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국 ] 안순시 두파당폭포(陡坡塘瀑布) < 2016. 6. 10. > ---------------------------------- 2016. 6. 6.부터 6. 11.까지 중국 귀주성 지역을 여행하였습니다. 중국에서의 5일 째의 아침은 안순시(安順市) 청와대호텔에서 맞습니다. 어제는 청룡 및 용궁풍경구 여행을 마쳤고 오늘은 이번 여행의 최대 목적지인 황과수폭포를 향해 떠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 중국 귀주성 안순시 새로 조성된 어느 숙박 단지의 청와대 호텔에서의 새 아침이 밝았다. 어제 오후 용궁풍경구 여행후 이 청와대호텔 체크인을 하면서 심선생이 아침식사 장소를 일러 주었고... 호텔 내가 아니라 건물 밖 2~300미터 떨어진 '찬청(餐廳)'이라는 외부 식당이라면서 식권을 나눠 줬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오늘의 여정상 서둘러 떠나기로 하였기에 아침 7시 정각, 식당을 찾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손님들(학생?)이 가득하고, 앉을 자리가 없어 다른 손님들과 겨우 합석을 해야 했다. 물론 우리 가이드는 보이지도 않았다. 음식도 이미 동난 것이 대부분이어서 우린 겨우 요기를 할 정도였다. 그런 혼란스런 식당 안에서 박샘은 휴대폰을 잃어 안절부절 하면서 찾으러 다닌다는 소식도 나중에 들려 왔으나 곧 찾을 거라는 희망적인 소식을 들으며 룸으로 들어가 떠날 준비를 하였다. 가이드가 호텔 측에 미리 알아보고 식사시각 같은 것을 서로 조정하는 등의 협의를 거쳐 일행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안내하면 좋았을텐데 그런 행동이 보이지 않아 아쉽다. 그 날도 심선생은 늦잠을 잤는지 나중에 도착했다는 얘기를 나중에 들었었다. 암튼 오늘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날, 왜냐하면 이번 여정 중에 제일로 꼽는 황과수 폭포를 가기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두파당폭포와 은목걸이폭포 등... 황과수풍경구를 전반을 거칠 예정이기에 어느날 보다 들떠있다. 아내와 난 청와대 호텔 침실에 큰 가방은 그대로 두고 각자의 배낭을 준비하고 조여 맸으며 출발이 예정된 8시에 맞춰 호텔 앞에 세워진 버스에 올랐다. . 농부들이 아침부터 못자리에서 모를 찌고 있으나 오늘따라 별로 관심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가슴이 설렌다. 카메라와 여분 렌즈와 배터리.. 그리고 보온병에 우산과 방수치마를 넣은 앞 배낭을 만지며 준비가 다 됐는지 확인 또 확인 했으니 이젠 현장에 가는 일만 남았다. 가자!! 우리를 기다리는 황과수폭포로.... 출발시각은 오전 8시였는데 벌써 시각은 20분을 경과했다. 창밖의 전망이 좋은 것으로 보아 날씨도 괜찮다. 산 중턱에 붉은 색 지붕의 단층 건물들이 보였다. 둘 째 날 묘족마을에서 출발해 흥의시로 가면서도 저런 것을 보면서 무슨 시설인지 궁금했었다. 하여 가이드 심선생에게 무슨 용도의 집인지 물었다. 심선생은 닭을 키우는 곳(鷄舍)이라고 했으며 주인마다 약제 등 먹이를 달리하는 고유의 방법(특허?)을 적용해 사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하면서 그 방법에 따라 맛과 육질이 좌우 된다고 덧붙혔다. 질문한 김에... 오가는 길에 보이는 건물 옥상에는 이상하리 만큼 물을 가두어 놓는 것 같던데... 혹시 이유를 아는지 물어 보았다. 그러자 자기도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보았으나 나중에 의도적으로 물을 가둔다는 것을 알았고. 중국의 건축물 방수 기술이 저 처럼 발달한 줄 최근에 알았다고 하면서.. 집 지을 때부터 옥상에 빗물이 고이게 짓는데.. 더울 때 건물의 기온을 낮추려는 지혜라 한다. 신축되는 건물들이 많이 보인다. 중국의 부동산 경기의 거품이 우려되고 있다는데... 분양이 안돼 공사중단으로 유령도시(거리)가 속출한다는 보도를 읽은 적 있다. 버스 안에서 박샘이 잠시 마이크를 잡았고 분실했던 핸펀을 다행이 찾았다며 일행들께 잠시 누를 끼쳐 죄송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즈음 어느 광고탑 같은 것이 보여 찍었는데.... 내용은 고속도로변 옥외광고에만 20년을 전렴하여 광고의 노하우가 있음을 내세우며 귀주성 지역에서 광고 하려면 자기네 회사에 연락하라는 그런 의미를 담은 광고탑 같다. 고속도로의 황과수 요금소를 방금 나왔다. 지금 시각이 8시 33분 출발한지 30분이 지났다. 이내 도착한 주차장, 우똑 서있는 황과수풍경구 표지석이 우리를 맞는다. 만봉림 표지석과 흡사하다. 풍경구 초입엔 어디던지 상가와 숙박업소들이 있게 마련인데... 황과수 풍경구의 입구인 이곳은 지금 그런 시설의 확장 공사를 하는 듯 하다. 잠시 걸어 들어가자 운영 중인 시설이 나타나고... 뒤이어 황과수 풍경구 구역을 나타내는 목판 안내도가 보였다. 기왕에 안내도가 나왔으니 어느 정도쯤의 황과수에 대하여 미리 이글을 읽고 동행하면 좋을 것 같다. 우리가 도착한 이 지역은 안순시 황과수 풍경구, 이 풍경구는 황과수폭포를 핵심으로 구성된 것은 당연하다. 중국 귀주성 안순시 진녕 부이족 묘족 자치현(镇宁布依族苗族自治县), 주강(珠江)수계 타방하(打邦河)의 지류 백수하(白水河) 9개 등급 폭포군 에서 규모가 가장 큰 1급 폭포이며, 현지에 "황과수"라는 식물이 많기 때문에 "황과수폭포"라고 한다. 이지역은 카르스트 지형의 대표적인 침식열 폭포이다. 황과수폭포는 폭포 한곳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를 중심으로 상류에서 하류까지 20 km되는 구간에 18개 폭포가 있다고 한다. 이 폭포들은 웅장함, 기이함, 험준함, 수려함의 서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단다. 1999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폭포군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되었다는 문헌도 있었다.
황과수 폭포는 오늘 오후에 간다고 하며 맨 처음으로 가는 곳은 18개 폭포 중 두파당폭포라 했다. 잠시 두파당폭포 입장소에서 대기하던 중에 폭포여행을 위해 완전 무장하신 박샘을 보고서 찰칵.... 박샘의 눈은 생전의 우리 어머니를 떠오르게 한다. 보고픈 어머니의 눈은 닮으셨기에..... 지금은 왠지 어제와 달리 생기가 없는 모습이다. 어제 과로를 하셔서 그랬을까? 출국 때부터 들었다던 감기가 재발을 했거나 아니면 핸드폰 찾으러 다니느라 피곤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공항도 아닌데 우리 일행들(한국인)은 입장할 때 입장권과 여권까지 제시하여야 한단다. 서투리씨는 입구의 아짐들이 서로 판매하는 화관을 몇 개 사셨나 보다. 그리고 각 조 별로 나눠주며 황과수폭포여행을 마칠 때까지 잘 보관하면서 서로 번갈아 쓰고 기념 사진찍을 때 사용할 것을 당부하였다. 예전 미국 하와이 방문 영상을 보면 현지인들이 입국하는 사람들에게 화환을 목에 걸어주던데.. 여기서는 필요한 사람이 사서 머리에 쓰는 것이다. 빨간색은 부겐베리아 꽃 몇송이를 모은 것이고 노란색은 작은 해바리기, 흰색은 개망초를 모아 머리에 얹기 좋게 엮은 것이다. 그 때가 9시쯤이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화관을 팔던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우비를 비롯하여 방수용 신발 카버까지 팔기 시작했다. 일행들은 이미 폭포수에 젖지 않도록 대비하였고 특별히 서투리씨가 선사한 마춤복인 방수치마까지 준비된 상태다. 방수치마는 군용 판초우의에 비해 쉽게 착용할 수 있었다. 다만 모자는 따로 준비해야 한다는.... 버스타기 위해 대기소에서 기다려야 했다. 버스 운행 간격이 있어서 인듯... 넓은 황과수 풍경구의 여러 여행 루트를 가려면 다양한 코스의 버스를 타야 하나 보다... 우리는 그 여러 곳 중에서 맨 처음으로 여행할 곳을 두파당폭포로 정했다고 했다. 두파당폭포는 황과수폭포군 중 물이 떨어지는 정상부가 가장 넓은 폭포란다. 높이는 21m에 불과하나 그 폭이 105m에 달하고, 폭포 이름에는 '가파른 언덕'이라는 뜻이 담겨 있단다. 두파당(陡坡塘) 경구 전경도가 보인다. 잠시 걸어서 다녀오는데 거리는 얼마되지 않는다고 했다. 화관을 나눠쓰고 우리조(2조) 조장님과 함께 선 옆지기 우산을 쓰고 있는 것을 보니 비가 내렸나 보다. 박선생님도 화관을 쓰셨다. 그런데 해바라기는 왜 뒤로 보내셨수? 화관을 썼으면서 약간 슬픈 것 처럼 보이는 모습이 얼핏 돌아가신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를 연상 시켰다. 박샘은 예나님과 절친하게 지냈으면서 어느새 옆지기와도 가까이 지냈는데 박샘은 친화력이 뛰어난 듯하다. 아내 왈 박샘이 친 언니의 나이와 같아서인지 친언니와 같은 느낌이 많이 든다고 했다. 천경자 화백의 자화상이 아닐까 하고 느낄수 있는 그런 작품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예전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느꼈던 그런 감정의 늪에 다시 빠져 들었고 내 아픈 기억을 다시 어루만졌다. http://blog.daum.net/baejery/658 다음 사진은 천 화백과 그의 작품 중하나... 그리고 또다른 한작품... 화관 쓴 박샘을 보고 떠올랐던 천 화백의 작품이다. 박샘과 비슷하지 않는가. 그러나 실제는 위작시비에 얽힌 다음의 '미인도'는 아까 박샘과 더 비슷하기도 하다. 더 창백하고 걱정이 더 깊은 듯이.... 두 사진은 서로 비슷하지만 어깨에 나비가 한 마리 앉아 있고 날자표시가 아라비아 숫자다. 1977년 그린 것으로 표기된 위 그림이 '미인도'이며~ 위작 시비 사건으로 세간에 알려진 그림이다. 위 위작 그림이라는 '미인도'에 의해 벌어진 시비사건을 사람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지 검색된 글들을 내 나름대로 정렬하고 재구성하여 소개한다. 따라서, 두파당 폭포여행에 대해서는 이미 쓴 내용으로 충분할 거라고 단정하고 마무리 지음을 부디 용서하시길 바란다.... 1991년에 발생한 미인도 위작시비는 개인 천경자 뿐만아니라 우리나라 미술계에도 커다란 사건이었다. 물론 천화백이 절필후 미국으로가 2015년 8월 6일 (향년 90세)에 죽은 후인 지금도 사건은 진행형이지만 말이다. 이번 두파당 폭포여행 중에 갑자기 삼천포로 빠졌지만...여행하면서 어찌 구경만 하겠는가 때때로 여행 중에 다른 생각을 파고드는 것도.. 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암튼, 10.26 사태이후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의 집에서 골동품을 비롯한 유명작가의 그림 수백 점이 쏟아져 나왔고 감정한 결과 진품(?)은 몇 종이 안됐다고 한다. 그 그림 중에는 '미인도"라는 천경자 이름이 써있는 그림은 진품으로 분류돼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단다. 그런데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소장한 그림 중에 위 미인도를 5호크기로 대량 복제하여 5만원씩에 판매하면서부터 미인도 위작시비가 발생하게 되었다. 친지에게서 복제품이 이상하다는 얘기를 들은 천 화백은 미술관이 소장한 그림과 복제품을 검토한 뒤, 이 그림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니라고 한 사실이 몇사람의 입을 거쳐 결국 언론에까지 거론되어 세상에 드러났다. 가짜 작품을 소장한 꼴이 된 국립현대미술관은 땅에 떨어진 명예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림의 제작부터 소장하기까지를 정황을 추적해 진품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다시 내렸다. 정작 그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작품을 소장한 미술관과 화랑협회가 진품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자 그해 4월 천경자 화백은 내 작품이 아닌 가짜라 주장하면서 강력한 이의를 제기했고 반대로 박물관측에서 진짜라고 맞받아 치면서 논쟁은 더욱 확대 되었으며 그가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있는 핏줄과 다름이 없습니다.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는 절대 미리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의 사인과 작품년도도 내 것이 아닙니다. 난 작품년도를 한자로 적는데 이 작품은 아라비아 숫자로 적혀 있어요. 내가 낳은 자식을 내가 몰라 보는 일은 없습니다. 당시 이미 68세의 고령이었던 천경자 화백은 세상과 언론을 향해 울부짖듯이 말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녀는 피를 토하듯 이의를 제기했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그는 졸지에 자식도 몰라 보는 어미가 되어 버렸다. 세상은 그의 얘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화랑가에서는 더 했다. 대중들과는 친숙하게 지냈지만... 그림을 팔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던 천경자 화백을 화랑가에서는 달가와 하지 않았다고... 한국화랑협회 감정위원회는 1차 감정을 실시한 후 "적어도 가짜는 아니다."라는 감정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며칠 후 이어진 2차 감정에서도 '진품'판정을 내렸다. 감정위원회는 판정 말미에 "만약 위작 경위가 밝혀질 경우 그 결과를 전면 수용하겠다"라고 덧붙여 진위여부를 둘러싼 논쟁을 증폭시켰다. 한편 국립현대미술관은 초지일관 "진품"임을 주장했다. 미술관은 두 가지를 근거를 내세웠다. 첫 째는, 소장 경위가 확실하다는 점이다. 문제가 된 미인도는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의 소장품이었다가 국가에 환수된 후 재무부와 문공부를 거쳐 1980년 5월 3일 국립미술관에 넘어 온 작품이라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문가가 이미 진품으로 판정을 했다는 것이다. 전문위원이었던 미술평론가 오광수(당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이미 진품으로 감정을 끝낸 상태라는 것. 그러나 당사자인 천화백의 항의와 언론의 의구심은 결코 가라 앉지 않았다. 며칠 후 국립미술관 측은 자체적으로 실시한 정밀검사 결과를 다시 발표했다. "현미경 분석과 적외선, X선 촬영 등을 통해서 종이와 안료에 대한 정밀 감식을 실시한 결과 역시 진품이 명확하다." 라는 것이 그 발표 내용이었다. 화가와 미술관의 자존심과 명예가 걸린 한판 싸움은 대략 그렇게 막을 내린 것으로 여겨졌다. 약한 여자 혼자 몸으로 싸우기에 세상의 벽은 너무도 두껍고 완강했던 걸까? "나이 탓에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자기그림도 몰라보는 정신 나간 작가라는.." 입에 담기 어려운 말까지 들어야 했고 이 일로 인해 평생 그림이라는 외길 인생을 걸어 온 천경자 화백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천경자 화백은 결국 사건 직후인 1991년 4월 7일 붓을 꺾겠다며 절필을 선언했다.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대한민국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제출하고서 딸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떠났다.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 요양차 떠난 미국행이었다.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된 위조범 권춘식씨가 검찰 수사과정에서 "화랑을 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소액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만들었다"고 말하면서 위작시비는 재연됐다. 이에 대해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당시 "'미인도'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면서 "한국화 위조범과 현대 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고 반문했다. 하지만 그 미술관이 진품이라면 직접 그렸어야 할 사람의 말은 믿지 않는다는 것. 원작자 말을 무시한 국립현대미술관은 후속 조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원에 작품 감정을 의뢰했고 한국화랑협회에서는 다시 진품이라는 감정을 내렸다. 이에 대한 재수사는 없었으며 수많은 의혹을 간직한 채 이 그림은 여전히 진품으로 소장되고 있다. 2014년 12월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공식사이트에서 소장품 검색을 해 보면 이 작품은 검색되지 않는 상태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떠난 미국에서 그녀의 나이 80세이던 2003년 뇌출혈로 쓰러졌다. 그 이후 뉴욕에서 제대로 걷지도 못하며 남은 삶을 이어가는 중에.... 2015년 8월 6일 (향년 90세)에 생을 마쳤다. 천화백의 둘 째딸 김정희 씨는 당시 "위작 시비는 언젠가는 밝혀질 자명한 사건"이라며 "위작 여부의 진실이 밝혀지겠지만, 국가기관이나 특정 이익단체가 조직적으로 나서 일평생 외골수로 작업한 화가의 작가 정신을 말살하는 사건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지금, 천 화백의 차녀 김정희씨(62)는 미인도 위작 소송을 제기하면서 미술관 관장과 학예실장 등을 사자명예훼손·저작권법 위반·허위공문서 작성 등으로 검찰에 고소하였다. 미국 몽고메리대학 미술학과 교수인 김씨는 지인 배금자 변호사를 통해 이번 사건을 진행 중이다. 특이점은 이 사건을 대리하기 위해 진보와 보수를 아우르는 초호화 변호인단이 꾸려졌다는 것이다.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를 밝히기 위해 KT&G를 상대로 공익소송을 벌여 이름을 알린 배 변호사가 주축이 된 '위작 미인도 폐기와 작가 인권 옹호를 위한 공동변호인단'에는 위철환 전 대한변호사협회 회장를 비롯한 초호화 쟁쟁한 변호사들이 이름을 올리기나 합류하였으며 무료로 사건을 맡겠다고 니서서 눈길을 끌었다. 김선수 전 민주사회를 위한변호사모임 회장을 비롯한,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 등도 이름을 올렸다. 검찰은 이 사건을 지적재산권 전담부서인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에 배당하고 본격적인 수사에 돌입했다. 배 변호사는 담배사건을 걸고 총력전을 펼쳤던 인물. 과연 어떤 결과로 마무리 될까? 사자명예훼손. 죽은 자를 기리는 소송. 또한 동아일보 단독 보도에 따르면... 천경자 화백의 별세 소식 이후 다시 '미인도'의 진위 논란이 불거져 있다.
이 사건을 바라보면서 기록한 식견있는 어느 분의 글이 검색돼 소개한다. "진실은 저너머에.."라는 제하의 내용이었는데... 이런 사건이 발생한 것을 두고 그는 이렇게 진단하였다. 이렇게 된 건 기본적으로 작품 감정 시스템이 부실했기 때문이고.. 90년대까지도 한국에는 이렇다할 감정시스템이 없었다. 전문가들의 식견과 기억에 의존하는 수준에 그친 것. 게다가 작품 감정은 과학시료분석 같은 것으로도 한계가 있다. 분석기계는 그 작품이 어떤 물질로 이루어졌는지를 말해줄 뿐, 누가 그 그림을 그렸는지를 말해주지는 않기 때문. 만약 위조범이 대상 작품에 사용했던 재료가 뭐였는지를 알아내서 그 재료를 구해다가 사용하든 아니면 우연히 같은 재료를 쓰든 원작가가 사용한 재료와 같은 재료로 위작을 만든다면 과학분석은 힘을 쓰지 못한다. 결국 가장 중요한건 미술작품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그 자료를 가지고 감정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작가의 화풍이나 제작습관 등을 면밀히 아는 감정전문가나 연구자들이 많아져야 한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한국전쟁을 거친데다, 산업성장에 치중해 문화 연구 지원이 미비한 한국에서 이런 자료 구축이 제대로 되었을리가 없다. 게다가 화랑이나 콜렉터들은 작품 가격에만 관심이 있지, 이런 감정에는 무관심하다. 황당한 건 아직도 천경자 미인도 위작사건은 오리무중이라는 것이다. 위작일 가능성도 높지만, 천경자 화백이 자기 작품이 마음대로 상품화돼서 팔리는 것에 기분 상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을 철회'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자존심이 강했던 천경자 화백의 성격상 아예 상종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국립현대미술관 측에 대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 천경자 화백처럼 석채화를 구사하는 화가가 적었다는 주장도 있어 권춘식의 자백이 의심을 받기도 하였고 말이다. 즉 다음과 같이 여러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 1) 권춘식이 위조->김재규->국가 환수->국립현대미술관 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 2) 김재규가 위조->국가 환수->국립현대미술관 순으로 넘어갔을 가능성. 3) 국립현대미술관과 화랑협회감정위원회 측에서 작정하고 위조했을 가능성.이게 사실이면 대막장 수준 4) 권춘식, 김재규, 국립현대미술관, 화랑협회 외의 다른 인물 (천경자 화백의 자녀나, 혹은 완전히 제 3의 인물 등)이 위조하고 개입했을 가능성. 5) 천경자 화백이 직접 그린 것이지만 작품을 위작이라고 선언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측을 '엿먹였을' 가능성. 가능성은 낮지만, 이러면 또 역으로 막장이 된다. 하지만 이미 공소시효가 지나면서 진실 밝히기도 뭐해져서, 말 그대로 '진실은 저너머에'가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진실과 정의를 외면하기도 한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고 정의 일까?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분야의 인간관계를 맺기 마련이고 서로의 친분과 신뢰가 영원하면 좋겠으나... 어떤 사건으로 인해 도저히 이어갈 수 없어 오히려 생면부지의 남보다 더욱 멀어지는 경우가 있다. 나 역시 마찬가지 여서 고민이라는....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까지 와 있는 듯 하다. 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또는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전혀 다른 실체처럼 느낀다는 것을 잘 안다. 사람이 살아 가면서.. 회사의 동료들간이나 선후배사이에 더 넓게 국가에서나 좁게는 친구 그리고 가족이나. 부부사이에서도 어떤 일을 놓고 고민하거나 처리를 할 때 견해가 전혀다른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을 우린 흔히 경험할 수 있다. 어느 둘 사이에 다툼이 될 만한 일이 있을 때에도 때론 끼어 들기도 하고... 어느 한편에 서기도 하며 그에 동조를 하거나 반대편에서 서서 상대편을 비난할 때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런 고민에 잠시 젖어 본다. 천경자의 작품 '미인도'위작시비 사건에서와 같이 잘잘못을 따질 때가 있고 그 사실을 확실히 알기 어려운 사항이 바로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라면.... 생각은 양쪽을 오가며 더더욱 골똘히 생각하게 한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하는 그 상황에서 보통의 사람들은 통상 감각적으로 아니 즉흥적으로 그 개인의 지식이나 경험에 비추어 지배를 받고 판단을 하는 것 같다. 천경자 화백의 행동이 옳은지 아니면 그 반대의 주장이 옳은지.... 분명히 진실은 하나일텐테 말이다. 사람은 정확히 알지 못한채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도 자기의 판단을 믿기에.... 잘못된 판단임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는 습성이 있는 것 같다. 한편 천경자화백의 말대로 감정된 그 그림이 실제 위작이었다 하더라도 천경자 화백이 굳이 붓을 꺽고 은신할 필요까지 있느냐 하는 주장도 있다. 것도 조국을 떠나면서까지.... 또한, 위작이 아니라 진품임을 주장하는 그의 반대편과 등질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작품활동을 계속 해 주길 바라는 팬들의 간절한 염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화백 입장에서 생각할 때 얼마나 분하고 억울하고 어이가 없었으면.. 일생을 바쳐 해오던 작품활동까지 멈추고 미국으로 갔을까 하는 편에도 서 본다. 나에게 당신에게 그와 유사한 경우가 지금 닥쳤다면....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마치 천경자화백의 경우처럼..떠날 것인가? 아니면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그림을 계속그릴 것인가? 나 같아도, 절필로 인연을 끊어 자존심과 정의를 지켜야 할 것 같은데... 과연 어떻게 할지..내 안에서 갈등은 이어진다. 우리는 갈등 속에 살고 있다. 이런 저런 갈등 속에 두파당 폭포 여행을 마치면서 천화백의 명예가 회복되길 빌어 본다. 이제 다음 여정으로 천성교를 향하고 있다. 고인이 된 천경자 화백을 추모한다.~ ^L^ |
첫댓글 우렁차게 쏟아지던폭포는
우리네의 가슴속을 시원하게 십년묵은 체증이뚫릴만큼 진한감동을 안겨주었읍니다!!
삼삼오오 화관을쓴 예쁜여인네들의모습,,
다시금 떠올려보며
언제 또 떠나려나!!
아직은 기약이없지만 그래도 희망은 품어봅니다,,,
오늘도 잘읽고 잘보고갑니다!!!!!!
우렁찬 폭포음을 들으며 보았던 두파당
산같은 하얀거품 물결은 설산이 흐르는듯 했지요.
어느 곳에서 보다 일행들이 함께 모여 넋잃고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우산쓰고 열지어 있던 때가 그립습니다.
가깝게 사시니 시간내서 만나면 좋겠습니다.
잘가시는 맛집에서....ㅎ
바로 이웃에 살면서 바쁜것이 없는데 바쁜척허네요~~
우짰든 이번 폭염 보내놓고 식사라도 한끼하시자구요,,,,
너무 더워서 머리가 어질어질합니다^^^^
폭포가 시원하네요...
앞으로 폭포 얘기가 줄을 이을 것입니다.
텃밭에 와서 기행얘기를 쓰지 못하지만
기다려 주시길요.
저 멋진 광경 보여드리겠습니다.
해가 져서 시원해 지는군요.
범사님 오늘밤은 더 시원하게 주무시길요.^^
바뻐서 이제야 들어왔습니다
저두 천화백의 위작시비에 관심을 가졌던터라 아주 재미있게 글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우리가 쓴 화관이 천화백의 미인도에 나오는 화관과 비슷하기도 하네요
언제 우리가 화관을 쓰고 사진을 찍어 보겠습니까
참으로 웅장하고 아름다운 폭포를 보면서 화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요
함께 여행한 멤버들이 너무 좋았기에 모든것이 다 좋았던것 같습니다
천화백의 위작 시비에까지 관심을 가지시다니.
운영자님은 다방면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습니다.
화관의 가격이 얼마씩인지 몰라도 여행중의 별미였던 것 같습니다.
일행 모든 여인들에게 분배되도 좋았었을 것 같아요. ㅎ
잘보았습니다
서울시립미술관(덕수궁옆) 천경자화백 작품이전시되어있어 종종갑니다
제가 즐겨 걷는곳이기도하구요!!
가을어느날 낙엽이질떄 걸으러 가야겠군요!!화관쓴미인도 만나러
서울시립미술관이 여러군데 이었군요.
들꽃님이 미술에 그리 관심이 많으신줄 몰랐습니다.
존경스럽네요. ㅎㅎ
낙엽이 질 때 쯤의 덕수궁을 걷는 다는 것...
너무 멋진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