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인 박사는 없었다 (3), 고대의 한국과 일본은 같은 나라였다.
왕인은 백제인들이 대거 일본으로 건너간 이야기
고대에 일본에 천자문을 전하였다는 왕인 박사의 스토리는 일본인만의 기록이며 관심이었을 뿐이었다.
그러한 왕인이 느닷없이 한국인의 현실세계에 재현하게 된 것은 조선이 멸망할 무렵, 근대 일제가 한국을 침략하면서부터이다.
실재하지 않았던 왕인의 이야기가 재탄생된 데에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경영정책으로 50년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왕인박사의 부활을 위한 국가 차원의 프로젝트가 있었다.
왕인박사비의 건립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되던 시대에, 왕인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헌책에서 꺼내어 '내선일체' 라는 사상으로 조선인을 속박한 것이다.
왕인박사비 건립 -1940년
일제 50년간의 국가적 프로젝트, 세번째
1940년, 소위 황국기원 2600년을 맞아 일본 토쿄 우에노 공원의 '사쿠라가오카’櫻ケ︎丘에 건립한 박사왕인비博士王仁碑의 낙성식이 있었다. 이때 식민지 정책인 일선동조론의 일환으로 왕인의 추앙사업이 다시 한번 범국가적으로 거행되었다.
비석을 건립하고 책을 편찬한 '선현왕인건비후원회'라는 단체는 황명회의 회장인 '요쓰미야 겐조四宮憲章'와 조낙규 등이 주축이 되었다.
비석은 '박사왕인비'(정비, 正碑)와 '부비副碑'의 2개로 이루어졌으며 현재도 그 위치에 남아 있다.
정비正碑 비문의 작성자는 조낙규인데, 그가 작성한 비문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백제 구수왕이 아직기로 하여금 천황에게 말을 바치게 하고 일본의 왕자를 가르치게 하였는데… 천황은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왕인을 징발하여 논어를 가지고 일본으로 오게 하였다. <중략>
오호라! 왕인은 비록 조선에서 태어났지만 일본은 거국적으로 왕인을 숭모하였는데, 우리 조선인은 조선의 선철군자先哲君子를 받들지 못하였으니 어찌 유림儒林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후학 조선인 조낙규 찬”
비석의 목적은 “왕인의 후학으로 조선인을 대표하는 유학자”라는 말 속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한국의 유림대표는 왕인을 본받아 일본천황의 황은에 감복하여 충성을 다하겠다는 맹세이다.
또 이 비문에서 주목할 점은, 일본의 천황이 백제의 왕에게 명령을 내려 왕인이라는 사람을 징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는 1937년 당시 내선일체를 부르짖던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 문학자, 승려, 정치가 등 각계를 망라한 230여 명이 참여하여 세웠다. 여기에는 일본의 총리대신(수상)을 지낸 사람의 이름이 무려 7명이나 올라 있다. 2차대전후에는, 총리를 지낸 이들 4명을 포함하여 모두 6명이 A급전범으로 지정되었으며, 명성황후를 살해한 아타치 겐조도 여기에 이름이 올라 있다.
이 왕인 스토리는 일제 역사왜곡의 대표적인 단면이다. 일제는 옛날의 고서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조선인에게 이러한 지식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을 강제하였다.
여기에서의 제막사는 유교 인물이라고 알려진 왕인을 기리는 행사임에도 일본 신토神道의 대교정大教正이자 일본 국수주의 학자인 '히라타 모리타네’平田盛胤가 작성하였는데 '신토'는 일본 제국주의의 근본이 되는 사상이다.
이때의 총독은 '미나미 지로'南次郞였는데, '미나미'는 "육군지원병제, 조선어폐지, 일본어 상용, 창씨개명, 국민징용령" 등으로 조선인들을 괴롭히고 '내선일체'라는 구호를 내걸어 조선인들에게 전쟁물자 생산과 전쟁 소모품으로 내몰았던 가장 악독한 총독이었다.
이 '내선일체'의 넉자야말로 '미나미'가 '박사왕인비'에서 찾아낼 수 있었던 최선의 구호였던 것이다.
박사왕인비 낙성식의 축사와 축전
1940년 낙성식의 축시, 축가 등을 실은 모두 97쪽의 자료집이 아직도 남아있다. 이때 축사와 축전을 보내온 사람의 명단과 순서는 아래의 첨부와 같다.
1940년 왕인박사비 건립시에 축사를 한 인물들의 순서와 직책은 아래와 같다.
제막식 축사 大敎正 平田盛胤
문학박사 上哲次郎의 축사
궁내대신 松平恒雄의 축사
문부대신 松浦鎭次郞의 축사
후생대신 吉田茂의 축사
척무대신 小磯國昭의 축문 (拓務: 식민지 담당)
조선총독 '미나미지로'南次郞의 축문
동경부(府)지사 岡山周造의 축문
동경시장 大久保留次郎의 축문
동경시 下谷구청장 千葉胤次의 축문
淸浦奎吾 백작의 축문
그 외에 德富蘇峰이라는 사람까지 12명의 축문이 있었다.
또 내빈축사로서
남작 荒木貞夫 대장
육군대장 林銳十朗
동경시 교육국장
二松학교 교장
그리고 전보로 보내온 축사로서
경기도지사는 “선현왕인비 건립은 내선일체의 교화에 경하할 일이다.”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내고 있다.
경상남도지사
전라남도지사
경상북도 유도회儒道會연합회장
오사카 병기창(工廠)의 육군보병대좌 八松雄馬
육군보병중좌 石田一松
여수경찰서 일동,
이들 외에,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에서도 많은 축전이 들어왔다.
조선인 교육을 다짐하는 일본인 상전들
왕인박사비의 건립은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전시동원체제가 가속화되던 시대에, 왕인이라는 허구의 인물을 헌책에서 꺼내어 '내선일체' 라는 사상으로 조선인을 속박한 것이다.
일본이 군국주의로 치달을 때, 총독 '미나미 지로'는 즉시 조선에 이를 적용ㆍ시행하였고, 또 식민지 조선을 온통 병영兵營으로 만들었다.
왕인박사비의 건립 후원자 명단에는 맨 먼저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수상을 비롯하여 작위를 가진 20명이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육군대장 출신으로 육군대신과 관동군사령관을 지냈으며, 한국인들에게는 하늘보다도 무서운 존재였던 '미나미 지로'南次郎 조선총독조차 후원자 명단의 36번째를 차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외에 경기도지사 등 고위직의 관리들이 총출동하여 명단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때 이는 왕인의 추모사업을 일제가 국가의 총력을 기울여 추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 왕인박사를 칭송하는 축사의 실제적인 내용은 일본인들은 모두가 조선인들에게 "왕인박사를 제대로 본받지 않으면 안된다"라는 통고다.
일제가 제정한 조선교육령이란 법의 목적은 한국인을 충성스러운 일본인으로 만들고, 일본어를 비롯한 일본문화의 주입으로 한국의 민족문화를 말살하며, 식민지의 효과적 경영을 위하여 조선인들을 일본인을 위한 일꾼으로 만들기 위한 저급한 실업교육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왕인이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식민지 조선인의 교육목적에 가장 적합한 모델이었던 것이다.
패전으로 소멸된 왕인의 이용가치
일본의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일본역사의 허구성에 대하여 무언가 깊이 감을 잡고 있는 일본인들이 분명히 어느 시기에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다만 일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합당한 조치가 취해지고 또 필요가 없어지면 조용히 철회되는 등 시기적절한 방침과 정책이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되면 필자의 이러한 추측이 허황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데, 왕인의 경우가 단적으로 이러한 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이차대전의 패전으로 일본제국이 해체되면서 왕인의 정치적 이용가치(the political role of Wani)는 사라져, 왕인의 용도는 가차없이 폐기되고, 왕인박사에 대한 모든 관심이 사라졌다. 만약 일본인들이 왕인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했다면 절대로 이렇게까지 폐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한국 특히 한국의 정부기관에서 고대 한국이 문화적으로 일본에 앞섰다는 상징성을 정치적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1980년 이후에는 한국정부에 대신하여 재일거류민단이 일본 상륙을 기념하는 큰 행사들을 마련하여 온 것으로 주관기관만이 바뀌었을 뿐 한국이 왕인의 현창사업을 계속하여 왔다.
현재는 왕인의 환생이 전라남도의 한 고을의 축제를 넘어, 한국의 국가차원에서의 대규모 추모사업으로 추진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로서 일본 역사의 허구적인 스토리가 한국인에 의하여, 한국 내에서 확대 재생산되는 단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재일 사학자 김영달은 “과거의 일본인들이 조작한 왕인의 이미지는 메이지(明治) 시대의 천황제확립 정책이라든가 소화(昭和)시기의 내선일체 정책에 이용되었는데, 한국인들이 뒤늦게 만들어간 왕인의 이미지는 한국의 일본에 대한 문화적 우월사관에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문화 콤플렉스의 반증이다”라고 비판하고 있다.
출처:『왕인 박사는 가짜다』, 2014, 곽 경, 67~80쪽
한일 역사 갈등의 비밀: 고대에 같은 나라가 원수로 만들어져 왔다.
고대 일본과 한국은 같은 나라였다. 그것은 이주민이나 도래인이 아닌, 같은 나라 같은 종족이었다. 그러다가 원수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까지 이 사실은 철저히 감추어져 왔으며, 우리는 한ㆍ일이 원래 다른 나라로 잘못 배워왔던 것이다. 이제 한ㆍ일의 고대사는 완전히 다시 쓰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의 제일 오래된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는 천황이 만세일계로 일본을 통치해 온 것으로 꾸며져 있으나, 실제 거기에 등장하는 40인의 천황은 모두 '가야/백제'의 왕과 왕족들이다.
『일본서기』는 겉으로는 역사서이나 실제로는 '가야/백제' 왕족들의 족보책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일본서기』의 지어낸 이야기는 역사로 둔갑하여 사실로 여겨졌고, 일본인들은 1300년 동안을 가상의 세계에서 살아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