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막 13장 32-37절
설교제목 : 깨어 있으라
성과 속의 경계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지난주 빠른 봄 날씨가 찾아와 따뜻한 주말이었습니다. 건조하고 따뜻한 날씨 탓인지 최근 몇 년간 산불이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기후위기 불러온 또 다른 위협인 듯 합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난주 ‘카니발(사육제)과 사순절 사이의 싸움(The Fight Between Carnival and Lent, 118cm X 164cm,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이라는 그림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그림은 1559년, 피터 뷔뤼겔 장로(Pieter Bruegel the Elder)가 그린 작품으로 카니발 축제와 사순절 사이의 전환을 풍자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좌측에는 여관이 있고, 하단으로 파란색 썰매 위에 돼지갈비가 붙어있는 맥주 통을 걸고 뚱뚱한 남자가 고기 꼬챙이를 들고 있습니다. 기타를 치는 사람 뒤로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측에는 교회가 있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교회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맨 아래쪽에는 의자가 있는 수레를 탄 사람이 긴 막대기 끝에 넓적한 부분에 생선 두 마리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무언가를 기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순절과 카니발의 추종자들이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고 있고, 끌어당기고 밀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건물에는 봄철 대청소를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림의 중앙에는 시장 광장에 있는 공공우물이 있습니다. 물을 길어 올린 여성이 있고, 그녀의 발 아래에는 신선한 야채 바구니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물 왼편으로 돼지는 분명한 대조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보노라면 성과 속의 구분이 그리 명확해 보이지 않습니다. 가운데 우물과 돼지가 묘사하듯 깨끗함과 더러움, 신성함과 욕망이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돼지 왼편으로 불같은 것을 든 광대를 따라가는 남녀가 있습니다. 밀짚모자를 쓰고 꼽추처럼 무언가를 등 뒤로 넣고, 오른쪽에 있는 여성은 허리에 타지 않은 등불을 들고 갑니다. 이 남녀는 이제 번잡함에서 벗어나 광장의 오른쪽의 조명이 켜진 길을 따라가려는 듯 보입니다.
이 그림은 카니발과 사순절 사이의 싸움은 우리의 내면의 투쟁이며, 한 측면을 억압하지 않고 함께 볼 수 있는 지혜, 이런 성과 속이 함께 수용할 수 있는 지혜를 일러주는 듯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두 측면이 드러나야 하는 때가 언제인지 알고 그것을 따라가는 지혜가 중요함을 일러주는 듯 합니다. 내가 어느 때를 살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인생은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내게 주신 시공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변환의 표징
예수님은 생애 마지막 예루살렘에 입성 후에도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성전을 다시 떠날 때 예수님은 성전을 바라보시면서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 멸망이 언제 일어날지, 그때에는 어떤 징조가 나타나는지 궁금하여 질문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멸망의 시기의 징조를 세 가지 현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는 자칭 그리스도라고 미혹하는 자들이 나타나는 것이고, 둘째는 전쟁이 일어나는 것이고, 마지막으로 지진과 기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징조는 종말의 때에 경험하는 현상일 수도 있지만, 정신의 국면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인간과 사회를 구원하고, 행복의 길로 안내하리라 유혹하는 강력한 지도자나 최고의 신인 물질에 미혹 당할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혹의 순간은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전쟁은 양립할 수 없는 두 세력이 갈등과 긴장 속에서 대결하는 현상입니다. 이것은 외부에만 있지 않고, 내면에도 있습니다. 지진과 기근은 사회적으로 모든 붕괴가 일어나고 생존이 불가능해지는 위기의 순간입니다. 심리적으로 말하면, 기존의 집단의식의 토대를 뒤흔드는 집단적 무의식의 요동이며, 집단의식과 집단적 무의식과의 불화와 불균형으로 인하여 생명력이 공급되지 않는 정체의 상황입니다. 고통스런 상황입니다. 그런데 8절에 말씀합니다. “... 이런 일들은 진통의 시작이다.” ‘고통과 재난의 시작’을 ‘진통의 시작’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출산을 위한, 새로운 것을 도출하기 위한 아픔의 시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개인과 집단의 종말적인 징조일 뿐 아니라 새로운 파괴 후에 새로운 건설을 위한 징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라 사칭하며 유혹하는 자들이 나타나고 첨예한 갈등이 일어나고 지진과 기근의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변환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전제입니다.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이 세 가지 국면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심하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견디지 못하면 그것은 단지 파괴로 마무리됨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유사 그리스도의 출현과 전쟁과 지진, 기근의 현상은 종말의 징조라기보다는 변환의 징조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이런 외적 내적 사건들은 모든 것이 끝나는 시간이 아니라 외부 세계의 새로운 변환을 위한 진통이며, 내면 세계의 변환을 위한 전조적 현상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제자들의 관심
제자들의 관심은 ‘언제 이 일이 일어나느냐’라는 정확한 날과 때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32).”
정확한 날과 때는 모든 인간에게 늘 회의와 불안, 조바심을 일으키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결정적인 때를 명확히 알고 싶어합니다. 내가 기대하는 날이 언제 도래할 것인지 정확하게 확정하려고 조바심을 내곤 합니다. 확실히 안다면 그 날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대하는 결정적인 때의 개념은 오직 하나님 편에게 있습니다. 결정적인 변환의 순간은 인간에 편에, 의식의 측면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삼차원적 시간의 관념에 사로잡혀서 그때를 알고자 합니다. 이는 삶이 힘겨울 때일수록 더욱 인간을 괴롭힙니다. 내가 기대하는 날이 시간 속에 붙박이 하려는 태도는 순진한 환상이며, 때로 도피일 수 있습니다. 삶의 곤경에 처한 분들이 분석 중에 저에게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습니다.
“언제 편해질까요?”, “언제 좋아질까요?”, “언제 달라질까요?”
결정적인 그 때는 답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끔 저는 대답합니다.
“오고 있지 않을까요!”
그 어떤 것도 내가 기대하는 정해진 시간표로 존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이미 과정 속에 담겨 있기에 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날과 그때는 하나님께 달려 있으니 맡겨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럼에도 결정적인 날은 인간에게 다가오고 있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오고 있는 때를 위해 오늘을 성실히 살아낼 수 있는 용기가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깨어 있어라
예수님은 그날과 그때를 아무도 모르기에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만 ‘깨어 있어라’를 세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조심하라’는 말을 다른 성경에서는 ‘주의하라’고 번역합니다. 사전에 보면 ‘주의하다’의 뜻은 “마음에 새겨 조심한다”, “정신을 한데 모아서 대하다”입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삶의 자세입니다. 어떤 일을 마음에 새겨서 정신을 집중하여 일을 대하는 태도가 ‘주의하다’는 말입니다. 깨어 있어라는 말도 주의하다는 말로 일맥상통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기에 깨어있어야한다고 엄히 일러주시면서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집주인이 집을 떠날 때 종들에게 권한을 주고 할 일을 맡기고, 문지기에게는 깨어 있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주인이 왔는데도 자고 있거나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 있으면 주인에게 혹독한 책망을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결정적인 때는 예기치 않게 갑작스럽게 다가옵니다. 홀연히 오기에 우리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인이 갑자기 오더라도, 너희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다. 깨어 있어라(36-37).”
주님이 오셨음에도 잠자고 있다면 어찌될까요! 언제든지 준비태세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비유에서 잠을 자는 것과 깨어 있는 것을 대조합니다. 잠을 자는 것은 무의식적 상태에 빠져 있는 것, 일종은 각성되지 않는 상태입니다. 반대로 깨어있다는 말은 의식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의식적인 상태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반무의식이거나 무의식적 상태일 수 있습니다. 만일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데도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잠든 상태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 때 진정으로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물리적으로 눈을 뜨고 있다고 깨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을 뜨고 있지만, 온갖 생각들이 나를 사로잡고,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지 못한다면 잠을 자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과 다름없습니다. 이런 깨어 있는 상태, 의식화된 조건은 어렵습니다. 끊임없어 어떤 외부 내부 자극이 발생하여 거기에 내가 반응하기 때문입니다. 콤플렉스가 안에서 작동하여 어떤 정서와 사고에 붙들리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깨어있음을 지향해야 합니다. 인간에게 가장 중대한 일은 나의 어둠에 불꽃을 붙여 의식화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깨어있음입니다. 사순절의 시간을 통하여 나의 무지와 어둠을 밝히고 조금 더 깨어있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