리 시단에서 하나의 보기 드문 시적 성찰이 될 것이다. 이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귀한 시인의 가파른 벼랑을 쉬엄쉬엄 뚜벅뚜벅 오를진저. ― 오탁번(시인.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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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규崔榮圭 시인∥
∙경기대 강원도 강릉 출생.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아침시집』『6인 합동시집』.
∙한국시문학상, 경기문학상 수상.
∙<시천지 동인> <서사시문학 동인>.
∙한국시인협회 사무총장 역임.
∙국제PEN클럽 한국본부 감사 겸 심의위원
<등반>
∙코오롱등산학교, 정승권등산학교 졸업.
∙한북정맥 종주, 백두대간 종주, 백두산(2,744m)
∙일본 오쿠호다카다케(3,190m).
∙일본 북알프스 및 남알프스 연속 종주.
∙말레이시아 키나발루(4,010m)
∙요세미티 트레킹, 몽고 트레킹.
∙유럽 최고봉 엘브루즈(5,642m)
∙남미 최고봉 아콩가구아(6,962m) 폴리쉬빙하 다이렉트 루트.
∙오세아니아 최고봉 코시어스코(2,230m).
∙중앙아시아 레닌봉(7,134m)
∙알프스 몽블랑(4,807m), 마터호른(4,48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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