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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천제일교회 남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식만
내가 겪은 6.25 동란 전후의 이야기(11)
보고 싶고 그리운 아버지 어머니와 두 귀여운 여동생이 모두 원산이 폭격을 받아 재가 된 가운데에서 살아나셨고 또 그곳에 머물러 계시는 것이 아니라 상상도 하지 못하는 저 남쪽 끝에 가 계신다 하니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편지지 5장의 앞 뒤 면에 가득히 오른쪽으로 부터 내려 쓰신 종서인데 나는 단숨에 다 읽었다.
화곡 받아 보아라
‘화곡아! 할머님 모시고 잘 있었느냐?
이 애비를 용서해 다오. 너 가 할머님을 모시고 이 참혹한 전쟁 속에서 살아 있다고 소식 들으니 이 기쁨을 어찌 표현하랴! 장하고 장하다. 내 아들아....’ 로 시작한 편지 내용을 잉크로 쓰신 글인데 물이 묻어 얼룩이 져 있었다. 아버님은 처음부터 그 편지를 당신의 오늘이 있게하신 어머님과 어린 아들인 나를 생각하시며 눈물을 흘리시며 쓰셨음을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여기서 잠시 어머님을 만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그 후에 내게 들려주신 원산 서 부터의 이야기를 미리 써본다.
아버님은 고향의 빨갱이를 피해 사람들이 많이 사는 옛날 연고지인 원산의 양조장 하는 팔용 아저씨 댁에 의탁하여 가족들과 숨어 지내시며 사시다가 국군이 북진한 뒤 대한민국 임시 행정 요원 인 학무 과장직을 맡아 근무 하셨다.
이때에 아버지는 우리 국방군이 진격한 최 전방을 방문한 내무부 장관 유석 조병옥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하셨다.
얼굴이 호랑이 상인데 신념이 아주 강하게 보였고 시선이 아주 무서 우셨는데 목소리는 걸걸 하면서 아주 다정하여 북쪽 임시 행정 요원들이 감동을 받았다 하셨다.
손 바닥이 어찌 큰지 악수를 할때 손을 꽉 움켜잡은 유석 선생의 자세는 대단 하셨다고 하셨다.
압록강 까지 진군한 우리국군이 중공군의 북괴 지원으로 참전을 하자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밀려 우리 국군은 다시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가 1.4 후퇴였다.
임시 행정 요원들은 모두다 가족들을 데리고 항구로 나갈 참인데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피하라는 말씀을 못 들으시고, 행정 요원들만 가족을 남겨두고 잠시만 원산 앞 바다 여도 라는 섬에 피하여 국군의 전세가 유리해 지면 다시 원산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말만 믿고 계셨다.
단신으로 행정 요원들과 나가려 했는데 사무실 아래에 내려가 보니 다른 행정 요원 모두가 가족들을 데리고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소스라쳐 놀란 아버지가 중리에 있는 집으로 뛰어 가려고 이층에서 계단을 탕 탕 탕 하고 뛰어 내려 오던 참이었다.
숨 막히는 절박한 시간이 빨리도 지나가는 때였다.
그 몇 시간 전 아버지가 나가시면서 잠시 행정 요원들이 피해 여도 까지 나갔다 온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믿기지 않아 만삭이 가까우신 어머니는 큰 여동생의 손을 잡고 어린 여동생은 업으시고 보따리 하나를 이시고 임시 행정사무실 학무과 사무실의 계단을 오르려 하는데 어머니를 찾으러 뛰어 내려 오시는 아버님과 계단에서 만나셨다고 하였다.
참으로 아슬 아슬 한 순간이었다. 모두들 항구로 나가니 항구 전체가 남쪽으로 나가려는 피난민 행렬이 인산 인해를 이루었는데 커다란 상선은 적군의 포격을 피해 멀리 여도 쪽 앞 바다에 정박해 있고 작은 배로 피란민들을 실어 날라 커다란 상선 옆에다 정박하고 배 위에서 기중기로 화물 적재하는 그물 망을 내려 보내면 그 그물 속으로 사람들을 짐 처럼 담아 올려져 배 위에 올려 쏟아 놓았 다고 한다.
벌써 원산 주변 산 위에서는 적군의 포격과 사격이 시작되어 폭탄이 터지는 소리가 여기 저기 진동 하고 저녘 부두엔 배를 타지 못한 피란민들이 가족을 서로 부르는 소리, 어서 태워 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 가끔 항구에 터지는 적군의 포탄 터지는 소리에 사람들이 울고 불고 아우성을 쳐 항구 천체가 사람들 고함소리에 그 처참하기가 형언할 수 없었다 한다.
그때 흥남 부두는 원산 부두의 몇 십 배나 더 했다고 하니 전쟁의 참혹 함과 공산주의 자 들의 악랄 함을 피해 남쪽 대한민국을 향해 내려 오려는 피란민 행렬을 보면 얼마나 그 김일성의 가혹 정치의 정도를 짐작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두 여동생은 하마터면 원산에서 또 한번 이산 가족이 될 뻔 하였다.
아버지는 어머님과 두 동생을 데리시고 배편으로 부산에 내려 가셨다.
다시 거제도 장승포 항으로 가셨는데 이 당시의 아버지가 쓰신 일기장 겉장에 '난중일기' 라 표제를 한 일기 내용 중 몇 가지를 살펴 본다.
아버지의 당시의 일기는 지금도 내가 소중히 잘 보관하고 가끔 당시의 어려움을 읽고는 1987년 5월 6일 (음력 4월 9일) 에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을 그리워 할 때가 많다.
아버지는 피란 내려온 즉시 1951년 1월 19일 제2 국민병 교육대에 입대 하셨다.
입대하면 전방에 갈 수 있다 하여 할머니와 나를 구출하시려고 자원 입대 하셨다고 하셨다.아버지의 심정이 어떠 하셨는지를 이사실로 금방 알수 있다
교육이 너무 힘이 들었었고 식량 지원이 아주 빈약하여 굶으면서 설 명절을 지나셨다고 하셨다.
3월 5일 온몸이 무섭게 붓고 너무 굶어 부황이 드신 아버지는 교육대에서 제대되어 당시 장승포에 피란 중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하셨다.
3월 7일 어린 두 여동생 선화와 선희 그리고 태어 난지 3주가 되는 여동생 선영이 영양 실조로 위독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였다.
3월 9일 생후 3주일된 여동생이 사망하였다.
장승포 국민학교의 뒷산에 묻었다고 하셨다.
이때의 아버지의 슬프신 마음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보면
내 피 받은 생명체가 어름인양 식어간다.
선영아 실오리 같은 영이 있을진댄
내 넋마저 빼어는 못 가느냐
반짝이던 동공마저 흐려 커지는 너를
너의 아비 어미가 보고 있다.
오호 3주일의 짦은 너의 생애를
애닯어 하나 울지 않고 보내련다.
마즈 막 가는 너의 몸을 묶었다
가냘 핀 너 몸을 홀로 안었다
흙구덩이를 파고 묻어 버렸다
멀리 고향하늘을 울우러 한숨을 쉬었다
3월 12일 선희( 주: 내가 사랑하는 동생들중 나의 둘째 여동생 -그는 지금 수녀로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봉사하고 건강한 몸으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 퇴원.
3월 12일 - 3월 22일 문교부 주최 월남교원 재교육 강습.
3월 23일 오비국민학교 근무 피명.
3월 25일 단신으로 부임(옥교장의 후원)3월 29일 가족 동반 부임(선화 보행 45리).중학교 입학 지원생 특별 수업도 시킴.
8월 15일 연초 중학교 설립착수. 통영군 각 관계기관과 토의. 피난민 중학생을 위하여 헌신키로 각오.
9월 18일 - 12월 14일 유엔 총사령부 교육국교육관 근무10월 2일이후 중학교 설립 신축 활발.
12월 15일 정식 개학. 개교식 성대. 연초중학교장으로 취임.
1952년 1월 13일 통영중학교 연초분교로 인가.
1952년 3월 27일 하청중학교 연초분교로 변경 인가.
4월 16일 선화(* 바로아래 큰 여동생) 가 자동차에 치였다.( 학교 운동장 아래 큰길에서 길을 건너다가 차밑으로 들어갔는데 미군 추럭 이 그대로 질주해 지나갔다. 차 밑에서 이마만 약간 다치면서 쓰러졌는데 기절후 기적적으로 살아남) (*우리 가족들은 지금도 이때의 놀란 사실에 대해 말함)
5월 31일 선희 모녀 고향 출발. 교통관계로 6월 2일 귀가.(어머니와 화곡을 데리러 떠난 것이 여의치 못함). 오호 고향 소식을 모르는 나의 심사여.
6월 25일 지방의 요청으로 지방학생 특별 모집(현재의 학생수 309명을 5학급으로)
7월 31일 하기 방학식 실시(1개월 간)
8월 31일 김상사 편으로 고향 소식을 듣다. 사는 마을은 무사 하다고 하니 어머님과 화곡 소식은 몰음에 애달프다.
9월 16일 어머님과 화곡이 건재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33 헌병대 권 상사가 보고 왔다고 화곡도 학교에 잘 다닌다고)
이날 아버지의 글
정녕 꿈은 아니다.
4년 참혹한 전화 속에서
어머님과 화곡이 살아났다.
이날이 오려고
기쁜 이 소식을 들으려고
나도 살었나 부다
어머님 불효자를 때려 주옵소서
화곡아
못난 아비를 욕하여 다오
기쁨은 신경으로 스며들어
한줌도 못되는 심장을 툭툭 쥐어 막아
모였다 흐터진다.
그립던 얼굴들... ... ...
멀리 멀리 고향 하늘을 울으러
삶의 두 손은 넋의 느낌에 떨린채
힘끝 마주쥐고
고요히 눈을 감었소
(어머님 상하의 화곡 내의 권상사 편으로 보내드리다)
10월 31일 화곡이 부산에 왔다는 소식을 듣다.(권상사의 노고를 감사한다.
어머님은 언제나 오시려는가? 10월 시향을 모시고 오시겠지)
부산에서 교원 채용 고시에 합격하고 고현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반공 사상을 교육 시키는 교관으로 계시다가 연초중학교를 설립하여 인가를 받고 피란민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초중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시는데 가족들은 모두 무사하고 잘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그때 하자 하셨는데 마지막에도 저에게 할머니 잘 모시고 있거라.
우리는 곧 만난다 하셨다.
전쟁통 내내 할머님께 걱정만 끼쳐 드린 나에게 아버지는 ‘할머니 잘모시고 있거라. 부탁한다.’ 하셨다.
권상사 아저씨를 만난 동기는 이렇다.
1951년 학교 설립을 추진 하시면서 한 편으로 9월 중순부터 아버님이 거제도 고현의 유엔사 사령부 교관으로 채용 되셔서 포로들에게 반공 정훈 교육을 시키는 교관으로 출 퇴근을 하실 때 였다.
미군 부대 앞에서 피난민 학생들이 떼를 지어 부대 근처를 배회 하면서 쵸코렛도 얻어 먹고 껌도 달라고 애걸하고 미군들의 군화를 닦아주고 얻어 먹는 처량한 전쟁통의 학생들을 보시고 아! 이 아이들이 저렇게 공부도 못하고 한참 공부할 나이에 피란을 나와 거지떼가 되어 부대 근처에서 처량하게 배회하니 이들을 위한 학교를 반드시 세워 이들을 가르쳐야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당시에 거제도에는 내륙의 각처에서 4만명이 훨씬 넘는 피난민들이 내려와 판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중학교 설립을 구상 하셨던 것이다.
학교를 세우는데 미군 사령부의 설립 자재 도움이 대단히 컷다고 하셨다. 뒤에 만난 권상사 아저씨의 부대를 오가면서 대민 지원케 한 역활도 대단 하였다고 하셨다.
하루는 부대 앞에서 중학교 1학년 정도 되는 학생이 껌을 사라고 해서 쳐다보니 아이가 아주 똑똑하게 잘 생겨서 그 학생의 내력을 물어보니 피란 중 부모 형제들과 모두 헤어져 단신으로 피란민 대열에 휩싸여 거제도 까지 내려와 이렇게 구두도 닦고 껌도 판다고 하면서 연신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울고 있었다.
어머니가 말씀 하시는데 목에 때가 더덕 더덕 한 아이가 완전 거지라 하셨다.
사실은 그 당시 피란민은 모두가 거지이기도 하였던 시대 였다.
아버지는 서울이 고향인 학생 권오호와 약속을 하고 저녁때 집으로 데리고 와서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이 되어 침식을 같이 하며 학교가 개교한 뒤에는 학교 소사로 일을 시키면서 공부를 하게 하였다. 오호형은 학급 에서는 반장도 하였다.
오호형은 이렇게 우리 집에서 어머니가 때묻은 얼굴도 씻어 주시면서 돌보게 되었다. 포로 수용소에는 항상 긴장감이 감돌았다. 적개심에 불타는 인민군 포로들이 매일 사고를 치고 여기 저기서 웅성 거렸다 한다.
뒤에 반공 포로가 되어 석방된 고향 친척 집의 두 형님 K S 형님 과 G S 형님도 수용소에서 만났는데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으시니 깨 소금이 필요 하다 하여 어머니가 상당 분량의 깨 소금을 만들어 전달 하시기도 하였다.
K S 형님은 돌아 가셨고 G S 형님은 지금도 부산에 사신다.
또 아버지가 해방 되기 전에 함경북도 두만강 옆 훈륭에서 일 하실때 일본인 들에게 유난히도 곤욕을 치르며 구박을 받는 소사 일을 보는 소년을 잘 돌보아 주고 그를 따뜻이 격려하여 주었는데 그 형이 청년이 되어 인민군 포로가 되어 그 곳에서 만났다.
아주 반가워 하였다 한다. 또 해방후 고향에 내려 오시든 해에 속초 위 간성쪽으로 오호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고 계실때 아주 똑똑한 쌍동이 두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을 잘 지도 하여 서울에 보냈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인민군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서 반갑게 만났다고 하였고, 인구 기사문리에서 전투에 참여하고 주둔했던 포로들도 만나 그들을 통하여 그 마을에 사시던 내 이모부 내 외분의 생사를 물었는데 총살 형을 당하여 땅속 구덩이에 두 분이 함께 묻혔다 하여 대성 통곡을 하셨다고도 하였다.
아버님이 세상을 떠나실 때 까지도 그 슬픈 사실을 어머님께는 비밀로 하셨다.
충격을 받으실가 보아 그러하셨으리라... 그저 행방 불명이 되셨다고만 하셨다.
포로 수용소의 분위기는 흉흉하여 포로 막사 마다 집 꼭대기엔 어떻게 만들었는지 인공기가 매일 나부끼고 지독한 포로들은 손톱들을 일부러 길게 길러 흉기처럼 만들어 흉칙 스럽기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했다.
깡통을 비워 그 껍대기로 칼과 무기등 각종의 흉기를 만들고 여기 저기에서 자그 마한 폭동 계속 일어나고 유엔군과 민간 교관들 그리고 반공사상을 가진 포로들이 피해를 당하였다고 한다.
연일 긴장된 분위기에서 하루는 두만강 옆 훈륭에서 아버지에게 도움을 받었던 분과 속초 위 오호 중학교 때의 쌍둥이 형제 제자들이 다가 와서 아버지에게 조용히 심각하게 일러 주기를 앞으로 대대적인 폭동이 일어 나니까 선생님은 교관직을 그만 두시고 피하라고 하였다. 선생님도 일등급 제거 대상이라 하였다.
이때의 사실을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악한 끝은 없으나 착한 끝은 있는 법이다' 이 말씀은 그 이후에도 우리 집안의 교훈중 하나이다.
그 인민군 형은 아주 새빨간 열렬한 공산 주의자 였다고 한다.
몇번 전향 하라고 권했으나 자기는 이북으로 간다 라고 하며 요지 부동이 었다 하였다.
아버지는 그 형의 진실된 귀띔의 말을 듣고 그 길로 유엔사 사령부로 가서 대대적인 폭동 계획이 있으니 철저히 대비하라 하였는데 머저리 같이 미군들이 이 말을 소홀히 하는 바람에 1952년 5월 초순 경에서 6월 중순까지 그 끔찍한 세계적으로도 소문이 난 폭동이 일어나 어마 어마한 살륙이 일어나고 포로 수용소 총 책임 사령관 돗트 준장이 5월 7일 포로 들에게 포로가 되는 웃지 못할 창피한 일이 벌어 졌던 것이다.
반공 포로들과 싸움이 붙어 서로 가 악귀 처럼 할키고 서로 죽이는데 그 끔찍하기란 인류 역사상 가장 처참한 포로 수용소의 폭동 이라고들 하였다.
그때 6월 중순이 되어 내 어머니가 학교 앞길 에서 연사리 쪽으로 50미터 쯤 떨어진 곳 오른쪽 돌담 아래(나도 그 다음 해에 이곳에서 아주 조금씩 나오는 생수를 오래 오래 기다려 물을 받곤 하였다) 우물에서 물을 받을때 커다랗고 아주 긴 추럭(비행장 활주로에 깔아놓는 구멍이 숭숭 뚤린 철판으로 차 울타리를 한)에 희생되어 죽은 시체의 팔 다리가 철판 밖으로 너덜 대는 대로 진흙 더미 싣고 가듯 가득히 쌓아 적재하고 장승포 쪽으로 지나는 차량 행렬을 보고 그 끔찍한 정황을 어머님은 지금도 말씀하신다.
물 받는 당시 전후로 폭동시 희생된 반공 포로들의 시체가 하루에 3, 4 대씩 며칠간 지나 갔다고 하니 그 처참함이란...
아버지는 그 전해(1951년) 12월 중순 인민군 군가 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매일 김일성 대원수 만세 소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포로 수용소 교관 임무를 그만 두셨고 바로 다음날 12월 15일 연초 중학교가 개교 하였다고 하셨다.
1952년 4월말 즈음 어느날 오호형이 학교 운동장에서 배구를 하고 있는데 포로 수용소에 공무로 들렸다가 장승포 쪽으로 지나가던 헌병 찦차 위의 권 상사 아저씨 눈에 띄어 내려가 가까히 다가가서 보니 어디가서 죽은 줄로만 알었던 동생이여서 두 형제가 감격적으로 만났고 다시 아버지와 대화중 전방의 나와 할머니 구출 얘기가 나왔다 한다.
순간 순간의 일들이 전광 석화 처럼 일어나던 시대였고 숨이 콱콱 막히는 일이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일어 난다는 옛 말처럼 실재로 있었던 그 당시의 일이었다.
그 이후 오호형은 아들을 잃고 부산에서 슬픔 속에 지내던 부모님의 수소문으로 부모님과 다시 만났다.
권 상사 아저씨에게서 아버지가 보내 셨다는 물건 보따리를 받아 들고 나는 다시 찦차를 타고 집에 오니 할머니는 그때 까지 집 앞에서 서성이면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다.
내리자 말자 나는 할머니를 향해 소리를 지르면서 와락 달려 들었다.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계서요! 동생들도 잘 있대요! 그때 부터 할머니와 나는 너무 좋아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보따리를 풀어 보니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보내신 할머니의 환갑 때 못 해 드린 옷 이라 면서 한복 한 벌 과 상하 내의 한 벌과 나의 내의 였다.
할머니는 그 한복과 내의를 가슴에 꼬옥 껴안으시고 내가 읽어 드리는 편지 내용을 귀 기울여 들으셨다. 할머니는 그 이후에 거제도에 내려 가셔서 부모님을 만날 때 까지 그 환갑용 한복을 한번도 입지 않으시고 소중히 보관 하시고 지니고 다니셨다.
'화곡 받아 보아라!' 로 시작되는 아버지의 편지는 그 이후 수도 없이 할머니에게 읽어 드렸다.
또 한번 읽어라!
다시 한 번만 들어 보자! 글씨를 모르시는 할머님은 아버지 생각만 나시면 편지를 읽으라 하셔서 얼마 뒤에는 나는 아버지가 보내신 편지를 아예 보지 않고도 줄 줄 외웠다.
한 밤중에도 불을 끄고 주무시려다가 '참! 편지 한번 읽고 자자' 하시면 어유 등잔불을 켜지도 않고 할머니 곁에 누워서 깜깜한 방에 누워서 ‘화곡 받아 보아라!’... 이렇게 줄줄 외워 서 읽어 드렸다.
그 이튼날 부터 할머니는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 받느라 희색이 만면하셨다. 내복을 자랑 하시느라고 들고 다니셨다.
나도 기가 살아 가슴을 펴고 어깨를 재고 다녔다. 가끔 동네에서 너희 부모는 이북에 갔으니까 빨갱이가 되었을 거라고 했을 땐 기가 죽어 있었고 부모님이 없다고 얕 잡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에도 제 풀에 기가 죽어 매우 슬퍼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 였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대한민국에 내려 가셔서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라 하셨으니 어깨를 재면서 우쭐 거리고 다닐 만도 하였다. 세상에 좋은 일이 많다지만 그때처럼 좋았을까...
권 상사는 곧 부대가 부산으로 이동 할때 너를 데리고 가려하니 나를 보고 떠날(?)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앞서 우리의 소식을 알려고 거제도에서 아버지의 부탁을 받고 전방 전투지에 온 김 상사라는 분이 사병을 통하여 왔다간 일이 있었을 때는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따라 가겠느냐 했을 때에는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그렇게 못하겠다고 했다.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버지의 글씨를 확인한 뒤에는 나는 그래도 망서리고 할머니 얼굴을 쳐다 보았는데 할머니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먼저 부모님과 귀여운 동생들을 만나러 가라고 단호히 말씀 하셨다.
언제 전쟁이 또 터져 죽게 될지 모르니 너는 먼저 군인들을 따라 아버지한테 가라고 하였다.
당시에는 나의 고향은 전쟁터 였기 때문에 후방에서 민간인 들이 함부로 드나 들 수도 없었고 통신도 끊긴 상태였다.
군인들끼리의 연락망 이외엔 소식 불통인 지역인 것이다.
군 부대가 가는 전투함 대열에 민간인 그것도 여자들은 절대로 배에 탈수 없었다.
할머니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손자, 손자가 태어나서 그때까지 조금도 떨어지게 하시지 않은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군인들에게 맏겨 이 아이의 손목을 저 애비 손에 반드시 넘겨 달라 고 군인들에게 신신 부탁을 하시는 것 이었다.
나의 할머니의 결심은 무서우셨던 것이다. 앞으로 전쟁이 또 계속 되면 이 아이를 제 애비 품에 넘기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단호해 지신 것이리라...
1951년 9월 중순이 지나 나는 할머니가 챙겨 주시는 하얀 무명 천으로 된 피란 시절 지고 다니던 배낭에 할머니와 내가 넘은 들에서 농사 지은 찰 벼를 찧어 소두 다섯 되가 넘는 찹 쌀을 넣고 권 상사 아저씨가 보내준 어른 군복을 바지 와 소매를 둘둘 말아 걷어 부치고 검정 고무신에 눈 앞으로 흘려 내려와 앞을 가리는 군모까지 쓴 아주 우스꽝 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집 앞에 나를 태우러 온 찦차 뒷 좌석에 올랐다.
할머니와는 가을 걷이가 완전히 끝난 다음 세월이 좀더 안정되면 민간 차 편으로 거제도로 내려 오신다 하신 할머니와 헤어져 사령부로 들어 갔다.
할머니와 잠시 떨어지는 나는 그날 소리 내어 울었다. 달리는 차 위에서 자꾸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단단하신 마음을 가지신 할머니도 우셨다. 할머니께서는 그해 12월 25일 오전 11시 우리가족과 거제도에서 다시 만나시기 위하여 떠나실 때 까지 가을 걷이를 하시러 집너머 밭에 가실때 뒷산에 올라 털석 앉으셔서 내가 떠난 동해 푸른 바다를 하염없이 내려다 보셨고 내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들을 베틀 방에 모아 놓고 하찮은 장난감들을 매일 한번씩 소중히 만져 보시면서 손주 보고 싶으신 외로운 마음을 달래 셨다고 하셨다.
나는 그때 부터 꼬마 군인 행색이 되었다.
어마 어마한 군 차량과 이동 병력이 속초항에 정박한 산보다 더 큰 L S T 3000 톤급 전함으로 향하였다.
군인들은 그 배를 배 앞에 어마 어마한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닫힌다 하여 '아가리'배 라고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