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종의 문치
성종 즉위25년 기간은 조선시대의 황금기라 일컬어지는 시기였다.
동국여지승람과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등
성종의 정치력에 힘입어 문치시대를 열었다.
태조의 호칭: 나라를 건국한 왕.
태종의 호칭: 건국의 기틀을 다진 업적이 있는 왕.
성종: 모든 제도와 문물을 완성한 왕.
우리 나라 역사에 고려조와 조선조에 이같은 왕들이 있었다.
김극뉵(23세), 김극니(23세), 김극수(23세), 김극괴(23세),
김성원(22세), 김석원(21세), 김순성(21세), 김 석(22세)
김 굉(22세), 김현뢰(19세), 김처겸(23세), 김 감(28세),
김극기(23세), 김 정(25세), 김언우(26세), 김언거(26세)
23세 대사간 광원군 휘 극뉵의 묘(양간공파‧의정공파)
한국정통 풍수지리학의 이론으로 한국팔대 명당의 하나로
손꼽히는 곳이 있으니 전남 순창군 임계면 마흘리에 있다.
대사간 광원군(大司諫 光原君)의 묘소로 만대영화지지(萬代榮華之地)요,
만대발복지지(萬代發福之地)라는 명혈(名穴)로 불러지는 곳이다.
순창 대사간 묘가 명당이라고 정평 받는 배경과 지형지국을 살펴보자.
산소 앞에서 전후 좌우로 넓고 멀리 큰 산이 겹겹이 옹위하고,
주맥을 험준한 산이 기운차고 웅장하게 뻗어 내려있다.
장군이 긴 칼을 뽑아내듯 날카로운 섬광과 내리쏘는 살기를
둥글고 큰 태산 봉우리가 막아주고 있다.
한 굽이 방향을 바꾸어 건좌원(乾坐原)에 좋은 복지(福地)로 품우하고 영명한 명당을 이루고,
태산 봉우리 옆으로 작은 산은
멀리 바라다 보이는 안산인 문필봉이 연주처럼 봉우리를 이루었다.
중앙에는 큰 냇물이 둥글게 싸서 흐르고, 넓은 들판은 곡창을 이루어 풍요를 자랑하니,
그 지세와 국세가 밝고 넓게 포태하여
풍수지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보면 저절로 감탄소리가 흘러나온다.
대사간 광원군은 좌의정 광산부원군(국광)의 장자로
세종병진(1436)에 태어나 연산 병진에 돌아가시니 61세다.
향수로 공은 음사로 청진전직이 되었다가 찰방, 남원부사, 1년 뒤
문과 급제 후 종부시정의 빈부경력으로 광릉군
이극배의 종사관으로 남방기근을 구제하는데 공평을 잃지 않았다.
그 공으로 절충장군에 승진되고 판결사로
오래 머무르다가 이어 각조 참의를 역임한 후 대사간(정3품)으로 재임 중
병들어 돌아가시니, 상감이 사제(賜祭)와 부의를 후하게 내렸다.
상감이 사제와 함께 부의를 내린 것은 전주 부윤을 지냈기 때문이다.
또한 상감께서 제문을 하였는데 이르기를
“성품이 간결하고 곧다” 고 하였다.
공이 두 아들과 두 딸을 두니 장남 종윤은 진산 군수요,
차남 소윤은 부호군이요,
따님은 진수윤(현감) 점광재(군수‧동래인)에게 출가하였다.
광원군의 후손이 크게 번창하여 명현 석학과 장상이
대를 이어 나서 현손 사계선생 부자분이 예학의 종장으로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다.
청백리가 두 분, 대제학이 여덟 분, 어영대장이 세분,
그 외 찬성(종 일품), 판서, 참판, 대사헌, 2, 3품 당상관과
유현이 대대로 이어나니 이는
대사간 공의 명당의 음우로 광김이 해동망족이 된 것이 아닌가.
종보 09. 9. 1.
김극니(克怩: 23세)는
둘째 동생으로 한성좌윤을 지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직언으로 논박하다가 강화유수로 좌천되었다.
이현로의 파당에 연좌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김극수(克羞:23세)는
셋째 동생으로 충훈부 경력(종4품)있을 때 아버지 상을 당하였다.
지나치게 애통하다가 3년상을 못 치르고 임종했다.
김극괴(克愧: 23세)는
인품이 뛰어나 공안공이 장제라고 추천하여 성종의 부름을 받아가니 손을 잡아 맞아 드렸다.
도총부사를 임명받고 물러나와 그 손을 비단으로 싸서 국은을 잊지않는 사람으로 유명하였다.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로 적병을 토벌하고 돌아와 31세 나이로 요절하셨다.
김성원(性源:22세)은
단종조 사마시에 합격.
승지로 있을 때 야은 길재의 증직을 탄원하여 허락을 받았다.
세조 12년에 정2품 이하 대소 신료들에게 탁영시라는 시험을 보였다.
공은 성적이 좋아서 임금이 술과 풍악을 하사하여 격려하였다.
김석원(석원:21세)은
성종조 사헌부지평으로 원종훈에 책록되었다.
승문원 교리로서 서거정, 강희맹과 같이 동국여지 승람편찬에 참여했다.
성균관 직강을 지낸 후 사후에 노산사에 배향되었다.
김순성(順:21세)은
세종때 감찰이되었고,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훈련원 판관으로 있을 때 성종의 왕명으로 경국대전을 고쳐 편찬하는데 공선되었다.
김 석:(22세)은 순성의 아들로 성종조 예조정랑을 지냈다.
김 굉(:22세)은
중종조에 사헌부 장령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두 번이나 다녀왔다.
암행어사로 함경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기민구제 책을 건의했다.
중종 11년에 사예로 조광조와 같이 간택되었다.
사간원 대사관, 경상, 충청 관찰사를 엮임
김현뢰(賢賚:19세)는
세조조에 사헌부 감찰을 지내다.
성종 2년(1471)에 평장동 유허서를 지어 후현재까지 보존되어
평장동을 성역화 하는데 일조했다.
김처겸(處謙:23세)은
성종조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이웃을 돕다는 효(孝), 우(友), 목(睦), 인(婣) 임(任), 휼(恤),의
여섯 가지를 논하고 실천하였다.
담양지방의 향약으로 정립되어 가문을 빛냈으며 호는 육당이다.
김 감(瑊: 28세)은
연산조에 문과 급제. 병마절도사, 좌찬성.
김극기(克己:23세)는 중종때 무과로 급제.
제주목사로 승진되었으나 스스로 퇴임하였다.
귀향하여 지월당이란 집을 짓고 후학을 지도하다. 경현사에 향사.
김 정(禎 25세)은 극기의 종손자로 의주교수. 후학 양성.
김언우(彦瑀:26세)는 김정의 아들로 청심정을 짓고 후학양성에 전념.
김언거(彦琚:26세)는
언우의 동생으로 중종 때 사헌부 장령을 지냄.
사직하고 물러나 풍영정을 짓고 후학을 양성에 전념.
광산김씨 약사, 광산김씨종보,.
. 2023년 6월.
. 편집자, 대구경북 종친회 전 부회장. 선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