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는 마음
박재삼(朴在森)시인이 편집한 ‘세계의 명문 200선’을 읽다가 노자영(盧子泳)의 수필 ‘산가일기(山家日記)’와 연암 박지원의 고전 수필 ‘열하일기’의 한편 ‘산장잡기(山莊雜記)’ 중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에 필이 꽂혀 되풀이해 읽었습니다. 글이 원체 명문장들이기도 했지만 한해의 마지막 날 밤에 컴퓨터 앞에 앉아 웹(web) 세계를 방랑하는 중늙은이의 마음을 붙들어 주는 작용이 컸기 때문입니다.
먼저 노자영의 ‘산가일기(山家日記)’ 중 6월 14일의 일기 전문을 옮겨 봅니다.
이 산사(山寺)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뜰 앞에 목련이 피었다. 백주(白珠)의 이슬이 청엽(靑葉) 위에 대글거리고 무한의 순결을 자랑하는 한얀 꽃봉오리가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피어오른다. 하늘빛 잎사귀, 눈빛 봉오리, 아름다운 조화 위에 자랑스러운 호화의 기세, 나는 아침 뜰 앞에 서서 그 꽃봉오리를 여러 번 만지다. 그리고 떠나기 어려운 듯이 그 꽃 밑에 한 시간이나 머뭇거리다. 세상에 아름다운 자랑이 여기보다 나을 것이 있을까? 신의 거룩한 표정! 모든 성스러운 최고의 미! 첫여름에 피는 목련은 이같이 아름답다. 로댕이 ‘한 떨기 꽃 아래 머리를 숙여 본 적이 있는가?’한 말을 다시금 생각할 수가 있다.
낮에는 송림 속 검은 바위 위에서 녹구(綠鳩)의 울음을 들으며 먼 산을 바라본다. 송림 새에 이는 미풍은 서늘하고 신비롭다.
밤에는 촛불 밑에서 옛 여인의 얼굴을 여러 번 그리다. 사진첩을 뒤적거리며 손으로 가슴을 만지는 이 마음이여, 동구 밑에서 울려오는 산개소리가 꿈 깊은 산곡을 이따금 깨우다. ‘예이츠 시집’을 속으로 몇 구절을 여러 번 되풀이하다.
노자영(盧子泳)은 1920∼1930년대에 창작활동을 했던 분인데 일제강점기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겨레의 정서를 담아내고자 노력했던 시인이자 수필가이셨다는군요. ‘산가일기’는 그가 일본 니혼(日本)대학에서 문과수업을 받던 중 폐질환을 얻어 학업을 그만 두고 투병생활을 하던 때 쓴 글이라고 하는데 병마에 시달리는 몸으로 산사(山寺)의 초여름 뜰 앞에 핀 목련을 보며 작은 기쁨을 찾는 장면과 산비둘기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암울한 현실을 탄식하는 장면 등이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와 동조하게 만드는 작용을 하여 박재삼 시인이 왜 명문으로 꼽았는지 알 듯싶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일탈을 꿈꾸는 예비 방랑객이라고 합니다. 병마와 싸우는 시인이 아니더라도 초여름 목련이 필 때 산사에 머무르고 싶을 수 있고, 늦가을 멧비둘기 울음소리에 마음을 상해 울적해 하는 바람이 되고 싶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웹서핑(web surfing)을 즐기는 현실 역시 떠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대신한 대리 만족을 찾는 작업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래는 역시 산가일기 중에서 뽑은 글로 9월 25일자 일기문의 일부입니다. 노자영은 지나치게 감상적인 글을 써서 문단의 평가가 높지 않다는 평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저는 아래 한 단락 글로 모든 것을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산산한 바람이 분다. 뒷산 골짜기에서 들국화 한 송이를 꺾어오다. 하얀 봉오리- 세상의 모든 정절과 성스러움을 가진 듯한 그 표정! 아 강한 자여, 네 지존에는 마음이 움직인다. 기특함과 높음과 깨끗함을 파는 모든 사람들아, 그대들은 이 들꽃 앞에 발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적이 있는가?
들꽃 앞에 고개를 숙인 시인의 심정…… 모든 주어진 것에 겸손한 한 줄기 지성은 바로 우리가 세상 풍파 속을 방랑하는 마음의 목표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아래는 ‘세계의 명문 200선’에 선해진 글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일부입니다. 제가 ‘열하일기’를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읽은 터라 박재삼 시인의 번역이 새삼스러웠음을 고백하고 이 또한 방랑하는 마음일 거라고 변명을 삼습니다.
나의 집이 있는 산중 바로 문 앞에 큰 내가 있다. 해마다 여름철 폭우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면, 냇물이 갑자기 불어나 마냥 차기(車騎)와 포고(砲鼓)소리를 듣게 되어 마침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되어 버렸다. 나는 일찍이 문을 닫고 드러누워 그 냇물소리를 유별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깊숙한 솔숲에서 울려 나오는 솔바람소리 같은 소리, 이 들음은 청아하다. 산이 찢어지고 언덕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 이 들음은 분격해 있다. 뭇개구리들이 다투어 우는 듯한 소리, 이 들음은 교만스럽다. 수많은 축(筑)이 번갈아 울려대는 듯한 소리, 이 들음은 흥취롭다. 거문고가 궁조(宮調)·우조(羽調)로 울려나오는 듯한 소리, 이 들음은 슬픔에 젖어 있다. 종이 바른 창문에 바람이 우는 듯한 소리, 이 들음은 회의에 설레이고 있다.
이 모두가 똑바로 듣지 못한 것이다. 단지 흉중에 머금어진 뜻이 있어 이에 따라 귀가 받아들여 소리로 만든 것일 따름이다.
……
내가 아직 요동 땅에 들어오기 전, 바야흐로 한여름이라 뙤약볕 속을 가는데 홀연히 대하(大河)가 앞을 가로막아 시뻘건 물결이 산같이 일어나서 대안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대개 천리 밖 상류지방에 폭우가 쏟아진 때문이었다. 물을 건널 적에 사람들이 모두 머리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보기에 나는 그들이 모두 하늘을 향하여 묵도를 올리나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중에 알았지만, 물을 건너는 자가 물이 소용돌이치기도 하고 용솟음치기도 하며 탕탕히 내닫는 것을 보면, 몸은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고 시선은 흐름을 따라 내려가는 것 같아 문득 현기가 나서 물에 빠질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머리를 젖혀 하늘을 우러러본 것은 하늘에 기도하기 위함이 아니라 숫제 물을 외면하고 보지 않기 위함이었다. 사실 어느 겨를에 그 잠깐 동안의 위급한 목숨을 위해 기도할 수 있었으랴.
……
낮에는 물을 볼 수 있으므로 오로지 눈으로 위태로움을 보는 데만 쏠려, 바야흐로 벌벌 떨며 도리어 눈을 가진 것을 걱정해야 할 판에 무엇이 들리겠는가. 지금은 밤중에 건너는지라 눈이 위태로움을 보지 못하느니만큼 위태로움이 오로지 청각으로 쏠려 귀가 바야흐로 벌벌 떨며 그 우구(憂懼)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야 도(道)를 깨달았다. 마음을 유적(幽寂)하게 하는 자는 이목(耳目)이 누(累)가 되지 않고, 이목을 믿는 자는 보고 듣는 것이 자세하면 할수록 병통이 되는 것이다.
……
소리와 빛은 외물(外物)이다. 외물이 항상 이목에 누가 되어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시청(視聽)의 바름을 잃게 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런데 하물며 인간이 세상을 살아나감은 그 험하고 위태로움이 강물보다 심한 데가 있고, 보고 듣는 것이 곧잘 병통이 되는 데에 있어서랴. 나는 또 나의 산중에 돌아가 다시 앞 냇물소리를 들어보아 이것을 경험해 보고 그리고 몸 가지는 데 교묘하고 스스로 총명함을 자신하는 자들에게 경고하리라.
아래는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찾은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의 해설입니다. 어줍은 말로 선인의 글에 누(累)가 될까봐 전문가의 글을 가감 없이 옮깁니다.
시내가 산과 산 사이로 흘러나와 급한 경사와 바위 등의 굴곡에 의하여 부딪힌 물결이 울부짖는 듯하게 들리기도 하고 전차 만대가 굴러가는 것처럼 큰소리를 낸다. 사람들은 이것을 설명하여 이곳이 옛날의 전쟁터였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난다고 한다. 그러나 소리는 듣기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옛날에 산속의 집에 누워 있자니 마음이 슬플 때, 기쁠 때, 화가 날 때 들려오는 소리가 모두 다르다고 하였다.
사람들이 장마 진 요하(遼河)를 건널 때에 기도하듯이 하늘을 쳐다보고 건너는 것은 물을 보면 어지러워 굴러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은 요하가 물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요하가 평야에 위치하여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낮에만 건너므로 눈에 보이는 거친 파도 때문에 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밤에 요하를 건너면 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은 눈에 거친 파도가 보이지 않아 귀로 위협적인 소리만 듣기 때문이다. 낮에도 삐끗하면 물로 굴러 떨어질 위태로운 자세로 강을 건너니, 위태로운 상황에 긴장하기 때문에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자주 그 강을 건너다니니 익숙하여져서 강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져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우리의 감관은 외물에 의하여 지배적 영향을 받게 되며, 이러한 상태에서는 사물의 정확한 실체를 살필 수가 없다. 이러한 인식의 허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감관과 그것에 의하여 움직이는 감정과 절연된 상태를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이 「일야구도하기」의 요지이다.
박지원은 시내를 건너며 귀에 들려오는 물소리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다르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인지하고, 이를 통하여 인식의 허실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 도달하는 방법은 외계의 영향을 배제한 순수한 이성적 판단에 의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끝에서는 인생은 시내를 건너는 것보다 더 크고, 더 험한 강을 건너가는 것과 같으므로, 자신의 몸을 닦고 자신의 총명함에 의거하여야 한다고 하여, 이러한 감정을 배제한 이성적인 인식을 궁극적으로는 삶을 영위하는 데까지 확충하여 이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병든 시인의 산중일기와 한 시대의 대표 지성이었던 옛 선비의 구도기(求道記)를 차례로 보면서 새해를 알리는 제야의 종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올 한해 내 몸에 닥친 병마에 얽매여 남은 날을 보낼지, 도(道)의 경지에 오른 선인의 방랑을 흉내 내게 될지 요모조모로 생각하며 글을 옮겨 보았습니다.
아래 법정스님의 글 ‘아름다운 마무리’의 일절을 옮겨 본편 ‘방랑하는 마음’의 마무리로 삼습니다.
아름다운 마무리는 살아온 날들에 대해 찬사를 보내는 것, 타인의 상처를 치유하고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그리고 수많은 의존과 타성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홀로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름다운 마무리는 언제든 떠날 채비를 갖춘다. 그 어디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고 순례자나 여행자의 모습으로 산다. 우리 앞에 놓인 이 많은 우주의 선물도 그저 감사히 받아 쓸 뿐, 언제든 빈손으로 두고 떠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귀한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마음에 새겨야 할 살아있는 말씀들이네요.
법정스님의 글도 그렇고요, ^^
잘 보았어염. 깊은글 감사 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좋은글..감사합니다....
감사..
재밌네~~~ ㅋㅋㅋ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훌륭하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동~~~
잘보고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마음이 살아야 하는데.........
산중에서 계곡의 쏟아지는 물벼락을 듣고싶네요.
우리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는 좋은 말씀이로군요...
잘읽고갑니다
잘읽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