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요란하기 짝이 없는 장황한 해설을 무색케 하는 비디오로서 닐 암스트롱의 1969년 아폴로 11호 달착륙이 사기였다는 그 결정적 영상 비스무리 한 것이 있어서 올린다. 판단은 독자의 몫, 즐감 바란다.
출처 : 유투브
제공 : 코액션The Korean Actions(大高麗國復興會) http://www.koaction.org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인류의 위대한 도약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시대
1981년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가 발사에 성공했다.
1986년 유인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파해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일곱 명이 전원 사망했다.
1992년 8월 11일 한국이 실험위성인 우리별 1호를 남미의 꾸르 우주센터에서 발사하면서 위성 보유국으로 등록되었다.
1969년 7월 16일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케네디 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유인 우주선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선 이글 호가 ‘고요의 바다’라고 명명한 달 표면에 착륙했다. 닷새 후인 7월 20일, 인간이 처음으로 달에 발을 디뎠다. ‘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한 걸음’의 주인공은 미국의 우주 비행사 닐 암스트롱. 그는 자신이 달에 첫 발을 내딛는 장면을 시청하고 있던 6억 명의 지구인들에게 한 마디를 던졌다.
“한 인간에게는 작은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
20분 후, 달 착륙선 조종사 에드윈 버즈 올드린이 두 번째로 달을 밟았다. 함께 간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는 비행선을 조종하느라 달에 내리지 못했다. 콜린스는 달 주위를 돌며 달 표면을 사진으로 찍었다. 암스트롱과 올드린은 2시간 30여 분 동안 달 표면을 걸어 다니며 성조기를 꽂고, 지진계를 비롯한 관측기를 설치하고, 샘플용 흙을 채취했다. 두 우주인은 185파운드가 나가는 육중한 우주복을 입고 있었지만 달 표면 위를 껑충껑충 가볍게 뛰어다녔다. 달의 중력이 지구의 6분의 1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암스트롱은 자신이 ‘매우 편안한 상태’에 있다고 말했다.
버즈 올드린의 달 착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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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는 7월 24일 태평양 해상에 무사히 낙하해 지구로 귀환했다. 이로써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를 소련에 빼앗기고 우주 탐사 경쟁에서 줄곧 뒤지던 미국은 일거에 자존심을 회복했다. 이후 미국은 우주 경쟁에서 주도권을 잡고 소련을 리드할 수 있었다.
1961년 케네디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1960년대가 지나기 전에 달에 인간을 착륙시킨 후 지구로 무사히 귀환시키겠다.”라고 약속했다. 케네디는 2년 후 암살되었지만, 미국 정부와 미국항공우주국(NASA)은 아폴로 계획을 지속적으로 수행해 이 약속을 지켰다. 여기에는 25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예산이 투입되었다. 미국의 아폴로 프로젝트는 이후에도 아폴로 12호부터 17호까지 계속되었다. 우주선의 산소 탱크가 파손되어 7일 만에 지구로 돌아온 아폴로 13호를 제외하고 여섯 대의 아폴로가 달 여행에 성공했다. 아폴로 15호부터는 달 표면용 자동차를 싣고 가서 운행했고, 자동차에서 찍은 달의 풍경을 텔레비전으로 중계했다.
로마 신화에서 아폴로는 달의 신이 아니라 태양의 신이다. 달세계 여행을 위한 우주선의 이름이 태양의 신에서 유래된 것은 소련이 이미 루니크 프로젝트에서 달의 신 루나의 이름을 땄기 때문이었다.
1960년대 미국과 소련 간 우주 전쟁의 주요 공략 대상은 달이었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달은 인간이 우주로 뻗어 나가기 위해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이었다. 100년 전 출간된 쥘 베른의 소설 《달세계 여행》이나 영화의 효시라 할 수 있는 조르주 멜리어스의 1902년 작 〈달세계 여행〉에서 보이듯 달은 인류가 늘 닿고 싶어 했던 ‘로망’이기도 했다.
전반전은 우주 탐사의 우등생 소련이 단연 앞서 나갔다. 소련은 1959년 무인 우주탐사선 루니크 2호를 달에 충돌시켰고, 같은 해 루니크 3호가 달의 뒷면을 촬영했다. 그리고 1966년 1월, 무인 우주탐사선 루니크 9호가 ‘폭풍의 바다’로 이름 붙여진 달 표면에 내려앉았다. 세계 최초로 달에 탐사선을 무사히 착륙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인간을 태운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킴으로써 일거에 대역전승을 거두었다.
암스트롱이 말한 ‘위대한 도약’을 두고 뒷말도 없지 않았다. 아폴로 11호의 달 나들이는 다행히 성공했지만, 사실 매우 위험하고 허술한 프로젝트였다. 발사 직전 달 착륙선의 과부하가 발견되었지만 나사는 무리한 발사를 강행했다. 달 착륙 이후 지구로 돌아오는 데 대한 대책도 허점투성이여서 지구로 귀환했을 때 남아 있던 연료는 아폴로 11호를 겨우 15초간 움직일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다. 닉슨 대통령이 암스트롱 등에 대한 애도사를 미리 준비해 놓았을 정도였다.
달 착륙 자체가 조작이라는 설도 제기되었다. 암스트롱은 달 표면에 성조기를 꽂았는데, 사진 속의 성조기가 힘차게 펄럭이는 모습이 문제가 되었다. 공기가 없는 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설명이었다. 소련과의 우주 탐사 경쟁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사가 착륙 장면을 스튜디오에서 촬영해 조작했다는 일종의 음모론이었다. 인류가 공유해야 할 달 표면에 마치 미국의 영토인 양 성조기를 꽂은 행위에 대해서도 비난 여론이 일었다.
달에서 펄럭이는 성조기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내딛은 닐 암스트롱은 달에 성조기를 꽂았다. 미국은 이로써 우주 전쟁에서 소련에게 당한 설욕을 일거에 해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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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본 소련 역시 1971년 6월 세 명의 우주비행사를 태운 살류트 1호를 발사시켰다. 살류트 1호는 23일간 우주에 머물렀지만 지구에 귀환했을 때는 세 명의 우주인이 모두 숨져 있었다.
아폴로 프로젝트 이후 미국은 우주정거장 계획에 착수하여 1973년 국제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을 쏘아 올렸다. 스카이랩에 탑승한 세 명의 우주비행사는 샤워 장치까지 되어 있는 우주선 속에서 84일 동안이나 머물렀다. 1980년대 들어서는 우주왕복선(스페이스 셔틀) 계획에 착수했다. 1981년 최초의 우주왕복선 컬럼비아 호가 발사에 성공했고, 디스커버리 호, 아틀란티스 호가 뒤이어 발사되었다. 1986년 1월 28일에는 유인 우주왕복선 챌린저 호가 발사 73초 만에 공중 폭파해 탑승했던 우주비행사 일곱 명이 전원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카이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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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의 한걸음은 전 세계 수많은 인류에게 희망을 주었다. 베스트셀러 《마지막 강의》의 저자인 미국 카네기멜론 대학교의 랜디 포시 교수는 그의 나이 여덟 살이던 1969년 인간이 처음으로 달 위를 걷는 장면을 보며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인류에게 또 다른 꿈을 주기 위한 달 탐사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아직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달에는 에너지 효율이 석유의 1,000배가 넘는다는 ‘꿈의 에너지’ 헬륨3가 대량 매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인류의 탐사욕을 자극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달에 우주인들이 상주할 영구 유인기지를 설립할 계획 아래 달에서 물을 찾는 데 집중하고 있다. 세 번째 유인 우주선 발사에 성공한 나라는 중국이었다. 이어서 일본, 인도, 유럽연합이 잇따라 달 탐사위성을 쏘아 올렸다. 우리나라는 2020년에 달 궤도를 돌 달 탐사선을, 2025년까지 달 탐사 착륙선을 개발할 계획이다.
현재 지구 궤도에는 수천 개의 인공위성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이들 대다수는 통신과 기상 관측을 목적으로 한 위성과 군사위성이다. 1983년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은 인공위성으로 적의 미사일을 감지해 목표물에 도달하기 전 상공에서 쏘아 떨어뜨리는 ‘전략방위구상’을 발표했다. ‘스타워즈(별들의 전쟁)’라고 불리는 이 구상은 스푸트니크 1호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발달한 우주 기술의 현 단계를 짐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상을 볼 때 인류는 언젠가 달을 넘어 화성 등 태양계의 다른 행성까지도 장악할 가능성이 높다. 많은 학자들은 SF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이야기들이 허황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한다.
위 참고 자료 출처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6580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