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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군도 (東沙群島) 제2권 표지
제목: 동사군도 제2권 (전3권)
지은이: 검궁인·백강
- 차례 -
제 11 장 아쉬운 이별(離別)
제 12 장 혈세천하(血洗天下)
제 13 장 젊은 영웅(英雄)들
제 14 장 천하경영(天下經營)의 방법(方法)
제 15 장 추나신공(推拿神功)
제 16 장 엇갈리는 애정(愛情)
제 17 장 수렵장(狩獵場)의 함정(陷穽)
제 18 장 되찾은 이름
제 19 장 역천지계(逆天之計)
제 20 장 실종(失踪)
제 21 장 백야무정객(白夜無情客)
제 11 장 아쉬운 이별(離別)
①
"백공자님.... 백공자님! 정신이 드세요?"
머리가 빠개지는 듯한 통증 속에 백육호는 여인의 외침을 들을 수 있었다.
"대체 여기가......?"
백육호는 천 근의 무게로 느껴지는 무거운 몸을 꿈틀거리며 축 쳐져 있던 눈까풀을 들어 올렸다. 그는 바짝 다가와 있는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절... 알아보시겠어요?"
백육호는 우스운 기분이 들었다. 눈앞의 얼굴은 다름 아닌 모용부인이었다.
"부인, 방금 전까지 함께 식사를 한 사람을 내 어찌 못 알아보겠소?"
백육호는 피식 웃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의아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 풍경이 생소했던 것이다. 모용부인은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후훗, 방금 전이라고요? 그건 벌써 삼 일 전이에요. 그리고 이곳은 배 위가 아니라 육지랍니다. 광동성의 조양진(潮陽鎭)이란 제법 큰 어촌이랍니다."
"예? 삼 일 전이라고요?"
백육호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그가 있는 곳은 해적선의 선실이 아니었다. 그는 아담한 방의 침상 위에 누워있었던 것이다.
"이곳은 조양진에서 가장 깨끗한 객점이랍니다."
백육호는 허둥댔다. 그는 창가로 달려가 밖을 내다보았으며, 다시 방문을 열어 밖을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음성을 높여 외쳤다.
"사사영.... 영매는 어디 있소?"
"잠깐 앉으세요. 얘기가 길거든요. 백공자님께서 삼 일간 잠에 취해 계시는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답니다."
모용부인의 침착한 태도는 백육호의 흥분을 가라앉히게 하는데 효과가 있었다. 아직도 어리벙벙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백육호는 마지못해 침상에 걸터앉았다.
"자세히 말씀해보시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이오?"
"우선 백공자께서 삼 일간이나 주무셔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요."
백육호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오, 영매가 어디 있는지부터 말씀해 주시오."
"사소저는 없어요. 하지만......."
"뭣이? 그럼 어디 있소? 그녀는 병자란 말이오. 그건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얼굴에 노기마저 띠는 백육호를 모용부인은 잠시 야속한 듯 바라보다 이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자초지종을 설명해 드릴테니 흥분부터 가라앉히세요. 사소저는 한 기인이 데려갔어요."
"기인이라니? 그가 왜 영매를......?"
백육호는 멍청히 중얼거렸다.
"혼란스러우실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순서대로 말씀드리려 했던 거예요. 답답하시더라도 참고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세요."
백육호는 할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모용부인은 차분한 어조로 며칠 전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백육호가 느닷없이 쓰러지자 모용부인은 물론이고 실성한 것으로 알고 있던 소녀도 소스라치게 놀라 그에게 달려들어 흔들었다. 사실 소녀는 일부러 실성한 듯 가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백육호는 도무지 깨어날 줄을 몰랐다. 아무리 세차게 흔들어도 그는 코를 골며 잠에서 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내 휘장이 걷혀지며 대주와 두충량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려는 두 여인들을 간단히 제압해 결박해 버렸다. 이후 모든 것이 뒤집혀지고 말았다.
갑판에 있던 세 소녀도 굴비 엮듯 함께 결박한 후 대주는 백육호가 먹은 술이 삼일취주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댔다. 모용부인과 네 소녀는 사색이 될 수밖에 없었다.
대주는 자신을 죽이라고 주장했던 모용부인의 뺨을 세차게 갈기며 욕설을 퍼부었으며 곧바로 침상에 누워있는 사사영에게 다가가 이불을 걷어냈다.
한편 두충량은 충격으로 다시 의식을 잃어버린 소녀의 옷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또 다시 만행이 자행되려는 순간이었다.
그때 갑자기 창노한 노갈과 함께 두 인물이 선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육순이 넘어 보이는 늙은 여인과 사십대로 보이는 중년여인이었다.
두 여인은 선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대주와 두충량을 너무도 간단히 장력으로 격살시켜 버렸다.
놀라운 것은 정신을 잃었던 소녀였다. 중년여인이 소녀의 등을 한 번 치자 그녀는 정신을 되찾았다. 이어 중년여인을 알아본 듯 갑자기 그녀의 품에 몸을 던지며 대성통곡을 터뜨린 것이다.
알고 보니 중년여인은 그 소녀의 모친이었던 것이다.
중년여인은 소녀가 납치된 후 바다를 이잡듯이 뒤지다 마침내 극적인 재회를 한 것이었다.
모용부인은 두 여인에게 그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자세히 설명했다. 중년여인은 자신의 딸이 해적들에게 무참히 능욕당했음을 알자 그만 노갈을 터뜨리며 대주와 두충량의 시신을 난도질해 버렸다. 물론 그런다고 지나간 일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대충 선박의 일들이 정리되자 늙은 여인은 사사영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히 놀라는 빛이 떠올랐다.
결국 두 여인은 소녀와 사사영을 한 척의 쾌속선에 옮긴 후 해적선을 떠났다.
백육호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자신의 무지와 오만, 방심이 모든 것을 망쳤던 것이다. 그는 자기학대의 심정에 빠져들어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부림쳐야만 했다.
"백공자님,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놈들이 워낙 간교하고 사악하여 당한 것이에요. 다행히 적시에 도움의 손길이 뻗쳐 우리는 아무런 봉변도 당하지 않았으니 그렇게 괴로워 하시지 마세요."
모용부인은 안쓰러운 눈길로 백육호를 바라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사소저도 별일 없을 거예요. 그 노여인의 말씀으로는 사소저의 용태가 너무 심해 자신의 거처로 데리고 가 치료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곳에는 진귀한 약초들이 많으니 완치가 가능하다고 하시더군요."
백육호는 머리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
"그곳이... 어디요?"
"그건... 말씀하시지 않았어요. 다만 남자들은 발을 들여놓을 수 없는 금남(禁男)의 땅이라고만 하셨어요. 그리고... 한 말씀 더 하셨어요. 백공자님께 전해달라시더군요. 그곳은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곳이니 괜한 정력을 허비하지 말라고.... 사소저와는 연이 닿는다면 머지않아 만나게 될 거라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고개를 번쩍 들며 외쳤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소? 두 사람 모두 의식이 없는 틈에 멋대로 결정을 내려 사람을 갈라놓다니...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이오? 더구나 영매의 치료는 나 혼자서도 해낼 수 있었소. 그런데 어째서 멋대로 사람을 데려갔단 말이오?"
"......."
모용부인은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한동안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가 풀이 죽어 고개를 떨구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분께서 중년여인에게 하시는 말씀을 우연히 들었어요. 사소저는 하늘이 자신에게 보내준 소녀라고요. 무슨... 타고난 성령옥체(聖靈玉體)라고 하며... 아무튼 그런 말로 미루어 보아 사소저에게 결코 위험은 없는 것 같았어요."
백육호는 기억을 더듬었다. 육노인도 사사영이 하늘이 내린 옥체를 타고난 소녀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사소저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얼마쯤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괴로우시겠지만 머지않아 건강을 회복하고 밝은 모습으로 백공자님 앞에 나타날 테니 마음을 편히 하고 기다리세요."
백육호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만 여겨졌던 것이다.
잠시 후 그는 창가로 다가가 눈앞에 보이는 어촌의 한가로운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포구의 한 허름한 가옥 마당에서 어망과 통발 등의 어구를 손질하고 있는 어부와 그 가족들의 분주한 모습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어디로 가실 건가요?"
왠지 쓸쓸하게 느껴지는 모용부인의 음성이었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드넓은 중원대륙에 발을 들여놓긴 했으나 딱히 갈 곳이 없었다. 모용부인은 그의 곁에 다가와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저 아낙네가 부럽군요. 행복해 보여요."
남편을 도와 어구를 손질하던 아낙이 가슴을 풀어헤치고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자식인 듯 보이는 아이들이 뜰에만 대여섯 명은 되는 것 같았다.
백육호는 모용부인의 고운 얼굴에 드리워진 그늘을 보았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부인, 나 때문에 며칠을 허비했군요. 어서 돌아가십시오. 아! 시비들은 어디에......?"
"옆방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서 가보십시오. 여러 가지로 고마웠소이다. 모용부인."
모용부인의 우수어린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고독이 짙게 배어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더니 자신의 뒷머리에서 비녀 하나를 뽑았다.
"백공자님, 이 비녀를 받아주세요. 보잘 것 없는 것이나 은공에게 드리는 작은 성의로 생각하시고 거두어 주세요."
그녀가 내미는 비녀는 청옥으로 된 것으로 연꽃 세 송이가 정교하게 양각되어 있었다.
"은공 소리를 듣는 것이 부끄러우나 고맙게 받겠소이다."
백육호는 사양할 수 없었다. 모용부인의 절실한 마음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또 뵐 수 있을까요?"
모용부인의 큰 눈망울이 뿌옇게 흐려지는 것 같았다. 백육호는 침묵했다.
"언제 떠나실 거죠?"
별 의미 없는 질문을 반복하는 모용부인이었다.
"바로 출발할 생각이오. 아, 일단 함께 나갑시다. 부인께서 가셔야 할 곳이 멀다면 안전한 곳까지 모셔다 드리겠소이다."
"아니에요. 배웅은 안해 주셔도 돼요. 친정이 조양진에서 한나절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어요. 이번에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것도 모처럼 친정에 들린 기분에 울적한 마음을 달래려 뱃놀이를 나갔다가 그만 그리 된 것이랍니다."
모용부인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백육호는 방안을 둘러보았다. 특별히 꾸려야 할 짐이 있을 리 없었으나 그의 눈에 한 자루의 철검과 회색의 보따리가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철검을 집어든 그는 유심히 살펴보았다.
색이 바랜 고색창연한 검집 위에 몇 개의 자수정이 박혀 있었다. 언뜻 보아도 보통 검이 아닌 듯했다. 손잡이에도 굵은 자수정이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으며 비록 바래긴 했으나 붉은 수실도 매달려 있었다.
그는 호기심을 느끼며 검을 뽑아보았다.
스르릉!
청명한 음향과 함께 주인을 반기듯 새하얀 검신이 그 자태를 드러냈다. 방안에 은은한 서기가 감돌았다. 거울처럼 반사되는 검신에는 초서(草書)체로 흘려쓴 용명(龍鳴)이란 문자가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가슴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필시 내력이 있는 검이다. 검을 만지는 순간 알 수 없는 웅후함이 느껴진다. 그런데 이게 어째서 방안에 있는 걸까?'
그는 잠시 생각하다 검을 제자리에 놓고 보따리를 풀어보았다.
보따리 속에서는 뜻밖의 물건들이 나왔다. 황금, 산호(珊瑚), 비취(翡翠), 묘안석(猫眼石) 등이 가득 들어 있었던 것이다.
'대체......?'
그는 의혹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양이면 가히 성을 살 수 있을 정도였다.
이때 문이 열리며 모용부인이 들어왔다.
'......!'
백육호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구름처럼 머리를 틀어올리고 잔뜩 성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화사할뿐더러 요염하기까지 했다. 백육호는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으나 그보다는 궁금증이 앞섰다.
"마침 잘 오셨소. 부인, 이 검은 무엇이고 또 이 보석들은 무엇이오?"
모용부인은 그가 바로 질문을 던지자 서운한 표정이 스쳤으나 부드러운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 제가 미리 말씀드린다는 것을.... 그 검은 사소저를 데려가신 노파께서 백공자님께 전하라 하신 거예요."
"왜 나에게......?"
"그분 말씀이 백공자님께서 자신이 유일하게 인정하는 한 영웅과 많이 닮았다고 하시더군요. 또한 본시 그 용명검은 여인이 다루는 것이 아니라면서 임자를 만났으니 드린다더군요. 참, 그분은 자신이 이성에게 베푼 호의로써는 이번이 두번째라고 하시면서요."
"......."
백육호는 침묵했다. 허락도 없이 사사영을 데리고 가버린 그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로서는 이런 호의가 달갑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용명검은 봉명검과 함께 자웅(雌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어요. 그분은 훗날 백공자님이 봉명검을 소지한 여인을 만나게 되실 거라고 예언하시면서 그 날이 되면 공자님은 이 검에 얽혀 있는 내력을 알게 되실 것이고 아울러 미지의 힘도 얻게 되신다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겠소이다. 그럼 이 보따리에 관해서 말씀해 주시오. 혹 그녀가 날 동정하여 적선한 것이 아니오?"
모용부인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것은 천첩이 꾸려놓은 거예요. 그것은 해적선에서 추려낸 것들이고요. 그중에는 제가 강탈당했던 것들도 조금 포함되어 있어요. 제가 보니 백공자님은 수중에 아무 것도 지니신 게 없더군요."
"그렇소. 호의는 고맙지만 이런 건 내게는 어울리지가 않소. 그러니......."
"백공자님, 천첩이 잘은 모르지만 아마도 공자님은 오랜 세월을 낭인생활을 하시게 될 거예요. 그렇다면 어느 정도의 재물은 필요하게 될 거예요. 더구나 그것들은 해적선에서 걷어온 것이니 임자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아무 부담 가지실 필요가 없어요."
백육호는 완강했다.
"해적선에서 나온 보석은 그렇다쳐도 부인의 패물을 소생이 가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외다."
"공연히 천첩이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군요."
모용부인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우수어린 눈을 내려감으며 자조하듯 말했다.
"그 패물들은 혼례 때 남편에게서 받은 예물들이랍니다. 그 날 이후로 전 남편의 강요에 의해 그것을 한시도 몸에서 뗄 수가 없었어요. 심지어 잠자리에서도 그중 아무 것이라도 착용하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지요. 그러던 차에 해적들에게 강탈을 당했어요. 그 광경을 시비들이 목격했으니 남편도 그 사실을 알게 될 거예요. 사실 제 시비들은 남편 쪽 사람들이에요. 의심 많은 남편이 절 감시하기 위해 붙인 거지요."
"......."
"그러다 시비들까지 당하게 된 거예요. 하지만 일이 우습게 되었어요. 시비들 덕택에 천첩은 해적들에게 납치는 되었을망정 능욕은 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에요. 우습죠? 제 꼬락서니가.... 어쨌든 그 패물들은 시비들 모르게 제가 다시 챙겼으니 그 아이들은 해적선과 함께 수장된 걸로 알고 있을 거예요. 전 그저 백공자님께 작은 도움이라도 드리고 싶었어요. 하지만 공자님이 그것을 더럽다 생각하시면 저와 헤어지신 후 마음대로 처분하세요. 거지에게 적선을 하시든, 오물통에 버리시든 말이에요."
모용부인의 말에는 심한 자괴감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당혹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백육호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여기서 헤어지는 게 좋겠어요.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했군요."
문고리를 잡는 모용부인의 손이 바르르 떨고 있었다.
"아무 내색 없이 백공자님과 담담하게 작별인사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잘 안되는군요."
"부인......."
백육호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라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때 그녀의 가녀린 손이 그의 손을 덮었다. 두 사람의 손을 통해 서로의 체온이 전해졌다. 백육호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뜨거운 마음을.
모용부인은 입술을 악물고 눈물을 삼켰다.
"공자님, 부디 사소저와 하루 빨리 해후하시길 빌겠어요. 그런 후 세속의 풍진이 닿지 않는 외진 곳에 정착하여 행복한 두 분만의 삶을 누리세요. 제 몫까지 모두 드릴께요. 저는 공자님과의 짧은 추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에게 감사드리며 남은 삶을 채울 거예요."
모용부인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내다보지 마세요. 이대로 그냥 갈 테니. 그럼 안녕히......."
"모용부인!"
백육호는 미끄러져 나가는 모용부인을 다급히 불러보았으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그녀를 쫓으려던 그는 문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를 불러 무슨 말을 하겠다는 건가?'
그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닫고 말았다.
모용부인의 체향이 은은히 감도는 썰렁한 방안에서 그는 갑자기 밀려드는 외로움을 전신으로 느끼며 사사영을 떠올렸다. 미치도록 보고 싶은 느낌에 그는 참담한 고독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②
조양진을 횡으로 관통하는 대로의 동쪽 끝에 관청은 위치해 있었다. 그 관청 안쪽 깊숙한 곳에 현령(縣令) 장소덕(張所德)의 처소가 자리잡고 있다.
축시(丑時) 무렵이라 관청은 어둠에 잠겨 있었으나 장소덕의 침실 창밖에 솟아있는 거송의 가지 위에는 언제부터인가 한 인영이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오늘따라 장소덕의 침실에는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그는 새로 들어온 어린 관기(官妓)의 수청을 받느라 밤을 밝히고 있는 것이었다. 나이 오십을 넘기면서부터 도리어 더욱 여색을 밝히게 된 그에게 동정녀인 관기의 머리를 올려주는 오늘 같은 밤은 쉽게 잠들 수가 없는 것이었다.
한 시진이 넘도록 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던 거송 위의 그림자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듯 가볍게 혀를 찬 후 몸을 일으켰다.
슷.......
그는 소리없이 창문에 매달렸다. 조심스럽게 창문을 연 그는 건물 안으로 그림자처럼 스며들었다.
십여 개의 화촉(華燭)이 타오르는 침실.
지금 그곳에서는 후끈한 열기가 감돌고 있었다. 침상 위에는 두 개의 알몸뚱이가 얽혀있었다.
하나는 비대한 체격으로 온통 비계투성이의 사내였으나 하나는 대조적으로 가냘프면서 백설처럼 흰 여인의 나신이었다.
"하아......."
장소덕의 정력은 절륜했다.
그는 모처럼만에 안게 된 동기의 나신을 구석구석 집요하게 애무하고 있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여체 탐험을 하는 바람에 전신이 온통 땀투성이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벌써 한 시진이 넘도록 그는 좀처럼 동기를 놓아주려 들지 않았다. 그동안 몇 차례나 방사를 치르는 바람에 동기는 탈진할 대로 탈진해 있었다. 그저 온몸을 힘없이 늘어뜨린 채 이제나저제나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장소덕은 추호도 멈출 생각이 없는 듯 혀끝으로 애무하며 그녀의 온몸을 짓이기고 있었다.
"아아, 나으리.... 이제 그만 좀 하시와요."
동기는 거의 울듯한 심정으로 애원했다.
"허허! 이런 몹쓸 것이 있나? 이제 겨우 길을 닦았거늘 예서 그만 하라니 말이나 되는 소리냐? 입 닥치거라. 이제 곧 너도 열락의 문으로 들어서게 될 것이다."
장소덕은 동기의 몸을 뒤집었다. 체위(體位)를 바꾸어 즐기려는 것이었다.
동기는 비명을 발하며 엎드렸다. 장소덕은 새삼 쾌락으로 온몸을 긴장시키며 그녀의 뒤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힘차게 돌진했다.
"흐음......."
그러나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몇 번의 방사로 인해 그의 노구 역시 생기를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는 안간힘을 쓰며 동기의 몸으로 밀고 들어가려 끙끙댔다.
"나으리... 이제 그만......."
참다 못한 동기가 고개를 돌렸다. 문득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녀는 입을 딱 벌린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저......."
"응? 왜 그러느냐?"
이상함을 느낀 장소덕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어 부득이 결례를 범했소이다."
심야의 침입자였다. 그는 한 자루의 철검을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바로 지척의 거리였다.
"......!"
장소덕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긴 머리를 대충 틀어올린 채 유령처럼 서 있는 흑영은 차분하게 말했다.
"몇 가지 장현령께 확인할 것이 있어 왔으니 너무 놀라지 마시오."
어린 관기는 황급히 이불을 당겨 머리 위까지 뒤집어썼다. 비록 열여섯 어린 나이이기는 하나 이런 경우에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귀가 따갑도록 들었던 것이다.
섣불리 도망치려 하지 마라, 침입자의 얼굴을 보려하지 마라, 설혹 능욕을 당하더라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으려 하지 마라, 침입자가 무슨 짓을 하건 비명을 지르지 마라.......
처음 겪는 돌발적인 상황임에도 영악한 관기는 선배들의 가르침을 충실히 이행했다.
"네... 네놈은 누구기에 감히... 여봐라! 게 아무도 없느냐!"
오히려 오십 풍상을 헤쳐온 장소덕의 처세가 슬기롭지 못했다. 상대가 좀도둑이 아닌 바에야 자신의 침소에 들이닥치며 아무 저지도 받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만큼 그는 당황하고 있었다.
퍽!
"크윽!"
장소덕은 침입자의 가벼운 발길질에 내장이 끊어지는 듯한 극렬한 고통을 느끼며 침상에서 굴러 떨어졌다.
"반 시진 전부터 이 침실주위의 포쾌 열두 명이 깊이 잠들어 있소. 그러니 앞으로 교대할 반 시진 동안은 장현령과 나는 아무 간섭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소이다."
그 말인즉 소리 질러야 소용없다는 것을 뜻했다.
"이, 이보시오! 대체... 왜 이러시오? 재물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줄 테니 말씀해 보시오. 대체 얼마나 드리면 되겠소......?"
한 번의 발길질에 장소덕은 상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체험한 듯했다.
"장현령, 이제부터 내가 묻는 말에만 신중히 대답하시오. 대답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을 시에는 이 검이 얼마나 날카로운지를 당신 목으로 시험해보게 될 것이오. 공연히 애써 화를 자초하지 마시오? 알겠소?"
"예, 예, 잘 알겠습니다. 무엇이든지 물어 보십시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은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장소덕은 공포에 휩싸여 벌벌 떨었다.
그의 사타구니 사이에 매달려 있는 양물은 조금 전과는 달리 형편없이 졸아든 채 달달 떨리고 있었다. 그는 비로소 느낀 것이다. 상대는 격이 틀린 강호의 고수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침입자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기도만으로도 그는 숨이 턱턱 막힐 듯했다.
"이번 달에도 직접 사사도에 다녀왔소?"
침입자, 즉 백육호는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아니... 사사도를 어떻게......?"
퍽!
"아이쿠!"
장소덕은 복부를 움켜쥔 채 뒹굴었다. 벌거벗은 추괴한 몸뚱이가 바닥을 대여섯 차례나 굴러갔다.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난생 이토록 지독한 고통은 처음이었다.
"대답만 하라고 했소."
"아, 알겠습니다요......."
장소덕은 부들부들 떨며 손을 싹싹 비볐다.
"예.... 보름 전에 소인이... 다녀왔습니다."
"그곳 상황을 자세히 말해보시오. 예전과 무엇이 변했는지."
"귀... 귀공도 이미 알고 계셨군요? 아니... 아닙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예, 사사도에 큰 변괴가 일어났습죠."
"어떻게?"
"소... 소인이 그곳에 도착했을 땐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리들은 물론이고... 죄수들도 단 한 명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섯 개의 섬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쥐새끼 한 마리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귀신이 곡할 노릇입지요."
백육호는 경악성을 목안으로 삼키며 급히 반문했다.
"그럼 섬 안의 사람들이 모두 죽었단 말이오?"
"그... 그렇진 않은 것 같습니다요. 사사도의 도주 처소인 만해관 옆에 조탁 도주의 봉분이 있어 파헤쳐봤는데... 부패하긴 했으나 아직은 알아볼 수 있는 그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었습니다. 목에 큰 상처를 입은 것으로 미루어 누군가에게 타살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밖의 시신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외부세력이 사사도를 침입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배 한 척이 고작인 그곳 사람들이 한순간에 증발해 버릴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밖에 눈에 띄는 다른 변화는?"
백육호는 무겁게 물었다.
"예.... 사람들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 것 외에는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었습니다. 석조 가옥과 최근에 만든 초옥들도 모두 멀쩡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듯... 지극히 평온한 정경이었습지요."
"외부세력이 들어왔었다면 장현령은 그들이 누구라고 추측하시오?"
"그건... 소인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감히 황실의 명으로 관리되는 동사군도에 무단침입하여 사람들을 모두 데려갈 정도라면... 보통 인물은 아닐 겁니다요. 하지만 소... 소인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보고를 받고 황실에서 급히 내려오신 어림군(御臨軍) 참장께도 똑같이 드린 말씀입지요."
"그 참장의 이름을 기억하시오?"
"서... 성은 기억합니다. 동행한 일행들이 등(鄧)장군이라고 호칭하는 걸 들었습니다. 형형한 안광에 행동거지가 신중하여 과연 어림군의 장수로 손색이 없구나 하고 감탄했었지요."
어느 정도 공포감에서 벗어났는지 답변하는 장소덕의 고개가 조금 들려 있었다.
"그 등장군이란 자가 당신에게 달리 한 말은 없었소?"
"예, 사사도와 관련된 것은 그 어떤 것도 함부로 발설하고 다니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은밀히 이곳 수군들을 바다에 풀어 의심이 가는 해적들의 본거지를 뒤져보라는 명도 내렸습죠."
"그래, 소득이 있었소?"
"웬걸요, 이 일대 몇 군데 해적들의 섬을 급습해 봤으나 무고하게 납치된 몇 명의 상인들을 구출해낸 것 외에는 별무소득이었습죠. 그 어디에서도 사사도 사람들은 그림자도 찾지를 못했습니다."
백육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 다시 날카롭게 물었다.
"사사도와 관련된 사항은 항상 당신이 직접 황실로 보고하시오?"
"아닙니다요. 이 광동성의 안찰사에게 보고를 드립죠. 이번에도 그리했으나 사안이 심각하다 여겨 황실의 장수가 소인에게까지 와서 확인을 한 것입지요."
"좋소. 그렇다면 그 장수는 누가 내려보낸 것이오? 황제요? 아니면 건친왕이요?"
"예?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장소덕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리곤 곧 실언했다는 것을 느낀 듯 급히 덧붙였다.
"아니... 제 말씀은... 그러니까... 어림군 참장이야 당연히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내려오셨을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는......."
"됐소,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해도 됐소."
백육호는 장소덕이 사사로이 건친왕부의 명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가 아님을 확인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모든 것이 불분명한 시점에서 아무 내막도 모르고 있는 어리숙한 현령 하나를 붙잡고 갑론을박할 일이 아니었다. 이제 그에게는 더 이상 들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섰다.
"장현령,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묻겠소. 당신은 사사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장소덕은 엉뚱한 질문에 잠시 멍한 표정이더니 더듬거리며 답했다.
"글쎄요.... 소인의 짧은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습죠. 단지 중죄인들을 격리수용하기 위한 유배지로 쓰기에는 사사도는 적합한 곳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대륙에서 물자와 인원을 지원하기에는 워낙 멀리 떨어져 있을 뿐 아니라 매번 거친 풍랑과 와류에 목숨을 내놓고 항해를 해야 하니... 사실 소인도 그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습지요. 위에서 하신 일이니 피치 못할 곡절이 있을 테지만 지난 십 년간 막대한 인명피해가 발생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백육호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몸을 돌렸다.
"당신의 마지막 답변이 목숨을 살렸소."
그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그는 거짓말처럼 장소덕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어이쿠! 십년감수했구나......."
장소덕은 긴장이 풀리자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나으리.... 괜찮으시옵니까?"
이불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어린 관기가 재빠르게 튀어나와 장소덕의 품안으로 파고들었다.
"오냐, 오냐.... 난 괜찮다. 너야말로 무척 놀랬겠구나."
알몸으로 안겨오는 관기의 교태에 장소덕은 한순간에 현령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으며 제법 태연한 미소마저 띠었다.
"나으리, 너무 무서워... 꼼짝할 수가 없었나이다."
"그래, 나 또한 그러했으니 넌들 오죽했겠느냐. 자... 우선 몸을 좀 씻어야겠으니 욕실로 가자꾸나."
다시 살아났다는 기쁨 하나로 장소덕은 관기 앞에서 추태를 보인 것에 대한 민망함 따위는 접어버린 채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예, 천첩이 모실 테니 편히 몸을 담그시고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그래, 그러자꾸나. 허허... 이 귀여운 것. 어찌 됐거나 너도 오늘밤 일은 절대 타인에게는 발설해서는 안된다. 알겠느냐?"
"걱정 마시와요, 나으리. 천첩이 그런 눈치도 없는 줄 아시옵니까?"
"알았다면 됐다. 필시 오늘밤 일은 심상치 않은 곡절이 있음이 분명하다. 나는 물론이고 너 역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렸다가는 큰 봉변을 당하게 될 게야."
욕실의 목욕통에 몸을 담그며 장소덕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낯이 익어.... 어디서 본 듯도 한 인물인데. 대체 어디서 봤을까......?'
장소덕은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봤으나 결국 알아내지 못한 채 눈을 뜨고 말았다. 관기의 부드러운 손바닥이 온몸을 어루만지자 다시금 욕정의 불꽃이 스물거리며 지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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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재미있게 보구 갑니다.
감사
감사 드립니다
즐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