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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3.26전국장애인대회 교양자료 |
[3.26교양자료1]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취지와 의미, 그리고 역사
장애인의 날의 유래와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전사(前史)
노동자들에게는 노동절(메이데이)이 있다. 1886년 5월 1일 미국의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의 법정 노동 시간을 쟁취하기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던 바로 그날이다. 도시를 완전히 마비시키고, 노동자가 일손을 놓으면 세상이 멈춘다는 것을 확인했던 이날의 총파업에 대해 미국 정부는 광기어린 탄압을 자행해 어린 소녀 노동자들이 살해되었으며, 이에 항거했던 미국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투옥되고 사형 당했던 뼈아픈 탄압의 역사이다.
많은 나라들이 전 세계 노동자들에게 자랑스럽고 역사적인 이날을 기리기 위해, 매년 5월 1일을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 연대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국제적인 기념일로 삼고, 이날을 노동자의 단결과 국제연대를 과시하는 다양한 행사와 현장투쟁으로 채워가고 있다. 노동절은 ▲전 세계 노동자의 단결을 과시하는 날 ▲노동자들의 당면 과제 해결을 위해 투쟁하고 결의를 다지는 날 ▲노동자 국제연대의 날이다.
노동절을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450만 장애인들의 ‘장애인의 날’이 이와는 다른 역사 속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한국의 장애인의 날은 한국장애인재활협회가 1972년부터 4월 20일을 ‘재활의 날’로 기념해오던 것을 이어받아, 전두환 군부 독재정권이 1981년부터 같은 날을 ‘심신장애자의 날’로 지정하면서 시작되었다. 장애인들의 가열찬 투쟁의 성과물이나 기념해야할 어떤 사건도 없이, 장애인의 날이 이렇듯 정치적 선전물로 출발했기에 지난 20여 년 동안의 기념식은 전시행정의 표본이었다.
영부인이 단골로 등장해 동원된 장애인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장애인복지 유공자들에게 훈․포장을 나눠주고, 장애는 극복해야할 것이라며 ‘장애극복상’을 수여한다. 평소에는 무관심하거나 이따금 동정적인 기사를 한두 번 내보내는 각 방송과 언론은, 이날 하루는 마치 장애인들에게 대단한 관심이라도 있는 듯 종일 방송을 편성하기도 한다.
87년 6월 항쟁과 7, 8, 9월 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며 청년장애인들도 장애인의 문제가 개개인의 노력이나 가족의 희생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고, 사회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해결하려는 장애인운동이 태동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장애인의 날을 정권이 선사한 전시적인 날이 아니라 ‘우리의 날’로 만들기 위한 외침도 시작되었다.
1989년 ‘장애인권익촉진 범국민결의대회’, 90년 ‘기만적인 복지정책 규탄 및 400만 장애인 인권쟁취결의대회’ 등 4월 20일을 전후한 행사들은 장애인문제연구회 울림터, 장애인운동청년연합회(장청) 등의 청년단체에서 주도하며 치러오다 이후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전장협)의 ‘장애인노동권 쟁취’에 초점이 맞춰진 행사로 발전한다. 전장협은 90년대 초반 ‘노동권쟁취를 위한 결의대회’ 등을 거쳐 96년부터 ‘장애인노동권리 확보를 위한 범국민걷기대회’를 매년 4월 20일에 개최하였던 것이다.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의 취지와 의의
그러나 해마다 장애인의 날이 되면 정부와 관변단체에서는 여전히 장애인들을 놀이공원과 체육관으로 불러내 온갖 친철을 베풀고, 언론에서는 인간 승리와 눈물겨운 휴먼드라마로 그들의 삶을 미화해내거나 ARS모금활동을 통해 장애인들을 돕기에 바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시혜와 동정의 이름으로, 장애극복의 기만적인 이데올로기로 장애인을 차별하는 사회구조를 강화시키고, 장애인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지배 권력에 면죄부를 부여하려는 기만적인 행태에 불과할 뿐이다.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약칭 420투쟁)은 이렇게 정부와 관변단체가 주도했던 시혜적이고 일회적인 장애인의 날 행사를 정면으로 거부하고 우리사회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을 장애대중과 함께 하는 장애인차별철폐의 날로 만들어 가고자하는 지향 속에서 2002년 처음 시작되었다. 이러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을 처음 주도했던 것은 장애인이동권연대에 참여했던 단체들이었으며, 별도의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약칭 420공동투쟁단)을 구성하여 매년 장애인의 날을 기점으로 1달여간에 걸친 공동투쟁을 벌이게 된다. 그리도 420공동투쟁단은 단지 장애인 관련 단체들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인권․사회․학생단체 등 우리 사회의 진보운동 단체들과 개인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함으로써, 장애운동 내부와 외부의 연대를 확산시키는 계기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420공동투쟁단의 활동은 각개 약진의 형태로 진행되던 영역별 연대체 간의 연대, 서울과 여타 지역 장애인운동간의 연대, 장애인운동과 전체 사회운동과의 연대라는 삼중적 의미를 연대를 실현시켜내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420공동투쟁단의 활동 경험은 이후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건설에 있어 귀중한 밑거름의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또한 420투쟁은 국가가 지정한 장애인의 날에 관변단체를 동원하여 이루어지던 행사들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행동들을 조직해 냄으로써, 매우 대중적이고 상징적인 차원에서 시혜와 동정의 이데올로기를 깨뜨려 나가는 효과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도 그 의의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420투쟁의 역사
1) 2002년 : 420투쟁의 시작
420투쟁이 처음 시작되었던 2002년에는 장애인의 노동권․이동권․교육권․시설비리척결․장애여성․복지(빈곤, 실업장애인의 최저생계 보장)․참정권의 7개 영역에 대한 요구를 정식화하고, 장애인의 날이 포함되어 있었던 주간인 4월 15일부터 4월 20일까지 이러한 요구들을 기반으로 다양한 실천들을 벌이게 된다.
구체적으로 공동투쟁 1일째인 4월 15일에는 420투쟁의 의의와 목적, 내용을 알려내는 장애인차별철폐투쟁선포식 기자회견을 열고, 4월 16일에는 장애인이동권쟁취를 위한 버스타기 투쟁과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평가와 전망에 대한 토론회를 진행하였다. 4월 17일에는 ‘장애인의무고용 외면하는 삼성 재벌 규탄대회’를 갖고, 저녁에는 장애인차별철폐문화제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개최하였으며, 4월 18일은 ‘에바다 문제해결과 장애인 시설비리 척결 결의대회’ 및 장애민중 투쟁 영상전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장애인의 날인 4월 20일에는 종묘공원에서 장애해방운동가 정태수․최옥란 열사 추모문화제와 장애인차별철폐투쟁결의대회를 진행한 후 가두행진을 벌이게 된다. 또한 투쟁기간 내내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는 장애인권 사진권, 정태수․최옥란 열사 추모전, 페이스 페인팅, 장애인 이동권 서명운동 등의 프로그램으로 거점선전전이 이어졌으며, 전교조에서는 전 조합원들이 장애인의 인권을 주제로 한 공동수업을 진행하게 된다.
2002년 420공동기획단에 참여한 단위는 총 87개 단체였으며, 이러한 광범위한 진보진영의 연대가 이루어진 것은 이동권 투쟁을 비롯하여, 장애인 문제와 관련된 다양한 실물적 투쟁의 흐름이 형성되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2003년 : 투쟁 기간의 확대와 주제의 다양화, 그리고 투쟁의 전국화
2003년 420투쟁은 2002년에 비해 투쟁 기간이 대폭 확대되었으며, 장애인운동 내부의 다양화된 쟁점과 요구를 걸고 투쟁을 진행하였다. 420공동기획단은 최옥란 열사 1주기인 3월 26일에 맞추어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선포 기자회견과 최옥란 열사 추모제를 개최하고 1달여간에 걸친 420투쟁에 돌입하게 된다. 2003년에 제시된 대정부 요구안은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노동권, 교육권, 이동권, 편의시설, 장애여성, 자립생활, 장애인연금법제정, 국민기초생활보장법개혁, 정보접근권, 에바다 정상화의 11개 영역으로 다양화․구체화 되었으며, 이에 맞추어 대중 집회, 서명운동, 1인 시위, 토론회, 장애인권영화제, 문화제 등의 행사를 개최하였다.
또한 2003년 420투쟁의 중요한 발전은 서울만이 아닌 경남, 부산, 광주 지역에서도 ‘장애인차별철폐 공동실천단’을 꾸리고 전국적인 규모의 투쟁이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각 지역 공동실천단은 지역의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요구안을 내걸고 다양한 행사와 투쟁을 진행하였으며, 이러한 공동실철단은 이후 상시적인 지역 연대체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또한 2003년 420투쟁의 슬로건은 ‘전쟁반대! 차별철폐!’로서, 전체 민중운동의 가장 주요한 이슈였던 반전운동의 내용을 장애인운동 역시 주체적으로 받아 안으려는 의지와 실천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3) 2004년 : 질긴 놈이 승리한다! 한 달간에 걸친 노숙 농성 전술의 사용
2004년 420투쟁은 세종문화회관 앞에서의 1달여간에 걸친 노숙농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행사와 투쟁 일정이 진행되게 된다. 이러한 거점 노숙 농성 전술의 사용은 대정부 압박을 보다 효과적으로 진행함과 동시에, 총선과 대통령 탄핵정국이라는 정세를 결연한 투쟁을 통해 돌파해내려는 의지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2004년의 420투쟁 역시 3월 26일의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 선포 결의대회’와 ‘최옥란열사추모사업회 출범 및 2주기 추모문화제’를 시작으로 그 포문을 열게 되지만, 당일 저녁 시간에 치러질 예정이었던 최옥란 열사 추모문화제는 공권력의 폭력 침탈에 의해 82명의 연행자를 발생시키며 무산되고 만다. 그러나 420공동기획단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곧바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노숙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4월 19일까지 매일 거리 선전전 및 약식집회, 영상문화제를 중심으로 농성을 이어나게 된다. 또한 ‘빈곤문제해결을 위한 사회연대’ 출범식(3/30)과 ‘서울시장애인콜택시올바른운영을위한공동대책위원회’ 출범식(4/12)도 420투쟁의 기간 동안 치러지게 되는데, 이러한 연대체의 출범식이 420투쟁의 흐름 안에서 함께 진행되었다는 것은 장애인운동과 사회운동 진영 간의 연대가 보다 긴밀해졌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 420투쟁의 요구안은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 장애인 노동권, 장애인 이동권, 장애인 교육권, 장애인 연금법 제정, 장애인 자립생활 지원, 장애인 기초생활권, 장애여성, 장애인 정보접근권, 장애인 문화권, 미신고시설 인권확보, 장애인 편의시설, 장애인 체육활동 보장의 13대 요구안 외에, 충북․경남․부산․광주의 지역 요구안, 그리고 김도현 동지 석방 특별 요구안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총 86개 단체와 773명의 개인이 참여하였다.
4) 2005년 : 제1회 전국장애인대회의 조직
해를 거듭하며 조금씩 발전을 거듭해오던 420투쟁은 2005년에 들어서는 전국장애인대회를 조직하게 된다.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기리며 전국노동자대회가 치러지듯이, 최옥란 열사의 기일인 3월 26일에 맞춰 ‘장애해방열사정신계승, 2005장애인차별투쟁선포 제1회 전국장애인대회’를 전국에서 모인 장애인운동의 주체들이 개최하게된 것이다. 이러한 전국장애인대회는 아래로부터의 대중투쟁을 통해 장애인의 권리를 쟁취해내고자 하는 진보적 장애운동 세력의 성장과 결집을 상징적으로 나타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약칭 420공동투쟁단)은 3월 24일부터 ‘대한민국에 장애인 인권은 없다’라는 구호 아래 국가인권위원회를 점거하고 농성에 돌입하였으며, 4월 19일까지 농성을 지속하였다. 그리고 4월 20일 공덕동 로터리에서 개최된 420장애인차별철폐투쟁결의대회 때에는 집회 후 마포대교를 4시간여 동안 완전히 점거하고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로 인해 95명의 인원이 연행되기도 하였다.
2005년 420투쟁은 장애인 차별철폐를 위한 법률제정(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 장애인교육지원법제정, 도로교통법․영화진흥법․선거법 개정), 장애인 생존권․생활권쟁취(중증장애인노동권 및 장애인연금제 쟁취,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개혁, 장애인자립생활을 위한 활동보조서비스 제도화, 장애인이동권 및 편의시설, 사회복지 시설 민주화 및 공공성 쟁취), 장애인의 사회적 권리확보(장애여성의 권리 확보, 장애인 문화권 확보, 장애인 체육활동 보장) 3개 영역에 걸친 11대 요구안과 충북․경남․광주의 지역 요구안을 걸고 진행되었다. 특히 전국장애인체전이 예정되어 있던 충북지역은 4월 14일부터 이동권, 교육권, 자립생활의 요구를 걸고 무기한 단식농성을 진행하는 한편, 장애인체전저지투쟁을 결의하는 등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2005년 420공동투쟁단에 참여한 단위는 총 93개 단체였으며, 1,224명의 개인이 실천단으로 조직되었다.
※ 3월26일 제5회 ‘전국장애인대회’
▣ 일시 : 2009년 3월 26일 (목) 오후 2시 ▣ 장소 : 국가인권위 앞 (보건복지부 까지 행진) ▣ 주최 : 420장애인차별철폐공동투쟁단/ 주관 :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
[3.26 교양 자료2] 최옥란 열사의 삶과 투쟁
1966년 출생
1988년 장애문제연구회 '울림터' 창립회원
1989년 '장애인고용촉진법 제정과 장애인복지법개정을 위한' 공대위 활동
1992년 장애인운동청년연합 활동 / 정립회관 정상화를 위한 공대위 활동
2001년 '장애인 이동권 쟁취를 위한' 연대회의 활동
2001년 2월 서울역 선로 점거 150만원 벌금형
2001년 12월 생존권 쟁취와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위한 명동성당 농성단
2002년 3월26일 심장마비로 별세
최옥란 동지의 삶은 한마디로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1급 장애인이었던 최옥란 동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권자로서 너무도 열악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투쟁으로 이겨내고자 최저생계비 현실화를 요구하며 투쟁해왔다.
정부가 최옥란 동지에게 지급한 돈은 생계급여(26만원)와 장애인수당(4만5천원)을 합쳐 30만5000원에 불과했다. 이 돈은 영구임대 아파트 관리비 16만원, 치료비 및 약품 구입비 25만3000원, 식비 등 최옥란 동지의 한달 생활비를 감안할 때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오히려 빚을 져야하는 실정이었다.(2002년 기준) 이러한 상황에서 동지는 청계천 벼룩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목디스크 수술을 받기 위해 노점을 접어야 하기도 했는데 2002년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따르면 1인당 월 소득이 33만원이 넘으면 수급권자가 될 수 없으며 의료보호 또한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지는 이와 같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에서 지급한 월 생계급여 26만을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되돌려 주기도 했다. 또한 “현재의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최저생계비 산출방식이 개인별, 가구별 특수성을 무시하고 행정편의적이고 일률적으로 이뤄졌다”며 “가구유형과 특성을 고려한 산정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고 항의했다. 또한 “현행 최저생계비에 기초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그리고 최저생계 보장이라는 법의 취지에 위배된다”며 헌법소원을 제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동지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쳤다. 4년 전 남편과 이혼한 동지에게 9살 난 아이가 한명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이며 최저생계비 수급자인 그녀가 양육권을 가질 수 있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으며 자주 만나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었다. 동지는 양육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통장에 어느 정도의 돈을 넣어두어야 한다는 조언을 변호사로부터 들었고, 주위 사람들의 도움으로 통장에 7백만원 가량의 돈을 모았다.
그런데 2월 20일경, 동지는 동사무소로부터 계좌추적에 관한 통지서를 한 통 받았다. 이는 재산과 소득을 파악해 수급권자를 재심의하는 절차의 일환인데, 동지는 통장의 돈 때문에 일정한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수급권자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그 상황은 동지에게 양육과 수급권 중 한 가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동지가 아이의 양육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수급권을 포기할 경우, 살아갈 방법이 없었다. 뇌성마비 중증장애인의 몸으로 장애인의 권익을 위해 정열적으로 투쟁해 왔던 동지였지만, 가난으로 모성마저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는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장애인으로, 여성으로, 수급권자로 그리고 실업자로 살아야했던 동지는 어떻게 호소해도 달라지지 않는 현실, 아이의 양육권과 쥐꼬리만한 수급권을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 사이에서 괴로워하다 극약을 마시고 한달 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던 끝에 결국 운명을 달리하였다.
최옥란, 그 이름을 기억해야 [한겨레 2002.3.30]
가난과 장애, 여성이라는 3중고를 짊어지고 살았던 한 생활보호대상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보통 장애인이 아니었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세상을 향해 온몸으로 호소하고 저항한 투사였다. 그러나 세상은 그에게 무관심했고 그는 끝내 죽음을 택했다. 그의 이름은 최옥란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거동을 할 수 있는 1급장애인이었다. 서른여섯의 이혼녀이며 아들이 있으나 양육과 접견이 금지되었다. 정부에서 생계비를 수급받는 극빈자다. 아이를 기르고 싶었지만 극빈자이기 때문에 양육이 불가능해지자 노점상을 했다. 노점상 수입이 조금 생기자 소득이 있으므로 생계비 수급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위협을 받았다. 노점상도 그만두었다. 정부는 극빈장애인의 처지를 외면하고 일률적으로만 생계비를 지원했다. 최소한도 60만원이 있어야 장애인이 살 수 있다며, 그는 불합리하게 책정된 생계비에 대해 위헌신청을 내고, 지난 겨울 명동성당에서 일주일동안 홀로 천막농성을 했다.
“26만원으론 못삽니다. 자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추운 겨울 천막농성을 하면서 걱정되는 것은 이 투쟁이 저혼자만의 투쟁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회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달라는 그의 호소문의 일부이다. 한달에 60만원만 있었으면 그는 가끔 아들을 만나며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차가운 관료주의나 행정편의주의 대신 전국의 15만 극빈 장애인 하나하나의 각기 다른 사정을 보살펴주는 손길만 있었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최옥란이란 이름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1970년, 청계천에서 다른 모든 노동자들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가고 있을 때 `노동기본권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자살하였던 전태일을 기억하듯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슬프고, 외롭고, 소외된 존재였지만 살아보려고 홀로 몸부림쳤던 한 장애여성이 죽음으로 호소한 `제발 관심을 가져달라'는 그 절절한 외침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
빈곤이 강요한 여성장애인 죽음 [인권하루소식 2002.3.28] 유언처럼 남겨진 '생활보장 수급권 운동'
"...저는 저의 텐트농성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정말로 저 같이 가난한 사람들의 최저생계를 보장하는 제도로 거듭나기를 희망합니다. 벌써 두 명의 수급권자가 자살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더 이상 수급자들이 자살하 거나 저같이 자살을 생각하지 않도록 바뀌었으면 합니다..."라며 지난 해 12월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진행했던 뇌성마비 1급 장애인 최옥란 씨가 26일 새벽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최 씨는 지난달 20일 경 자살을 시도한 후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치료를 하며 건강을 되찾아 가던 중이었다. 최 씨의 갑작스런 죽음은 빈곤에서 벗어 나기 어려운 여성 장애인의 삶과 그들에게 안전망조차 돼주지 못하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에 대한 무언의 항변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 씨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에 따라 28만원의 생계급여를 지급받아 왔다. 하지만 이 돈으로는 도저히 '최저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장애로 인한 치 료비 20여만원, 영구임대아파트 임대료 16만원을 포함해 매달 월 60여 만 원의 생계비를 지출해야 했기 때문. 이에 최 씨는 지난해 12월 3일부터 1주 일 간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하라"며 명동성당에서 농성을 했다. 또 현행 최 저생계비 산출방식이 장애인 가구 등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추가로 드는 비용을 개인에게 전가해 헌법상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 등을 침해한다며 헌 법재판소에 위헌확인 소송을 내기도 했다. 이 와중에 지난 2월에는 적은 생계급여마저도 더 이상 못 받게 될 거라는 공포가 최 씨를 엄습했다. 서울실업운동연대 유의선 사무국장에 따르면, 최씨에겐 아들이 하나 있는데, 이혼한 남편에게 양육권이 있어 함께 살 수 없 을뿐더러 자주 만나기도 어려웠다. 올해 초 최 씨는 양육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통장에 어느 정도의 돈을 넣어두어야 한다는 조언을 변호사로부터 들었고,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통장에 7백만원 가량의 돈을 모았다. 그러던 중 지난달 20일 경 최 씨는 동사무소로부터 계좌추적에 관한 통지서를 한 통 받았다. 이는 재산과 소득을 파악해 수급권자를 재심의하는 절차의일환인데, 최 씨는 통장의 돈 때문에 일정한 소득이 있는 것으로 간주될 형편이었다. 최 씨는 이 때 "수급권자에서 탈락하겠구나"는 생각에 낙심한 나머지, 과산화수소 한 통과 수면제 20알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다. 그 상황 은 최씨에게 양육과 수급권 중 한 가지를 강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최 씨가 아이의 양육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수급권을 포기할 경우, 살아갈 방 법이 없었다. 최 씨는 자살 시도 후 응급치료를 받고 건강을 회복하면서는 "사람들을 보고 싶다. 수급권 운동을 해야 한다"며 삶의 의지를 다시 보였다고 주위 사람들이 말한다. 하지만 최 씨는 앞으로의 바램을 남긴 채, 결국 이 세상을 떠나고야 말았다. |
[3.26 교양 자료 부록] 연관 검색어 자료 꼼꼼히 보기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문제점
○ 통합급여 방식으로 인한 사각지대 확대 및 수급탈출을 꺼리게 하는 역기능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all or nothing 체계라 해서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의 수급대상이 되면 소득보장, 의료보호, 교육급여, 해산급여, 장제급여, 자활급여 등 해당가구의 환경적 요인에 따라 보장을 받음. 이는 수급자와 차상위계층 간의 소득역전 현상을 발생시키거나, 수급자들이 노력을 통해 탈수급하려는 자활의지를 억제하는 기제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음.
이에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개편안을 제시하고 있지만, 기존의 통합급여를 분리하고 차상위까지 개별급여를 확대하고자 하는 것임. 하지만 현 정부에 들어오면서 논의가 진전되지 못하고 있으며, 오히려, 사회적일자리창출이라는 미명아래 노동을 강제하고, 서비스의 질을 담보하지 못하는 일시적인 정책을 확대하고 있음. 사회적일자리창출정책에 있어서는 부족한 사회서비스를 확대하여 보편적 사회서비스의 확대라는 맥락에서는 긍정적인 것 처럼 보이나, 일자리의 성격이나, 이들의 임금수준, 기간등을 고려했을때 사회서비스시장을 저임금, 불안정노동계층을 양산 및 고착화 하여 결과적으로 노동빈곤층을 확대양산하는 기제로 작용할 개연성이 높음.
○ 광범위한 사각지대 형성
- 선정 기준의 및 낮은 최저생계비의 문제
• 낮은 최저생계비로 인해 선정기준이 낮아짐. 이는 제도의 정책대상을 최소화함. 소득불평등 및 양극화로 인해 신빈곤층은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상대빈곤률은 지속적으로 큰 폭으로 상승함에도 불구하고 절대빈곤률(최저생계비 기준)은 둔화되는 현상이 나타남.
• 4인가구 도시근로자가구 평균소득 대비 최저생계비 추이는 최저생계비가 공식적으로 계측되어 적용된 1999년에 비하여 지속적으로 감소. 이는 최저생계비가 지속적으로 낮게 갱신되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임. 2005년 전년 대비 1.4%p상승한 것은 최저생계비 계측 해로 인한 상승.
- 부양의무자기준의 문제
•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조건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대상자의 소득기준과 부양의무자 기준, 자동차기준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 등 엄격한 수급조건으로 인해 광범위한 사각지대 형성. 보건사회연구원(2005)에서는 엄격한 대상자 선정 기준으로 2003년 현재 기초생활보장 제도는 전체 빈곤층 716만명중에서 138만 명만이 보장을 받고 있다고 발표.
• 비수급 빈곤층은 부양의무자 기준과, 엄격한 재산 기준에 의해 수급에서 탈락된 가구. 여유진(2004)에 의하면 비수급 빈곤층의 41%가 부양의무자 기준 및 간주부양비로 인해 탈락했으며, 51%는 비현실적 재산 기준에 의한 것.
소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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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생계비의 1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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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상위 빈곤층 (206만명) 전 인구의 약 4.3% (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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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저생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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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생활보장 수급자 (138만 명) 전 인구의 약 2.9% (A) |
기초생활보장 비수급 빈곤층 (372만 명) 전 인구의 약 6.3% (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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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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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소득인정액(소득평가액+재산의 소득환산액)이 최저생계비의 100%인 선
B: 소득인정액이 최저생계비의 120%인 선
* 자료: 한국보건사회연구원, ‘2004년 차상위계층 실태조사’에 의한 잠정추계(‘05년 7월)
- 비현실적인 간주부양비로 인한 동반 빈곤현상 심화
• 부양능력유무 기준 중 부양능력미약가구에 해당하는 부양의무자가구들에게 부양비를 전제하고, 이는 수급당사자에게는 받았던 받지 못했던 간주부양비로 산정함. 2005년 최저생계비 이하가구 중 사적이전소득을 실제 받고 있는 가구는 22.6%, 받지 못하고 있는 가구가 77.4%(이선정.2006).
• 분석결과 부양의부자의 소득수준이 너무 낮아 개별급여 대상인 차상위 수준. 이런 이유로 실제 사적이전소득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1년 평균 금액이 10만원 수준 즉 월평균 1만원도 되지 않는 수준이며, 월평균 1만원도 받지 못하는 노인가구가 77.4%에 달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에서는 과도한 부양비를 산정하여 부과함으로서 수급대상 노인가구의 수급권을 박탈한다거나 생계급여의 액수를 낮추는 기제로 활용.
부양의무자 기준으로 인한 사각지대의 문제는 노인 및 장애인의 탈락을 확대하고, 빈곤가구의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막는 기제로 작동하고 있어 빈곤의 악수환의 고리를 탄탄하게 만드는 기제로 자리하고 있음. 따라서 부양의무자의 기준을 폐지함으로서 가족 빈곤의 악순환 고리를 끊어야 할 것임.
- 모든 수급권을 박탈하는 자동차기준
• 사회복지서비스 대상 선정 시 소득만으로 가구의 생활수준을 파악하기 어려워 소득인정액제도(소득+재산의 소득환산액)를 사용. 재산의 범위에는 전세자금과 통장의 금융자산, 생계를 위한 것이 아닌 자동차 등이 모두 재산 포함. 당연히 자동차도 재산으로 포함해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비현실적인 재산의 소득환산율이 모든 공적부조 대상자는 물론 복지서비스 수급의 발목을 잡음. 이는 자동차의 소득환산율을 100%로 적용하여 실제 매매가가 200만원인 자동차의 경우 200만원을 월소득으로 평가하기 때문. 대부분이 서비스대상에서 제외됨. 한국의 자동차 보유가구는 전체의 59.4%로 자동차가 부의상징이 될 수 없는 생활필수품임을 인식하지 못함.
- 근거 없는 불법 추정소득부과의 문제
• 노동을 조건으로 수급을 받는 조건부 수급자가 일용직, 파트타임, 노점 등 소득파악이 용이하지 않은 가구원에 대하여 추정소득을 부과함. 이러한 추정소득은 유사업종에 종사자들의 소득을 조사하여 추정소득을 부과하도록 되어 있음. 그러나 실제 조사에 있어서 많은 허점이 들어나고, 부과대상자의 노동과 환경 등을 고려하지 않고 과도한 추정소득을 부과함으로서 수급권을 박탈하거나 생계급여를 낮추는 기제로 작용
• 원칙적으로는 추정소득을 폐지해야 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추정소득에 대한 명확한 근거와 면밀한 조사가 필요함. 또한 생계급여 수령 시 추정소득은 물론 급여수령액에 대한 근거를 당사자에게 제시함으로써 급여지급에 대한 투명성이 담보 돼야 함.
# 노동절(메이데이)
메이데이(May Day) 또는 워커스데이(Workers' Day)라고도 한다. 근로자의 노고를 위로하고 근무의욕을 높이기 위해 제정된 휴일로서, 매년 5월 1일이다.
미국과 캐나다에서는 9월 첫째 월요일, 유럽·중국·러시아 등에서는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8·15광복 후 5월 1일을 노동절로 기념했으나,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1963년 4월 17일 공포, 법률 제1326호)에 따라서 한국노동조합총연맹 창설일인 3월 10일을 노동절 대신 근로자의 날로 정하여 기념했다. 그러나 1994년부터 다시 5월 1일을 근로자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그 유래는 미국의 노동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성장한 독점기업은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노동자들을 착취했다. 이에 노동자들은 자신의 권익을 스스로 보호하기 위해 힘을 모으기 시작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와 미국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노동운동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1869년 필라델피아에서 전국 노동조합 연합단체인 노동기사단이 결성되고, 1886년 미국 노동총연맹이 탄생하여 노동운동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미국 노동자들은 1886년 5월 1일 하루 8시간 노동을 위해 총파업에 돌입했다.
이 파업에서 경찰의 발포로 어린 소녀를 포함한 노동자 6명이 사망했다. 다음날 이에 격분한 노동자 30만 명이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헤이마켓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하지만 시위중 갑자기 폭탄이 터졌고, 집회를 주도한 노동운동가 8명이 폭동죄로 체포되어 재판에서 5명은 사형, 3명은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을 헤이마켓사건이라고 한다. 그러나 7년후 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본가들이 이 사건을 조작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져 국민을 경악케 했다.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1889년 7월 파리에서 열린 제2인터내셔널 설립대회에서는 미국 노동자의 8시간 노동을 위한 상황을 보고받고, 1890년 5월 1일을 '노동자 단결의 날'로 정하여 8시간 노동쟁취를 위해 세계적인 시위를 결의했다. 이렇게 메이데이는 시작되었다. 이후 세계 여러 나라에서 노동자의 연대와 단결을 과시하는 국제적 기념일로 정하여 이날을 기념하고 있다.
# 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1987년 6월 10일부터 6월 29일까지 대한민국에서 전국적으로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 운동이다. 6월 민주항쟁, 6월 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으로 불린다. 대통령 선거인단이 대통령을 뽑는 간접 선거를 골자로 한 기존 헌법에 대한 전두환 대통령의 호헌 조치와, 경찰의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이한열이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사건 등이 원인이 되어 6월 10일 이후 전국적인 시위가 발생하였고, 이에 6월 29일 노태우의 수습 선언으로 마무리되어, 대통령직선제로의 개헌이 이루어졌다. 2007년 6월 10일 정부 차원의 첫 기념식이 열렸다.
# 7,8,9월 노동자 대투쟁(87년노동자대투쟁)
1987년 6월 29일 노태우 민정당대표의 민주화항쟁에 대한 항복 선언이 발표되자 거리를 휩쓸던 민주화 시위투쟁은 진군을 멈추었고 정치운동권은 잠시 조용해졌다. 이 정적을 깨고 먼저 투쟁의 불길을 당긴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들은 다양한 요구조건을 내세우고 폭발적인 파업투쟁과 노동조합 결성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당시 노동자 투쟁이 얼마나 폭발적이었는가는 투쟁기간과 규모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1987년 6월 29일부터 10월 31일까지 발생한 노동쟁의는 총 3,311건이었고, 그 가운데 97.7%인 3,235건은 쟁의행위를 수반하였으며 여기에 참가한 총인원은 약 122만 5,830명에 이르렀다. 이런 노동쟁의 발생 상황은 1977년-1986년 사이에 일어난 쟁의행위건수 1,498건과 참가자수 25만 명에 비교하면 각기 2배, 5배를 훨씬 능가하는 규모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은 산업별 업종별로 거의 전 부문의 노동자가 참여하였으며 지역적으로 볼 때 전국에 걸쳐 극히 짧은 시차를 두고 일어났다 노동자 대투쟁은 동남지역의 거대 공업단지인 울산을 기점으로 마산․창원․부산․광주․대구․대전을 거쳐 경인지역으로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이들 투쟁은 크게 세 갈래로 전개되었다. 첫째 갈래는 울산 현대엔진노동조합 결성을 시작으로 부산 ․ 마산 등지로 번져나간 제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었고, 둘째 갈래는 성남시를 비롯한 각 지역 택시 노동자들의 연대파업 ․ 시위 확산이었으며,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격렬한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이 셋째 갈래이었다.
노동자대투쟁은 세 시기로 진행되었다. 제1기는 전두환 독재정권의 6.29항복 선언과 함께 국가의 억압적 통제기구가 이완된 현상을 드러내면서 노동자들의 투쟁이 점점 확산된 시기다. 이 시기 투쟁은 현대엔진 노조결성(7.5), 현대미포조선 노조결성 신고서 탈취사건(7.16) 등을 거치면서 비교적 완만하게 진행되었다. 제2기는 8월 8일 현대그룹노동조합협의회 결성과 대우조선 파업 등을 시작으로 투쟁이 폭발적으로 고양되어 전 산업․전 지역․전 규모에 걸쳐 확산된 시기다. 예컨대 8월 17일-23일에는 1주일 동안 파업이 866건 발생했고, 파업참가자수도 25만 명을 넘어섰으며, 113개의 노조가 새로이 만들어졌다. 이처럼 투쟁이 폭발하자 자본 측과 정부는 공격적인 자세로 바꾸기 시작하였고 언론들은 매일처럼 ‘불순세력 개입’, ‘좌경 용공세력 침투’, ‘노사분규의 정치적 이용’ 등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매도하고 나섰다. 제3기는 정부가 물리력을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노동운동 탄압에 나서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급속하게 위축된 시기이다. 그 계기는 8월 28일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의 장례식이었다. 경찰은 추모집회 및 시위와 관련하여 933명을 연행하여 그 가운데 67명을 구속하였다. 이어 정부는 8월 28일 국무총리의 ‘좌경용공세력 척결을 위한 담화’ 발표 후 9월 4일 대우자동차와 현대중공업 파업 농성장에 경찰병력을 투입하였다. 이렇게 정부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노동자대투쟁은 9월말에 이르러 크게 위축되었다.
이와 같이 87년 노동자들은 전 지역, 전 산업에서 전체 사업장 규모와 관계없이 대대적인 파업을 전개했다.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에서 노동자계급이 형성된 이래 최대규모의 노동쟁의이자 대중적 항거였다. 그것은 오래도록 억눌려 왔던 노동자들의 불만과 요구가 잠재적인 형태로 존재해 오다가 거의 동시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궁핍 이외에 작업장에서 행해지는 각종 차별대우와 비민주적 관행 그리고 전근대적 노동통제가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반영한 것이었다. 또한 그것은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자발적인 대중투쟁을 통해서 종래 국가와 자본이 구축한 억압적 통제체제를 깨뜨리고, 노동운동의 자율적 공간을 넓힘으로써 노동체제를 새롭게 개편한 주체적 개입이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생존권과 노동권 등 기본권리 보장, 억압적 ․ 병영적 노무관리 철폐, 노조 결성과 조합 활동 보장, 단체협약 체결, 어용노조 민주화 등 광범하고 다양한 요구조건을 제시하였고 각종 차별제도와 비인간적 대우 철폐도 중요한 요구로 제기하였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법 절차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먼저 파업․농성․시위를 벌이고 노조를 만들어 협상을 요구하는 형태의 선제적 투쟁방식이었다. 이 사실은 1987년 노사분쟁 3,749건 가운데 94.1%가 불법 쟁의행위였다는데서 잘 나타나며 노동자들은 파업이나 단순한 작업거부 보다는 사업장 안팎의 점거농성과 시위 등의 격렬한 집단행동을 완강하고 지속적으로 단행하였다. 또한 집단행동은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는 절반정도만 일어났고 그것도 대부분 기존의 집행부와는 별개로 현장 노동자들이 주도하였다. 그 만큼 노동자대투쟁은 종래의 투쟁들에 비해서는 훨씬 더 대중적이고 대규모적이었다. 아울러 노동자대투쟁은 중화학공업 분야의 대기업 생산직 노동자들이 투쟁의 중심에 섰다. 이런 사실은 쟁의행위의 53.8%가 조립금속․섬유․기계․전기기계․기타화학 등의 산업에서 일어났고 1,000인 이상 대규모 사업체의 절반이 훨씬 넘는 곳에서 노사분쟁이 발생했다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것은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도세력으로써 중화학공업 대기업 생산직 남성노동자들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노동자대투쟁은 계획적이거나 조직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은 투쟁과정에서 지역별, 재벌그룹별, 산업별 연대투쟁을 시도하였고 이런 지역, 그룹 차원의 투쟁은 이후 지역 노조협의회, 그룹 노조협의회 등으로 조직화가 추진되어 이후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어 가는 핵심적 조직체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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