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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연 윤치영의 독입유공자 서훈 박탈
국가보훈처가 장지연, 윤치영 등 19명의 독립유공자 서훈을 박탈했습니다. 모두 친일인명사전에 친일인사로 등재된 이들입니다. 서훈 박탈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보훈처는 1996년에도 서춘 <매일신보> 주필과 박연서 목사 등의 서훈을 박탈한 사례가 있다고 합니다.
장지연은 1905년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에 항의하는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이날을 목놓아 크게 운다)을 쓰는 등 항일언론 활동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장지연은 한일합방 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식민통치를 미화하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초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윤치영은 일본과 미국 유학 시절의 독립운동 활동을 한 것으로 인정돼 1982년 건국포장을 받았지만, 1938년 전향성명서를 발표한 뒤 일제의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썼습니다.
이번에 서훈이 취소된 이들 중에는 동국대 이사장과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낸 이종욱, 장응순 장로교 목사 등 종교계 인사들도 다수 포함돼 있습니다. 대부분 한일합방 전후 항일활동을 하다 일제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는 1930년대말을 전후해 친일인사로 변한 이들이라고 합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실현될 전망이 보이지 않자 실망이 깊어지면서 전향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동안 친일인사가 버젓이 독립유공자 대우를 받게 된 배경에는 뒤틀린 우리 역사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해방 뒤 일제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반민특위는 1949년 이승만 정부의 방해 등으로 제대로 활동도 못한 채 해체되는 비운을 겪었습니다. 반면 일제시대 친일행위를 한 많은 이들과 그 세력들은 정부나 기타 여러 분야의 요직에서 활동해왔습니다.
일제잔재 청산 작업이 다시 활기를 띤 것은 참여정부 들어와서입니다. 2005년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가 대통령 직속기관을 설립돼 4년간 활동한 끝에 704명의 친일인사 명단을 발표했고,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 지난해 11월 4389명의 친일행위를 담은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것입니다.
이번 결정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친일잔재 청산 작업이 진행형임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친일재산환수 소송 결과가 언론지상에 보도돼 우리를 당혹스럽게 하지 않습니까? 이번 결정이 뒤집힌 역사를 바로잡는 작업에 좀더 힘을 실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박병수
출처 : 한겨례
장지연(張志淵, 1864년 ~ 1921년 10월 2일)
대한제국의 애국계몽운동가, 언론인으로 본명은 장지윤. 아호는 위암(韋庵)이다. 을사늑약 때에 쓴 반일 사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으로 유명해졌지만 1914년 이후의 행적에는 친일 경력이 포함되어 있어 이를 둘러싼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생애
유년시절
경상북도 상주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 향시 응제과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다. 이후 3~4차례 과거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했고, 1894년 식년시 진사 3등급 682위로 합격했으나 이무렵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면서 임명되지는 못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같은 해 2월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의 초안을 짓고 독소(讀疏)를 맡았다. 1897년 7월 사례소 직원에 임명되었고, 9월부터 내부주사를 겸직하다가 1898년 10월에 의면했다.
1898년 4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이름을 바꿔 발행하는데 참여했고, 9월에는 남궁억 등과 함께 《황성신문》을 창간하고 독립협회에서 이상재와 함께 활동했다.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위원으로 활동하였고, 1899년 1월부터 8월까지 격일간 신문인 '시사총보'의 주필을 지냈다. 같은 해 9월 황성신문 주필로 초빙되어 취임했으나 수개월 후 그만두었다. 1900년 10월 '시사총보'를 출판사인 '광문사'로 개편, 설립할 때 참여해 편집원을 맡아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흠흠신서'등을 간행했다. 1901년 봄 다시 황성신문의 주필로 초빙되었고, 1902년 8월에는 사장으로 취임했다. 1904년 3월 중추원에 연명으로 시정개선을 촉구하는 '정치경장에 관한 주요사항' 55개 조항을 헌의했다.
1905년 4월 정6품 승훈랑의 품계를 받았고, 7월부터 9월까지 민영기,윤치호,이달용등과 함께 일본의 신문사를 시찰하고 돌아왔다. 같은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사흘 후인 11월 20일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었다가 투옥되었다. 을사조약을 규탄한 <시일야방성대곡> 은 1905년 11월 27일 대한매일신보 에 한문과 영문으로 번역되어 기사로 나갔다. 이후 「코리아데일리뉴스」, 「제팬크로니클」 등의 언론이 이 명문을 인용했다. 한편, 장지연이 사장직에 있던 황성신문은 통감부의 압력에 압수되었고 1906년 2월 12일까지 정간되었다.
1906년 1월에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장지연은 교육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나아갔고, 대한자강회와 그 후신인 대한협회등을 조직하여 친일단체 일진회와 정면 대립을 전개하기도 했었다.
1908년 2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며 1년가량 머물렀고, 귀국하여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이 신문은 1910년 경술국치 체결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 복간되는 과정을 거쳤다.
경술국치 이후 장지연은 이 황현의 절명시 필화 사건 이후부터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친일시와 매일신보에 논설 주필로 있었고 730여편을 기고했다고 한다. 매일신보 기고 활동은 1914년 말부터 1918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려 조선인은 단결성이 없는 인종이라고 주장한 바도 있다.장지연이 이러한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은 일제강점기 경남일보사의 내부분열로 신문사를 퇴사한 이후 조선총독부 인사인 '아베 미쓰이에'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활동하게 된거다.
이러한 행보는 그 당시에도 유림,지식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러한 비난에 대해 장지연 본인은 '1.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않는다, 2.작성 원고는 일사유사, 종교풍속 등의 내용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등 세가지 조건에 입각해 매일신보에서 활동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그의 논설글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적인 언설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1918년 매일신보에 그의 이름으로 사설 실린것이 마지막글로 그 이후부터 장지연은 1919년 4월 경남 양산을 유람했다. 1921년 1월에 병을 얻었으나 회복되지 않고 더욱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도 끊으면서 치료했지만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11월에는 국가보훈처가 선정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바 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 1914년~1918년 사이 총독부 어용신문사 매일신보에 주필로 활동하여 700여편의 친일한시 및 사설을 게재했다는 의혹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언론 부문에 선정되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 오른 이들 가운데 논란이 많은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논란의 이유로는, 오랫동안 교과서 등을 통해 알려진 통념에 배치된다는 점, 경술국치 이전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해 활동했다는점, 지방에서 기고 위주로만 활동하면서 말년의 행적이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는 점, 일반적인 전향 친일 인사들이 흥업구락부, 수양동우회 사건이나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압박과 같은 계기를 통해 집단으로 친일파로 방향을 바꾸는 데 반하여 1910년대 초반에 특별한 동기가 알려진 바 없이 이미 천황을 찬양하고 총독을 칭송하는 행적을 보였다는 점, 친일 증거물 중 그가 쓴 것으로 의심 받는 《경남일보》의 시나 기사에는 기명 기사를 내지 않는 관례 때문에 글쓴이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지 않아 장지연의 글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점 등이 있다.
최근에는 장지연이 말년에 '1921년 소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기록한 일본 외무성 문서가 발견되었다. 1921년 5월 5일에 작성된 이 문서에는 러시아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이끈 "김경천의 초대로 온 장지연이 주우찌하(블라디보스토크 인근으로 추정)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는 내용이 소개돼 있다.
이 문서 자료를 발굴한 연세대학교 국문과 박애경 교수는 "매일신보 기고자였던 장지연을 매일신보 기자라고 오기한 측면은 있지만 이름이 정확히 일치하고, 매일신보를 언급했다는 측면에서 엉뚱한 사람을 장지연으로 오인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자료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자인 수원대학교 박환 교수는 "불령단관계잡건이 신빙성 있는 자료인 것은 분명하지만 노령의 장지연이 의병을 이끌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입증하려면 일본 병무청 문서 등 다른 신빙성 있는 자료와 비교 대조해 볼 필요가 있다"며 위암이 말년에 의병활동했는지에 대한 진위여부 논란은 더욱 심화될 전망이다.
윤치영(尹致暎, 일본식 이름: 이토 치에이(伊東致映)
1898년 2월 10일 - 1996년 2월 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교육자, 외교관이었다.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李承晩)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친일 의혹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에는 임정 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였으며,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9개월간 영어(囹圄)의 몸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이승만의 비서이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면서 그에게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될 것을 권고하기도 했다.
1945년 해방 뒤에는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기도 했고,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지내기도 했다. 1956년과 1960년 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최고희의 의장을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 내내 한 살 연상의 조카 윤보선과 정치적 거취를 달리했다.
한민당으로 정계입문하였으나 입각 후 한민당을 탈당,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한민당과 민국당에 대항하여 친여 성향의 대한국민당을 조직하여 야당을 견제하였다. 윤영렬의 6남 3녀 중 여섯째 아들로 윤치소는 친형이었고, 윤치호는 사촌 형이었으며 이병도·인촌 김성수등과 인척관계를 형성하였다. 정치인 이은혜(異恩惠)의 남편이었다.
호는 동산(東山)이며, 다른 이름은 자능(子能)이다. 가계상 윤보선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숙부이지만, 그보다 나이는 한 살 어리다. 1982년 건국포장을 받았다. 본관은 해평(海平). 경성부 종로방 안국동 출신으로, 4대조 때부터 충청남도 아산군에 정착했으므로 충청남도 출신으로도 간주된다.
첫댓글 이종욱스님 또한 서훈이 취소 되었군요.()()()
문중차원에서 각종문헌, 문서가 아닌 녹취록등으로 안이하게 소명하다보니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의견에 충분한 반론을 못한면도 없지않습니다.
또한 종교인으로서 끝까지 소신을 지키지 않으면 후대의 질타를 면하기 어려움을 극명하게 봅니다.
끝까지 회향을 잘해야겠습니다.()()()
우리나라처럼 확실하게 무엇을 규명하고 진실되게 처리가 더딘 나라가 또 있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잘못된 과거사 다 털어버리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지요.
그리않되니 친일파 후손이 재산반환 청구소송이나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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