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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력설교) 20260517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
시편 47편 · 사도행전 1:1-11 · 에베소서 1:15-23 ·
누가복음 24:4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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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활절 일곱째 주일입니다. 눈치 빠르신 분이라면 오늘 주보의 성서 본문이 지난 목요일 승천일의 본문이라는 것을 알아채셨을 겁니다. 부활 후 40일째 되는 날이 주님의 승천일인데, 평일에 있다 보니 그동안 주일 강단에서 다룰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복음 마지막 장 끝에 나오는 승천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본래 주님의 승천기념일(Ascensio Domini)은 초대교회 때부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큰 날이었고, 종교개혁자 루터도 교회력 가운데 가장 무게 있는 날 하나로 꼽았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에겐 어떤가요? 성탄절엔 산타클로스, 부활절엔 계란, 오순절엔 불꽃이라도 떠오릅니다. 하지만 승천일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기억 하나가 통째로 사라진 셈입니다.
왜 우리는 주님의 승천을 잊었을까요? 우리의 기억력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계가 변해서 그런 것 아닐까 싶습니다. 1세기 제자들에게 온 세상은 하나님이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그분의 음성이 들리는 공간이었습니다. 천둥과 전염병, 별의 움직임 뒤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을 하늘의 음성으로 읽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사는 세계는 완전히 다릅니다. 천둥은 대기의 방전 현상이고, 전염병은 바이러스의 확산이며, 별은 빛의 입자로 설명됩니다. 그 어디에도 신의 섭리가 끼어들 자리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자라고 잠드는 사람에게 ‘승천’이라는 말은 고대인의 신화로 처리되고 맙니다. 기껏해야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보았던, 흰옷 입은 인물이 구름 위로 떠오르는 그림 정도의 의미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교회 다니는 우리라고 다를까요. 우리는 예배 때마다 사도신조를 고백하면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라고 입으로 중얼거리지만, 그 문장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서가 들려주는 주님의 승천은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베다니의 이상한 이별
오늘의 복음서 본문인 누가복음 24장으로 가봅시다. 44절부터 마지막 53절까지 빠르게 눈으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리하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이별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이 매우 이상합니다. 보통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자리에는 슬픔이 있고, 침묵이 있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워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50절을 주목해 보세요.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베다니에 가시더니, 손을 들어 그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51절이 이렇게 이어집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눅 24:51). 예수님의 마지막 자세가 무엇인가요? 손을 들어 제자들을 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려지십니다. 그분의 손이 내려오지 않은 채 제자들의 시야에서 사라지신 겁니다. 이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납니다. 남겨진 제자들이 슬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갔다고 기록합니다(눅 24:52).
이상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스승이 눈앞에서 사라졌는데 제자들이 기뻐합니다. 도대체 이 기쁨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베다니라는 장소부터 살펴봅시다. 예루살렘 동쪽 약 3km, 감람산 너머 작은 마을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이 마을이 몇 번 나옵니다. 나사로가 죽었다 살아난 곳이 베다니였고, 베다니의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곳도 이곳입니다. 죽음과 부활, 환대와 슬픔이 교차하는 자리가 베다니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이 승천하십니다.
승천하시기 전 예수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도 유심히 살펴봅시다. 45절입니다. 함께 읽어봅시다.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떠나시기 전에 하신 일은 기적도 아니고, 조직 구성도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열고 성경을 풀어주신 일입니다. 그분이 떠나신 후에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를 미리 보여주신 셈입니다. 교회는 마음을 열고 성경을 깨닫는 공동체, 곧 말씀의 해석 공동체로 부르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을 떠나기 전 주님이 몸소 보여주신 교회의 사명입니다.
승천의 본질
자,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갑시다. 왜 제자들은 슬퍼하지 않고 기뻐했을까요? 오늘 우리는 흔히 승천을 ‘아쉬운 이별’로 읽거나, 더 나아가 ‘신화의 한 장면’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주님이 사라진 자리의 슬픔도, 신비한 전설도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주님이 하늘로 오르신다는 것은 곧 왕위에 오르신다는 기쁨을 말합니다.
오늘의 시편 본문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즐거운 함성 중에 올라가심이여 여호와께서 나팔 소리 중에 올라가시도다”(시 47:5). 이 시편은 이스라엘에서 새로운 왕이 보좌에 등극할 때 부르던 노래입니다. 백성들은 큰 함성과 나팔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누가복음 24장의 승천 모습이 바로 이것과 똑같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은 사라지시는 장면이 아니라 왕으로 즉위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오늘 함께 읽은 사도서간은 이것이 무슨 뜻인지 풀어주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20부터 제가 읽습니다.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사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엡 1:20-22).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분이 모든 만물을 발 아래 두신다는 겁니다. 황제의 권력도, 시장의 힘도, 알고리즘의 지배도, 여론의 흐름도, 모두 그분 발 아래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것이 승천의 본질입니다. 떠나심이 아니라 자리 잡으심이고, 사라짐이 아니라 왕으로 오르시는 즉위입니다. 바로 이것이 제자들이 기뻐한 이유입니다.
하늘에 멈춰선 시선
그런데 승천을 묵상할 때, 여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 1장으로 넘어가 봅시다.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을 쓴 같은 사람이 기록한 속편입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4장의 이야기가 사도행전으로 그대로 이어집니다. 사도행전 1:10-11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올라가신 후 제자들이 하늘을 쳐다보고 서 있습니다. 그때 흰옷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묻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행 1:11).
천사의 이 말은 부드러운 권면이 아니라 나무라는 말입니다. 이상하지 않으세요? 제자들이 잘못한 게 없잖아요. 거룩한 사건을 목격했고, 사라지신 주님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자연스럽고 가장 경건한 자세 아닐까요? 그런데 천사가 질책합니다.
여기에 주님의 승천이 가르치는 또 하나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을 향한 시선을 땅으로 되돌리라는 것입니다. 위만 바라보고 있지 말고, ‘그 감격을 가지고 우리 삶의 자리로 돌아가라’는 명령입니다.
이쯤해서 우리를 돌아봅시다. 1세기의 제자들은 그래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게 제자들의 문제라고 천사가 꼬집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떤가요? 우리는 하늘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우리의 눈은 핸드폰 화면으로, 통장 잔고로, 회의실의 권력 구도로, 자녀의 성적표로 향합니다. 그 시선 어디에도 만물을 통치하시며 모든 것 위에 뛰어나신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습니다. 루터는 이런 시선을 두고 “자기 안으로 굽은 시선”(incurvatus in se)이라고 말합니다(Martin Luther, Lectures on Romans, WA 56:304). 자기 안에 갇힌 시선, 모든 것을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만 굽히는 시선, 이것이 죄의 본질이라고 루터는 설명합니다.
이 굽은 시선은 한 개인의 문제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이 모이면 시대의 모습이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을 한 번 보십시오. 지구의 들판이라고 불리던 우크라이나의 곡창지대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골목이, 아프리카 수단의 마을이 매일 전쟁으로 무너져 내립니다. 그러나 그 비극이 뉴스 한 꼭지로 나오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멀리 볼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몸 담고 있는 한국 교회는 또 어떤가요. 어느 순간부터 양극단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강단과 회중을 동시에 점령해 버렸고, 같은 성경을 읽고 같은 찬송을 부르면서도 서로 다른 적군의 언어를 토해 냅니다. 사람들은 점점 혼자 먹고, 혼자 살고, 혼자 죽어 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옆자리에 누가 앉아 있는지, 식탁에 함께 앉은 사람의 이름도 모른 채 주일 예배가 끝납니다. 굽은 시선은 결국 이렇게 우리를 서로에게서 잘라 내는 끔찍한 가위가 됩니다.
1세기 제자들에게 “왜 위를 쳐다보느냐”고 묻던 천사의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는 이렇게 들립니다. 너희는 도대체 어디를 보고 있느냐. 위도 아니고, 너희가 부르심 받은 자리도 아니고, 전쟁의 비극 앞에서도, 교회의 분열 앞에서도, 옆 사람의 외로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그 시선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느냐?!
열린 식탁과 교회
사도행전 1장은 누가복음 24장에서 들려주지 않은 예수님의 이야기 하나를 더 들려줍니다. 주님이 승천하기 전 유언처럼 이런 말씀을 남기십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방향이 정반대로 뒤집힙니다. 예수는 위로, 제자들은 세상으로. 이것이 승천이 만들어낸 새로운 방향입니다.
여기서 “땅끝까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이 표현을 거의 자동적으로 해외 선교 명령으로 읽는 데 익숙합니다. 물론 그것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예루살렘,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 이 지명들의 배열을 잘 보십시오. 단순히 멀어지는 거리를 뜻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경계가 무너지는 울타리로 읽어보세요.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특별한 곳이고, 유대는 보통 사람의 자리입니다. 사마리아는 어떤가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한 우물을 쓰지 않고, 한 식탁에 앉지도 않고, 길에서 마주치면 옷자락이 닿지 않도록 비켜갑니다. 그 너머 ‘땅끝’은 유대인이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의 자리입니다.
이걸 염두에 두고 “땅끝까지”라는 말씀을 읽으면, 단지 지도 끝까지 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너희가 평생 외면해 왔던 사람들, 끝까지 우리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람까지 가서 가족으로 품으라는 말씀이 됩니다. 남은 제자들, 그러니까 제자 공동체인 교회가 그런 곳이 되라는 명령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찾아가고 손잡아준 사람들을 떠올려 봅시다. 그분은 세리와 죄인, 가난한 자와 병든 자, 부정하다고 멸시받던 한센병 환자들, 사회 바깥으로 내몰린 여인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과 식탁을 나누셨습니다. 당시 모두가 꺼리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셨습니다.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라”고 하신 것은, 바로 이 모습을 너희가 이어가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르고, 우리를 그 지체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교회가 어떤 곳이 되어야 할지도 명확해집니다. 교회는 모두를 위한 안전가옥입니다. 정치적 입장이 달라도 한 떡을 떼는 자리이고, 세대가 달라도, 상처와 다름을 안고 와도 쫓겨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약함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누구도 자신의 외로움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본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단 하나, 그 중심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속에서 시기와 미움, 배척하는 마음이 올라올 때, 나의 귀와 입과 생각과 마음을 그리스도께서 지켜주시라고 기도합시다.
들린 손, 거두지 않으신 축복
다시 누가복음 24장 마지막 부분으로 돌아갑시다. 베다니에서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는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눅 24:53)했다고 합니다. 승천을 목격한 제자들이 자기 삶의 자리, 곧 일상의 예배 공동체로 향했다는 뜻입니다.
저는 오늘 복음서 본문을 여러 번 읽으면서 하나의 명화처럼 남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하늘로 오르시며 손을 든 자세가 그렇게 마음에 남았습니다. 주님이 축복하실 때 손이 올라갔고, 제자들을 향한 그 손이 내려오지 않았습니다(눅 24:51). 우리를 향한 주님의 축복이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손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이 장면이 그리도 위로가 될 수 없습니다.
한 번 정직하게 우리 안을 들여다봅시다. 사람은 참 이상한 존재입니다. 손에 쥐고 싶던 것을 다 쥐어도, 어느 순간 가슴 한쪽이 비어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오래 바라던 자리에 올랐는데 그 자리에서 더 큰 허전함이 밀려옵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한참 이야기를 나누어도, 밤이 깊어 혼자가 되면 설명하기 힘든 갈증이 가슴 안쪽에서 일어납니다. 분명한 한 가지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는 내 안의 빈자리가 채워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있든 없든, 교회를 다니든 다니지 않든,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그런 자리 하나쯤은 안고 살아갑니다.
오늘 승천을 다루는 성경의 말씀들은 그 빈자리에 무엇이 들어와야 하는지를 넌지시 알려 줍니다. 그것은 거두지 않으신 그분의 손입니다. 우리는 머리로는 승천을 옛이야기처럼 흘려 보냈을지 모르지만, 가슴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그 손을 기다립니다. 우리의 모든 자리, 우리의 가장 낮은 자리, 우리의 가장 부서진 자리 위에 다른 사랑의 통치가 있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병상에서 천장을 바라보는 자리, 사랑하는 사람의 영정을 마주한 자리, 전쟁의 폐허에서 무너진 집을 바라보는 자리, 그 모든 자리 위에 그분의 들린 손이 있습니다. 그것이 승천의 의미입니다. 떠나심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으로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그분의 들린 손에 새겨 있습니다. 베다니의 그날, 제자들은 스승의 빈자리를 본 것이 아니라 들린 손을 보고 돌아갔고, 그들이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사라짐이 아니라 축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손은 여전히 저와 여러분을 향해 펼쳐 있습니다. 주님은 당신의 손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이제 곧 우리도 제자들처럼 일어나 우리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의 복된 손 아래서 우리의 월요일이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일주일이 사라지신 분이 아니라, 만물을 다스리시며 손을 거두지 않으신 그리스도,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