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古朝選) 단군조선 세계 여러 나라의 고대사를 보면, 성인들과 위인들의 탄생에 신화가 따라다닌다. 유대의 아담과 예수, 우리 배달, 동이 사람인 태호 복희(단기전 12세기 / 서기전 36세기)·염제 신농·황제 헌원·석가모니와 노자· 혁거세·동명왕·수로왕 등 이들의 신화가 그 예이다. 그러면 그렇다 해서 이들을 모두 신화적 존재로 돌려 부정할 것인가. 아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격을 지극히 높이고 받들자는 뜻일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오랜 옛날부터 단군을 우리 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고조선의 건국시조로서의 역사적 존재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역대의 통치자들은 자기를 단군의 계승자로 자처하였고 백성들은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었다.《제왕운기》에 시라, 고례, 동북부여, 남북옥저, 예맥 등이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씌여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또한 신라의 유명한 화가 솔거가 단군의 초상을 1000매나 그린 것이라든가 고려시기에 삼남지방의 집집마다 단군의 초상을 모시고 있다고 한 것을 보면 후기 신라와 고려 시기에도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재의 인물이 아닌 신화 속의 인물로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역사자료가 탕멸되어 버린 까닭도 있지만 사대주의적 사학자들이 옛날부터 우리 민족의 역사를 깍아내린 탓이다. 왕검은 신묘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 아래 태어났는데 신령(神靈)한 사람의 덕을 가져서 원근(遠近) 사람들이 두려워 복종하였다. 나이 열넷 되던 갑진년에 웅씨왕이 그가 신성(神聖)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碑王)으로 기용하여 대읍국(大邑國) 일을 섭행(攝行)하게 하였다. 당요(唐堯) 무진년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 단목(檀木)의 자리로 옮겨 왔다. 나라 사람들이 왕검을 추대(推戴)하여 천제자(天帝子)로 삼아서 아홉 환(桓)을 통일하니 신성한 덕화(德化)가 멀리까지 미쳤는데 이가 단군왕검이다. 비왕의 자리에 있은지 24년이고 천제의 자리에 있은 지는 93년이며 130세의 수를 누렸다." 태초(太初) 신시 시대에 사방에 모여든 백성들이 두루 산골짜기에 모여 살았는데 풀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맨발로 다녔다. 신시개천 1565년 상달 초사흗날에 신인(神人) 왕검(王儉)이 있었는데 5가 중에서 우두머리였다. 무리 8백을 거느리고 단목(檀木)의 자리로 와서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지극히 신령한 덕과 거룩함과 인자함을 겸하여 천명(天命)을 받들어 계승하였다. 그 뜻이 높고 넓으며 강렬하니 아홉 환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고 진심으로 복종하여 그를 추대하여 천제 화신(天帝化身)이라 하고 임금으로 받들었으니 이가 단군왕검이다. 신시의 옛 규범을 회복하고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이라 말하였다." 아들의 뜻을 안 환인은 하늘에서 삼위(三位)와 태백(太白)을 내려다 본 후 자기 아들이 인간에게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아들에게 3가지 신권의 징표(천부인,天符印)를 준 후 지상으로 내려보냈다. 환웅은 3000명의 신하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이 곳을 신시(神市)라 부르니 이때부터 사람들은 환웅을 '환웅 천왕'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 비 그리고 구름을 다스리는 신들이 그에게 복종하였다. 그는 곡식의 성장, 인간의 운명, 질병, 형벌 그리고 선악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그는 360여 가지의 인간사를 맡아서 지상에서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그 때 지상에는 한 마리의 곰과 한 마리의 범이 같은 굴에 살면서 항상 환웅에게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에 신은 그들에게 신비로운 한 다발의 쑥과 스무 개의 마늘을 주면서 이르기를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의 모습으로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것을 받아먹고 경계하기 21일 만에 곰은 여자의 몸이 되고 범은 햇빛을 피하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웅녀는 그녀와 혼인할 사람이 없어 항상 단수 아래에서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기원하자 이에 환웅이 자신의 모습을 바꾸어서 그녀와 결혼하였다. 아들을 낳게 되자 이름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중국 요임금이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 하였다. 뒤에 아사달로 돌아와 숨어 산신이 되니 이 때 나이가 1908세였다." 따라 '사람을 크게 유익하게 하기(弘益人間)' 위하여 삼신산(三神山)인 한밝산(太白山, 백두산)에 내려온 것이다. 따라서 우리 배달의 겨레와 나라의 시조를 환인 천왕이라거나 또는 배달 환웅 천왕이라 함이 옳을 것이나, 과거 오랜 세월 동안에 배달 임금 '단제왕검(檀帝王儉)'을 배달 겨레의 아버지요 스승이요. 또 임금이라 하였다. 《동사강목》에선 말하기를, '배달은 나라 이름인 까닭에, 그 자손들은 모두 배달 임금(단군)이라 한다'하였고《동국여지승람》에선 '단군이라 일컬음은 곧 배달 나라 임금의 칭호인 까닭에, 그 나라를 잇는 임금들을 모두 단군이라 일컫는다'라고 하였다. 단군은 단국군(檀國君), 곧 '배달 나라 임금'으로서 배달 나라의 47대 임금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단군 왕검을 비롯해서 합 47대 단군들이 다스린 시대를 일반으로 단군 시대라 하고, 또 나라를 단군 조선, 왕검 조선, 혹은 상고 조선이라 하는데 이 시대가 2096년(서기전2333년-서기전238년) 동안이다. 상고 조선 단군의 47대 임금들의 제위 햇수는《환단고기(桓檀古記)》와《단기고사(檀紀古史)》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중국의 은·주 교체기)를 전후하여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등장하여 늦어도 기원전 4세기경에 고대국가로 성립하였으며, 전성기에는 대릉하 서쪽에서부터 요하유역과 요동반도, 평안도 지역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했다는 것이다. 강국들과 대등한 세력을 유지할 만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발전했으며, 철기시대에 접어들어 국가체제를 더욱 완벽하게 갖추었다. 위만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에서 세력을 키워 준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를 열었다. 위만 이후 고조선은 그 손자인 우거왕때까지 이어 내려오다가 한나라의 공격을 받아 기원전 108년에 멸망하였다. 위만은 중국이 한나라로 통일된 후에 고조선으로 망명한 사람인데 그 출신에 대하여는 논란이 있어 왔다. 첫째 위만이 관리로 있었던 당시 연나라의 종족 구성이 복잡하였다는 점 둘째, 그가 당시 조선민족의 습속이었던 북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었다는 점 셋째, 한 글자로 된 중국식 국호가 아니라 '조선'이라는 국호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으며 관직제도 등이 당시 조선의 유풍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등을 들어 위만은 요동지방에 토착하여 살고 있던 고조선인으로 이해하였다. 차지하게 되었다. 한얼교라 하였다. 이를 부여에선 대천교, 신라에선 숭천교, 고구려에선 경천교, 발해에선 한배교(진종교), 고려에선 왕검교, 조선조에선 대종교 또는 단군교라 하고 남북 만주에선 주신교 또는 천신교라 하였다. 현재 우리 나라에선 대종교 또는 단군교라 하고 있다. 빼앗아 오래도록 지배하려는 야심에서 단군을 받드는 모든 교파를 탄압하고 교문을 닫게 하였다. 고려 때는 처음부터 단군교와 불교의 두 교문에서 사회를 지도하였던 바 원나라의 정책으로 불교만을 숭상하게 되었고, 조선조 5백년 동안은 유교의 세력이 너무나 까다로워서 단군교는 일어날 기운을 얻지 못하였고 불교도 심한 배척을 받았다. 제사를 올렸는데 그 제사의 이름은 시대에 따라 달랐다. 부여에선 그를 맞이굿(迎鼓), 예와 맥에선 한얼춤(舞天), 마한에선 소도, 진한과 변한에선 계음, 고구려와 발해에선 새 맹세(東盟 한맹), 백제에선 교천이라 하였다. 마니산의 제천단(참성단), 황해도 구월산의 어천대 등이 있다. 부여는 서기전 2세기경부터 494년까지 북만주지역에 존속하였으며 북부여라고도 한다. 《고기(古記)》에서는 부여의 건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임금이 되었다. 그 뒤 공화 정치를 베풀고 나라 사람들로부터 임금으로 추대되니, 이 분이 단군이 되어 북부여의 시조가 되었다. 이 북부여의 나라 땅이 서북녘으로는 현재 중국의 흥안령과 일부 찰합이성에서 동북녘으로는 합강성 우수리강까지다." 요동의 중국세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삼국지》부여전에서는 '부여의 면적이 사방 2천리나 되며 동이지역에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부여가 동방의 다른 나라에 비해 대단한 강국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부여국을 건국한 해모수는 기원전후시기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살던 사람들에게 영웅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또 발해에 이르기까지 부여라는 이름이 지속적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볼 때 동방사회에서 부여의 위상은 대단히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부여는 농업을 위주로 하면서도 목축의 비중이 큰 사회였다. 하지만 동방사회에서 교역의 중개, 주변세력의 통제와 같은 중심국가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부여가 고조선같이 동방사회의 중심국가가 되려 했다면 문명의 중심지가 될 지역, 즉 보다 생산성이 높은 요동과 평안도 지역으로 남하를 했어야 했으나 그러하지 못했다. 부여는 3세기 중반이후 남으로부터 가해지는 고구려의 압력과 서쪽의 선비족의 세력팽창에 의하여 여러 차례 공략을 당하였다. 285년 선비족의 모용씨에 의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부여왕실은 북옥저 방면으로 피난하였다. 그러나 뒤이어 거듭된 모용씨의 침공과 고구려의 공략을 받아 쇠약해진 부여는 마침내 고구려에 복속되었다. 기승을 부리자 의분을 일으켜 세상을 구제할 뜻을 세웠다. 이해에 졸본(卒本)에서 즉위하고 스스로 동명(東明)이라 하였는데 혹은 47대 단군 고열가의 후손이라 한다. 거느리고 도성으로 들어 왔는데 나라 이름은 그대로 북부여라 하였다. 옮겨간 부여를 동부여라고 하며 이 시조가 해부루(解夫婁)이며 재위는 39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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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다시 배워야 할 우리의 역사 원문보기 글쓴이: 설레임의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